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계 5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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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2,478회 작성일소설 읽기 : 파계 59화
파계 3권 - 9화
때는 유시(酉時:오후 5~7시) 초.
오칠은 사람들이 그득하게 모여 있는 번화가를 느긋하게 걸어갔다.
‘여전히 사람은 많군.’
해가 저 서쪽 아래로 떨어져가는 데도 물건을 팔고 사는 사람은 여전히 많았고, 그 외에도 오가는 행인들이 길가에 그득했다.
오칠은 사람들 사이로 걸으며, 거지꼴로 다닐 때와는 달리 누구와도 부딪치지 않고 누구에게도 욕을 먹지 않았다. 눈을 제외한 얼굴이 가려져 있기는 하지만 그의 모습은 더할 수 없이 깨끗하고 정갈하며, 보는 것만으로도 절로 기분이 좋아질 만큼 바르고 단정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어디 한번 시험해볼까?’
오칠은 문득 자신의 능력이 녹슬지 않았는지 시험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얼굴을 가리고 있던 부채를 내리며 눈동자를 완전히 드러내고, 적당한 목표를 탐색하기 시작했다.
‘저 정도면.’
옷차림이 고급스런 여인이었다.
나이는 대략 서른쯤 됐을까?
하지만 전체적인 분위기로 보았을 때는 그보다 훨씬 나이가 많을 듯했다. 다만 용모가 빼어나고 고와서 그렇게 보이지 않을 뿐이었다. 그리고 좌우에 세 명이나 되는 시비를 이끌고 있는 걸 보면 신분이 높고, 혹은 돈이 많은 집안의 부인일 수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여러모로 보나 접근하기가 쉽지 않은 여인이고, 행실을 함부로 할 여인도 아니었다.
‘아주 적당해.’
오칠은 패물점 앞에서 비싸 보이는 장식품들을 살펴보고 있는 그 여인 쪽으로 걸음을 움직였다.
그리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거리를 두고 멈춰선 오칠은 물건들을 살피는 척하면서 여인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이쪽을 보라고.’
타인의 시선을 느낄 수 있는 적당한 거리.
게다가 오칠은 슬며시 기운을 발휘해 여인의 감각을 자극했다. 자신이 보고 있음을 느낄 수 있게 말이다.
‘그렇지.’
오칠은 고개를 돌린 여인과 시선을 마주치고 부채를 내렸다.
“……!”
여인의 놀란 얼굴이 보였다.
그리고 화급히 표정을 가다듬고, 자신의 당혹스러움을 감추는 것도 보였다. 행실이 바르고, 자신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여인이라면 누구나 취하는 행동이다.
오칠은 걸음을 움직였다.
여인이 자신의 존재를 감지했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움직여야 할 때였다.
“이건 무엇으로 만든 것인가?”
여인이 있는 패물점에 다가가며 오칠이 주인에게 물었다.
목소리엔 무거우면서도 밝은 기운을 담고, 장식품을 가리키는 손짓에서 기품이 느껴지도록 했다. 그리고 우연인 듯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려 여인과 다시 시선을 마주쳤다.
“……!”
여인이 또다시 당황하는 모습이 보였다.
오칠은 내심 회심의 웃음을 짓고, 겉으로는 더할 수 없이 부드러운 미소를 만들어내며 여인에게 눈인사를 해 보였다.
여인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곧 자신의 행동에 당황한 듯 얼굴을 붉혔다. 하나, 그건 당연한 반응이었다. 오칠과 같은 미남자의 미소와 눈인사를 받게 되면 누구라도 마음이 흔들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더구나 이미 어떤 남자의 부인으로 살아오고 있다면 그 같은 관심을 받기란 더욱 힘이 들고, 그래서 당혹스러우면서도 마음 가득 흡족함이 드는 게 당연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오칠은 여인의 바로 그러한 감정적 틈새를 파고들려는 것이었다.
