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계 6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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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계 3권 - 19화
오칠은 매 문주의 앞에 멈춰 섰다.
“벌이라… 뭐, 이 많은 사람들에게 벌을 내리기도 귀찮으니, 그냥 매 문주의 목숨을 받는 것으로 해결하지.”
엎드린 매 문주의 어깨가 딱딱하게 굳어졌다.
하지만 곧 고개를 들어 당당한 눈빛으로 오칠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미천한 소첩의 한 목숨으로 큰 죄를 용서해주시는 오칠님의 크신 아량에 감사드립니다!”
매 문주는 손목에 차고 있던 연검을 풀었다.
그리고 공력을 넣어 연검을 단단하게 곤두세우더니, 지체치 않고 자신의 목을 그었다. 아니, 그으려고 했다.
팅―
오칠의 발끝에 차인 연검이 하늘로 솟구치고, 그 충격으로 아귀가 찢어진 매 문주는 고통으로 인해 살짝 찡그려진 눈으로 오칠을 바라보았다.
왜 자신을 막았는지 의문이 묻어난 눈동자였다.
“생각해보니, 내 목숨을 노렸는데 너무 쉽게 해결을 보는 것 같잖아.”
매 문주의 눈동자엔 그러면 그렇지, 하는 빛이 그려졌다.
하지만 곧 이어지는 오칠의 말에 그녀의 얼굴 표정이 놀라움으로 바뀌었다.
“계속 생각해보고 마땅한 벌을 떠올리게 되면 그때 다시 이야기하기로 하지. 그러니 그때까지 벌을 내리는 것은 미뤄두겠어.”
말을 돌렸을 뿐이지, 죽이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사실, 매 문주가 죽는다 해도 경 보주의 경우처럼 오칠에겐 전혀 상관이 없었다. 하지만 오칠은 살인귀가 아니었다. 피가 보고 싶어 환장한 광인이나 마인이 아니었다.
물론 과거 아주 잠깐 동안 그런 적도 있었고, 마음만 먹으면 누구든 죽일 수 있지만, 어쨌든 지금의 오칠에겐 별 의미 없이 누군가를 죽이는 취미 같은 건 없었다.
더구나 천상루의 일은 약간의 궁금증과 반 장난으로 생겨난 것이었다. 자신이 고의로 시비를 걸어 일어난 싸움이었는데, 그 일로 누군가를 죽을 필요는 없는 것이다.
“이제 모두 돌아가.”
귀찮다는 듯 오칠은 손을 내저었다.
매 문주는 몸을 일으켰다. 뒤에 있는 백여 명의 여인들도 조심스럽게 일어나 매 문주가 내릴 명을 기다렸다.
“언제고 오칠님께서 하명하실 것을 대비하여 제 두 여식을 남겨두겠습니다.”
매 문주가 고갯짓을 하자 뒤에 있던 매적화, 매청화 자매가 앞으로 한 걸음 나섰다.
그녀들의 얼굴엔 기대감과 기쁨이 담겨 있었다. 그동안 모친의 엄명으로 오칠을 찾아가고 싶었던 것을 참고 있었는데, 이제는 오칠을 보필하라는 명을 받게 되었으니, 진정 기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들의 속내도 모르고 오칠은 고개를 저었다.
“필요 없어.”
순간, 앞으로 나섰던 매 자매의 얼굴에 당혹스러움이 떠올랐다.
안타까움과 실망, 그리고 슬픔이 담긴 복잡한 표정이었다.
“많이 부족하지만 오칠님께서 요긴하게 쓰실 수 있는 아이들입니다. 부디 거절하지 말아주십시오.”
매 문주의 말에 좌우에 선 매 자매가 뭔가 간절한 눈빛으로 오칠을 바라보았다.
자신들의 행동이 자존심을 내버리는 것이라 해도 상관없었다. 그녀들은 그만큼 오칠을 마음에 깊이 담았고, 자신의 감정에 솔직한 것이니까.
‘흠, 요긴하게 쓸 일이라…….’
진정 오칠에겐 매 자매가 필요 없었다.
여자에게 굶주려 있지도 않았고, 그러고 싶은 생각도 없을 뿐만 아니라, 그녀들의 시중은 더더욱 필요 없었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번 마성으로 가는 길에는 매 자매가 필요할 수도 있었다.
‘그 광명우사가 여인들을 좌우에 끼고 있는 내 모습을 보면 더 마음이 떠나겠지.’
“좋아. 이번 여정 동안에만 잠시 데리고 있어 보지.”
오칠의 말에 매 자매는 기쁜 표정을 지으며 공손하게 다가와 오칠의 좌우에 시립했다.
“이제 가지.”
오칠은 시종 아무 말도 않고 지켜보고 있던 경 보주와 함께 좌우로 길을 여는 여인들 사이를 지나 마차가 있는 곳으로 움직였다.
“아가씨들이 저럴 필요까지 있을까요?”
