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계 58화
무료소설 파계: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2,630회 작성일소설 읽기 : 파계 58화
파계 3권 - 8화
“괜찮니?”
매적화는 동남구의 여러 기루 중에서도 열락문의 본루인 천상루(天上樓) 팔 층 꼭대기에 올라가 매청화를 침상에 내려놓았다.
“조금씩 몸이 풀어지는 거 같아.”
매청화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렸고, 매적화는 그제야 안심을 했다는 듯 긴 숨을 내쉬었다.
“그자가 고명한 점혈법을 모르니 다행이구나.”
매적화는 오칠이 실력이 부족하여 단순한 점혈법을 펼쳤다 생각하는 것이다.
하나, 그건 매적화의 착각이었다.
오칠은 마음만 먹는다면 그 누구라 해도 풀 수 없는 강력한 점혈법을 펼칠 수 있다. 아니, 원하는 시간 안에 기혈이 뒤틀리고, 죽게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지 않은 것이다. 굳이 매청화를 죽일 이유가 없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그자는 이제부터 우리 열락문의 적이야.”
매적화는 오칠의 그 더러운 얼굴만 떠올려도 화가 나는지 몸을 떨기까지 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매청화의 반응이었다. 그녀는 매적화 이상으로 오칠에게 굴욕을 당했으니 더욱 화를 내고, 욕하기를 서슴지 않아야 했다.
“…….”
하지만 매청화는 조용했다.
점혈이 아직 풀리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말을 할 수 없는 것이 아니었고, 그래서 무슨 말이든 해야 하는데 그녀는 그냥 조용히 입을 다물고만 있었다.
‘충격이 큰 모양이구나.’
매청화는 그렇게 생각했다.
자신이야 남자 경험도 있고, 평소에도 사내들을 상대하는 일을 하고 있으니 가슴 정도는 그냥 참아 넘길 수 있었다. 그러나 동생은 달랐다. 워낙 성정이 차가워서, 기녀 교육을 받고도 모친이 일찌감치 무력단으로 뺐을 정도다. 그런 그녀가 사내에게 온갖 희롱을 당하고도 정신적 충격을 받지 않는다면, 그게 이상한 일이다.
더구나 몰골이 거지와 다름없는 자에게 그리 험한 꼴을 당했으니, 그 충격은 더욱 클 것이 아니겠는가.
‘반드시 그자의 손목을 잘라버리겠어!’
매적화는 내심 그렇게 다짐했다.
그러나 문득 마지막에 보았던 오칠의 그 하얗고 가지런한 치아가 떠올랐다. 아니, 치아를 시작으로 그 지저분한 얼굴 가득 지어진 환한 미소가 떠오른 것이다.
왜?
매적화 자신도 몰랐다.
오칠이 그때 그녀로서는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막강한 섭혼공을 펼치려다 말았다는 것을, 그래서 그 아주 잠깐의 강렬함이 머릿속에 각인되었다는 것을 매적화는 전혀 상상할 수 없었던 것이다.
“어머니가 돌아오시려면 며칠은 있어야 하니, 그 전에 우리가 처리하는 거야!”
매적화는 자꾸만 머릿속을 맴도는 오칠에 대한 생각을 떨쳐버리려는 듯 크게 소리쳤고, 매청화는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하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쉬고 있으렴. 기루를 둘러보고 나서 그자를 어찌 처리할지에 대해 논의해보자.”
매적화는 방에서 나갔고, 매청화는 침상에 누운 채 홀로 남았다.
매청화는 멍하지 천장을 보고 있었다. 잠을 자려고 해도 잠이 오지 않고,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려 했지만 머릿속은 누군가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했다.
“말도 안 돼!”
매청화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자꾸만 머릿속에 떠오르는 오칠 때문이었다. 그녀 역시도 매적화처럼 오칠에 대한 생각으로 큰 혼란을 겪고 있었다.
왜?
오칠이 그녀에게도 섭혼공을 사용하려 했었던 걸까?
그래서 그 영향으로 오칠의 모습이 자꾸 떠오르는 걸가?
아니었다. 오칠은 매청화에게 섭혼공을 쓴 적이 없었다. 그러나 매청화는 오칠의 모든 것을 기억했다. 특히나 그녀의 몸을 농락했던 손길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다만 머리가 아닌, 몸이 기억하고 있을 뿐이지만 말이다.
‘그는 파렴치한이야! 그자는 색마라고!’
매청화는 속으로 그렇게 외쳤다.
머리로도 오칠은 색마고, 생각할 가치도 없는, 당장에 죽여야 할 자라고 되뇌었다. 그러나 육체는 그녀의 생각을 거부하고 있었다.
