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계 8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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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2,583회 작성일소설 읽기 : 파계 83화
파계 4권 - 8화
“오칠님을 뵙습니다.”
형제 중 둘째인 경중광은 사람들 사이를 지나 멀뚱히 서 있는 오칠에게 다가가 깊이 머리를 숙였다.
“무슨 일이야?”
“오칠님께 서신을 전해드리러 왔습니다.”
경중광은 품에서 꺼낸 서찰을 공손하게 내밀었고, 오칠은 서신을 받자마자 펼쳐서 쭉 읽어 내렸다.
서신의 내용은 천목보를 비롯해 스스로 머리를 숙이고 들어온 열락문, 철근문, 그리고 왕공단 등이 뭉치면서 하나의 무리를 이룬 사두문을 하부 문파로 정하고, 경가장에 무적 정의파의 이름을 내건다는 것과 며칠 내로 오칠을 배알하기 위해 광명우사 화웅섭을 비롯해 배화교 일곱 가문의 수장들이 무한으로 올 것이라는 등등의 것들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오칠이 그의 존재감을 무한 전체에 드러내기 위해 취해야 할 행동 등에 대한 조언이 첨부되어 있었다.
‘한마디로 무한을 싸돌아다니라는 말이군.’
오칠은 약간 귀찮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목운교를 만나기 위해 해야만 하는 일이라면 이 정도 귀찮음 정도는 참을 수 있다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화르르.
오칠의 손에 있던 서찰이 갑자기 불타올랐다. 삼매진화로 불태워버린 것이다.
그리고 오칠은 사람들의 놀란 시선엔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경중광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잘 알았다고 경 보주에게 전해.”
“그럼 소인은 물러가겠습니다.”
경중광은 공손하기 그지없는 인사를 하고는 올 때와 같은 걸음으로 주점을 떠났다.
‘그냥 백천맹에 몰래 들어가 만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목운교를 만나는 것에만 의의를 둔다면 오히려 그게 더 쉬울 것이다.
하지만 그녀와 오칠의 사이는 그렇게 편하게 대할 사이가 아니었다. 최종 결과가 어떻게 되었든지, 결국 두 사람은 한 번씩 상대 가문을 풍비박살 낸 원수지간이나 마찬가지니까.
“……?”
오칠은 문득 자신을 향해 집중된 시선을 느끼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조금 전 경중광과의 대면이나, 오칠이 보여준 삼매진화, 그리고 경 보주를 아랫사람처럼 말하던 모든 것을 보고 들은 사람들이 오칠에 관한 소문이 진실이었음을, 그리고 그들의 눈앞에 선 이 젊은 사내가 얼마나 대단한 인물인지를 새삼 깨닫고 경악하며 오칠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밥 먹기는 글렀군.’
오칠은 손님들의 놀란 시선을 뒤로하고 다시 그의 방으로 갔다.
그리고 경 보주의 조언을 실천하기 위해 다시 몸과 얼굴을 말끔하게 씻고, 백색 비단의까지 차려입고서 방을 나섰다.
“아!”
“아!”
여기저기에서 놀란 탄성이 들려왔다.
완벽하게 달라진, 그래서 아름답기 그지없는 미남자로 변한 오칠을 보고 여인들이 지른 탄성이었다.
‘놀라기는.’
아무리 잘난 이도 꾸미지 않고는 그 자신의 가치를 드러내기가 힘이 드는 법이다.
진흙 속의 진주도 빛을 받을 수 있게 밖으로 노출되어야 광채를 뿜을 수 있으니까 말이다.
여하튼, 오칠은 몽롱한 표정을 짓는 여인들에게 환한 웃음까지 지어 보이며, 완전히 정신을 잃을 정도로 혼미하게 만들어주고는 무한의 중심가를 향해 움직였다.
이제 오칠은 목운교를 만나기 위한, 가만히 생각하면 참으로 소박하기 그지없는 목적을 위해 무한을 뒤흔들 본격적인 행보를 내딛는 것이었다.
