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계 6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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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2,606회 작성일소설 읽기 : 파계 62화
파계 3권 - 12화
“금 문주는 그동안 여러 종류의 사람을 사귄 듯하군요. 하지만 그들을 믿고서 이곳에 온 것이라면, 날 너무 무시하는 처사가 아닌가요?”
매 문주는 왕공단 등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고, 그래서 더욱 짙은 비웃음을 날렸다.
“내가 어찌 열락문의 문주를 무시할 수가 있겠소. 하지만 내 아우를 그리 말하니 별로 기분이 좋지 않구만.”
금철산은 그렇게 말을 하며 몸에 힘을 불끈 주었다.
그러자 금방이라도 옷이 터져나갈 듯 팽팽해지고, 근육의 꿈틀거림이 눈에 확연하게 보였다.
“그 버릇은 아직도 버리지 못했군요.”
매 문주도 금철산이 화만 나면 근육을 부풀려 옷을 찢는다는 걸 잘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문주님.”
이때, 안절부절못하고 있던 일 총관이 다가왔다.
너무 급작스럽게 분위기가 냉각되어 말을 할 기회를 찾지 못하다가, 더 늦으면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될까 봐서 서둘러 자초지종을 설명하려 한 것이다.
한데, 한 사내가 장내에 나타나면서 일 총관은 하고자 하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손님이 많구만.”
뚱뚱하지도 않고 마르지도 않은, 균형 잡힌 몸매와 멋스럽게 난 콧수염, 정갈하게 다듬은 머리하며, 외모만으로 보자면 노련한 관리 같기도 하고, 유상(儒商:학문에 밝은 상인)처럼 보이기도 하는 장년의 사내였다.
그의 등장에 매 문주를 제외한 장내의 모든 이들이 당황했다.
“경 보주님!”
금철산은 화급히 머리를 숙이며 포권을 취했다.
매 문주에게는 그저 형식적인 인사에 불과했지만, 지금 금철산의 태도는 달랐다. 장년의 사내를 공경하듯 진정 예의를 다하는 모습인 것이다.
경모혁.
사내의 이름이다. 그리고 동북구와 동남구를 아우르고 있는 천목보(千目堡) 보주의 이름이기도 했으니, 그가 바로 현 무한 제일의 사파 세력인 천목보의 주인인 것이다.
그런데 어찌 그가 이곳에 나타난 걸까?
사실 매 문주가 며칠간 외출을 했던 것은, 황학루(黃鶴樓)로 나들이를 가는 경 보주의 시중을 들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경 보주는 나들이의 마무리로 천상루에 술을 마시러 온 것이다.
즉, 매 문주가 술자리를 준비하기 위해 먼저 천상루로 온 것이고, 조금 뒤늦게 경 보주가 도착한 것이다.
“잘 있었는가, 금 문주.”
“예. 경 보주님께서도 그간 별고 없으셨습니까.”
“나야 늘 그렇지.”
일단 두 사람의 대화는 보통의 안면이 있는 사람들처럼 평이했다.
그러나 곧 경 보주의 눈길이 금철산의 좌우, 뒤로 향하면서 대화의 방향은 조금씩 달라졌다.
“그런데 자네는 여기 웬일인가? 그것도 이리 많은 수하들을 데리고 말이야.”
“그것이…….”
금철산은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생각하느라 잠시 머뭇거렸다.
그러나 경 보주는 생각할 틈을 주지도 않고, 조금은 딱딱해진 음성으로 다시 물었다.
“요즘 철근문에 내가 모르는 좋은 벌이라도 생겼나?”
“……?”
“천상루는 나도 자주 오지 못할 정도로 돈이 많이 드는 곳이지 않은가. 그런데 자네는 이리 많은 수하들을 데려온 걸 보면 분명 어디선가 많은 벌이가 있었다고밖에 생각할 수가 없지.”
“아닙니다, 벌이라니요. 경 보주님께서 아시는 그대로의 장사만 하고 있을 뿐입니다.”
금철산은 말도 안 된다는 듯 손을 크게 내저었다.
천목보는 사파 세력이면서 상인 연합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런 천목보는 무한 상권에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장사에 관련한 것이라면 아주 조금이라도 손을 뻗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런데 대부분의 수입을 객잔에서 벌어들이는 철근문이 천목보도 모르는 장사를 하고 있다면 그건 밀매밖에 없고, 이는 밀매에 관해서도 독점에 가까운 이익을 챙기고 있는 천목보에게 적대적인 행위를 하는 것과 다름없는 것이다.
그래서 금철산은 괜한 오해를 사지 않기 위해 적극적으로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로서는, 아니 힘이 부족한 철근문으로서는 절대 천목보의 눈 밖에 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니까 말이다.
“아니라니 다행이군. 하면, 열락문과 싸우기라도 할 생각으로 온 것인가?”
순간, 금철산의 등으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경 보주의 서글서글한 눈동자가 더할 수 없이 매섭게 변했기 때문이다. 그건 무한 제일의 고수일 수도 있는 자의 살기가 담긴 눈빛이었고, 금철산은 아직까지 그런 고수의 눈빛을 감당할 실력이 되지 못했다.
