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계 3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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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2,631회 작성일소설 읽기 : 파계 36화
파계 2권 - 11화
무리는 조금씩이지만 흔적을 발견하기 전보다는 빠르게 전진해나갔다.
곰의 족적은 명확했고, 그래서 방향이 헷갈리거나 잘못 보는 경우가 없기 때문이었다.
‘슬슬 나올 때가 되었는데…….’
곰은 단거리에서 엄청나게 빠르지만, 오래 뛰지는 않는다.
즉, 먹이를 잡지 못할 거면 중간에서 포기하지, 장거리까지 쫓아가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니 반 각 정도를 움직인 거리면 대략 곰이 나타날 때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놓쳤나?’
곰이 사냥물을 놓쳤다면 이미 다른 곳으로 사라졌을 테고, 좀 더 오래 그 뒤를 추적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때, 막산일은 뭔가 소리를 들었다.
‘좋아!’
분명 곰일 것이다.
막산일은 그렇게 확신하며 뒤쪽에 손짓을 하고 몸을 낮게 숙였다.
그리고는 눈앞의 시야를 가린 작은 언덕을 향해 접근해갔다. 사냥꾼들도 낮게 몸을 숙인 자세로 뒤를 따랐다.
‘역시!’
까만 털이 보이고, 그 털이 수북하게 뒤덮인 곰의 넓은 등짝이 눈에 들어왔다.
생각했던 것처럼 그 크기가 지금껏 본 적이 없었을 정도로 엄청난 놈이었다. 저 곰의 가죽 하나면 황금 오십 냥은 너끈하게 받아낼 수 있을 것이다.
‘어?’
사냥을 시작하자고 뒤로 신호를 보내려던 막산일은 문득 뭔가 이상한 점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먹이를 먹는 것처럼 등을 보이고 앉아 있는 곰이 아무런 움직임도 없이 석상처럼 굳어 있었던 것이다. 마치 죽어 있는 것처럼 말이다.
한데, 곧 곰의 어깨가 움찔움찔 움직이기 시작했다.
막산일은 자신이 쓸데없는 생각을 했다고 여기고는 헛웃음을 지으며 뒤로 신호를 보내 사냥꾼들을 언덕 위로 나오게 했다. 이제 저 엄청나게 큰 곰의 뒤쪽으로 몰래 접근하여 그물로 덮고, 화살로 눈을 쓸모없게 만든 다음에 창으로 급소를 찔j 죽이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
막산일 등이 언덕을 조심스럽게 내려와 곰과 삼 장여 정도의 거리를 두고 있을 때에, 움찔움찔 거리던 곰의 상체가 크게 흔들리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는 쿵! 하는 육중한 소리와 함께 뒤쪽으로 무너져버렸다.
“헉!”
막산일은 너무도 놀라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다른 사냥꾼들도 할 말을 잃고, 커다랗게 뜨여진 눈으로 눈앞의 모습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보고 있었다.
‘사람?’
사지를 활짝 펼치고 땅바닥으로 무너진 곰 위에는 사람 하나가 앉아 있었다.
아니, 더 정확히는 곰의 뱃속으로 상체의 절반 정도를 박아 넣고서 뭔가를 하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마… 막 대장!”
사냥꾼 중 하나가 이제 어찌해야 하냐는 듯 막산일을 불렀다.
하지만 막산일도 이런 상황에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설마 광산에 사람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고, 더구나 그 사람이 그들이 노리고 있던 곰을 잡았다는 것은 더더욱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저 사람과 얘기 좀 해봐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래요. 혹시 우리 같은 사냥꾼일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처음의 충격이 조금씩 진정되어가자 사냥꾼들은 너도나도 떠들어 대며 막산일을 부추겼다.
하지만 막산일은 그들과 전혀 생각이 달랐다.
‘네 녀석들은 저 사람이 사냥꾼처럼 보이냐?’
곰을 죽였다는 것만으로 친다면 사냥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저 사람은 곰의 뱃속에 상체의 절반을 쑤셔 넣고 뭘 하는지도 모를 짓거리를 하고 있었다. 혹, 동료가 곰에게 먹혀서 그 잔재라도 찾는 게 아닐까, 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막산일은 전혀 그렇게 생각지 않았다. 차라리 곰의 쓸개를 찾기 위해 뱃속을 뒤적거리고 있다는 게 더 그럴듯한 생각일 것이다.
‘하지만 사냥꾼은 저따위 무식한 방법으로 쓸개를 찾지 않는다고.’
일단 곰을 잡았으면 그 가죽을 벗기는 것이 우선이다.
무엇보다 돈이 되는 것이 가죽이니까, 아주 조심스럽게 그 원형의 모습을 잃지 않게 껍질을 벗기는 것이다. 그런 다음에 나머지 소소한 것들을 정리하는 법이다.
“뭘 그리 생각해요?”
사냥꾼 하나가 고심하고 있는 막산일을 툭 치며 물었다.
다른 사냥꾼들도 그런 막산일을 빤히 바라봤다. 이미 그들의 얼굴에서는 처음의 충격이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한 사냥꾼이 앞으로 나서며 이 사태를 전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었다.
