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계 6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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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2,482회 작성일소설 읽기 : 파계 66화
파계 3권 - 16화
“……!”
그런데 갑자기 경 보주는 오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십 장.
정확히 그 정도 거리의 숲속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마치 접근하고 있다는 걸 알리겠다는 듯한 또렷한 발소리였다.
‘내 이목을 속이고 십 장까지 접근했다고?’
경 보주는 믿기지 않았다.
그는 대단한 고수인 만큼 예민한 감각을 가지고 있었고, 그래서 최대 스무 장 이내로 접근하는 존재에 대해서까지도 그 기척을 놓친 적이 없었다.
더구나 숲 속은 성내와 달리 인적이 없어 고요할 뿐만 아니라, 그는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잔뜩 예민해져 있는 그의 감각을 피해 접근한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다.
게다가 갑자기 지금처럼 분명한 기척이 느껴진다는 것은, 상대가 고의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았다면 그 이상으로 가까이 접근할 수도 있었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한참 찾았네.”
경 보주를 당혹시킨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오칠이었다.
“이봐, 장소를 정할 때는 서로 간에 공감대가 형성되는 곳을 찾아야지. 당신이 아는 다른 사람은 북쪽 산 정자로 오라는 말만 하면 잘 찾는지 모르지만, 난 전혀 아니라고.”
오칠은 불만을 터트리며 정자 안으로 들어섰다.
“그래도 결국 찾아오지 않았소.”
경 보주는 한 달 전에 보았을 때와는 달리 헝클어진 머리와 지저분한 옷차림을 하고 있는 오칠을 살피는 듯한 시선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오칠은 천상루를 다녀온 이후로 당장에 옷을 갈아입고, 그 후로는 잘 씻지 않아서 이전처럼 아름다운 사내라는 말과는 약간의 거리가 있는 모습이었다.
물론 이전처럼 완전 거지 몰골이 아니라서 곱상하네, 라는 생각이 들 정도의 모습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아까 주점에 왔을 때 그냥 들어왔으면 이렇게 고생할 필요가 없었잖아.”
오칠은 난간에 몸을 기대며 경 보주를 삐딱한 시선으로 쳐다봤다.
하지만 경 보주는 전혀 불쾌한 표정도 짓지 않고, 심지어 이전부터 쭉 반말을 하는 오칠에게 경어를 쓰면서 예의를 잃지 않고 있었다.
왜?
경 보주조차 이런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만인의 존경을 받으며, 두려움을 느끼기보다 두려움을 주는 인물이었고, 그만큼 오만하고 자신만만한 사람이었다. 지금껏 아무에게나 이리 공손하고, 저자세를 취한 적이 없었던 것이다.
단순히 오칠이 그가 생각하는 존재일지도 모른다는 것 하나로는 설명할 수가 없었다. 어쩌면 오칠에게서 풍기는 기묘한 무언가가 그를 압박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제부터 그 정확한 이유를 알아봐야 할 때였다.
“조용한 곳에서 이야기 하는 것이 낫다 싶었소.”
“그러시겠지. 그런데… 좀 오래 걸렸네?”
오칠이 경 보주와 만난 것이 한 달 전.
자신을 찾아오라고 한 지 한 달이나 지나서야 온 것을 지적하는 것이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소.”
경 보주는 왜 자신이 이렇게 구차한 변명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오칠과 관련한 모든 것들이 그 자신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아니던가.
“생각은 무슨. 오라면 오면 되는 거지.”
순간, 경 보주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아무리 오칠의 앞에 있는 것만으로도 주눅이 들기는 하지만, 이렇듯 무시를 당하고 참는다는 건 절대 그에게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당신은 나를 너무 무시하는 거 같소.”
경 보주의 말이 아니라도 그 표정을 보면 그가 분노하고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오칠은 전혀 신경 쓰이지 않는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내가 무얼 무시했다는 거야?”
“난 무한의 절반을 지배하고 있는 천목보의 보주요.”
뭔가 어린애의 투정 같은 말이었지만, 경 보주의 입에서 나오는 것이었기에 그 말에는 무시할 수 없는 무게가 실려 있었다.
하지만 오칠은 여전히 시큰둥하기만 했다.
“도지휘사가 들었다면 입에 게거품을 물고도 남을 말이군. 그보다 당신, 지금 그깟 천목보의 보주라는 이름을 걸고 날 만나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오칠은 천목보를 마치 길가에 세워진 허름한 객잔 이름이라도 된다는 듯 말을 하고 있었다.
무한의 누구라도 경악을 금치 못할 말인 것이다. 하지만 그 말로 인해 경 보주는 분노를 가라앉히고, 좀 더 차분한 신색으로 돌아왔다. 어떤 면에선 조금 긴장된 표정 같기도 했다.