“……!”
하지만 경 보주는 금철산의 반응이 예전과는 달라졌다고 느끼고 있었다.
‘내공을 수련한 것인가?’
몇 달 전에 보았던 금철산은 절대 지금과 같지 않았다.
경 보주가 쏘아 보낸 살기라면 심맥에 영향을 받고 크게 흔들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이 외공만 익혀온 자의 약점이다.
물론 경 보주처럼 막강한 내공과 살기를 뿜을 수 있어야만 꽤 높은 경지의 외공을 수련한 금철산의 심맥에 영향을 줄 수 있을 테지만 말이다.
어쨌든, 분명 금철산은 달라졌다. 그리고 내공에 관한 것이 아닌, 다른 변화가 있을 리는 없었다.
‘그럼 자신이 생겨서 온 것인가? 지금은 매 문주를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이 생겼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다면 금철산이 이곳 천상루에 올 일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경 보주는 오래 전에 열락문과 철근문의 다툼을 용납하지 않겠다고 공표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금철산은 자신의 말을 무시할 정도로 멍청한 자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진정 술을 마시기 위해 왔단 말인가?
하지만 금철산의 대답은 경 보주의 모든 생각을 빗겨가는 것이었다.
“은공께서 천상루에 계시기에, 혹여 문제라도 생길까 싶어서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은공?’
경 보주는 그게 무슨 소린지 생각했다.
그는 최근에 철근문이나 금철산이 누군가에게 은혜를 입었다는 등의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더구나 대외적으로 드러내고 있지는 않지만, 정보 면에서 개방과도 비견될 수 있다 자신하는 천목보였다. 아니, 이제는 예전만큼의 성세를 뻗치지 못하고 있는 개방을 넘어서는 수준에 이르렀다 확신하고 있었다. 한데, 그런 천목보의 정보망에도 걸리지 않은 것이 있단 말인가?
‘내가 며칠 방을 비웠기에 전해 받지 못한 것인가?’
그러나 고작 며칠 사이에 은공 어쩌고 할 일이 생겼다는 것은 너무도 이상한 일이었다. 뭐, 있을 수는 있겠지만, 중요한 일이었다면 쉬고 있는 때라 해도 보고가 되지 않을 리가 없는 것이다.
“자네에게 그리 중한 분이 계셨군. 그래, 그분의 고명은 어찌 되시는가?”
“오칠이란 분입니다.”
경 보주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어느 집 종놈이나, 없이 사는 집에서 대충 붙여질 이름이기 때문에 그러는 것일까?
아니었다.
이름 때문에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이 아니었다.
사실 경 보주는 오칠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한 달여 전에 금철산을 패배시킨 괴이한 인물이 나타났다는 보고를 받은 적이 있고, 그자의 이름이 오칠이란 것을 알고 있었다.
‘무공 내력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금철산을 능가하는 외공의 고수라고 했지.’
경 보주는 그 말을 듣고 오칠이란 인물에 대해 조사를 지시해두었다.
약간의 흥미도 생겼고, 정사 간에 균열이 생기는 요즘같이 어수선한 시국에 능력이 있는 자가 나타났으니 당연히 조사해둘 필요성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오칠을 금철산이 은공이라 하니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무엇보다 금철산은 오칠에게 패했고, 결과적으로 그의 이름과 철근문의 위세에 악영향을 끼친 자였으니까 말이다.
“그가 자네의 은공인가?”
경 보주는 확인하듯 물었고, 금철산은 분명한 사실이라 듯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분께선 제게 스승과 다름없는 분입니다.”
경 보주는 더욱 이해하기 힘들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그 이상 더 어떤 대답을 들을 수는 없었다. 스승이라면 무공에 관련한 것일 테고, 이를 캐묻는다는 건 무림인의 생리상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말이다.
“뭐라고 했느냐!”
이때, 매 문주의 놀란 외침이 들려왔다.
그녀는 경 보주가 금철산과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일 총관에게 보고를 받고 있었고, 그 내용의 중심은 오칠이 매 자매의 시중을 받으며 술을 마신다는 것이었다.
“앞장서거라.”
매 문주는 분노하여 일 총관을 다그쳤다.
그리고 재빨리 좌우로 물러나는 수하들 사이를 지나 위층으로 사라졌다.
“재밌는 일이 있는 모양이군. 그럼 나도 올라가볼까.”
경 보주는 빙긋이 미소를 지으며 매 문주의 뒤를 따라 위층으로 움직였다.
금철산에게선 여타의 다른 이야기를 들을 수도 없을뿐더러, 지금 매 문주가 분노하여 올라간 이유가 이 모든 소란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오칠이란 인물 때문임을 알았다.
“우리도 올라가야 하지 않을까요?”
경 보주의 위명에 기가 죽어 뒤로 물러나 있던 왕공단이 계단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하지만 금철산은 고개를 저었다.
“이곳에서 기다리는 것이 좋겠어. 은공께 일이 생긴다면 자연히 알게 되겠지. 지금 우리까지 올라가게 되면 분위기가 훨씬 험악하게 될 거야.”