“막 대장이 안 나서면 내가 하지.”
사내는 광산에 들어서면서 괜히 불안한 말투로 막산일의 신경을 거슬리게 한 자였다.
한데, 지금은 오히려 뭘 그리 겁을 먹고 있느냐는 듯 당당한 얼굴을 하고 있지 않은가. 마치 내가 아니면, 누가 나서겠냐는 듯이 말이다.
‘멍청한 자식! 세상에서 진짜 조심하고, 무서워해야 하는 것은 맹수도, 귀신도 아닌 사람이란 말이다!’
막산일은 사내의 하는 꼴이 더 없이 한심해 보였지만 말리지 않았다. 그저 슬며시 뒤로 빠지며, 정확히 뭔지는 모르지만 이 불길한 느낌이 현실화되었을 때 재빨리 도망칠 수 있게 행동을 취했다.
“이보시오!”
사내는 무리의 앞으로 나서서는 여전히 곰의 뱃속에 머리를 처박고 있는 사람을 불렀다.
하지만 반응이 없었다. 그래서 조금 더 크게 소리쳐 불렀다.
“이보시오, 우리하고 이야기 좀 합시다!”
이번엔 반응이 있었다.
곰의 뱃속에 들어가 있던 어깨 부위가 슬며시 빠져나온 것이다.
사내는 반응이 있다 싶자 뒤를 돌아보며 동료들에게 이것 보라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 좀 더 자신감 있는 목소리로 말을 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황천과 신현 인근에서 온 사냥꾼들이오. 댁도 우리와 같은 일을 하는 사람 같은데, 한 손보다는 두 손이 낫다고 우리와 같이……!”
신나게 떠들어대던 사내는 순간 입을 닫았다.
곰의 뱃속에 상체를 처박고 있던 사람이, 어깨를 시작으로 머리까지 완전히 빼내면서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뭐… 뭐야……!”
사내는 저도 모르게 뒤로 한 걸음 물러나며 떨리는 목소리를 내뱉었다.
자신들과 같은 일을 하는 사냥꾼이라고 믿었다. 적어도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모습은 사람이었지만, 입에는 반쯤 뜯어먹은 곰의 심장을 물고 있고, 눈에선 광폭한 붉은빛을 뿜어내고 있는 그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야수였다.
“크으……!”
인간의 것 같지 않은 비틀린 신음이 야수의 입가에서 퍼져나가 사냥꾼들의 주위를 맴돌았다.
야수는 눈을 희번덕거리며 사냥꾼들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입에 문 심장을 우적우적 씹어서 삼켜버렸다.
그 모습을 보며 사냥꾼들은 마른침을 삼켰다. 마치 그들의 심장이 씹히고 삼켜지는 것 같아서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
“마… 막 대장……?”
자신 있게 앞으로 나섰던 사내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려 막산일을 찾았다.
막산일은 어느새 무리의 맨 뒤에 서 있었다. 잔뜩 찌푸려진 얼굴을 하고서 뭔가 결심한 듯 이를 악무는 모습이 보였다.
“모두 싸울 준비해.”
원래 막산일은 도망치려 했다.
하지만 이대로 물러나는 것을 야수가 용납하지 않을 거라는 걸 막산일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만약 눈앞에 있는 것이 호랑이나 표범이었다면 조용히 뒷걸음쳐서 물러날 수 있었을 것이다. 자신들이 공격할 의사가 전혀 없다는 것을 알게 해준다면, 그리고 수적으로 많다는 것을 안다면 맹수들은 섣불리 덤비지 않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저 야수는 달랐다.
사람 같지만, 도저히 사람으로 볼 수 없는 몰골을 하고서 흉포한 눈빛을 뿜어대고 있는 저 야수는, 절대로 자신들을 그냥 보내주지 않을 것이 확실했다.
그리고 그가 처음 곰의 흔적을 발견했을 때의 생각, 즉 곰이 무언가를 사냥하고 있었을 거라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오히려 곰이 무언가로부터, 아마도 저 사람 같지 않은 야수로부터 도망치는 중이었을 것이 분명했다.
‘그래도 다행이라면 싸워볼 만하다는 거지.’
야수는 엄청나게 큰 곰을 혼자 쓰러트렸다. 그것만 본다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상대였다. 분명 어느 맹수보다도 쉽지 않은 놈일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 해도 상대는 사람의 몸을 가진 놈이다. 아무리 흉포해도 창에 찔리고, 화살에 꿰뚫리고, 피가 나면 약해질 수밖에 없는 사람의 몸을 한 야수인 것이다. 그것이 맹수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었고, 사람의 가장 큰 약점이니까.
그리고 바로 그 점이, 막산일이 이 위험한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으로 삼고 있는 것이었다.
“크……!”
야수는 곰 위에서 땅으로 내려섰다.
탁! 철컹!
그 단순한 동작으로도 야수의 동작이 매우 빠르고 날쌜 것이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제야 사냥꾼들은 야수의 발목에 굵고 검은 쇠사슬이 달려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순간, 지옥에서 탈출한 악마가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했다.
