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계 3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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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2,572회 작성일소설 읽기 : 파계 31화
파계 2권 - 6화
“그대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구려.”
한데, 방장은 오늘 확실히 괴이한 구석이 있었다.
어느새 오칠의 앞을 막아섰고, 비명을 지르고 발광을 하려는 오칠에게 점혈 수법까지 사용한 것이다. 다른 이들에게는 자극을 주지 말라며 금했던 수법을 말이다.
“잠시 동안이니, 너그럽게 이해해주시오.”
굳어버린 오칠의 몸을 잘 정돈해주고 계단에 앉힌 방장은, 그 역시 자리에 앉았다.
소림의 방장이, 무림에서 가장 영향력 높은 이들 중 한 명인 그가 계단에 앉다니.
진즉에 전음을 날려 자리를 피해달라고 하지 않았다면, 평소 주위를 수호하는 무승들은 너무도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을 것이었다.
혹자는 계단에 앉는 것이 뭐 그리 대단한 일이냐고 할 수도 있지만, 위신이라는 것에 마냥 여유로울 수 없는 곳이 바로 무림인 것이다.
‘역시 소림사의 방장인가.’
오칠은 점혈이 잘 되지 않는 자신의 몸이, 아직도 굳어 있다는 것에 새삼 경각심을 품었다.
그래서 섣부르게 행동했다가는 그대로 방장에게 꼬리를 잡히고 말 것이라는 불안감이 오칠을 더욱 긴장하게 만들었다.
“벌써 삼 년이나 되었구려.”
방장은 조용히 대화의 운을 띄웠다.
그런데 고작 열아홉의 청년에게, 그것도 정신이 올바르지 않고 소림사에서는 결코 용납할 수 없는 마기에 빠져 극악한 짓을 벌이려 했던 오칠에게 경어를 쓰는 이유는 무엇일까?
설마 파문된 오칠을 사조로 여기는 것일까?
아니면 죽은 노승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해, 그 끝자락에서라도 발을 떼기 싫어하는 어린애 같은 심정일까.
오칠은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
그리고 솔직히 관심도 없었다. 다만 두 번째일 가능성이 높다고 잠깐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대가 실혼인이 된 것은 오히려 잘된 일이었소. 그렇지 않았다면, 노스님의 당부가 있었다 해도 쇄마동에 갇히는 것을 막을 수 없었을 테니까. 분명 그대의 신체에도 강한 제약을 가하려고 했을 것이오.”
오칠이 삼 년 전에 정신을 차리고 예상했던 일이었고, 그래서 지금까지 계속 실혼인으로 연기를 펼치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요즘도 가끔 노스님이 생각난다오. 살아계실 때는 잘 찾아뵙지도 못했는데, 지금은 왜 이리도 노스님이 그리운지. 그래서 너무나 후회가 된다오.”
오칠은 갑자기 가슴이 울렁거렸다.
노승이 죽기 전, 그의 몸에 알지 못할 금제를 가하고 죽기 전에 느꼈었던 뭉클함이었다. 그것이 당황스러울 정도로 마음을 아리게 하고 있었다.
‘하나도 안 슬퍼!’
이를 악물었다.
슬퍼할 일이 아니라고, 노승이 자신을 대신해 죽었다고는 하지만 그건 노승의 선택이고, 자신은 그저 살려달라고 했을 뿐이지, 대신해 죽으라고 강요한 적은 없다고 속으로 소리쳤다.
오칠은 이 갑작스런 우울함을 떨쳐내기 위해,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죽은 노승에 대한 그리움을 사라지게 하기 위해, 머릿속을 차갑게 냉각시키려 노력했다.
하지만 잘 되지가 않았다.
무공에 대해 생각하고, 소림에 대한 분노를 되새기고, 나중에는 노승이 얼마나 괴팍했는지 등등에 대해 떠올렸지만, 그런 모든 것이 소용없었다.
오칠은 삼 년 전, 고작 넉 달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노승과 지내면서 너무나 깊이 정이 들었음을 깨닫게 되었을 뿐이다. 그리고 노승에게 얼마나 고마워하고 있는지, 또 얼마나 그를 그리워하고 있었는지 자신의 숨겨진 마음을 처음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되었소이다. 이제는 그만 가시구려.”
방장은 눈으로 보이지도 않을 빠른 손놀림으로 오칠의 점혈을 풀고는 계단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잠시 오칠을, 그리고 오칠의 발목을 구속하고 있는 쇠줄을 바라보다가 방장실로 들어갔다.
“…….”
오칠도 일어났다.
이 마음의 여운 때문에 잠시 그대로 앉아 있고 싶었지만, 점혈이 풀렸으니 일어나야 했다. 실제로는 방장이 풀기도 전에, 이미 풀려버린 상태였지만, 어찌 되었든 실혼인인 오칠은 그냥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되었다.
