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계 10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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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2,546회 작성일소설 읽기 : 파계 104화
파계 5권 - 4화
대신 그의 관심은 녹명원의 누이에게 매우 많이 쏠려 있었다.
‘나의 멋진 모습을 잘 보았다가 너의 누이에게 세세하게 설명해주거라!’
화유상은 벌써부터 그의 영웅담을 듣고 얼굴이 발그레하게 붉어질 녹명원의 누이이자, 자신과 같은 지군 소속인 녹선향을 떠올리면서 내심으로 끝없는 환호성을 지르고 있었다.
조용하게 해결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들고, 선주를 답답하게 만든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던 것이다.
그가 흠모하고 있는 녹선향에게 영웅담을 들려주고 싶고, 그러려면 이번에 철혈군으로 들어오는 녹명원이 그 모습을 직접 목도하고 누이에게 설명해줄 필요가 있는 것이다.
더구나 그가 상대할 사람들은 도적의 대명사 중 하나인 수적들이다. 숫자가 조금 많다는 것이 약간 걸리기는 하지만, 싸우는 것이 그저 숫자로 해결될 일이 아니라는 건 그 자신처럼 실력을 쌓은 무림인이라면 누구나 아는 일이 아니던가.
“수적과 협상은 없소.”
“대협, 안 됩니다!”
선주는 화유상이 무슨 말을 할지 어느 정도 예상했었기에 강하게 거부했다.
“뭐가 안 된단 말이오?”
눈살을 찌푸리고 허리에 차고 있는 도의 손잡이를 움켜잡는 화유상의 소리 없는 압박에 선주의 심장은 콩알만 하게 작아졌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었다.
“장강에는 장강의 법칙이 있습니다!”
선주는 뭔가 더 할 말을 찾아야 했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할 말이 없었다. 오랫동안 암묵적으로 행해져온 도적과 장사꾼의 거래를 또 다른 어떤 말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그 정도라면 아무리 바보 멍청이라고 해도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이다.
물론 화유상은 바보도 아니고, 멍청이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나름의 목적이 있고, 선주의 말을 무시할 정도로 두꺼운 얼굴과 자신의 의지를 밀어붙일 힘을 가지고 있었다.
“협의를 신봉하는 나로선 선주의 그 말을 용납할 수 없소.”
더 이상 듣지 않겠다는 듯 고개까지 돌려버리는 화유상의 태도에 선주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갔다.
“하지만 대협, 저의 처지…….”
“선주는 나서시오!”
저 멀리서 선주를 부르는 수적들의 외침이 들려왔다.
어떻게든 화유상을 설득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입을 열려던 선주의 얼굴이 창백하다 못해 하얗게 변했다.
“대협, 어쨌든 참아주시오! 제발 가만히 있어주시오!”
선주는 그렇게 화유상에게 신신당부를 하고 수적들이 반쯤 포위하고 있는 난간으로 뛰어갔다.
“내가 선주요!”
쾌속선들의 중심에서 채주라 생각되는 장년인이 손에 들고 있는 아미자를 만지작거리며 미소를 지었다.
조용한 협상으로 통행세만 받고 물러나려고 하는 것이니 굳이 인상을 구길 필요는 없는 것이다.
“본인은 현묘채의 채주 염추패요. 좋은 인연도 아니니 적당하게 거래를 하고 헤어집시다.”
“좋소!”
원래 선주는 몇 마디의 말로 채주의 말에 장단을 맞추었다가 품에 넣어두고 있는 금액보다 약간 적은 금액으로 협상을 마무리 하고 돈을 던져주는 것으로 끝내야 한다.
그러나 선주는 마음이 급했다. 언제 화유상이 초를 치고 곤란한 상황을 만들지 모르는 것이다.
“시원스러워서 좋구려!”
염추패는 선주의 너무도 빠른 대답과 뭔가 다급해 보이는 표정이 괴이쩍었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저리 다급해하는 걸 보면 통행세로 은자 서른 냥 이상은 뱉어낼 것 같고, 이런 중형선에서 그 정도의 통행세면 나름대로 만족스런 결과니 말이다.
그런데 곧 그의 품으로 날아올 돈주머니를 생각하며 싱글거리던 염추패의 표정이 일순간에 일그러졌다. 갑자기 선주를 밀쳐내고 얼굴을 드러낸 사내의 말이 그의 기분을 망친 것이다.
“협상은 없다! 목숨이 아깝다면 이대로 그냥 물러나라!”
“…….”
염추패는 잠시 일그러진 얼굴 그대로 침묵했다.
백 명에 달하는 그의 수하들도 채주의 침묵에 동참하며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러나 곧 염추패는 키득거리며 웃기 시작했고, 수하들도 깔깔거리며 웃어댔다.
“지금 나보고 하는 말이냐?”
슬며시 웃음을 멈추고 말하는 염추패의 시선은 싸늘하게 가라앉아서 화유상에게 고정되었다.
그리고 화유상은 감히 수적 따위가 그런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은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일이라는 등등의 말을 내뱉으며 허리에서 도를 뽑아들었다.
