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계 2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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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2,620회 작성일소설 읽기 : 파계 25화
파계 1권 - 25화
굉덕은 방장의 법명이었다. 그리고 방장이 되고부터 거의 불리어지지 않은 이름이었다.
방장이란 것은, 항렬을 불문하고 소림에서 가장 높은 위치이고, 그런 방장의 이름을 말 할 수 있는 이는, 그의 사부와 전대 방장들 외에는 없었으니까.
그리고 방장의 사부이자, 전대 방장, 그리고 그 이전의 방장들은 이미 모두가 열반에 들었으니, 이 자리의 그 누구도 방장의 법명을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보아야 했다. 설사 세 항렬이나 높은 노승이라도 말이다.
물론 노승이 무승이 아닌, 학승이라는 점이 크게 작용한 것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방장을 제외한 승려들이, 사실 바로 그 점 때문에 노승에 대한 공경심과 경외심이 부족한 것이기도 했다.
“굉덕아!”
다시 노승의 음성이 울렸다.
“말씀을 삼가십시오!”
굉요가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다른 승려들도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이는 불경죄라며 난리를 쳤다.
“굉덕아!”
하나, 노승은 계속 방장의 이름을 불렀다.
“십팔나한은 뭣들 하느냐! 어서 노스님을 밖으로 뫼시고 나가거라!”
굉요가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버럭 소리쳤다.
한데, 그런 굉요를 막는 손이 있었으니, 바로 그의 옆에 있는 방장의 손이었다.
“나는 노스님의 말씀을 들어야겠네.”
“하지만 방장 사형! 이는 있을…….”
“그만.”
방장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더 이상 논하지 않겠다는 듯, 다른 모든 승려들에게도 개입하지 말고 그대로 앉아 있으라고 명을 내렸다.
“굉덕아!”
방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하게 두 손을 모으고 합장을 해 보였다.
“굉덕이 여기 있으니, 노스님께선 말씀하십시오.”
노승은 이제야 방장이 거기 있었다는 걸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 몸을 돌려 방장을 보지는 않았다.
마치 오칠에게 말하고자 한다는 듯, 두려움이 완전히 가시지 않은 오칠의 눈동자를 똑바로 마주하며 말을 하기 시작했다.
“자비(慈悲)란 무엇이냐?”
노승의 물음에 방장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말했다.
“제가 배우기로 중생에게 고통을 덜어주고, 안락하게 해주려는 일이라 하였습니다.”
“또?”
방장은 잠시 침묵하다 고개를 내저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너는 예전에 내가 해준 자비에 관한 이야기를 기억하느냐?”
“기억합니다.”
“그럼 지금 그 기억을 떠올려보거라.”
방장은 과거 노승에게서 많은 이야기를 들었었다.
그리고 그중에 자비에 관한 이야기가 있는데, 바로 마신이라 불리는 아수라와 호법신인 제석천이 싸우는 중에 있었던 일이었다.
사실 두 신의 싸움은 제석천의 잘못으로 기인한 것이었다.
제석천이 아수라의 딸을 억지로 능욕하고, 자신의 여자로 만들어 데려갔던 것이다. 물론 두 사람은 모두가 부러워하는 사이좋은 부부가 되었지만, 어쨌든 아수라에겐 결코 유쾌한 일이 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제석천을 원망했고, 증오하게 되어 결국 두 사람은 싸움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싸움이 시작되고 어느 날, 제석천의 군세가 열세에 놓이게 되었다. 그래서 제석천의 군대는 달아났고, 아수라의 군대는 그들을 쫓았다.
그런데 제석천이 도주하는 길 위에 금시조(전설의 새)의 둥지가 있고, 그 둥지 안에 갓 태어난 새끼가 있었다. 제석천의 군대가 그대로 돌진하면 새끼들은 모두 짓밟혀 죽게 될 것이 자명한 일이었다.
갑자기 제석천은 군대를 멈추게 하고, 방향을 바꿔 다시 아수라에게로 돌진을 명했다. 그러자 이 돌연한 변화에 아수라는 제석천이 큰 비책을 가지고 있다고 오해하게 되었고, 그래서 아수라는 군대를 돌려 후퇴했으며, 제석천은 위험을 피할 수 있게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노승은 이 이야기가 왜 아수라가 마신이 되었고, 제석천이 석가세존의 호법신이 되었는지를 말해준다고 했었다.
