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계 8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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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2,754회 작성일소설 읽기 : 파계 80화
파계 4권 - 5화
“잡소리 그만 해.”
십마각은 돈에 이어, 서찰까지 받아들어 품에 넣었다.
그리고는 탁자에 있는 술병을 들어 그 안의 술을 단번에 입 안으로 쏟아 부었다.
“돈은 그곳에서 기다렸다가 일이 끝나면 받으시오.”
“그러지.”
십마각은 몇몇 사람들이 술을 마시고 있는 탁자 사이를 소리 없이 지나가 주점을 나왔다.
“덥군.”
늘 더웠다.
이 빌어먹을 감숙성은 늘 따가운 태양이 가득한 곳이니까.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 이곳을 떠나 중원으로 돌아가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것이 그의 현실이었다.
‘이곳에서 계속 살아야 한다면 뭔가 더 그럴듯한 일을 찾아야 할지도 모르지.’
오 년 동안 그런 쪽으로는 생각도 안 했다.
언젠가는 중원으로 돌아갈 수도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오 년여가 지난 지금은 점점 더 그럴 가능성이 희박해져가고 있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뭔가 대책을 간구해야 할 필요성이 있는 것이다. 아니면 중원에 숨겨둔 그의 재산을 이쪽으로 가져오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이번 일이 끝나면 진지하게 고민해봐야지.’
십마각은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며 태양을 피하기 위해 건물의 구석지고 흙 지붕에 가려진 곳만을 골라 무위 외곽으로 나섰다.
그리고 제법 견고한 분위기를 풍기는 성벽을, 경공술을 발휘해 타고 넘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메마른 대지에 내려섰다.
“갔다 오면 우선 회포나 풀어야겠군.”
무위에서 유일한 홍등가를 떠올리며 십마각은 품에 넣어두었던 돈주머니를 빼들어 땅에 묻었다.
도적들을 만나러 가는데 돈을 가지고 있는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꺼림칙한 일이라 늘 이렇게 해왔던 것이다.
우두둑.
십마각은 어깨를 풀고, 팔을 풀고, 다리를 풀었다. 그리고 각반을 단단히 묶고서 발목을 시작으로 발가락까지 부드럽게 이완시켰다.
“좋아.”
십마각은 저 끝도 없을 것 같은 이글이글 타오르는 지평선을 바라보며 바닥을 콩콩 뛰어오르다가 앞으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탁. 탁. 탁. 탁. 탁.
가볍고 경쾌하게 뛰어가던 걸음은 곧 빠르고 다급한 걸음으로 바뀌었다.
타타타타타타.
눈에 보이지도 않을 발놀림과 그에 호응하는 팔놀림이 십마각의 전신을 뿌연 연기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그는 그의 호칭 그대로 열 마리 말의 발로 뛰는 것처럼 엄청난 속도로 메마른 평야를 질주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한 시진 만에 무위와 난주 사이에 위치하고 있는 도시, 고랑(古浪)을 옆으로 지나쳐갔다.
타타타타타타타타.
“후― 후― 후―!”
십마각의 전신은 땀으로 흠뻑 젖어 들어가고, 입에서는 일정하면서도 거친 숨이 뱉어졌다.
그러나 그는 지친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다만 어떤 의지가 깃들어 있는 표정이었다.
경공 수련.
그는 지금 단순히 도적들의 정보를 전달해주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이 익힌 경공을 보다 극대화하고, 순간순간 보안할 점을 찾아내 갈고닦는 중이었다.
그것이 그가 중원에서 감숙의 메마른 대지로 온 뒤, 이런 일을 하며 돈을 버는 이유였다. 물론 그가 익히고 펼칠 수 있는 대단한 경공 수준에 비해 전혀 뛰어나지 않는 무공 실력을 가지고 있기에 마땅히 다른 일을 찾을 수도 없지만 말이다.
어쨌든, 십마각은 온 힘을 다해 경공을 펼치며 달려갔고, 태양이 지고 초승달이 하늘에 걸릴 때쯤 산봉우리들이 곳곳에 솟구쳐 있는 난주의 북쪽 지역에 당도했다.
산봉우리.
말만 산봉우리지, 거의 민둥산의 툭 튀어나온 혹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황폐하고 초라하기 그지없는 봉우리들이었다.
하지만 십마각은 경관을 구경하고자 이곳을 찾은 것이 아니었다. 저 봉우리 사이 어느 곳에 무리를 짓고 있는 도적들, 정확히는 혈풍단(血風團)이라고 하는 마적단에게 서찰을 전하기 위해서일 뿐이다.
휘휙! 휘휘휙―
십마각의 신형은 나무가 드물어 더욱 오르기가 쉽지 않은 봉우리의 푸석한 땅을 디디며 위로 쭉쭉 솟구쳐 올랐다.
타탁.
“……?”
아래의 전경을 일시에 내려다볼 수 있는 봉우리 꼭대기에 올라선 십마각은, 이마에서 흘러내려 눈을 따끔거리게 하고 있는 땀방울을 닦아내며 고개를 갸웃했다.