‘보통은 여기서 꽤나 공을 들여야 하지만.’
오칠은 그렇게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았다.
예전이었다면 우연인 듯 여인이 보고 있는 장식품에 관심을 보이고, 그로 인해 말문을 열고, 혹은 기타적인 호감을 부여하여 이후에 있을 만남을 기약하게 만들어야 했다. 물론 여인의 관심이 더욱 크고, 시간까지 여유롭다면 단번에 품에 안을 수 있는 방법을 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오칠은 그럴 생각으로 여인에게 작업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방금 전의 행동들도 그저 여인에게 자신의 존재를 부각시키고, 약간 관심도를 높여 이제부터 발휘할 섭혼요마신공(攝魂妖魔神功)의 효과를 더욱 극대화하기 위함인 것이다.
‘어디.’
오칠은 부끄러워하면서 고개를 숙이고 있던 여인이 다시 고개를 들어 자신을 향해 시선을 준 순간, 섭혼요마신공을 운용했다.
번쩍.
일순간, 오칠의 눈동자에서 붉은 섬광이 뿜어졌다가 사라졌다.
그러나 그건 찰나의 순간이었고, 누구도 그 붉은빛을 본 사람은 없었다. 다만 목표 대상이었던 여인만이, 그 빛을 두 눈 가득 전해 받고 현혹되었을 뿐이다.
‘이거 아주 좋은데.’
몽롱해져 있는 여인의 눈동자를 보며 오칠은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섭혼요마신공은 백팔 가문의 무공으로, 색공과 섭혼공의 장점을 혼합하여 극대화시켰고, 그래서 그 어떤 섭혼공이나 색공도 따를 수 없는 최상의 섭혼공이었다.
눈빛 한 번으로 대상의 이성을 제압하고, 그 외에도 모든 행동과 말투에 그 기운을 담아서 매혹시킬 수 있는 가장 완벽한 색공이자 섭혼공인 것이다.
물론 모든 섭혼공이나 색공이 그렇듯 시전자의 기타 요건으로 더욱 빛을 발휘할 수 있는 것으로, 오칠은 내공을 비롯해 여러 요건을 두루 갖춘 미남자였기에 이처럼 빠르고 신속하게 여인을 현혹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적청쌍미한테 그냥 써먹을 걸 그랬군.’
오칠은 아침 나절의 소란이 마무리되는 순간에 매적화에게 이 섭혼요마신공을 사용하려다 그만두었다.
사실 그녀의 색혼공이 오칠에게 전혀 소용없었던 것은 오칠이 쉽게 흔들리지 않는 감정을 가진 사람이라는 이유도 있지만, 그보다는 색혼공보다 더 강력한 섭혼요마신공을 익히고 있기 때문이었다.
섭혼공이나 색공 같은 기법은 대부분 상위 수법에 종속되는 경우가 많고, 그래서 과거 모든 술법이나, 진법, 그리고 여러 기타적인 잡술에 있어서 최고의 지식을 가지고 있던 배화교의 비전을 섭렵하고 있는 오칠은, 그 방면으로 가히 무적이자 난공불락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리 와.
오칠은 여인에게 전음을 날렸다.
“너희들은 여기 있거라.”
전음을 받은 여인은, 몽롱한 눈빛으로 시비들에게 기다리라 명을 내리고 오칠을 향해 움직였다.
다른 손님들을 상대하러 주인이 밖으로 나가고, 비어버린 패물점 안엔 여인과 오칠만이 남게 되었다. 오칠은 조금도 망설임 없이 여인의 허리를 감아 품 안으로 바짝 끌어당겼다.
여인은 보기와는 달리 매우 풍만했고, 그래서 오칠은 더욱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걱정 마. 그저 꿈처럼 기억될 거니까.”
오칠은 환한 미소를 지었고, 여인의 얼굴은 뭔가에 대한 기대감으로 더욱 붉게 물들었다.
