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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계 41화

무료소설 파계: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2,582회 작성일

소설 읽기 : 파계 41화

파계 2권 - 16화

 

 

 

 

 

번쩍!

 

오칠의 시야는 하얀빛에 휩싸였다.

 

‘노스님!’

 

순간, 오칠은 노스님을 떠올렸다.

 

이 막강한 빛의 압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인간적 감정을 산산이 부수고 날려버리려는 빛의 공격을 이겨내기 위해 노승의 얼굴과 그가 했던 말들, 또 그가 마지막으로 보여주었던 미소를 떠올렸다.

 

화아-!

 

오칠의 몸을 뒤덮고 있던 불길도 사라지고, 오칠이 서 있는 곳은 아무것도 없는, 그저 투명한 공간으로 변해버렸다.

 

[…….]

 

오칠은 멍해져 있었다.

 

그 무엇도 남아 있지 않은 주변을 말없이 둘러보았다.

 

악몽은 끝이었다. 더 이상 파란빛도, 붉은빛도 나타나지 않을 것이었다. 그 모든 것은 오칠의 머릿속에만 남아 있었다.

 

칠 대 교주가 남긴 기억.

 

정사 무림과 배화교의 마지막, 칠 대 교주가 죽기 전에 비술로 남겨두었다던 안배는 교주의 기억이었으며, 이제 완전히 오칠에게 전해지게 된 것이다.

 

그리고 지금 오칠은 그 막대한 기억의 충격에서 아직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또한 앞으로도 며칠 동안은 그 충격 속에 잠겨 있어야 했다.

 

칠 대 교주의 모든 기억이 오칠의 것이 될 때까지 말이다.

 

 

 

 

 

* * *

 

 

 

 

 

며칠 뒤에 정신을 차린 오칠은, 배화교의 칠 대 교주가 안배를 통해 계승자를 찾은 뒤에도 왜 시험이란 걸 해야 했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지금으로부터 이백여 년 전, 칠 대 교주는 믿음을 배신당하고, 정에 이끌렸다가 죽음에 이르렀다. 누구보다 믿었던, 처음으로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끼게 해준 여인이 그의 심장에 독이 발린 비수를 찌르는 순간, 너무나 커다란 절망을 맛보아야 했던 것이다.

 

칠 대 교주는 자신처럼 과오를 범하는 교주가 다시는 생기지 않기를 바랐다. 그래서 오랜 시간을 공들여서 오칠의 감정을 제어하고, 번뇌(煩惱:마음이나 몸을 괴롭히는 모든 망념)를 없애려고 했던 것이다.

 

‘난 당신과 달라.’

 

오칠은 칠 대 교주의 모든 것을 기억했다.

 

그가 어떻게 배화교에 들어갔는지, 그리고 어떻게 교주가 되었으며, 어떤 마음으로 무림 정벌에 나섰는지도 알게 되었다.

 

당연히 배화교의 기원과 그들의 역사까지도 알게 되었다.

 

어쩌면 그 기억으로 인해 배화교에 대한 생각이 조금은 달라졌을 것이다. 그들은 무림에서 말하는 악독한 마교의 무리가 아니었으며, 투쟁이 그들의 기본 교리이기는 하지만 그들만큼 순수한 이들도 없다는 걸 알았으니까.

 

물론 그들도 두 번 정도 세상에 대한 원망으로 분노와 복수심에 찬 광기를 부리기도 했었다. 하나, 그것은 잠깐이었고, 그 행위도 정당한 것이었다. 그들에게 있어 불의에 대한 전쟁은 당연한 것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모르겠다.’

 

오칠은 그들의 교주가 될 것인가, 라는 물음에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는 배화교도가 아니었다. 칠 대 교주의 기억을 통해서 그들의 사상과 의지를 누구보다 잘 알게 되었지만, 그것만으로 교주가 된다는 것은 웃기는 일이었다.

 

아니, 어쩌면 그러한 점이 교주로서 가장 합당한 자격을 갖추는 것일지 모른다. 하지만 확신이 없었다.

 

‘그들을 찾는 것도 쉽지 않지.’

