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계 2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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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2,525회 작성일소설 읽기 : 파계 28화
파계 2권 - 3화
“꺅!”
능소혜는 깜짝 놀라 뒤로 물러났다.
자신의 뒤에 누군가 있었다는, 그것도 밤에 보면 특히나 무섭고, 두려운 몰골로 소리 없이 다가와 있었다는 것이 그녀를 당혹스럽게 했다.
만약 손에 검이라도 있었다면, 사람이건 뭐건 간에 단번에 두 동강을 냈을 것이 분명했다.
“어?”
그런데 능소혜는 괴인의 모습이 낯익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 파계승!”
능소혜는 자신이 말을 해놓고는 깜짝 놀랐다.
미쳤다고 하는 파계승의 앞에서 그런 말을 했으니, 어떤 일이 생길지 두려웠던 것이다. 하나, 곧 그의 뒤에는 능진철이 있고, 든든하기 그지없는 금원종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힘을 얻었다.
“당신 뭐야! 사람 놀라게 왜 뒤에 서 있었던 거야! 죽고 싶어!”
삿대질까지 하고 소리치면서도 능소혜는 슬며시 실혼인의 눈치를 보았다.
여차하면 뒤로 빠져, 금원종에게로 달려가려는 것이었다.
‘차라리 그랬으면…….’
실혼인이 괴이한 짓거리라도 한다면, 그 핑계로 해서 금원종의 품에 안길 수도 있는 일이 아닌가.
하지만 실혼인은 처음부터 그랬듯 아무 말도 없이 멍하니 서 있었다.
“이봐, 왜 아무 대답이 없는 거야?”
“그를 그냥 놔두는 것이 좋을 것 같구나.”
금원종이 그리 말하고, 능진철도 무시하고서 숙소로 돌아가자고 했다.
이곳, 탐림은 소림사에서는 성지와 다름없는 곳.
그런 곳에 들어왔다는 것부터 꺼림칙한 일인데, 검을 들고 무공까지 수련한 그들 입장에서 괜한 소란이라도 생기면 결코 좋은 일이 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난 무시당하는 것이 싫어!”
하지만 능소혜는 갑자기 쓸데없는 고집을 부렸다.
상대가 파계승이고, 정신도 온전치 못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능진철 외에는 평생 누구에게 무시를 당해본 적이 없었던 능소혜였다.
그래서 그녀는 지금과 같은 상황을 그냥 넘길 아량을 가지지 못한 것이다.
“이봐, 어떤 말이든 해보란 말이야! 설마 벙어리는 아니겠지?”
능소혜는 금원종이 말리는데도 실혼인에게 성큼 다가갔다.
처음에는 무서웠지만, 뒤에서 그녀를 지켜줄 수 있는 충분한 실력의 사람이 둘이나 있다는 것이 그녀의 간을 커지게 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실상은 그녀 혼자만 해도 보통 사내 열은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실력의 무림인이 아니던가.
“왜 내 말을 무시하는 거야!”
산발한 머리에 가려져서 실혼인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 것에 능소혜는 와락 짜증이 났다.
그래서 얼굴을 가리고 있는 머리카락을 향해 손을 휘둘렀다.
훅-
손바람이 일어났고, 실혼인의 얼굴을 가린 무성한 머리칼이 뒤로 휙 하고 넘어갔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능소혜의 비명이 이어졌다.
“꺄악-!”
게다가 이번에는 실혼인까지 비명을 질러대고 팔을 흔들며 광기를 부리는 것이 아닌가.
“끄아~ 끄아~!”
결코 작은 소리가 아니었다.
능소혜는 실혼인의 커다란 괴성에 놀라 곧 입을 닫았지만, 실혼인은 계속해서 비명을 지르고 몸을 흔들어댔다.
“실례하겠소!”
순간, 금원종의 신형이 실혼인의 몸을 스쳐 지나가고, 실혼인은 우뚝 정지해버렸다.
사방이 떠나가라 질러대던 비명도 멈춰진 것은 불문가지.
갑자기 주위로 조용한 침묵이 감도는데, 왠지 그 분위기가 을씨년스러웠다.
“우리의 사정상 소란을 피울 수 없어, 피치 못하게 당신을 점혈했소. 이해해주기 바라오.”
금원종은 두 팔을 하늘로 올린 채 굳어 있는 실혼인에게 포권을 해 보이고는 품에서 콩알만 한 작은 환약을 꺼냈다.