오칠을 떠올릴 때마다 가슴 저 밑바닥에서 스멀거리며 열기가 피어올랐다. 그의 손이 거칠게 스쳐지나갔던 몸 곳곳에서 습기가 배어나왔다.
매청화는 움직일 수 있게 된 손으로 자신의 풍만한 가슴을 꽉 움켜잡았다. 고통을 느끼라고, 끓어오르는 열기를 내리누르라고 속으로 외치며 자신의 가슴을 거세게 움켜잡았다.
‘아!’
하지만 매청화는 도리어 짜릿한 쾌감에 몸을 떨었다.
화들짝 놀란 매청화는 황급히 가슴에서 손을 뗐다. 그리고 이번엔 허벅지를 꼬집었다. 아프라고, 참으라고, 피멍이 들도록 허벅지를 꼬집었다.
그런데 다시금 쾌감이 전해져왔다. 허벅지를 꼬집던 손은 저도 모르게 그녀의 은밀한 부위로 부드럽게 이동해가고 있었다.
“안 돼!”
매청화는 상체를 벌떡 일으켜 두 손을 위로 들어올렸다.
“난… 난… 난 그따위 놈을…….”
욕망의 대상으로 여기고 있는 걸까?
오칠이 매청화의 차가운 마음을 녹이고, 열기를 불어넣은 걸까?
알 수 없는 일이다. 어쩌면 매청화는 그동안 자신을 감추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자신은 차가운 여자라고, 자신은 사내가 필요 없다고, 자신은 당당한 여인이라고 스스로를 속여왔는지도 모른다.
“아니야!”
하지만 매청화는 인정하기 싫었다.
인정할 수도 없었다. 오칠은 파렴치한이었다. 그는 나쁜 사내였고, 여인의 적이었다.
“그는… 그는…….”
매청화는 뒷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다시 침상으로 쓰러진 그녀는 몸을 이리저리 뒤척였다. 몸 저 깊은 곳에서 시작된 열기는 계속해서 그녀를 괴롭히고 있었고, 그 열기를 내리누르는 것만 해도 너무 버거운 일이었다.
매청화는 그렇게 침상에 누워 자신과 싸워나갔다.
그녀의 육체를 지배하려는 오칠의 손길, 몸이 기억하고 있는 오칠의 손길에 저항하기 위해 그녀는 온 힘을 다하고 있었다.
제27장. 절정미남(絶頂美男) 호색(好色)하니
“……!”
종삼은 너무도 놀라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자신의 앞에 선 사람이 진정 그가 알고 있는 그 사람인가, 하고 내심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묻기를 반복했다. 하지만 아무리 자문해보아도 이 문에서 나올 사람이라고는 그 사람밖에 없으니 다른 답이 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확인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이 누구라는 말을 듣지 않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종삼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 목소리로 물었다.
“오칠님이세요?”
딱.
“아야!”
종삼은 얻어맞은 머리를 움켜잡으며 팔짝팔짝 뛰었다.
눈물이 와락 솟구칠 만큼 아팠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하지만 종삼은 곧 뛰는 것을 멈추고 다시 한 번 물었다.
“진짜 오칠님이세요?”
“그럼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냐?”
오칠이 한 대 더 맞으라는 듯 손을 번쩍 들어올리며 말했고, 종삼은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누가 이 모습을 보고 오칠님이라 믿을 수 있냐구요!”
종삼은 정말 억울했다.
오칠의 모습이 달라져도 너무 달라져 있었다.
기루에 가야 하니 멋을 좀 내야겠다면서 오칠은 종삼에게 옷을 사오라고 시켰다. 너무 화려하지 않은, 적당하게 품위가 생겨날 듯한 백색 비단으로 지어진, 문양이 전혀 없는 옷으로 말이다.
‘품위는 무슨!’
종삼은 심부름을 가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좋게 보면 거지요, 약간 삐딱하게 보면 광인과 같은 몰골의 오칠이 무슨 품위를 따지냐는 것이 종삼의 생각이었던 것이다.
물론 무공을 익혀서인지 몸매는 매우 훌륭했다. 하지만 역시 산발한 머리와 때에 전 피부 등을 고려할 때, 오칠의 변화는 그리 대단할 것이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어쨌든, 옷 외에도 부채, 가죽 신발과 머리를 묶을 수 있는 비단 끈까지 사들고 온 종삼은, 갔다 오는 사이에 오칠이 목욕을 하고 있어서 옷 등을 방 앞에 내려놓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렇게 한 식경쯤 지났을 때였다.