그런 여인의 입술에 오칠은 자신의 입을 포개고, 깊숙하고도 뜨거운 입맞춤을 선사했다.
“아주 기분 좋은 꿈으로 말이야.”
입술을 떼고 여인의 귓가에 조용히 속삭였다.
그리고 황홀함에 물들어 있는 여인에게서 떨어져 패물점을 나왔다.
“준비 완료.”
오칠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방금 은밀한 입맞춤을 나누었던 여인의 존재는 이미 그의 기억 속에서 지워졌다. 이제는 그가 목표로 정해놓은 여인들을 상대해야 할 때이다.
“금방 갈 테니까 기다리라고.”
오칠은 열락문의 중심이자 무한 제일의 기루인 천상루(天上樓)가 있는 곳으로 걸음을 내딛었다.
* * *
천상루(天上樓).
모두 팔 층으로 이루어져 있고, 별관만 해도 열 개가 넘는 방대한 규모의 기루다.
그러나 천상루는 결코 별천지가 아니었다. 일 층만 해도 아주 조금의 여유만 있으면 술을 마실 수 있으니까 말이다. 다만 이 층부터 조금 다를 뿐이다.
이 층부터는 어느 정도 삶이 풍족한 이들이 이용할 수 있으며, 그 위층은 꽤 풍족한 이들, 또 그 위층으로는 잘사는 이들, 그 위층으로는 매우 잘사는 이들 등등으로 계속해서 술을 마실 수 있는 능력에 차별을 두었다.
물론 그 차별의 여건은 손님 스스로의 능력으로 구분되어진다. 돈을 낼 수 있으면 그에 맞는 층을 요구하는 것이다.
더구나 팔 층을 제외한 별관을 빌리려면 보통 사람은 생각도 할 수 없는 엄청난 돈을 들여야 하는 곳이 바로 천상루이다.
게다가 동남구의 패자인 열락문의 중심 기루인 만큼 술시중을 드는 여인들을 함부로 대해서도 안 된다. 물론 기루라는 특성상 잠자리도 할 수 있고, 적당한 농도의 술시중을 받는 것도 가능하다. 그러나 술이 과했다는 핑계로 기녀들을 때린다거나, 충분한 금액을 지불하지 않고 농도 짙은 시중을 요구했다가는 큰일이 생긴다.
그리고 이런 모든 요건은 열락문의 영향이 미치고 있는 동남구의 기루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즉, 열락문은 기녀들과 그와 관련된 업종에 종사하는 여인들 모두의 안정을 추구하고, 그들의 절대적인 지지 속에서 막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었다.
“대단하군.”
오칠은 그런 천상루의 입구 밖에 서서 건물 전체를 관조하고 있었다.
종삼에게 듣기는 했지만 이토록 거대한 규모인지는 몰랐다. 과거 무한에 잠시 있었을 때, 늙은이가 천상루에 언제고 다시 가겠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는데, 이제 그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그리고 지금 안으로 들어가서 천상루가 왜 무한 제일인지를 확실히 경험해볼 차례인 것이다.
시끌시끌.
“…….”
사람 셋이 나란히 들어갈 수 있는 크기의 문 안으로 들어선 오칠은, 사람들로 그득한 장내를 둘러보며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수수하군.’
일 층의 공간은 매우 넓었다.
백 명이 넘는 인원도 충분히 앉아 있을 정도로 말이다. 하나, 천상루의 명성만큼 그 내부 장식이 화려하다거나 고급스럽지 않았다. 깨끗하지만 그저 다른 객잔이나 기루 정도 수준이랄까.
일 층은 사람들로 그득했다.
자리 하나 없이 사람들이 빼곡하게 앉아서 여인들의 시중을 받으며 술을 마시고, 그 사이사이로 점소이들이 바쁘게 오가고 있었다. 다만 점소이까지도 여자라는 것이 특이했다.