 

무림에서 그들의 존재는 이미 전설이 되었다.

 

이백여 년 전에 이미 산산이 쪼개지고 멸망했다고 알려졌다. 그런데 오칠이 어찌 그들을 찾을 수가 있겠는가.

 

‘칠 대 교주는 그저 팔 대 교주가 되라 했지, 그들을 찾아 배화교를 일으키라는 말은 하지 않았잖아.’

 

오칠에게는 그 어떤 의무도 없었다.

 

또한 그렇게 해야 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다. 그저 칠 대 교주의 기억을 갖게 되었고, 교주가 될 수 있는 충분한 지식을 갖추게 된 것뿐이지 않은가.

 

‘뭐, 그들의 무공도 알게 되긴 했지만.’

 

칠 대 교주의 기억에는 배화교의 막강한 무공들도 있었다.

 

소소한 무공들이 아니라, 당시 배화교를 구성하고 있는 백팔 가문을 대표하는 무공과 교주만이 익힐 수 있다는 가장 강력한 호교 무공이었다. 그리고 칠 대 교주가 그 무공들을 어찌 수련했고, 어떻게 경지에 이르렀는지도 모두 알고 있었다.

 

‘일단 딴생각 말고 무공이나 익히자.’

 

아직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또 고민하고 싶지도 않았다.

 

오칠은 칠 대 교주가 원했던 것처럼 여러 감정에 무감각해져 있었다. 물론 교주가 원했던 완벽한 상태는 아니었다. 오칠은 끝까지 저항했고, 노승을 떠올리면서 희미하게나마 감정의 고리를 이어갈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너무나 희미하고, 미세했다. 이런 감정이었나 싶을 정도로 모든 것이 아련하고, 낯설었다.

 

‘내가 인간이라는 것을 잊지 않으면 되지.’

 

오칠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앞으로 희미하게 이어져 있는 인간의 감정을, 이 메마르고 푸석푸석한 욕망을 보다 뚜렷하게 느낄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아직은 그 방법을 모르지만, 이제부터 생각하고 알아내면 되는 것이다.

 

‘그럼 우선…….’

 

오칠은 이제부터 배화교의 무공을 수련하기로 했다.

 

지금껏 익히고, 수련했던 소림 무공과 경신법들을 보다 원숙하게 단련시키고, 배화교의 무공까지 익혀서 더욱 강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건 천하제일인이 되고자 하는 욕망 때문이 아니었다. 과거에는 그렇게 원했고, 지금도 그런 감정을 가지면서 기뻐하고 싶었지만, 이 메마른 감정은 그런 욕망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저 익힐 뿐이었다.

 

머릿속에 있는 칠 대 교주의 기억들이 그걸 강요하고 있었다. 그래서 오칠은 이 년이나 있었던 광산(狂山)에서 더 오랜 시간 동안을 지내보기로 마음먹었다.

 

얼마나 될지 자신도 알 수 없는, 기약도 없는 시간 동안을 말이다.

 

 

 

 

 

* * *

 

 

 

 

 

사 년.

 

오칠이 산에서 무공을 익히기 위해 보낸 시간이다. 그리고 그 사 년 뒤에야 모든 걸 끝내고 산을 떠날 수 있었다.

 

십 년.

 

오칠이 소림사 외학전에 들어가고, 다시 세상으로 나오기까지 십 년이었다.

 

강산도 변한다는 십 년.

 

숭산을 오르면서 다음 해에는 세상을 볼 수 있게 될 것이라 생각했던 오칠은, 그렇게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 드디어 세상으로 나가게 된 것이다.

 

 

 

 

 

제20장. 무한에서 그녀를 만나다

 

 

 

 

 

때는 오월 중순에 이른, 호북 동북 쪽에 위치한 홍안(紅安).

 

그 서쪽으로 하남의 산줄기로부터 이어져온 산이 있다. 그리고 그 산자락 밑으로 검은빛의 투박한 지팡이를 든, 추레한 몰골의 사내 한 명이 나타났다.

 

사내의 몰골은 추레하다는 말 그대로, 깨끗하지 못하고 더럽기 그지없었다.