‘그물!’
막산일은 선두에 선 사내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물을 던질 준비를 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활을 들고 있는 자에게도 눈짓을 보냈다. 우선 화살을 쏴서 야수를 당황시키고, 때를 맞추어 그물을 던지게 하려는 계획이었다.
다른 이들에게도 좌우로 산개하여 동물을 사냥할 때처럼 각자의 역할에 맞추어 움직이라고, 야수가 듣지 못할 정도의 목소리로 조용하게 전달했다.
“쏴!”
길게 기다리고, 망설이면 때를 놓치는 법.
막산일은 즉각 신호를 보냈고, 활을 든 사냥꾼은 빠르고 능숙하게 화살을 날렸다.
핑!
그가 사용하는 활은 군대에서 사용하는 정량궁(正兩弓:큰 활)이 아닌, 단거리에서 강한 힘을 발휘하는 수렵용 단궁(檀弓)이었다. 하지만 그 주재료는 뿔과 쇠였고, 그만큼 엄청난 관통력을 가진 각궁(角弓)으로서, 저 멀리 활의 명인이 많은 걸로 유명한 조선에서 비싼 돈을 주고 구한 것이었다.
씨잉-
화살은 그 명성에 걸맞게 삼 장의 짧은 거리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속도로 야수의 얼굴을 향해 날아갔다. 사냥꾼들은 순간 그물을 던질 필요도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을 정도였다.
팅!
“……!”
하지만 야수는 손을 휘둘러 간단하게 화살을 튕겨버렸다.
피핑-
활을 든 사냥꾼은 다른 이들처럼 멍하니 보고만 있지 않았다.
그는 어느 때건 실패할 상황을 대비해 준비하고 있었고, 그래서 재빨리 두 대의 화살을 더 날리고 있었던 것이다.
티팅!
“……!”
하지만 야수가 또다시 두 대의 화살을 손으로 막아버리자 화살을 쏜 사냥꾼도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크아!”
야수가 소름끼치도록 섬뜩한 괴성을 터트리고 사냥꾼들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물!”
막산일은 좌우로 퍼지라고 손짓하며 그물을 가진 사내에게 소리쳤다.
촤악!
시원스런 소리와 함께 너무도 빠르게 달려드는 야수의 몸으로 그물이 넓게 퍼져나갔다.
“됐어!”
사내는 환호를 지르고 뒤로 빠지며 등에 메고 있던 창을 꺼내들었다.
그물엔 쇠로 만든 얇은 가시가 촘촘히 박혀 있어서 한 번 걸리며 절대 빠져나올 수 없게 만들어져 있었다. 그러니 야수는 절대로 그물에서 벗어날 수 없을 테고, 이제부터 창으로 요혈을 노리고 찌르면 되는 것이다.
핑-
그물에 뒤덮인 야수의 몸으로 먼저 화살이 날아갔다.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맞출 수 있을 거라는, 절대 피할 수 없을 거라는 확신에 차서 쏜 화살이기에 더없이 강력하게 날아갔다.
팅!
“……!”
하지만 이번에도 화살은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물에 덮여서 운신하기가 힘들 텐데도 야수는 손을 휘저어 화살을 쳐낸 것이다.
“말도 안 돼!”
그물을 던지고 환호를 질렀던 사내는 불신에 가득 찬 음성을 내질렀다.
쇠로 된 가시 때문에 조금만 움직여도 엄청나게 고통스러울 것이 분명한데, 야수가 움직이고 있었으니 놀라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믿을 수 없는 일이 생겼다고 해서 사내는 멍하니 있지 않았다.
사내는 창으로 야수의 가슴을 노리고 힘껏 찔렀다. 좌우로 넓게 퍼져 포위하듯 접근하던 다른 사냥꾼들도 때를 맞추어 창을 찔렀다.
푹! 푸푹! 푸푸푸푹!
살 속으로 창날이 찔러 들어가는 소리가 연속으로 터져 나왔다.
하지만 창을 찌른 사냥꾼들은, 손에 전해지는 감각을 통해 자신들의 공격이 제대로 성공하지 못했음을 알았다.
‘왜?’
날카롭게 날이 선 창날이 왜 제대로 찔러 들어가지 못한 걸까?
모두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고, 그 의문을 풀 수 있는 방법은 누구에게도 있지 않았다.
“크아-!”
야수는 그물에 달린 쇠 가시에도 개의치 않고 괴성을 지르며 양팔을 크게 휘저었다.
팅! 티티팅! 티티팅!
창대가 거센 힘에 밀려 이리저리 튕겨나갔다.
야수는 그에 그치지 않고 몸을 뒤덮은 그물을 움켜잡았다. 그리고 마치 몸에 붙은 거미줄을 떼어내듯 단번에 그물을 찢어발겼다.
“하압!”
그때, 힘찬 기합과 함께 야수의 뒤에서 막산일이 뛰어올랐다.
그리고는 손에 든 박도를 있는 힘껏 내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