파계 42화
무료소설 파계: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2,436회 작성일소설 읽기 : 파계 42화
파계 2권 - 17화
‘여기가 좋겠군.’
오칠은 주변에 사람도 보이지 않고, 성곽 위로 병사도 지나다니지 않을 만한 곳에 멈춰 섰다.
그리고는 내공을 끌어올려 몸을 가볍게 하고는 성곽을 올려다보았다. 경공으로 넉 장 높이의 성곽을 뛰어넘으려는 것이다.
‘혹시 모르니까.’
혹시라도 누가 볼까 싶어서 몸을 감출 수 있는 귀영백변신법(鬼影百變身法)을 운용하기까지 했다.
‘핫!’
오칠의 신형은 어떠한 소리도 없이, 순식간에 넉 장 높이의 성곽을 밟고서 공중으로 솟구쳐 올랐다.
‘어? 사람이 있네.’
저 멀리 있는 성곽 쪽이기는 했지만, 그냥 뛰어올랐다면 성곽 위를 걷고 있는 병사, 복장으로 보면 장수라고 할 수 있는 군인에게 들키고 말았을 것이 분명했다.
‘혹 저자가 성문교위가 아닐까?’
걸음걸이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결코 일반 병사라고 볼 수 없는 자였다. 더구나 지금같이 한산한 시간에, 더구나 사람의 모습을 찾기도 쉽지 않은 성곽에서 몰래 넘어오는 놈이 없나 하고 돌아다니는 꼴이 여간 고지식한 자가 아니었다.
‘뭐, 나완 상관없지.’
오칠은 성곽을 넘어가면서 아주 잠깐 그런 생각을 했고, 곧 장수에 대한 관심을 접었다.
탁.
‘좋아.’
오칠이 내려선 곳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성곽 위에 있는 장수가 신경 쓰여서 오칠은 조금 더 멀리 떨어진 다음에야 귀영백변신법을 풀었다.
‘이거 편하네.’
귀영백변신법이라면 번거롭게 성곽을 넘어갈 것이 아니라, 그냥 성문을 지나가도 문제가 없을 듯했다.
오칠은 다음에는 신법을 운용해서 성문을 지나가야겠다고 생각하며 무한성의 번화한 내부로 걸어갔다.
* * *
‘많네.’
오칠은 주변을 둘러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호북의 성도인 만큼 엄청나게 번화하고, 사람도 많았다.
크고, 넓게 만든 대로를 중심으로, 가지각색의 상가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고, 그 사이사이 골목마다 이것저것 팔기 위해 소상인들이 펼쳐놓은 자판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그리고 그만큼 많은 손님들이 곳곳에 바글바글 모여 시끌시끌하게 흥정하며, 이곳이야말로 사람이 사는 곳이라는 걸 더욱 확실하게 느낄 수 있게 했다.
툭.
“에이, 재수 없게 웬 거지새끼야! 저리 안 꺼져!”
오칠의 어깨와 부딪친 누군가 버럭 화를 내며 지나갔다.
사람이 많다 보니 길을 걷다가 부딪치게 되는 것은 당연지사.
하지만 그 누구도 지저분하기 그지없는 오칠과 부딪치고서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확실히 내 성질이 죽었네.’
열다섯이었을 때의 오칠이 이런 일을 당했으면 결코 참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열넷이었을 때도, 아니 열셋이었을 때도 오칠은 참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화를 내고 간 놈을 쫓아가서 그놈의 뒤통수를 후려치고, 반 죽도록 두들겨주었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지금 오칠은 멍하니 가만히 있었다.
누구든 나이가 들면 한층 인내심이 강해지고, 좀 더 참을성이 많아지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오칠이 그냥 있는 것은, 결코 그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만약 감정이 제약당하지만 않았어도, 그래서 이리 무감각한 성정으로 변하지만 않았어도, 오칠은 그자를 찾아서 아주 잔혹한 짓을 서슴지 않았을 게 확실했다.
그러나 현실의 오칠은 무감각한 인간 그 자체였다.
화를 낼 필요성도 느끼지 못하는, 너무나 여유롭고 목적의식 없는 인간이 돼버린 것이다.
아마도 칠 대 교주는 이런 점에 대해선 전혀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그의 계승자가 감정이 제약당하면서 어떤 대상을 만나도 남녀를 구분 짓지 않고 똑같이 대하며, 그래서 냉철해질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무언가에 대한 의욕을 불태우지 않기 때문에 교를 규합하고 세력을 정비하고, 아후라 마즈다의 영원한 왕국을 위해 힘써 일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에 대해선 전혀 예상치 못했을 것이 분명했다.
아니면, 칠 대 교주는 그런 것을 신경 쓰지 않은 것이 아닐까?