* * *
“오칠님을 뵙습니다!”
“무고하십니까요, 오칠님!”
“오칠님을 뵙게 되어 참으로 영광입니다!”
“한번 저희 객잔에 왕림해주십시오. 최고로 모시겠습니다!”
주점을 나와 허름한 집들을 벗어나자마자 오칠은 별의별 인사를 다 받기 시작했다.
우선 사두문 소속이라 짐작되는 하오배들, 철근문의 무인들이라 생각되는 덩치 좋은 사내들, 게다가 곳곳에 객잔 주인들과 상점 주인들까지 뛰어나와 왕이라도 행차한 것처럼 오칠을 반겼다.
더구나 오칠을 본 여인들이라면 누구나 황홀함에 물든 표정으로 눈인사를 보내고 있으니, 길을 걸으면서 오칠에게 인사를 하지 않는 사람은 눈이 침침한 노인들이나, 아직 말도 배우지 못한 아이들뿐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한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사람들의 인사를 받아야 하는 난감한 상황을 맞이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 그런 상황은 둘째 치고, 오칠의 머릿속에는 하나의 의문이 계속해서 맴돌고 있었다.
‘이 사람들이 내 얼굴을 어떻게 알지?’
몇몇 하오배들, 몇몇 철근문 무사들은 알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객잔 주인들과 상점 주인들, 혹은 누군지도 모를 중년인들까지 잘 알고 있다는 듯 친근하게 인사를 하고 있으니, 그런 의문이 드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그 의문은 오칠이 중심가에 나왔다는 말을 듣고 십여 명의 수하들을 대동하고 찾아온 사두문의 둘째 구장질과 셋째 양만창을 통해 해소될 수 있었다.
“경가장에서 주군의 초상화를 죄다 깔았습니다.”
“뭐?”
오칠은 뭔 소리야? 하는 얼굴로 되물었다.
“주군이 천목보의 새로운 주인이라는 것을 모두가 알게 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동북구, 동남구뿐만이 아니라 검룡천화장의 구역인 서북구, 서남구에도 부분적으로 배포되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천목보의 영향권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은 주군의 얼굴을 알고 있다는 말이죠.”
상권에 관해서라면 무한에서 힘이 뻗치지 않는 곳이 없는 천목보였으니, 한마디로 오칠을 모르는 사람은 무한에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는 말이었다.
“…….”
오칠은 멍해졌다.
경 보주의 이 파격적인 방법이, 오칠과 무적 정의파를 단시일 내에 얼마나 크게 홍보할 수 있는지는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무슨 현상 수배범을 찾는 것도 아니고, 초상화를 배포하다니.
“하하하!”
결국 오칠은 웃고 말았다.
경 보주는 그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대단한 인물이었다. 또한 꽤나 괴상한 인물임을 인정해야 했다. 그 냉철하고 고지식함이, 그리고 그 안에 감추고 있는 열정이 묘하게 뒤엉켜 오칠의 생각을 뛰어넘고 있는 것이다.
‘무적 정의파 개파식에서 비무대회를 열겠다고 한 것은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일이었군.’
경 보주의 서찰에 쓰여 있던 내용 중에는 개파식과 그날 하게 될 여러 일정이 있었고, 그중에 가장 큰 행사는 바로 최후에 오칠과 싸울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는 비무대회였다.
물론 오칠과의 싸움이 사람들을 끌어 모으는 것이 아니라, 그에 따른 여러 상금이 사람을 끌어 모으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날 사람들은 천목보를 패배시켰다는 무적 정의파의 장문인이 얼마나 대단한 인물인지를 두 눈으로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알았다. 이제 가봐.”
“저희가 모시겠습니다.”
석 달 전과는 확연히 달라진, 이전의 껄렁껄렁한 하오배가 아니라 뭔가 무인답게 변해버린 구장질과 양만창은 절도 있는 동작으로 머리를 숙였다.