“이것은 옥진환(鈺珍丸)이라 하는 것이오. 한 식경 정도만 있으면 제압되어 있던 마혈이 풀리겠지만, 혹시 모르니 당신에게 복용시켜두겠소.”
“금 사형, 옥진환을 이 사람에게 준다고요?”
옥진환은 기혈을 안정시키고, 내상을 치료하는 데 뛰어난 효능을 가진 환약이었다.
그래서 화산파 제자에게도 일 년에 한 번씩 지급되는데, 사용하지 않았을 시에는 교환하여 다시 지급할 정도로 그 취급을 신중히 하는 귀한 약이었다.
당연히 그 사용에 관해서도 나중에 보고를 해야 하는데, 지금 금원종이 그 귀한 환약을 실혼인의 입에 넣어주고 있으니, 능소혜가 놀라는 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우리가 점혈을 했는데, 이 사람이 혹시라도 몸에 문제가 생기면 어찌하겠느냐.”
“하지만…….”
능소혜는 실혼인에게 옥진환은 필요 없을 거라고 말하려 했다.
조금 전에 보았던 그 해골과 같이 피골이 상접한 얼굴은, 그 어떤 영약을 먹어도 아무런 효과를 볼 수 없을 거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능소혜는 끝내 말하지 않았다.
그렇게 말했다가는 금원종이 얼마나 화를 낼지 잘 알기 때문이었다.
“알았다구요. 그럼 이제 그만 가요. 여기에 더 있다가는 귀신을 볼 것 같단 말이에요.”
금원종은 소림의 성지에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며, 실혼인에게 포권을 취했다.
“다시 한 번 사과하겠소.”
그리고 금원종 등은 탑림에서 떠나갔다.
“…….”
금원종 등이 탑림에서 사라지고, 대략 일각이 지났다.
그리고 실혼인은 위로 들고 있던 팔을 내리고, 굳었던 몸을 풀려는 듯 몸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금원종은 점혈이 풀리는 시간이 한 식경은 걸릴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실혼인은 일각 만에 점혈이 풀어진 것이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것은 점혈은 사실 반 각 만에 풀린 것이고, 실혼인은 고의로 반 각을 더 굳어 있는 척했다는 것이었다.
도대체 어찌 된 일일까?
“좋은 녀석이군.”
비명과 괴성 외에는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할 것 같던 실혼인의 입에서 말이 흘러나왔다.
그것도 매우 정상적인 말투의 말이었다.
휘잉~
부드러운 바람이 일었다.
그것은 실혼인의 머리칼을 이리저리 흔들었다.
“가려워.”
실혼인은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얼굴을 가리고 있는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겼다.
그리고 드러난 얼굴은 참으로 흉하기 그지없었다.
살점 하나 없어 광대뼈가 뚜렷하게 드러나고, 눈동자는 마치 억지로 끼워 맞춘 것처럼 이질적이었다. 전체적으로 껍질만 붙어 있는 해골처럼 보인다고나 할까.
능소혜가 실혼인의 얼굴을 보고 비명을 지른 것도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만약 실혼인의 벗은 몸까지 보았다면, 능소혜는 그대로 혼절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 몸 역시 얼굴처럼 앙상하기 그지없어, 보는 것만으로도 흉물스러웠으니까.
한데, 왠지 실혼인의 얼굴은 어느 누군가를 떠올리게 하는 뭔가가 있었다.
누구일까?
누구일까?
아, 오칠!
실혼인의 얼굴은 행자승 오칠을 떠올리게 했다.
눈으로 보고도 믿지 못할 만큼 몰골이 크게 변했을 뿐이지, 실혼인은 외학전 행자승 오칠이었던 것이다.
제14장. 죽기 싫어 정신없는 놈으로 살았다
오칠은 왜 실혼인이 되었을까?
아니, 왜 오칠은 정신이 온전한데도 실혼인으로 행세하고 있는 걸까?
삼 년 전 그날, 오칠은 소림사의 지하광장에서 노승에 의해 금제를 당하고 정신을 잃었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팔 일이나 흐른 뒤에야 정신을 차렸다.
‘어떻게든 살아남겠다!’
노승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는 더욱 삶에 대한 집착이 강해졌다.
절대 죽어서는 안 된다는, 쇄마동 같은 곳에 갇혀서도 죽는 것과 다름없는 삶이기에 어떤 방법이든 생각해내야 했다.
그래서 실혼인이 되었다.