“그럼 내가 어떤 이름으로 당신을 만나야 한다는 것이오?”
“글쎄, 그건 당신이 더 잘 알고 있을 텐데.”
“내가 무얼 알고 있다는 말이오?”
“몰라, 당신이 한 번 말해봐.”
“…….”
경 보주는 오칠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오칠이 진정 자신이 생각하는 존재가 맞는지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이자는 너무 가볍다.’
그가 기다리는 존재는 만인 위에 군림해야 할 인물이었다.
지존(至尊).
그렇게 높고도 강력한 존재여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오칠에게서는 그런 모습을 찾을 수가 없었다. 여전히 뭔가 알 수 없는 부담감은 있지만, 그 이상의 무언가가 느껴지지 않았다.
‘사실 이자가 그분이 말씀하신 전인이라는 증거는 아무것도 없다.’
배화교의 전설.
그의 가문에, 그리고 그의 가문이 믿고 있는 배화교엔 하나의 전설이 있었다.
전설의 시작은 지금으로부터 이백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배화교의 역사상 가장 강력하고, 가장 현명하며, 가장 완벽한 교주였던 그분은, 무림 통일을 코앞에 두고 정사 연합 무림인들의 암계에 빠져 크나큰 부상을 입으셨다. 그리고 얼마 뒤 커다란 불꽃에 휩싸여 죽음에 이르셨다고 한다.
하지만 그분은 죽음에 이르기 전, 하나의 예언을 남겼다.
때에 이르러, 아후라 마즈다의 영원한 왕국이 세워질 그날을 예비할 자가 나타나리라.
그 예언은 무림의 잔혹한 공세에서 살아남아 중원 각지로 흩어진 배화교인들의 희망이 되었다.
언제, 어디서 나타난다는 명확한 계시는 아니었지만, 배화교의 누구도 그 말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분은 그들의 왕이었고, 왕의 말은 그들에게 절대적인 가치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 가치는 이백여 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이어져 경 보주의 믿음을 지탱해주고 있는 희망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 그분이 말씀하신 예비자가 이리 경박한 자일 리가 없다.’
경 보주의 머릿속에 생겨난 불신의 감정은 점점 크게 부풀어 올랐다.
생각해보면 오칠은 아후라 마즈다와 아리만을 거론했을 뿐이고, 그 이름이 진실한 배화교인이 아니라면 알 수 없는 것이긴 하지만, 그것으로 오칠이 아후라 마즈다의 왕국을 예비할 자이며, 그들 배화교의 교주라는 의미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더구나 요 한 달 간 오칠에 대한 조사를 해보았지만, 아직까지 아무런 내력도 밝혀진 것이 없었다. 그저 두 달여 전에 이곳 무한에 나타났고, 왜인지 모를 이유로 하오배들과 철근문을 제압했다는 것이 다였다.
물론 무한에 한한 조사이기에 다른 지역까지 조사한다면 내력이 밝혀질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아직까지는 정체불명의 사내일 뿐인 것이다.
“난 당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소.”
경 보주는 오칠이 자신의 정체를 분명히 밝히기 전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했다.
“정말?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그렇소.”
“하긴 요즘 마교는 전설 속의 이야기와 달리 겁이 많으니까.”
“……!”
유연하게 상황을 이끌어가려던 경 보주의 얼굴에 순간 싸늘한 살기가 일었다.
“지금 마교라고 했소?”
“응.”
망설임 없는 오칠의 대답에 경 보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로써 명확해졌군. 당신은 그분의 전인이 아니야.”
마교라니.
배화교인들은 자신들을 단 한 번도 마교라 생각한 적이 없었다. 세상 모든 이들이 그렇게 부른다 해도, 그들은 자신들의 종교를 마의 교리를 따르는 사악한 종교라 생각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물론 교인들은 자신들을 선악의 경계에 두고 있고, 그 믿음의 중심은 스스로의 선택이긴 하지,만 과정이 어찌 되었든 결국 마지막은 선의 신이자 최고의 신인 아후라 마즈다의 왕국에 들어간다는 공통된 목표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오칠은 아무런 망설임이나 주저함도 없이 배화교를 마교라 말하고 있었다.
그들의 지존이 될 교주는, 중원 각지에 흩어져 있는 배화교인들을 이끌어야 할 왕은 절대 마교라는 이름을 입에 담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적어도 배화교의 교주를 보필해야 하는 광명좌사(光明左使)의 신분을 가진 경 보주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전인? 계승자를 말하는 거겠지? 그렇다면 당신의 생각은 틀렸어. 내가 바로 그 전인이야.”
매우 심각한 경 보주와는 달리 오칠은 별일 아니라는 듯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오칠의 가벼운 말과 행동으로 경 보주의 생각은 더욱 확신으로 굳어졌다.