그런 두 사람을 보며 오칠은 웃었다.
“됐어. 가서 왕공단이나 냉대손에게도 오지 말라고 그래. 내가 나왔다는 말을 들으면 뛰쳐나올 것이 분명하니까.”
“주군을 모시는 것이야 저희들의 당연한 의무입니다.”
“야~ 이제 제법 그럴듯한 말도 하는구나!”
오칠은 대견스럽다는 듯 두 사람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뒤에 선 수하들과 주변에서 조심스럽게 시선을 주고 있던 사람들은 이 광경에 입을 떡하니 벌렸다. 어찌 보면 십대의 미소년처럼 볼 수도 있는 오칠이 머리 반 토막 정도는 더 큰 험악한 인상의 중년 사내들의 머리를 어린애처럼 쓰다듬고 있으니, 그 상하 관계를 떠나서 참으로 괴상한 광경이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하지만 당사자들인 구장질과 양만창은 오히려 스스로가 대견스럽다는 듯 머리를 더욱 깊이 숙였다.
이제 그들과 오칠 사이엔 나이나 성별 등등의 것들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 그저 주군과 수하의 관계, 혹은 스승과 제자의 관계라 할 수 있는 것만 존재할 뿐이었다.
“다음에 보자.”
“살펴 가십시오!”
널찍한 어깨를 깊이 숙이며 인사하는 구장질 등을 뒤로하고 오칠은 다시 중심가를 걸어갔다.
그리고 여지없이 사람들의 인사를 받아가며 그동안 제대로 돌아다녀보지 않은 동북구를 두 눈에 담았다.
‘가끔 이렇게 돌아다니는 것도 나쁘지 않네.’
귀찮다고 너무 주점에만 붙어 있었더니, 사람들의 사는 모습이나 일상적인 경관들조차 눈을 즐겁게 하고 있었다.
하지만 곧 하나의 문제가 오칠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배고파.”
많이 돌아다니다 보니 인사하는 사람들도 적어지고, 슬슬 돌아갈까 하는 시점에서 허기가 급속도로 몰려왔다.
그리고 그 순간, 오칠의 눈에 띈 것은 많고 많은 음식점이나 객잔 등이 아닌, 자판이 늘어진 곳 구석에서 팔고 있는 당과였다.
“맛있겠다.”
오칠은 망설임 없이 당과를 파는 곳을 향해 빠르게 다가갔다.
“두 개 주시오.”
“예, 예. 나리!”
당과를 파는 중년인은 조금 전 오칠이 어떤 사람들의 인사를 받았는지 모두 보았다.
그리고 오칠이 정확히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그 외모와 옷차림 등으로 범상치 않은 신분의 사람임도 눈치 챘다. 한마디로 괜히 성질 건드려서 좋을 것 없는 사람으로 결론지은 것이다. 그래서 오칠이 당과를 받아들고 내민 돈도 받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오칠은 장사는 돈이 오가야지, 하는 말로 더 이상 거절하지 말라 하고는 자판 옆 투박하게 놓여 있는 네모난 돌 판에 앉았다.
쭙쭙.
“역시 당과는 빨아먹는 맛이지. 그렇지 않소?”
자판 바로 옆에서 당과를 먹는 것이 매우 부담스러운 중년인은 맞습니다요, 하는 말을 연신 내뱉으며 오칠의 비위를 맞추려 노력했다.
오칠은 그런 중년인의 내심을 파악하고는 다시 말을 걸지 않았다. 내켜하지 않는 사람과 대화를 하는 것만큼 재미없는 일은 없으니까.
오칠은 조용히 먹기만 했다. 그가 그곳에 있는지조차 사람들이 잊을 때까지 침묵하며 당과만 빨아먹었다.
‘이걸 외로움이라고 하는 건가?’
오칠은 문득 가슴이 공허해졌다.