칠 대 교주는 당시 사랑하는 여인으로부터 엄청난 배신을 당하고, 그 절망감에 생각이 한쪽으로 치우쳐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그도 어쩔 수 없는 인간이고, 인간은 늘 자기 기준에서 생각하기 마련이니까 말이다.
툭.
“더럽게 뭐야!”
툭.
“구걸할 거면 저기 구석으로 가서 해!”
사람들은 전혀 줄어들지 않고, 그래서 오칠은 계속해서 사람들과 부딪치며 욕을 먹었다.
어떤 자는 주먹질까지 하려고 했지만, 오칠이 하도 더러워 손만 들었다가 그냥 가버렸다. 감정이 없다는 게 어떤 면에선 좋을 수 있는 것이, 아무리 욕을 먹어도 화가 나지 않는 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칠은 가고 싶은 길을 계속 가고, 보고 싶은 것을 다 구경하며 다녔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런 오칠의 걸음에 딴죽을 거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근육으로 똘똘 뭉친 덩치와 외모가 범상치 않게 험악하여, 사람들로 꽉 메워진 길에서도 널찍한 공간을 만들며 걷는 자들이었다. 한데, 그런 그들의 앞을 무서움을 모르는 오칠이 마주 걸어간 것이다.
툭.
“이 새끼가!”
퍽! 퍽! 우당탕!
다른 이들은 건드리기도 싫어하는 오칠의 얼굴에 큼직한 주먹이 꽂히고, 가슴에 발길질이 이어지면서 오칠의 몸은 저쪽 벽으로 나뒹굴었다.
“너! 다신 내 눈에 띄지 마!”
오칠을 나뒹굴게 만든, 대략 나이가 서른쯤 될 것 같은 사내가 험악하게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여섯 명 중에서 가장 선두에 선 것도 그렇고, 근육도 우람한 것을 보면 그 사내가 제법 어깨에 힘을 주는 지위에 있는 것이 분명했다.
카악! 퉤!
허연 가래를 오칠의 발치까지 날려 보낸 사내는 ‘가자!’ 하고 말을 내뱉고는 그 무리와 함께 사라졌다.
“…….”
오칠은 상체만 일으켜 벽에 기댔다.
조용히 입을 닫고 동작을 멈춘 채로 빤히 쳐다보고 있던 사람들은, 제각각 할 일을 찾아 다시 부산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에게 있어 거지가 얻어맞아 나자빠진 일 같은 것은 아주 잠깐의 여흥일 뿐, 크게 신경 쓸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럴 땐 화를 내야 하는데.”
오칠도 잘 알고 있었다.
부딪쳐서 욕을 먹는 것과 이렇게 얻어맞는 것은 분명한 차이가 있었으니까. 물론 오칠은 사내에게 얻어맞은 곳이 전혀 아프지 않았다. 그 정도 주먹이야 모기에 물린 정도도 안 되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이건 아프고 말고 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래서 오칠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어나서 그놈을 쫓아가 죽도록 두들기고, 그 패거리도 아주 박살을 내려고 했다. 하지만 오칠은 절반쯤 일어나다 그냥 다시 앉았다.
‘다음부터는 화를 내면 되지, 뭐.’
이제 와서 쫓아가기도 귀찮고, 새삼 그 일을 따지는 것도 그리 내키지가 않았다.
‘이거 점점 감정 결핍이 심해지는데.’
오칠도 자신의 마음 자세가 점점 나태해진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이런 자신이 몇 년간이나 무공을 익히고, 얼마 전에는 신법을 운용하여 성곽을 타고 넘었다는 게 신기하다 생각될 정도였다.
‘모르겠다. 그리고 급할 것도 없잖아.’
아까 그놈은 분명히 이 근방에 자주 나타나는 놈일 것이다.
그리고 오칠이 이곳에 있는 동안은 언제고 만나게 될 것이다. 그러니 성급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었고, 그래서 이렇게 여유를 부리는 것이었다.
‘어라?’
오칠이 벽에 기대어 앉아 멍하니 사람들을 보고 있는데, 어느 한 소년이 그의 관심을 끌었다.
‘배수짓이라…….’
소년은 사람들 사이사이를 오가며 은밀히 손을 움직이고 있었다.
보통 사람은 잘 눈치 챌 수 없을 정도로 능숙한 동작으로 볼 때, 연습을 꽤나 많이 한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경험이 부족했다. 또한 대담함이 부족했다.
손은 교묘하게 사람들의 품속으로 찔러 들어가는데, 한 번도 성공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는 것이었다. 즉, 결정적인 순간에 목표물을 과감하게 움켜잡지 못하고, 혹은 그 위치를 정확하게 포착하지 못했다는 의미였다.
오칠은 소년을 좀 더 자세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대략 십오 세 전후의 나이였고, 뭉툭한 코와 통통하게 올라 있는 볼 살 때문에 전체적으로 귀염성 있게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어수룩하게 보이는 인상이었다.