 

머리는 산발하여 얼굴의 대부분을 가릴 정도로 무성하고, 옷은 여기저기 해어져 있어 원래 어떤 색깔이었는지, 어떤 모양이었는지 의문이 생길 정도였다.

 

“드디어 세상으로 나온 건가?”

 

사내는 고개를 들었다.

 

무성한 머리칼이 살짝 뒤로 젖혀지면서 가려져 있던 눈동자가 보였다.

 

외모로는 나이를 구별할 수 없었지만, 그 눈동자로는 가능했다. 대략 스물 정도. 어쩌면 그보다 많을 수도 있었다. 아니, 사내는 확실히 스물보다 다섯 살이나 더 많았다.

 

오칠.

 

사내는 오칠이었다. 십 년 만에 드디어 산을 내려와 세상으로 나오게 된 것이다.

 

한데, 손에 쥔 검은색의 지팡이는 무언가.

 

오칠이 지은 이름은 묵철곤(墨鐵棍)이었다. 지팡이가 아닌 몽둥이였고, 그 재료는 오칠의 발목에 채워져 있던 쇠줄, 즉 만년묵철이었다.

 

오칠이 산에서 익혀야 했던 무공엔 도법과 검법도 있었다.

 

그의 엄청난 내력을 감당할 마땅한 무기를 찾아야 했기에, 마침 달고 다니기도 귀찮았던 쇠줄을 발목에서 떼어냈고, 그걸 강력한 열양공을 이용하여 뭉친 다음에 이처럼 몽둥이로 만든 것이다.

 

참으로 무식한 방법으로 만들었고 그 모양 또한 투박했지만, 웬만한 대장장이는 녹이지도 못할 만년묵철이었으니, 이렇게 몽둥이로 만든 것만 해도 대단하다 할 수 있었다.

 

더구나 묵철은 일반 철보다 무거웠고, 만년묵철은 더욱 질적으로 차이가 나기 때문에 묵철곤은 무게만 해도 백 근에 달하는, 크기와 모양에 비해 상대적으로 엄청난 중병이었다.

 

그러니 보통의 도검은 이 묵철곤곽 부딪쳤을 때, 강도와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부러지거나 깨어지고 말 것이 분명했다. 한마디로 제대로 쓸 수만 있다면 천하제일의 병기가 바로 묵철곤이란 말이었다.

 

“이제 사람이 있는 곳으로 가볼까.”

 

오칠은 호북의 남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광산(狂山)에서 북쪽으로 가지 않은 것은 당연히 소림사 때문이었다. 그러나 소림사가 두렵기 때문은 아니었다. 이제 오칠은 세상에서 무서울 것이 없었다.

 

하나하나가 너무도 막강한 위력을 가진 무공을 이백여 가지나 몸에 익혔기 때문이 아니라, 지금 오칠은 두려움, 공포 등등의 감정을 거의 느끼지 못하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소림사를 피해 방향을 아래로 정한 또 하나의 이유는, 그들과 얽혀 괜한 귀찮은 일이 생기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이었다.

 

물론 예전이었다면 당장에 소림사로 찾아가 분풀이를 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오칠은 그런 모든 것들이 식상해졌다. 게다가 그나마 남아 있는 엷은 감정들 중에는 노승에 대한 고마움이 가장 크고, 그래서 웬만하면 노승의 사문이었던 소림과는 충돌을 피하고 싶었던 것이다.

 

각설하고, 오칠은 그런 마음으로 산줄기를 타고 남쪽으로 방향을 잡았고, 호북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제 더 남쪽으로 내려가면서 사람이 많이 있는 곳을 찾아 움직여 나갔다.

 

‘사람이다!’

 

오칠은 산을 내려와 거의 하루가 지나서야 사람을 보게 되었다.

 

하지만 생각처럼 그리 크게 감흥은 일지 않았다. 그저 너무 오랜만에 보았기에 아주 약간 흥미가 생기고 관심이 갔던 것인데, 그것도 금방 싫증이 나버렸다.

 

게다가 길이 넓어져갈수록 눈에 띄는 사람이 많아졌고, 몇 개의 작은 마을들을 지나면서는 아주 질리도록 사람들을 보게 되었으니, 나중에는 사람을 보고 놀랄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여기가 좋겠군.’