한창 배우는 중에 있는 요리를 만들기 위해 온 신경을 다 쓰고 있는데, 방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 아닌가. 목욕물을 버리라는 소리였다.
종삼은 짜증이 났지만 어쩔 수 없이 방으로 갔고, 방문을 열고 나오는 사내를 보고 경악하고 말았다.
적당하게 그을린 피부, 어느 여인의 머릿결 부럽지 않을 긴 생머리가 비단 끈으로 정갈하게 묶여서 등 뒤로 늘어졌다. 검은 눈동자는 너무도 또렷해서 마치 어린아이의 눈동자를 보는 것 같았고, 턱 선은 여인들이 부러워할 만큼 섬세하고 매끄러웠다.
게다가 긴 목선을 따라 시작된, 탄탄해 보이면서도 훤칠한 육체엔 백색 비단옷이 너무도 잘 어울렸으니, 진정 그를 위해 만든 옷이 아닌가 하는 착각이 일 정도였다. 종삼은 그저 백색 비단으로 만든 아무 옷이나 사왔을 뿐인데도 말이다.
미남자.
너무도 아름다운 외모에, 어느 사내건 부러워할 수밖에 없는 육체를 가진 완벽한 미남자였다.
그리고 그런 미남자가 오칠이라니!
얼마 전까지만 해도 거지처럼 더럽고, 광인처럼 산발한 머리를 한 그 오칠이라니!
목욕 한 번 하고, 옷 좀 갈아입었다고 해서 이리 사람이 달라 보이는 것이 말이 되는 일이란 말인가?
종삼이 눈앞의 사람이 정말 오칠인지 의심하고 두 번이나 물은 것도, 게다가 아직까지도 완전히 의심의 시선을 거두지 못하는 것도 충분히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도대체 왜 지금까지 거지 몰골로 있었던 거예요? 이리 잘났으면서 왜 그런 거냐구요?”
종삼은 왠지 화가 났다.
이제 십여 세에 불과한 나이지만 종삼도 남자였고, 한창 감수성이 예민할 나이이기 때문에 더욱 외모가 신경 쓰이는데, 오칠이 이리 잘생겼었다는 사실에 질투심이 생긴 것이다.
더구나 오칠은 엄청난 무공의 고수이지 않은가.
오칠은 괴팍한 성격에, 무공만 강한 사내다, 라고 판단했던 것이 착각이었다고 생각하니 종삼은 더욱 기분이 좋지 않았다. 한데, 그런 종삼의 심정도 모르고 오칠은 더욱 울화통 터지는 말을 했다.
“귀찮아서.”
“뭐가요?”
“여자들이 너무 달라붙잖아.”
“…….”
종삼의 솔직한 마음 같아서는 ‘그래! 너 잘났다!’라고 소리치며 주먹을 날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래봤자 자신만 얻어맞을 것이 뻔하기에 꾹 참았다. 그러나 배알이 뒤틀려서 한마디 더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자 좀 달라붙으면 어때요? 사내가 여자한테 인기가 있으면 좋은 거잖아요.”
“그렇긴 하지. 근데 여자만 달라붙는 게 아니거든.”
“…….”
종삼은 잠시 무슨 소리인가 하여 오칠을 빤히 쳐다보았다.
하지만 오칠의 얼굴을 보면 볼수록 기분만 나빠져서 얼른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왠지 가슴에서 묘한 기분이 들기도 해서 더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아!”
종삼은 손뼉을 치며 탄성을 질렀다.
처음엔 오칠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는데, 이제는 무슨 말인지 알게 된 것이다.
‘그럴 만도 하지.’
오칠의 얼굴은 진정 아름다웠다.
지금도 그런데 더 어릴 때는 오죽했을까.
종삼은 그와 같이 고아들 중에서 얼굴이 반반한 아이들은 이상한 쪽으로 관심이 있는 부호들이나 고관들에게 팔려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 오칠의 말이 충분히 이해가 되었던 것이다.
“오칠님처럼 얼굴이 예쁘다고 해서 꼭 좋은 것만은 아니군요.”
종삼은 안됐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자신도 저렇게 잘생겼으면 하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아름다움을 향한 동경과 욕망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누구나 똑같은 것이니까 말이다.
“어린놈이 노인네처럼 다 안다는 듯 말하지 마.”
오칠은 종삼의 머리를 툭 치며 미소를 지었다.
“나 간다.”
오칠은 괜히 소란 일으키지 말라는 종삼의 잔소리를 뒤로하고 주점을 나왔다.
그리고 부채를 펼쳐들고서 얼굴을 가린 뒤, 정말 오랜만에 무한의 번화가를 향해 나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