분명 최초의 정의는 아수라에게 있었다. 따라서 그의 분노는 당연한 것이었다. 하나, 싸움을 하면서 아수라는 그저 싸움만을 위한 집념의 화신이 되었다. 아수라는 제석천의 무공을 당할 수 없는데도 포기할 줄 모르고 계속해서 싸움을 벌여나갔다.
내가 절대적으로 옳고, 상대가 나쁘다, 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 아수라는 처음부터 제석천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다. 자신 또한 제석천과 다를 바 없는 행동을 하고 있다는 걸 몰랐다.
그의 분노는 당연한 것이었지만, 타인에 대한 연민을 잊었고, 동정심도 없었으며, 그 자신의 분노에 휩싸여 싸움에만 집착하게 되었다.
그러나 반대로 제석천은 어떠한가.
제석천은 도덕적으로 칭찬받지 못할 행동을 저질렀다. 하지만 그에게는 자비의 마음이 있었다. 약한 자, 작은 자에 대한 연민의 마음.
그것은 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이었다.
그는 잘못을 저질렀지만, 후회하고, 보시를 행하고, 선행을 쌓았다. 석가세존에게 귀의하여 세존의 살아생전 동안 그를 보호하고, 결국 훗날 호법신으로 추앙받게 된 것이다.
‘난 노스님이 해주신 이야기를 듣고서 아수라가 마신이고, 제석천이 선신이라는 것이 말도 안 된다고 했었지. 아수라가 마계로 떨어져 마신이 된 것은 부당한 처사라고 했었지.’
방장은 당시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이제는 불교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제 다시 한 번 묻겠다. 자비란 무엇이냐?”
노승의 물음에 방장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차분하게, 예전엔 몰랐지만 이제는 알게 된 자비의 뜻을 말했다.
“남을 사랑하고, 가엾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래. 이제는 알고 있구나. 난 네가 똑똑한 아이였다는 것을 예전부터 알고 있었느니라.”
“노스님의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방장은 두 손을 모아 합장을 하고, 노승을 향해 깊이 허리를 숙였다.
굉요를 비롯한 모든 승려들은 방장의 행동을 보고, 그래선 안 된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 누구도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노승과 방장 사이에 오고간 대화와 그로 인해 생겨난 기묘한 분위기에 눌려 감히 끼어들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럼 이제 내게 시간을 줄 수 있겠지?”
노승은 처음으로 고개를 돌려 방장을 보았다.
방장을 향하고 있는 노승의 시선은 왠지 슬픈 듯한, 그러나 뭔가 초연해 있는 듯해 보였다. 그 눈동자를 보고 방장은 내심 안타까운 탄성을 터트렸지만,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뜻대로 하십시오.”
방장은 자리에 앉았고, 반발하려는 다른 승려들에게 다시 한 번 개입하지 말라고 조용히 경고를 주었다.
“오칠아.”
방장에게 향했던 고개를 다시 돌린 노승은 오칠의 눈동자를 똑바로 보았다.
예전의 그 영악함은 사라지고, 두려움밖에 담겨 있지 않은 눈동자였다. 오칠이 이제 열여섯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해주는 눈동자였다.
그리고 오칠을 암울한 공간에 던지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이대로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신세가 되게 해서는 안 된다는 확신을 갖게 해주는 눈동자였다.
“오칠아.”
“예… 예, 노스님.”
오칠은 간신히 입을 열었다.
멍청이처럼 변해버린 머릿속을 어떻게 할 수 없다는, 절망감에 찬 목소리였다.
“세상 모든 것은 네 마음이 있기에 존재하는 것이다.”
“……?”
“네가 집을 마음에 담았기에 집이 보이고, 네가 나무를 마음에 담았기에 나무가 보이는 것이다.”
오칠은 더욱 멍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처럼 혼란스런 상황에서 어찌 더 생각을 복잡하게 하는 말을 한단 말인가.
오칠은 솔직히 제발 그만 하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지금 오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 노승의 말을 듣고 있는 일이었으니까.
“악이고, 선이고, 부처고, 악마고, 그것은 네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니, 너는 세상을 보기 전에, 그 세상을 담아야 하는 네 마음을 먼저 보거라.”