그냥 편하게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존재가 없다는 것, 그냥 아무 의미도 없이 당과가 맛있다느니, 하는 대화도 나눌 사람이 없다는 건 정말 기분이 뭐 같은 일이었다.
‘그러고 보면 종삼이 그놈이 기특한 놈이었군.’
무한에 와서 처음 대화를 나눈 것도 종삼이었고, 이후로 스스럼없이 그에게 투덜거리고 장난을 치던 사람도 종삼이 유일했다.
물론 경 보주나 매 자매 등과도 대화를 하긴 했지만, 종삼만큼 편한 사람은 없었다. 어쩌면 영악하기는 해도 종삼이 어리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달랐던 걸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면 주점을 찾아와 음식을 먹고, 일자리를 부탁하던 아이들도 그렇지 않았던가. 그리고 지금 주점에서 점소이를 하는 아이들도 다른 사람들에 비해 오칠을 주인 그 이하로도, 이상으로도 보지 않았다.
아이들은 그저 눈에 보이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
그런 생각이 들었기 때문인지, 오칠의 눈에 한 아이가 들어왔다.
아니, 대로 곳곳에 있었던 아이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사람들을 구경하고, 자판을 구경하고, 괜히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노는 아이들도 보였다.
“꼬마야.”
오칠은 가장 가까이 있는 예닐곱 살 정도의 아이를 불렀다.
손에 쥔 나무막대기로 바닥을 박박 긁어대고 있던 아이는 오칠의 부름에 반응하여 시선을 주었다.
“뭘 하는 거냐?”
“바닥 긁어요.”
아이는 와~ 얼굴이 무지 예쁘네요! 하는 순수하기 그지없는 감탄과 함께 대답했다.
“왜?”
“그냥요.”
그냥.
그랬다. 아이들의 행동 중 절반은 목적이 없기 마련인 것이다. 점점 감정이라는 것이 생기기 시작하면서 오칠도 그냥, 그저 재미로, 등등의 이유를 들며 행동하지 않았던가.
“당과 먹고 싶냐?”
처음부터 아이의 시선은 알맹이 하나만 남은 당과가 들려진 오칠의 손을 향해 있었고, 그래서 오칠이 물어본 것인데 아이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리 와서 먹어라.”
“돈 없어요.”
“내가 사줄게.”
오칠은 어린아이라고 해서 뭘 사주고, 어쩌고 하는 등의 아량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다.
과거 어릴 때도 그랬고, 지금도 여전히 가진 걸 베풀어 세상을 좀 더 살기 좋게 만들자, 하는 생각을 가지지도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냥 뭔가 같이 할 수 있는 존재가 필요했다. 나란히 앉아서 당과를 먹고, 이게 얼마나 맛있는 것인지, 하는 가벼운 이야기를 나눌 존재가 필요했다.
“저기… 형들도 있는데요?”
아이의 손이 저 뒤쪽에서 이리저리 뒤엉켜 노는 몇몇 아이들을 가리켰다.
“쟤들도 오라고 그래.”
“정말요?”
“응.”
아이는 얼굴이 환해져서는 제 형들이 있다는 곳으로 뛰어갔다.
그리고 곧 여섯 명의 아이들이 양손에 당과를 쥐고는 오칠의 좌우로 나란히 앉아서 당과를 빨아먹었다.
“맛있지?”
오칠이 묻자, 아이들은 정말 맛있다고 크게 소리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난 너희 나이 때 이걸 제대로 못 먹었어.”
오칠은 과거를 회상하며 말했다.
가문이 멸족당하지 않았을 때는 이런 길거리 음식을 먹을 수 없었고, 늙은이를 만나기 전까지 허기에 지쳐 골목을 뒹굴고 있었을 때는 능력이 없어 먹을 수 없었다. 또 늙은이와 다닐 때에는 일을 하느라 바쁘고, 좀 더 맛있는 음식을 먹기 위해 노력하느라 먹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