‘확실히 천상루군.’
시간은 이제 고작 유시(酉時:오후 5~7시) 중순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일을 하고 바쁘게 지내는 것은 아닐 테지만, 이처럼 이른 시간에 객잔도 아닌, 주점도 아닌 기루에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것이다.
“죄송합니다만, 일 층에는 자리가 없습니다.”
삼십 대의 미부가 다가와 오칠에게 공손히 말했다.
그녀는 일 층 총관이었다. 천상루는 다른 기루와는 달리 총관을 여인이 맡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일반적인 기루는 점소이가 손님을 맞이하는데, 이곳은 총관이 입구에서부터 일일이 손님을 상대하는 모양이었다.
‘아마도 이런 것 하나하나가 천상루의 격을 높이는 것이겠지.’
“일 층에 자리가 없다면 위로 올라가야겠군.”
오칠은 무슨 문제가 되냐는 듯 말했고, 일 층 총관은 크게 드러나지 않는 시선으로 빠르게 오칠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돈이 없지는 않은데…….’
일단 비단옷에, 가죽신, 머리카락을 하나로 묶은 비단 끈, 게다가 전체적인 몸가짐과 말투에서 절로 기품이 느껴졌다. 즉, 외견상으로 보았을 때 삶이 꽤 풍족한 자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천상루는 삼 층까지 손님들이 들어차 있었다. 그러니 삶이 풍족한 정도로는 술을 마실 수가 없는 것이다.
“죄송합니다만, 이미 삼 층까지 손님들이 계셔서…….”
뒷말은 듣지 않아도 뻔한 내용이었다.
사 층으로 올라가야 하는데 능력이 되지 못하면 포기하라는 말인 것이다. 잘사는 이들이 아니라면 결코 마음 놓고 술을 마실 수 없는 사 층이기 때문에, 일 층 총관은 나름대로 오칠을 배려하는 것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오칠은 그렇게 쉽게 돌아갈 생각으로 천상루를 찾은 것이 아니었다.
“제일 높은 곳으로 안내해.”
오칠의 말에 총관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근처를 지나가던 점소이도 그 소리를 듣고 멈춰 서서 오칠을 쳐다보았고, 가장 가까이 있는 탁자의 손님들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총관은 머뭇거렸다.
손님들이 천상루에서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층은 칠 층이었다. 칠 층은 돈에 구애받지 않고 술과 여인을 즐기는 이들이 찾는 만큼 큰 금액을 지불할 수 있는 능력이 되지 못하면 오를 엄두도 내지 못하는 곳이다.
그런데 일 층 총관의 눈에 보이는 오칠은 절대 그러한 능력을 가진 이가 아니었다. 그리고 다른 이들의 눈에도 오칠은 그만한 능력을 가진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대화를 듣고 있던 손님들 대부분이 비웃음을 날리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혹시 칠 층을 구경하겠다는 마음으로 온 자가 아닐까?’
일층 총관은 문득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간혹 천상루의 명성을 경험하고자 거짓으로 치장을 하고 오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칠 층까지 올라갔다가 그냥 내려오거나, 혹은 술과 여인을 즐기고도 돈이 없다 생떼를 부리는 경우가 있었던 것이다.
물론 생떼를 부리는 이들의 대부분 본신의 힘을 믿는 무림인들이었고, 결국 천상루의 쓴맛을 몸소 경험하고, 먹고 논 만큼의 돈을 토해내거나, 혹은 그만큼의 노동을 한 후에 천상루를 떠날 수 있었다.
“뭐가 문제야?”
오칠은 내심 짐작이 되면서도 물었고, 슬며시 얼굴을 가리고 있던 부채를 내렸다.
“……!”
일 층 총관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당연히 오칠의 빼어난 외모에 놀란 것이다. 더구나 슬며시 지어지는 그 미소는 마음이 흔들릴 만큼 매혹적이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