지금의 오칠은 마음의 여유조차 없는, 소림사에 있는 한은 절대 감정에 휩쓸려 긴장을 늦춰서는 안 되는 처지인 것이다.
‘참자, 참자, 참자!’
오칠은 화가 나고, 짜증이 나고, 울적해지려는 마음을 애써 내리 눌렀다.
그리고 원래 가려고 했던 장생전을 향해 실혼인 특유의 느릿하고, 어눌한 걸음으로 움직여 나갔다.
* * *
‘내일까지 참자.’
팔대호원 끝자락 건물의 지붕 한구석.
그곳에 무림 제일의 도둑이라 하는 만리신투(萬里神偸) 견봉생이 숨어 있는 채로 미동도 하지 않고 방장실이 있는 곳을 보고 있었다.
그는 이곳 팔대호원의 지붕에 자리를 잡기 위해, 보름 동안 세밀한 사전 조사와 지독한 인내심, 그리고 변장술을 사용했다.
그리고 벌써 이틀 동안을 지붕 위에서 죽치고 있는 것이다.
당연히 방금 전, 희한하게도 발목에 쇠줄을 찬 웬 거지 같이 해괴한 몰골을 한 놈과 뭔가 이야기를 나누던 방장이 안으로 들어가는 것까지 모두 지켜보았다.
‘내일 얼른 그것만 쓱싹하고서 장경각을 터는 거야.’
사실 견봉생이 이곳 소림사에 숨어든 것은 그 자신의 의지가 아니었다.
반 협박과 반 회유에 넘어가, 사실 넘어가지 않으면 죽는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이 일을 맡은 것이었다.
하나의 고서.
페르시아어로 쓰인 책 하나를 소림 방장실에서 가져오라는 것이 그를 협박한 자의 의뢰였다.
하지만 소림사에 숨어들겠다는 마음을 먹고, 여러 조사를 하면서 견봉생의 마음엔 하나의 목표가 생겨났다. 무림에서 살아가는 도둑이라면 누구나 생각하고, 꿈에 그리는 목표!
장경각을 터는 목표 말이다.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방장실을 터는 것보다 더한 조사를 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지만, 어찌 되었든 견봉생은 그 자신이라면 가능할 수 있는, 다른 사람은 불가능해도 최고의 신법과 최고의 은신술을 습득한 자신이라면 숨어들 수 있는 길을 결국 찾아낼 수 있었다.
그리고 바로 내일, 고서를 훔치고서 장경각을 털 생각인 것이다.
‘아~ 생각만 해도 가슴이 끓어오르는구나!’
장경각에서 뭘 가지고 나오는 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용담호혈이라는 소림사의 장경각을 턴다는 것 자체가 명예스러운 일이다. 두고두고 무림에 회자되고, 만리신투 견봉생이라는 이름은 최고의 도둑으로서 길이길이 남게 될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견봉생은 지금도 인내하고 있었다.
그의 이름을 드높일 내일의 영광을 위해서 말이다.
* * *
오칠은 방장을 만난 계기를 통해서 더욱 굳게 다져진 마음상태로 장생전에 들어섰다.
그리고 광등 대사가 평소 수련을 하는 곳으로 움직여 나갔다.
‘저기 있군.’
오칠은 저 멀리 커다란 바위 앞에 서 있는 늙은 승려를 발견하고 그리로 움직였다.
“또 왔냐?”
광등은 오칠이 오자마자 고개를 돌리며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오칠은 늘 그렇듯 묵묵히 서서 광등을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난 가끔 네 녀석이 의심스럽다.”
광등의 말에 오칠은 가슴이 뜨끔했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척 멍하니 있었다.
휘잉.
순간, 바람이 불고, 오칠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머리칼이 쓸려 올라갔다.
“…….”
광등은 바람에 날려 드러난 오칠의 해골 같은 몰골에 흠칫했다.
“만약 그 몰골도 네 녀석이 다 거짓으로 꾸민 것이라면… 참으로 큰일이겠지. 너의 영악함이 언젠가 소림사에 화를 가져올지도 모르니까.”
오칠은 멍한 표정뿐만이 아니라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려고 했다.
광등의 말이 오칠의 심기를 자극하고 있어서, 마음의 평온을 유지하지 않으면 표정에 드러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흠… 어쩌면 내 의심이 모두 기우에 불과할 수 있으나, 조심하거라. 소림은 한 사람의 힘으로 어찌할 수 있을 정도로 호락호락한 곳이 아니니까 말이다.”
오칠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무공을 외우고, 수련하고, 익혀나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다만, 이제부터는 좀 더 급하게 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장의 일도 그렇고, 지금껏 별로 개의치 않는 것 같았던 광등이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이, 결코 예사로운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광등이 의심을 하고 있듯 다른 장로도, 그리고 장로들 이상으로 오칠을 껄끄러워하는 각주나, 원주, 나한승들 역시 오칠에 대해 의심하고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다.
‘당신들을 바보라고 생각하지는 않아. 또 영원히 숨길 수 있다고 믿지도 않았어. 하지만…….’