정신을 차리고서도 한동안 멍해 있었기 때문에, 실혼인이 되었다고 속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절대 말을 하지 않고, 누군가 건드리기만 해도 비명을 지르고, 발광을 했다. 씻지도 않고, 먹을 것에 대한 욕망도 완전히 끊어버렸다. 가슴속에서 끓어오르는 분노와 삶에 대한 욕구를 숨긴 채, 승려들의 눈에는 그저 멍하니 살아가는 것처럼, 정신 나간 놈처럼 보이게 했다.
오칠은 그렇게 삼 년을 소림사에서 보내왔다.
* * *
[돌아왔구나.]
오칠은 어둠 속에서 들리는 소리에 덜컥 겁부터 났다.
삼 년 동안 매일 밤 그랬듯 또 악몽이 시작된 것이다.
[시작해볼까?]
어둠 속의 목소리는 묻고 있었지만, 그건 의향을 묻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이제부터 시작될 파괴와 고통, 그리고 욕망의 시작을 알리는 것에 불과했다.
후와와아-
바람에 밀려난 것처럼 어둠은 사라지고, 주위는 회색빛에 물들었다.
사막.
오늘은 사막이었다.
어느 날은 나무가 빼곡히 들어찬 밀림이고, 어느 날은 발이 푹푹 들어가는 습지였다. 또 어느 날은 오칠에게 전혀 관심 없는 수백의 사람들이 지나가는 대로였다.
삼 년 동안 꿨던 천 번에 가까운 악몽의 배경은 그렇게 매일 달랐다. 하지만 배경은 달라도 한 가지만은 똑같았다.
나타났다!
모래 속에서 흉측한 모양의 손이 불쑥 솟아나오고, 이어서 눈이 하나에, 뿔이 두 개인 괴물이 나타났다.
괴물의 목적은 오칠에게 고통을 주기 위함이었다. 주먹으로, 발로, 때로는 가시가 삐죽삐죽 튀어나온 쇠도리깨와 같은 무기들을 이용하기도 했다.
오칠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처음엔 도망치기만 했지만, 어느 날부터인가는 맞서 싸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제는 먼저 괴물에게 달려들어 싸웠다.
퍽! 퍼퍽! 퍽! 퍽!
오칠은 주먹을 내지르고, 발을 올려 찼다. 이로 물어뜯기도 하고, 다리를 걸기도 하고, 목을 조이기도 했다.
모든 싸움 기술을 이용해 괴물에게 맞섰다. 치졸한 짓거리도 서슴지 않았다.
[헉… 헉… 헉…….]
괴물을 죽였다.
두 손이, 가슴이, 얼굴이 온통 괴물의 몸에서 흘러나온 붉은 피로 흥건했다.
불쑥.
하지만 한 놈을 죽였다고 안심할 수 없었다.
이곳저곳에서 흉측한 손이 솟아나오고, 방금 전 죽인 괴물과 같은 놈들이 무더기로 나타났다.
[으아~!]
기합을 질렀다.
두려움 때문에 도망치려는 자신을 막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싸움기술과는 다른, 무공이라 할 수 있는 동작을 펼치며 괴물들에게 달려들었다.
퍼퍽.
가장 앞에 있는 괴물의 몸에 주먹이 작렬하며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아라한신권(阿羅漢神拳)이었다.
오칠은 여세를 몰아 쉼 없이 무공을 끄집어내며 괴물들을 공격했다.
관음청강수(觀音靑剛手), 반선수(盤禪袖), 보리옥룡인(菩提玉龍印), 쇄비장(碎碑掌), 광한지(廣寒指), 금룡십이해(金龍十二解), 관음십팔족(觀音十八足), 금강장(金剛杖)…….
오칠이 펼치는 것은 소림칠십이절예의 무공들이었다.
위력은 너무도 약했지만, 분명 그 동작들은 소림 무공이 분명했다. 하지만 역시 약했다.
그리고 그런 공격은 괴물들의 강철 같은 몸에 아무런 효과를 발휘할 수 없었고, 오칠은 곧 잔혹한 반격을 당해야 했다.
퍼퍽! 콰직! 퍼퍽! 우둑! 퍼퍽!
강철 같은 주먹이 얼굴을 치고, 배를 가격했다.
쓰러진 오칠의 몸에 쇠기둥 같은 발들이 떨어지고, 오칠의 몸은 순식간에 고깃덩이처럼 짓이겨졌다.
[빌어먹을!]
괴물들은 사라졌다.
하지만 오칠의 몸은 이미 인간의 몰골이 아니었다. 머리만 덩그러니 남아서 생각만 할 뿐이었다.
[호호호호!]
악몽의 마지막을 알리는 요사스러운 웃음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