오칠 등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천상루의 일 총관이 조심스레 다가와 물었다.
오칠이란 인물이 경 보주가 모실 정도로 대단한 인물이라는 것은 진정 놀라운 일이긴 했지만, 다음 대 문주로 내정된 매적화까지 시비와 다름없는 임무를 맡겨 보낸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오칠이란 사내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서야. 그리고 우리 열락문이 그로 인해 더욱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인가를 가늠해보아야겠지.”
매 문주의 눈에 보이는 오칠은 그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사내였다.
그 감추어진 힘과 배경뿐만이 아니라, 짐작할 수도 없는 과거와 감정적 변화만 따져보아도 참으로 기괴한 사내였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오칠이 결코 이곳, 무한에 안주할 인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낭중지추(囊中之錐).
오칠 자신이 조용히 있으려 해도 그 능력 때문에 저절로 그의 존재가 무림 전체로 퍼져나갈 것이다.
‘게다가…….’
두 딸들의 가슴에서 타오르고 있는 열정을 해결해야 했다.
사랑의 열병이란 감추고 누른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냥 타오르는 대로 놔두어야 결국 그 불길은 저절로 잦아들기 마련인 것이다.
그래서 매 문주는 그 불길에 부채질을 한 것이다. 딸들의 활활 타오르는 열정이 재가 되도록 말이다. 설혹 그 불길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더라도, 최소한 무시해도 될 정도로 작게 만들 수는 있을 것이다.
‘오칠이란 사내는 너희들이 감당할 수 있는 자가 아니야.’
오칠은 앞으로 무림의 중심이 될 수도 있는 사내였다.
단순히 무림인이란 것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폭풍이 될 수도 있는 만큼 그 무게는 더욱 무거워질 것이며, 곁에 있는 것만으로 힘겨운 일이 될 것이다.
또한 매 문주 자신이 그랬듯, 딸들 역시도 평온한 여인의 삶을 살 수는 없을 것이다. 그것은 혈통이란 말로 설명할 수도 있고, 혹은 전통의 얽매임이란 말로 설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자신의 과거를 떠올리고 딸들의 앞날을 예상해보면 매 문주는 마음이 씁쓸했지만, 모든 것은 결국 그렇게 흘러갈 것이고, 딸들도 결국 납득하고 인정할 날이 있을 것이다.
“배가 고프군.”
매 문주는 문득 고개를 돌려 주점을 바라보았다.
“아이야, 장사는 시작했느냐?”
주점 문 앞에 종삼이 멍하니 서 있다가, 매 문주의 말에 화들짝 놀란 얼굴이 되어서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우리 모두가 먹을 수 있게 준비를 해다오.”
종삼은 다시 고개를 끄덕이고 안으로 들어가려다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술은 맛이 형편없는 분주밖에 없는데, 드실 겁니까?”
매 문주는 미소를 지었다.
“지금 내 심정에 너무도 잘 어울리는 술이구나.”
종삼은 매 문주가 하는 말에 담겨진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매 문주가 술을 먹을 거라는 것이고, 그래서 얼른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백여 명이 먹을 수 있는 요리를 혼자서 하기 위해서는 한시도 머뭇거릴 틈이 없으니 말이다.
제31장. 복건성 무이산에 그들이 있다
진한 태양빛이 스며들어오는 커다란 창문가에 중년의 사내가 서 있었다.
그는 호리호리한 몸과 날카로운 눈빛 외에는 이렇다 할 특징적인 외모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에게선 은연중에 주변을 압도하는 기도가 풍겨져 나왔다.
위지무성.
범상치 않은 기세를 가진 사내의 이름은 위지무성이었다.
“참으로 좋은 날이구나.”
위지무성의 눈길이 창문 밖을 향했다.
창문 밖으로는 아찔한 높이의 깎아지른 절벽들이 보였고, 그 사이 사이로 밀림처럼 짙푸른 숲과 계곡이 곳곳에 형성되어, 대왕봉(大王峰)이니 옥녀봉(玉女峰)이니 하는 봉우리들을 따라 굽이굽이 높다란 산줄기가 펼쳐져 있었다.
천유봉.
웅장한 규모의 교궁(敎宮)이 세워진 곳은 그 모든 곳을 거느리듯 내려다볼 수 있을 만큼 높다란 무이산(武夷山)의 천유봉(天遊峰)이었다.
그리고 지금 위지무성이 있는 방은 그 모든 것들을 내려다볼 수 있는, 궁에서 가장 전망이 좋은 방이다. 그래서 위지무성은 이 방을 좋아했다. 세상을 인지하고, 자신의 존재를 느끼고, 어떻게 최고가 되어야 하는가, 하는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질 수 있을 정도로 머리가 크기 시작하기 전부터 이 방을 좋아했다. 그리고 당연히 이 방의 주인이 되기를 원했다.