 

사람이 많은 곳을 찾다 보니 자연히 많은 사람들이 향하는 곳으로 따라가게 되었고, 그렇게 번화한 곳을 지나다 보니 오칠은 어느새 호북의 성도 무한에 이르게 되었다.

 

무한(武漢).

 

무창(武昌), 한구(漢口), 한양(漢揚)의 특색 있는 세 도시가 합쳐진 도시로, 장강과 한수의 합류점에 위치해 있고, 예로부터 아홉 개의 성으로 통하는 대도라고 불린 호북의 중심지였다.

 

‘예전에 한 번 들른 적이 있었지.’

 

과거 늙은이와 정처 없이 떠돌 때, 오칠은 이곳에 한 번 와본 적이 있었다.

 

그때도 이곳에서 일거리를 찾아 부족한 노자를, 실제로는 늙은이의 부족한 술값을 채우기 위해서였지만, 어쨌든 돈을 마련하면서 잠시 동안 이곳에서 지냈었다.

 

사실 무한은 살기엔 무척 좋은 곳이었다. 하지만 워낙 난립하는 하오배 무리들이 많았고, 오칠처럼 좋지 못한 짓을 하고 살아야 하는 이들에겐 여러 귀찮은 일이 많은 곳이었다.

 

게다가 늙은이는 어디 무리에 들어가 일하는 것을 극도로 꺼려해서, 결국 오칠은 며칠 있지 못하고 무한을 떠나야 했었다.

 

‘이번엔 좀 오래 있을 수 있겠지.’

 

이제는 늙은이도 없고, 특별히 급한 일도, 가야 할 곳도 없는 오칠이 아니던가.

 

‘어라, 병사들이 지키고 있네.’

 

오칠은 저 멀리 커다란 성문 양쪽에서 문을 오가는 사람들을 살피는 병사들을 발견하고 걸음을 멈췄다.

 

‘들여보내주지 않을 것 같은데…….’

 

원래 병사들은 성문을 오가는 이들의 호패나 여러 증명서를 일일이 검사해야 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그렇게 하기엔 불가능했고, 위에서 특별한 지시가 있을 때나 혹은 술 생각이 나서 적당히 돈 좀 뜯어야 할 일이 있을 때에만 검사하곤 했다.

 

더구나 보통은 성문에 나와 있지도 않는 것이 일반적이어서, 지금처럼 병사들의 모습이 보이는 것 자체가 희한한 일이라 할 수 있었다.

 

‘어디 높은 사람이 오기라도 하는가 보군.’

 

아니면 어떤 지시가 내려왔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어쨌든, 오칠로서는 멀쩡하게 성안으로 들어가기는 힘들게 되었다. 병사들이 지저분한 몰골의 오칠을 들여보내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혹여 얼굴이라도 익혀둔 거지라면 그들도 크게 신경 쓰지 않겠지만 오칠은 처음 보는 얼굴이고, 그래서 돈 몇 푼이라도 찔러주지 않는다면 절대 그냥 들여보내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장님 행세라도 할까?’

 

그것도 나쁜 생각은 아니었다.

 

지팡이처럼 보이는 투박한 모양의 묵철곤이 있고, 장님 행세는 오칠에게 일도 아닌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가능성은 반반이었다.

 

병사들이 오히려 더 무시하고, 귀찮아해서 곤봉을 휘두를 수도 있는 일이니까 말이다.

 

‘고민하기 귀찮다.’

 

이것저것 생각할 것 없이 그냥 편한 방법을 쓰기로 했다.

 

오칠은 성문이 아닌, 성곽을 따라 오른쪽으로 크게 돌았다. 혹시라도 무너진 곳이나 구멍이 있을까 하는 기대했지만, 이곳의 성벽 관리자는 꽤나 유능한지 그런 곳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성문에 병사들이 나와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일지도 모른다. 성곽을 관리하는 관리자는 성문을 관리 감독하는 성문교위(城門校尉)의 밑에 있으니, 그가 꽤나 철두철미한 인물이라면 다 설명이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