‘좀 더 가까이 가서 볼까.’
오칠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을 때린 놈도 그냥 놔두었으면서 배수짓을 하는 소년에겐 이상하게 흥미가 생긴 것이다. 어쩌면 과거에 그가 저 나이 때에 배수짓으로 먹고 살았다는 기억 때문인지 모른다. 물론 오칠은 그 이상으로 험악하고 나쁜 짓을 많이 하며 밥벌이를 했지만 말이다.
‘그렇게 하면 안 되지.’
오칠은 소년의 뒤를 조용히 뒤따랐고, 그리고 매번 제대로 성공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워 혀를 찼다.
‘안타까워?’
낯선 감정이었다.
감정이 제약 당하기 전의 오칠에게도 익숙한 감정은 아니었다. 그래서 소년을 향한 오칠의 관심이 좀 더 깊어졌다.
어쩌면 저 소년이 감정을 되찾을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 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야.”
오칠이 소년에게 순간적으로 바짝 다가서며 어깨를 툭 쳤다.
소년은 어떤 사내의 품속으로 막 손을 찔러 넣으려는 중이었기에 깜짝 놀랐고, 당연히 경계와 두려움 섞인 표정으로 오칠을 쳐다보았다. 여차하면 도망쳐야지, 하는 의지도 눈빛에 그려지는 걸 보면 마냥 어수룩하기만 한 아이는 아닌 모양이었다.
하긴 배수짓을 하는 아이가 생각도 모자라고 눈치도 없이 당당히 살아갈 수 있을 정도로 호락호락한 세상은 아닌 것이다.
“넌 마음자세가 부족해.”
“……?”
소년은 당연히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웬 거지같은 인간이 난데없이 어깨를 치고서 한다는 말이, ‘마음자세가 부족하다!’ 라니, 어찌 이상하게 생각되지 않을까.
“뭐가요?”
소년은 물었고, 오칠은 소년의 귓가에 얼굴을 바짝 들이밀었다.
“냄새나요!”
코를 움켜잡으며 소년이 물러나려 했지만, 오칠은 얼른 손목을 잡아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맥문을 움켜잡고 재빨리 점혈을 했기 때문에 소년은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임마, 그런 식으로 했다가는 평생 남의 돈 못 만져.”
“……!”
자신이 무얼 하는지 보았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던 소년은 깜짝 놀랐다.
“봐… 봤어요?”
소년은 아주 조용히 물었고, 오칠은 ‘그럼 못 봤을 줄 알았냐?’ 하는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날 잡아가려는 거예요?”
“아니.”
“그럼 왜 이렇게 날 붙잡고 있어요?”
“네가 도망갈까 봐.”
“안 도망갈 테니 이거 놔요.”
“싫어.”
“왜요?”
“네가 거짓말을 한 거니까.”
“진짜라니까요. 나 안 도망가요.”
“그래도 싫어.”
“또 왜요!”
“난 남의 말은 믿지 않아.”
“…….”
소년은 더 이상 정상적인 대화가 불가능함을 깨닫고 포기했다.
그리고 오칠이 무언가 말을 하기를 가만히 기다렸다. 하지만 오칠은 말은 하지 않고 소년을 번쩍 들어서 길 한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도대체 이 거지가 왜 이러는 거야!’
소년은 오칠이 무슨 해코지를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걱정이 됐지만, 도망치려고 해도 어떻게 된 일인지 몸을 꼼짝할 수가 없어 그러질 못했다.
“임마, 이제부터 내 말 잘 들어.”
“왜요?”
오칠은 잠시 소년을 빤히 쳐다보다가 꿀밤을 먹였다.
“아야, 왜 때려요!”
“그 말, 하지 마.”
“왜요!”
퍽.
이번에는 제법 강도가 있어서 소년은 찔끔 눈물을 흘리기까지 했다.
“하지 마.”
“예…….”
매에는 장사가 없다고, 소년은 고분고분해질 수밖에 없었다.
“네 손 동작은 그리 나쁘지 않다. 하나, 배수짓은 그저 손만 빠르다고 되는 것이 아니야. 응용력이 있어야지.”
“아저씨도 배수짓 할 줄 알아요?”
“그래. 그리고 날 아저씨라 하지 마.”
“그럼 뭐라고 불러요?”
“음…….”
오칠은 가만히 생각하다가 이거다 싶어 말을 했다.
“오칠님.”
“이름이 오칠이에요? 거기다 ‘님’자를 붙이라고요? 지금 농담하는 거죠?”
오칠은 고개를 내저었고, 소년은 코웃음을 치려 했다.
하지만 오칠이 주먹을 들어올리자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고 대답했다.
“저 사람을 봐라.”
소년은 오칠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을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