“당신이 무슨 말을 해도 난 믿을 수 없소.”
경 보주의 얼굴은 더할 수 없이 차갑게 굳어져 있었다.
그리고는 정자 밖으로 나가서 오칠을 향해 날카로운 눈빛을 던졌다.
“나오시오. 정당한 싸움을 통해 당신의 목숨을 빼앗겠소.”
경 보주의 살벌한 말에도 오칠은 두 말 않고 밖으로 걸어 나왔다.
“마교와 관련된 인물이란 것을 내가 알게 되었으니, 입막음을 하겠다는 건가?”
오칠은 경 보주를 마주하고 서서 담담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런데 배화교인은 착한 것을 생각(善思)하고, 착한 말(善言)을 하고, 착한 행동(善行)을 의지로 삼아야 하는 거 아니야? 이렇게 아무렇게나 사람을 죽여도 되나?”
“…….”
경 보주는 오칠이 그들 배화교의 기본 교리를 거론하자 잠시 당황했지만, 곧 더욱 싸늘한 표정을 지었다.
“당신은 우리 교에 대해 많은 걸 알고 있군. 혹, 흩어진 배화교인들의 후인이오?”
“전인이라니까.”
“흥! 헛소리. 그렇다면 백천맹(白天盟)의 인물이겠군. 아니면 흑천맹(黑天盟)의 인물이거나.”
백천맹은 정파문의 연합이고, 흑천맹은 사파문의 연합을 이르는 말이다.
사실 두 맹은 백 년 전까지만 해도 하나의 맹으로 이어져 왔으나, 이후 백 년 동안은 서로 간의 가치관과 그에 따른 반목을 감당하지 못하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둘로 나누어진 상태였다.
그러나 처음 무림맹이 만들어진 계기가 마교와의 크나큰 싸움이었던 만큼, 아직까지도 그들은 마교에 대한 두려움을 완전히 잊지 않고 있었다. 그러니 그들이 혹여 그 낌새를 포착하고 오칠과 같은 고수를 파견할 수도 있는 것이다.
물론 오칠이 백천맹 등에서 파견된 인물이라 해도 순순히 인정할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저 그런 말로 오칠의 감정적 변화를 살피려는 것이다.
하지만 오칠은 경 보주가 원하는 어떠한 대답이나, 표정 변화를 보여주지 않았다.
“이봐, 몇 번을 말해야 돼. 난 당신이 말하는 그 전인이라니까.”
“당신 같은 자가 그분의 전인일 리가 없소!”
“내가 어떤데?”
“…….”
경 보주는 대꾸할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야기를 할수록 오칠이 장난을 하고 있다는 생각만 들었기 때문이다. 그 하는 말엔 지존의 무게감이나 종사(宗師)의 위엄이라는 것이 전혀 담겨 있지 않고, 하는 말들은 그저 하오배의 시시껄렁한 말투와 다름이 없었다.
“당신이 전인이라면 증명할 방법은 하나밖에 없소.”
“뭔데?”
“내게서 살아남는 거요.”
경 보주는 오른손을 내밀었다.
스릉.
빈손이었던 경 보주의 손에 어느새 검이 쥐어져 있었다.
그것은 무척이나 얇고 섬뜩할 정도로 투명한 광채가 뿜어지는 검이었다.
월광검(月光劍).
마치 연검처럼 손목에 숨길 수 있는 것으로, 배화교 최고의 장인이 만든 보검이었다. 월광검을 들었다는 것은 경 보주가 지금 최선을 다해 오칠을 죽이려 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역시 힘이 진리라는 건가.”
오칠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허리에 차고 있던 투박한 모양의 묵철곤을 꺼내 잡았다.
경 보주는 비웃음 섞인 시선을 던졌다.
“그런 쇠몽둥이로 나의 월광검을 상대하겠다는 것이오?”
“지금 검이 예쁜 모양을 하고 있다고 나한테 자랑하는 거야? 무기는 그저 무기일 뿐이라고.”
오칠은 하하, 웃으며 묵철곤을 앞으로 내밀어 까딱였다.
경 보주는 그의 검을 보기에만 좋은 장식품 정도로 취급하는 오칠의 말에 코웃음을 쳤다.
“좋소! 당신이 얼마나 강한지 증명해보시오!”
타탁.
경 보주는 선 자세로 바닥을 가볍게 내딛었다.
하지만 그의 신형은 가벼운 발동작에서 시작된 움직임이라고 할 수 없는,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오칠을 향해 짓쳐 들어갔다.
샤샤샤삭―
마치 갈대밭을 휘도는 듯한 바람소리가 생겨나고, 그 소리의 끝엔 경 보주의 월광검이 새파란 그림자를 만들어내며 오칠의 전신을 휘어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