그리고 금철산이 예측하기로 오칠은 결코 쉽게 당할 사람이 아니었다.
이곳에서 진을 치고 있는 것은 그저 그가 업신여김을 당할까 우려했기 때문이지, 위험이 있을까 걱정했기 때문은 아닌 것이다.
‘다만, 경 보주는…….’
금철산은 오칠에게 무공을 배우면서, 그가 자신에겐 티끌만큼의 실력만을 보인 굉장한 고수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경 보주 역시 겉으로 드러난 것 이상으로 대단한 고수였다.
‘어쩌면 이번 일로 은공의 감추어진 실력이 드러나는 계기가 될 수도 있겠지.’
금철산은 그런 생각을 하며 계단 쪽을 바라보다가 의자에 앉았다.
“모두 앉아.”
그리고 왕공단을 비롯한 모든 이들에게도 그렇게 말했다. 일이 생기면 즉각적으로 반응할 수 있도록 적당한 긴장감을 유지한 채로 휴식을 취하려는 것이다.
* * *
“열어라.”
매 문주의 싸늘한 음성에 일 총관은 황급히 방으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
열려진 문 안으로 들어선 매 문주는 아무 말도 않고 방 안의 전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어미가 왔는데도 사내밖에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냐?”
착 가라앉은 음성.
매 문주는 분노의 감정을 그렇게 조용히 분출하고 있었다. 하지만 우습게도 그런 그녀의 분노를, 방 안에 있는 이들 중 누구도 알아주지 않았다.
그녀의 두 딸들은 오칠을 향해 열정과 애정이 가득한 시선을 주고 있을 뿐, 매 문주를 향해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있는 것이다.
“당신은?”
좌우에 매적화, 매청화 자매를 두고서 술잔을 들어올리고 있던 오칠은,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담담한 시선으로 물었다. 아니, 실제로 오칠은 매 문주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의 명으로 매 자매가 자신을 탐문하려 했고, 그녀들 스스로의 판단이기는 하지만 결국은 죽이기로 마음을 먹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천상루를 떠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이자가 오칠이라고?’
매 문주가 듣기로 거지같은 몰골의 사내라 했다.
칼도 튕겨버릴 정도의 외공을 수련해 금철산을 제압했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보이는 오칠은 그런 소문과는 전혀 상관도 없을 듯한 미남자였다.
오칠의 모습은 빼어난 화공의 손에서 그려진 듯 어디 한 군데 모나지 않고,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아름답다.
사내를 그리 표현하는 것은 참으로 우스운 일이지만, 진정 오칠은 그런 외모의 사내였다. 특별히 화려하게 가꾸지 않았지만, 그 모습 자체로 빛이 나는 사내였다. 그 점만 보자면 자신의 딸들이 그 품에 안겨 고개조차 돌리지 않는 것도 이해할 만했다.
그러나 매 문주는 기녀로서 녹녹치 않은 세월을 살았고, 많은 경험을 쌓은 여인이다. 그래서 딸들의 눈빛이 평소 보던 것과는 조금 다른 빛을 띠고 있다는 것을 알아보았다.
“그대는 내 딸들에게 무슨 짓을 한 거지?”
하지만 오칠은 매 문주의 대답에 고개를 저었다.
“내가 먼저 물었잖아. 당신 누구야?”
“나와 지금 말장난을 하고 싶다는 것이냐?”
“누가 말장난 하고 싶데? 당신이 누구냐고 묻는 거잖아.”
“…….”
매 문주는 긴 숨을 내쉬었다.
어린 사내의 말장난에 놀아나지 않기 위해서는 우선 급하게 날뛰는 마음부터 차분하게 가라앉힐 필요가 있는 것이다.
“난 그대가 품에 안고 있는 아이들의 어미다.”
“아~ 그럼 댁이 열락문 문주겠군?”
“그렇다. 그러면 이제 내가 묻는 말에 대답해라. 내 딸들에게 무슨 짓을 한 거지?”
“별거 없어. 그냥 당신이 가르친 것보다 조금 더 뛰어난 걸 사용한 것뿐이니까.”
“……!”
매 문주는 당황했다.
하지만 곧 오칠의 별처럼 반짝이는 눈동자를 보며, 그 속내를 파악해보려 노력했다.
‘설마 색혼공을 알고 있다는 건가?’
딸들의 눈동자는 분명 색혼공에 현혹되었을 때에나 볼 수 있을 몽롱함이 깃들어 있었다.
물론 그것과는 조금은 다른 표정과 분위기도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색혼공에 현혹된 모습에 가까웠다.
그러나 오칠이 색혼공을 알고 있고, 그보다 더욱 강한 섭혼공을 익힌 상태라는 것에는 회의적이었다. 왜냐하면 그녀가 전대 문주에게 전수받은 색혼공은 이러저러한 잡다한 것들과는 다른, 현 무림에서 유일한 정통의 섭혼공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초대 문주에게 색혼공을 전해준 이는 그 색혼공의 원 주인들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고, 그 어디서도 계승되지 않고 있다고 했다. 그러니 그 많은 세월 동안 단 한 번도 사술에 가까운 색혼공을 들키지 않고, 지금의 열락문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