하지만 과거의 위지무성은 이 방의 주인이 될 수 없었다. 방엔 이미 주인이 있었고, 그는 자신이 어찌할 수 없을 만큼 강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늘 이 방을 동경했다. 언제고 자신이 이 방의 주인을 능가할 수 있는 그날이 오면, 반드시 이 방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말겠다고 다짐하곤 했다.
‘서른넷이라…….’
위지무성은 자신의 나이를 떠올렸다.
적은 나이도 아니지만, 결코 많은 나이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십오 년 동안이나 이 방의 주인이 되기를 다짐해왔다는 걸 생각하니 절로 쓴웃음이 지어졌다. 자신처럼 야망이 큰 사람이 이십오 년이나 기다릴 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기적인 것이다.
“하지만 충분히 기다릴 만한 가치가 있었지.”
위지무성은 창문에서 시선을 돌려 방 안을 둘러보았다.
좌우 십 장에 이르는 널따란 공간.
중원에서도 찾기 힘든, 가지각색의 화려하고 진귀한 것들로 장식되어 있으면서 보는 것만으로 절로 위압감이 드는 전경이었다.
하지만 단순히 외적인 모습 때문에 이 방의 주인이 되기를 원한 것은 아니었다. 물론 아주 어릴 때는 단순히 방만을 원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었다. 이 방의 주인이 권력과 힘을 가질 수 있기 때문에 동경한 것이다.
위지무성의 시선이 방 안을 한 바퀴 돌아 마지막으로 향한 곳은 하나의 커다란 침상이다.
붉은 천이 드리워진 침상.
침상에는 이 방의 주인이 누워 있었다. 하지만 유명무실한 주인이었다. 주인의 육체는 곧 있으면 위지무성에게 자리를 양보해야 할 정도로 쇠약했고, 지금도 사리분간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뚜벅. 뚜벅. 뚜벅.
위지무성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걸음으로 침상을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시야를 가린 붉은 천을 걷었다.
노인.
파리할 정도로 창백한 안색에 곧 말라죽을 것처럼 피골이 상접한 몰골이었다. 팔 년 전, 주화입마로 인해 전신불수가 된 뒤, 위지무성의 은밀한 명으로 지금껏 약과 함께 독을 복용했기에 생겨난 결과였다.
“사부님은 너무 안주했습니다. 아니, 전대의 모든 교주들은 과거의 기억에 분노하면서도 두려워하기만 했습니다. 하지만 사부님, 이제는 때가 되었습니다.”
위지무성은 눈동자에 슬픈 빛을 담아 그렇게 말했다.
사부.
노인은 고아였던 위지무성을 데려다 키우고, 가르친 사부였다. 사실, 노인이 데려온 것이 아니라, 교의 장로가 재능을 알아보고 데려온 것이긴 했지만, 어쨌든 노인은 위지무성을 교의 높은 서열로 올려놓은 인물이고, 무공까지 가르친 사부였다.
그렇다면 노인의 지위는?
두말 할 것 없이 노인은 교의 주인인 교주였다. 절대적 권력과 힘을 갖춘 가장 막강한 존재. 겉으로 드러나진 않았지만, 복건성의 경제와 무력을 한 손에 쥔 존재.
팔 년 전, 교의 전신(前身)인 배화교 일 대 교주의 무공을 무리하게 익히다가 주화입마로 쓰러지기 전까지 노인은 그렇듯 대단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무 힘도 없는 늙은이에 불과했다. 그리고 이제 그 기나긴 생을 마감할 시간이었다.
위지무성은 바로 이 순간을 위해 자신이 찾아낸 일 대 교주의 무공을 변형시킨 뒤, 사부의 손에 넘어갈 수 있게 술수를 쓴 것이 아니겠는가.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슬픔과 안타까움이 담긴 말과는 달리 위지무성의 손길은 노인의 목을 움켜잡고 강하게 내리눌렀다.
우둑.
허망한 죽음이었다.
교의 절대적 존재였던 인물에게는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 죽음이었고, 더구나 제자에게 배반당하고 살해당하는 굴욕적인 죽음이었다.
하지만 방 안에는 그의 죽음을 슬퍼할 이가 없었다. 조금 전까지 슬픈 빛을 담고 있던 위지무성의 눈에서조차 더 이상 그런 감정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럼 이제 나머지 걸림돌을 처리하러 가볼까.”
그의 얼굴에 즐거운 미소가 지어졌다.
방금 전 누군가를, 더구나 사부를 죽였다는 죄책감 같은 것은 조금도 담겨 있지 않았다.
끼익.
위지무성이 다가가자 커다란 방문이 저절로 열렸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무사들이 위지무성의 기척을 느끼고 문을 연 것이다.
“상황은?”
위지무성은 무사들의 수장에게 물었다.
“내부는 완전히 제압되었습니다. 그리고 쥐는 연무장에 몰아넣었습니다.”
“그럼 그곳에 가봐야지.”
위지무성이 앞장서고, 수십의 무사들이 그 뒤를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