오칠은 노승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노승이 대답을 듣고 싶어 하는 것 같았기에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래. 이제 되었구나. 지금은 이해하지 못하지만, 훗날 알게 될 것이다. 너는 아주 똑똑한 아이니까 말이다.”
오칠은 문득 가슴이 울렁거렸다.
자신을 바라보는 노승의 눈빛을 보고 있자니, 어느새 멈춰 있던 눈물이 다시 뺨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왜?’
모르겠다.
왜 이렇게 슬프고, 눈물이 나는지 오칠도 몰랐다. 그냥 노승을 보고 있으니까 그렇게 될 뿐이었다.
“다 잘 될 것이니, 울지 말거라.”
노승은 손을 들어 오칠의 머리에 얹었다.
‘내가 하는 일이 옳은 것이라고는 확신하지 못하겠구나.’
지금 노승이 하려는 것은, 한편으로 과거 그의 사형들이 노승에게 했던 것과 비슷한 것이었다.
사형들이 그에게 모든 내공을 전해주었듯, 노승도 자신의 몸에 있는 내공을 모두 오칠에게 전해줄 생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방법과 결과는 다른 것이었다.
사형들은 노승의 약한 몸을 위해서. 사바에 두고 가야 할 막내 사제가 안타깝고, 염려가 되어 내공을 전해준 것이었다.
덕분에 노승은 이리 건강한 것이고, 거의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오칠의 마기를 잠재울 때처럼 엄청난 내공을 바탕으로 한, 음공을 펼칠 수 있는 능력까지 얻게 되었다.
그러나 지금 노승이 하려는 것은, 단순히 사형들로부터 받은 내공을 오칠에게 옮기는 것이 아니었다. 그 내공을 이용해서 오칠의 몸에 금제를 가하려는 것이었다. 그래서 점점 강력해지는 마기를 잠재울 생각이었다. 영원히 나올 수 없도록 말이다.
‘지금은 이것이 최선일 것이야.’
오칠이 꿈에서 들었다는 이름, 아리만.
노승은 그 이름이 무얼 말하는지 알고 있었다.
배화교의 악신, 광명의 신인 아후라 마즈다와 대립하는 암흑의 신. 그것이 바로 아리만이었다. 그리고 영원히 그 존재감을 세상에 드러내지 말아야 할 이름이었다.
“오늘 내가 한 말을 잊지 말거라.”
노승은 오칠의 눈동자를 똑바로 마주보며 내공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형들과 노승만이 알고 있던, 정확히는 노승이 우연히 알게 되어 사형들에게 알려주었던 절대금마령(絶對禁魔靈)의 심법을 운용하여 오칠의 백회혈로 내공을 주입하기 시작했다.
“끄…….”
오칠은 이를 악물었다.
머리끝부터 시작되는 갑작스런 고통에 절로 반응한 것이다. 그리고 점점 커져가는 고통에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뭐지? 노스님이 뭘 하려는 거지?’
오칠은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몰라 당황했다.
하지만 곧 어떤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온몸이 뜯어 발겨지는 듯한 엄청난 고통에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끄아~!’
오칠은 입을 열지도 못해, 속으로만 처절한 비명을 내질렀다.
그리고 순간 정신을 잃었다.
* * *
화아아~!
노승과 오칠을 중심으로 엄청난 바람이 일었다.
주변에 있던 십팔나한들을 광장의 벽으로 사정없이 날려버리는 엄청난 바람이었다. 노승의 몸에서, 그리고 오칠의 몸에서 방장을 비롯한 모든 승려들이 온 힘을 다해 저항해야 할 정도로 강력한 무형의 힘이 발출되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일각이 넘도록 휘몰아치던 바람은 사라지고, 광장을 꽉 메우고 있던 무형의 힘도 사라졌다.
“…….”
“…….”
광장에 침묵이 감돌았다.
“나무아미타불!”
그리고 곧 방장이 흐트러진 옷을 바르게 정리하고, 더없이 공손하게 합장을 하며 광장의 중심을 향해 머리를 조아렸다.
다른 승려들도 침통한 얼굴로 방장을 따라 광장의 중심을 향해 나무아미타불을 읊조렸다.
광장의 중심.
그곳엔 쇠사슬 때문에 쓰러지지도 못하고 정신을 잃은 오칠과 가부좌를 한 채 열반에 든 노승이 있었다.
<다음 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