저 아래 봉우리들 사이엔 백여 명의 사람과 그들이 탈 수 있는 말들을 넉넉하게 담을 수 있는 분지 비슷한 공간이 있고, 천막 등이 쳐져 있는 혈풍단의 근거지가 만들어져 있었다.
그런데 분명 십마각의 눈에 보여야 할 것들이 보이지 않고, 들려와야 할 것들이 들리지 않고 있었다.
곳곳에 피어져 있는 횃불과 술에 취한 마적들이 토해내는 아우성들.
그런 것들은 흐릿한 달빛에 의지한 마적단들이 가지고 있는 가장 기본적인 요건이다. 그런데 그것들이 없는 것이다.
마치 모두가 깊은 잠에 빠져든 것처럼 말들의 투레질 소리 외에는 아무것도 들려오지 않고 너무나 고요했다. 아니, 너무 조용해서 사람은 모두 죽어버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도 들었다.
‘이상하네.’
응당 보여야 하고, 들려야 할 것들이 없다면 불안한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십마각은 그런 추상적인 불안감을 근거로 일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혹시 정말 자고 있는지도 모르는 일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불침번들은?’
아무리 규칙이고 뭐고 없이 막무가내 생활을 하는 마적단들이라고는 하지만, 최소한의 생각 정도는 가지고 있는 자들이었다.
아니, 생각이 없는 놈들이 지천이라 해도 세 명의 두목은 나름대로 머리를 굴릴 줄 아는 자들이었다. 그러니 한두 명 정도의 불침번들은 십마각의 눈에 보여야 하는 것이 정상이었다.
‘어두워서인가?’
십마각은 하늘을 보았다.
초승달은 크게 의지할 만큼의 빛을 뿌리지 못하는 놈이었고, 십마각 자신도 그리 눈이 밝은 사람이 아니었다. 경공은 뛰어난데, 기타적인 능력이 부족하여 밤에도 낮처럼 볼 수 있다는 절정고수의 눈을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이다.
그러니 저 아래 어둠에 잠식된 혈풍단의 근거지에 누군가 가만히 앉아서 매복하듯 불침번을 서고 있다면 알아채지 못할 수도 있었다.
‘어쩌지?’
십마각은 땀에 달라붙어 분을 칠한 것처럼 얼굴을 뒤덮고 있는 먼지를 신경질적으로 털어냈다.
얼른 서찰을 전하고서 반나절을 내리 달려와 지쳐버린 몸을 쉬게 하고 싶었다. 저기 어딘가에 있을 술이라도 마시면서 말라버린 목 줄기에 시원한 수분을 공급하고 싶었다.
‘뭔가 문제라도 있다면 도망치면 되지.’
혹시 감숙성 치안 부대의 공격을 받았고, 그래서 저기에 병사들이 매복을 하고 있다면 도망치기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또는 혈풍단을 몰아내고 새로운 마적단으로서 살아가고자 하는 신흥 도적들의 소행이라 해도, 그리고 그들이 저기 숨어서 혈풍단의 또 다른 일행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해도 도망치는 그의 걸음을 따라잡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십마각은 내려가기로 했다. 여기서 아무리 생각해보았자 머리만 복잡해지고 짜증만 솟구치지, 해답을 얻을 수는 없으니까 말이다.
휘휙.
십마각은 어슴푸레한 달빛에 의지하여 신중하면서도 재빠르게 봉우리를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신형은 순식간에 분지의 평평한 바닥에 내려섰다.
‘응?’
뭔가 익숙하면서도 이질적인 냄새가 메마른 그의 코끝을 간질였다.
그리고 채 다섯 장 거리도 되지 않는 곳에 나뒹굴고 있는 시체를 보며 그 냄새가 혈향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도망쳐야 한다!’
무슨 일일까, 하는 생각으로 머뭇거릴 이유가 없었다.
십마각은 냄새의 정체와 아무렇게나 나뒹굴고 있는 시체를 발견한 순간, 몸을 날려 그가 내려왔던 봉우리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아니, 달려가려 했다.
우뚝.
“……!”
하지만 십마각은 그럴 수가 없었다.
조금 전까지 그가 달빛을 받고 서 있던 봉우리 꼭대기에 어떤 사내가 자리를 잡고서 그가 움직일 방향을 차단하고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그 사내의 손에는 목이 잘린 머리가 머리채를 잡힌 채 좌우로 흔들리고 있었는데, 그 얼굴은 분명 혈풍단의 세 두목 중에서도 대형이라 불리는 자의 얼굴이었다.
‘빌어먹을!’
십마각은 내심 욕을 씹어뱉으며 반대 방향으로 움직였다.
시체가 나뒹굴고 있던 곳이었고, 그 시체를 뛰어넘으며 천막 사이를 바람처럼 달려갔다. 그리고 지천으로 깔린 시체들과 빗물처럼 바닥을 적시고 있는 피의 줄기를 발견하며, 백 명이 넘는 혈풍단 모두가 이곳에서 시체가 되어 나뒹굴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됐다.