할 수 있을 때까지 숨겨야 했다.
최소한 익힐 수 있는 무공은 다 익히고, 훗날을 위해 강해질 수 있는 기반을 얻을 때까지는 버틸 생각이었다.
‘그러니 어서 당신이 수련하고 있는 무공을 보여 달라고!’
오칠은 내심과는 별개로 광등의 어떤 말에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광등은 그런 오칠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고개를 내저으며 다시 바위를 상대로 해서 무공을 수련했다.
핑.
광등의 검지가 바위를 파고들었다.
일지선공(一指禪功).
특수하게 재조한 약으로 치료하면서 검지를 엄청나게 단련하고, 경지가 극에 이르면 벽을 격하고 살상할 수 있다는 칠십이절예의 무공이었다.
물론 광등의 경지는 극에 이른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오칠은 광등이 어떻게 어깨를 움직이고, 팔꿈치를 돌리고, 손가락을 어떻게 펴는지 세심히 관찰했다. 그것이 광등을 찾아온 이유였으니까.
‘소림이 호락호락하지 않으니, 당신을 비롯한 모든 무승들의 비결을 내가 가져가겠다! 난 매우 영악한 놈이니까!’
오칠은 광등이 했던 말들을 되새기며 더욱 신경을 집중했다.
* * *
오칠이 장생전을 나와서 탑림으로 온 시간은 술시(戌時:밤7~9시) 초였다.
광등의 무공 수련뿐만이 아니라 나한승들 중에 몇 사람의 수련까지 보고 오느라 하루 반나절을 다 쓰고 온 것이다.
“…….”
오칠은 하늘을 보았다.
어제와 다름없이 그믐달이 떠 있었고, 그래서 주변은 어두웠다.
하지만 오칠은 이 어둠 속에서 자유를 느끼고 있었다.
“내 목소리가 내 목소리 같지가 않구나.”
하루 동안 말을 하는 것이라고는 밥을 먹이려는 승려들과의 실랑이 때 지르는 비명이 다였다.
그래서 혼잣말을 할 때면 매번 푹 가라앉은 목소리가 낯설었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혼잣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만약 이 년여 전, 방장이 오칠의 거처로 지정했던 팔대호원 구석진 승방에서 뛰쳐나오지 않았다면, 정말 미쳐버리고 말았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리고 이곳, 탑림에서 지내는 것을 방장과 승려들이 용인하지 않았어도 멀쩡한 정신을 유지할 수 없었을 것이다.
“…….”
문득 생각에 빠져 있던 오칠은 자신이 어떤 비석 앞에 섰다는 걸 깨달았다.
‘노스님…….’
여기에 노승의 유골과 사리가 묻혀 있다고 했다.
지금껏 탑림에 있으면서도 애써 외면하고 있었는데, 오늘 방장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남다른 감정에 빠졌기 때문인지, 절로 묘비를 찾아오게 된 것이다.
하지만 마땅히 할 말이 없었다.
대신 죽어줘서 고맙다는 말을 하는 것도 이상하고, 예전의 일을 들먹이며 참으로 좋았었지요, 하는 것도 웃기는 일이었다.
그래서 염불을 외웠다.
노승의 염불소리를 너무 많이 들어서 귀에 박혀버린 염불을, 그냥 아무런 감정도 없이 읊조렸다.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 사리자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 사리자 시제법공상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시고공중무색 무수상행식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
오칠은 마음이 편안해졌다.
어떤 감흥이 생겨났고, 부처의 대자대비(大慈大悲:그지없이 넓고 큰 자비)한 마음을 새삼 깨달아서도 아니었다.
과거 노승이 염불을 외울 땐 더없이 좋아 보였고, 너무도 자유스러워 보였던 기억이 떠올라 기분이 좋아진 것이다.
“무무명 역무무명진 내지 무노사 역무노사진 무고집멸도 무지역무득 이무소득고 보리살타 의반야바라밀다고 심무가애 무가애고 무유공포 원리전도몽상 구경열반 삼세제불 의반야바라밀다고 득야뇩다라삼먁삼보리 고지반야바라밀다 시대신주 시대명주 시무상주 시무등등주 능제일체고 진실불허 고설 반야바라밀다주 즉설주왈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염불을 끝낸 오칠은 어둔 하늘을 향해 긴 숨을 내쉬었다.
“후아~”
오늘 하루 몸에 쌓였던 탁한 기운들을 모두 내뱉어버리듯 길고도 시원스럽게 숨을 내쉬었다.
“오늘은 정말 잠들지 말아야지.”
오칠은 지금의 이 기분을 놓치기 싫었다.
악몽을 꾸게 되면 지독한 불쾌감과 고통스러움에 이 기분 좋은 느낌을 기억할 수 없을 것이다.
“시작하자.”
오칠은 탑림에서도 구석진 곳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오늘 보았던 무공들을 수련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