‘도대체 어떤 놈들이야?’
당연히 드는 의문이었다.
천막들은 멀쩡한데 시체가 나뒹굴고 있다는 것은 군대의 소행은 아니라는 증거였다. 그렇다고 신흥 도적들의 소행이라기에는 너무 잔혹했다. 그들은 어느 정도 승패가 갈리면 항복한 상대를 병합하여 규모를 크게 하곤 하니까 말이다.
‘이건 마치… 사람 죽이는 것에 아무런 의미도 두지 않는 놈들의 소행 같잖아.’
중원 사파인들도 특별한 증오심이 있지 않은 이상은 이 정도는 아니었다.
그들도 최소한의 아량은 가지고 있고, 자신의 목숨이 위협받지 않은 이상은 이처럼 사람을 벌레처럼 죽이지도 않았다.
“……!”
갑자기 십마각의 생각이 멈추고, 바람처럼 달리던 그의 다리도 정지했다.
그의 시선은 그가 빠져나가려던, 혈풍단이 분지의 입구로 삼고 있던 길목을 막고 선 어떤 존재를 향하고 있었다.
달빛이 제대로 비추지 않는 곳이라 정확한 모습을 파악할 수는 없었지만, 작은 바람에 찰랑이는 긴 머리카락이나 너무도 선명한 풍만한 몸매의 굴곡이 상대가 여인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하지만 상대가 여자라고 해서 마음이 느긋해지지는 않았다. 반대쪽 봉우리를 막고 선 자에게서 풍겨오던 불길하고도 위험한 기운이 여인에게서도 풍겨오고 있었으니까.
“진짜 빠르네.”
뒷걸음치던 십마각의 심장은 여인의 목소리를 들으며 크게 요동했다.
목소리를 들은 것뿐인데도 흥분이 되다니.
십마각은 자신의 이 기이하고도 당황스러운 신체 반응이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얼굴은 보이지 않아도 앞에 있는 이는 분명 그가 지금껏 보아온 그 어떤 여인보다도 매혹적인 여인이라는 것을.
하지만 그렇다고 뒷걸음치는 걸음을 멈추지도, 재빨리 몸을 돌려 또 다른 길을 향해 도망치는 것을 멈추지도 않았다.
“소용없어.”
뒤에서 여인의 매혹적인 음성이 들려왔지만, 십마각은 개의치 않고 달렸다.
그는 중원제일이라 자부할 수 있는 경공을 지녔고, 그런 그를 따라잡을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믿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그의 걸음은 그런 자부심에도 불구하고, 금세 우뚝 정지하고 말았다.
그가 향하려고 했던 저 멀리 봉우리 꼭대기에 사람이 서 있었던 것이다.
“……!”
십마각은 왼쪽 방향에 솟아오른 봉우리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곳에도 사람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하늘로부터 은은하게 비춰지는 달빛을 받으며 그 사람은 왠지 사악하다고 느껴지는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사방이 막혔다.
그렇다면 그들 사이로 도망쳐야 할까?
그럴 수 없을 것이다. 십마각은 그들 사이로는 빠져나갈 수 없다는 걸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그렇다면 어찌해야 할까?
그러나 그런 심각한 고민은 어느 순간 그의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갑자기 뭔가 엄청나게 불길한 기운이 그의 전신을 따갑게 자극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불길한 기운은 그저 추상적인 느낌이 아니라, 여인이 막고 있던 곳에서 천천히 걸어오고 있는 중년의 사내에게서 전해져 오는 무형의 살기라는 것을 깨닫고 십마각은 두려움에 떨기 시작했다.
왜?
그저 살기가 전해져온다고 해서 두려움을 느낀단 말인가.
아니었다. 이 기이한 살기는 십마각을 중원에서 도망치게 만든 어떤 존재가 풍기는 그러한 살기이기 때문이었다.
“견봉생, 도대체 이런 척박한 땅에서 뭘 하고 있는 건가?”
중년의 사내는 십마각을 견봉생이라 말하고 있었다.
만리신투(萬里神偸) 견봉생.
과거 소림사에 침투하여 소란을 일으켰던 그가 바로 십마각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견봉생을 두려움 속으로 밀어 넣은 사람은 혈천신교의 교주 위지무성이었다.
“지금은 복면을 쓰고 있지 않지만, 나를 알아보겠지?”
견봉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몸은 두려움에 가득 차 석상처럼 굳어 있었지만, 위지무성의 물음에 반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책은 어디 있지?”
위지무성이 물었고, 견봉생은 위지무성에게서 도망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조금 전까지 그를 움직이지도 못하게 했던 두려움이 도리어 용기가 되어 그를 위지무성의 반대쪽으로 뛰게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또 도망가는군.”
위지무성은 작게 중얼거렸고, 그의 뒤에 있던 농염한 몸매의 여인은 그의 옆을 지나쳐 날아올랐다.
그리고 각기 세 방향의 봉우리 꼭대기에 자리 잡고 있던 위지무성의 세 사제들도 도망치는 견봉생을 향해 뛰어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