“난 백천맹 열혈단이다! 마지막 기회를 주겠다! 이대로 물러난다면 그 머리를 온전히 놔두고 보내주겠다!”
염추패는 백천맹 열혈단이란 말에 순간 움찔했지만 곧 코웃음 쳤다.
백천맹의 수뇌라면 모를까, 후기지수들이나 모여 있는 열혈단의 애송이 하나에 겁을 먹을 그가 아닌 것이다.
“너, 이 새끼! 뒈지고 싶어서 환장했냐?”
염추패의 입은 더 이상 협상을 위한 입이 아니었다.
당장에 적의 목을 자르고, 사지를 찢어내겠다는 농락과 조롱으로 가득한 입이었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 그리고 다른 수적들의 입에서 도저히 듣고 있기조차 민망하고, 얼굴이 붉혀지는 욕과 조롱들이 마구 쏟아져 나왔다.
“당장 올라와라! 내 그 더러운 혀를 잘라내서 다시는 입을 놀리지 못하게 해주겠다!”
“미친 새끼! 우리가 돌았냐? 내 혀 자르고 싶으면 직접 이리 와!”
“카카카카!”
“하하하하!”
“낄낄낄낄!”
비웃음을 날리는 염추패의 말에 수적들은 손뼉을 치며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왜? 이리 오는 것은 무섭냐?”
염추패는 화유상을 향해 손가락을 까닥이며 다시 한 번 비웃어주었다.
‘이놈들이!’
왠지 자신의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는 것과 도저히 귀를 열고서 들을 수 없는 조롱 앞에서 화유상의 얼굴은 붉어지기만 했다.
마음에서 일고 있는 분노를 풀자면 당장에 몸을 날려 저 수적들의 목을 뎅강 잘라버려야겠지만, 중형선과 쾌속선의 거리는 오 장여가 넘었고, 아직 자신의 경공술로는 단번에 넘어서기 힘든 거리인 것이다.
더구나 배를 움직이라는 말에도 선주는 꿈쩍도 하지 않았고, 사람들은 절대 수적들을 향해 움직여서는 안 된다고 악다구니를 쳤다. 아무리 화유상과 그 일행이 도검을 지닌 무림인들이라 해도 자신의 목숨이 달린 일에까지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안 와? 아까는 그렇게 기고만장하더니 지금은 마음이 바뀌셨나? 겁나면 그냥 협상을 하시던가. 내 크게 아량을 베풀어서 받아주도록 할 테니까.”
“협상은 없다!”
화유상이 다시 버럭 소리쳤다.
뒤에서 불안감을 드러내고 있는 사제들과 녹명원은 둘째 치고 이대로는 자존심상 물러날 수 없었다.
“내 참, 잘되던 협상을 망치고서 싸우자고 하기에 이리로 오라고 했더니 오지는 않고, 다시 협상을 하자고 하니 그것도 안 된다고 하면 도대체 나보고 어쩌라는 거야?”
어깨까지 으쓱이는 염추패의 태도는 화유상에게 더할 수 없는 모욕을 주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해결 방법이 딱 하고 나타나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화유상은 더 이상 그렇게 가만히 있기도 어렵게 되었다. 염추패가 중형선을 물속에 가라앉히겠다고 소리쳤기 때문이다.
“야, 너, 너, 너, 그리고 너, 가서 배 밑바닥에 구멍을 뚫어버려!”
염추패가 손가락으로 수하들을 가리키며 하는 말은 화유상뿐만이 아니라, 배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심장을 덜컥 내려앉게 하는 것이었다.
“일을 이렇게 만들었으니, 이제 어쩔 생각이오!”
선주는 두려움과 분노로 가득한 얼굴을 부르르 떨며 화유상에게 소리쳤다.
하지만 화유상이 뽑아든 도를 갑자기 바닥에 푹 내리찍자 선주는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났다. 아무리 상황이 어려워도 상대는 무림인이고, 배가 가라앉아 익사하기 전에 목이 잘려 죽을 수도 있는 것이다.
“……!”
치솟는 수치심과 분노를 풀길이 없어 도를 휘둘러 바닥을 찍은 화유상은 도가 바닥을 깊이 파고든 것을 보고는 뭔가를 생각해냈다는 듯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그리고 아직 수적들이 강물로 뛰어들지 않았음을 확인하고, 배에 구멍을 내겠다는 염추패의 말이 어느 정도는 엄포용이라는 걸 깨닫고는 내심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거리가 멀다면 다리를 만들면 되지!’
화유상은 사방에서 쏟아지는 원망의 시선을 간단히 무시하고 도를 들어 바닥을 향해 빠르게 휘둘렀다.
츠아악! 츠아악! 츠아악!
두툼한 갑판이 쫙쫙 갈라지고, 그 사이 사이로 계속해서 화유상의 도가 움직여나갔다.
“뭘 하려고 하시는 겁니까, 사형?”
사제 중 하나가 의문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리고 어느 정도 되었다고 여긴 화유상은 휘두르던 도를 멈추고 싱긋 웃었다.
“저 수적들을 혼내주는 것 말고 내가 할 일이 무엇이 있겠느냐?”
그리고 화유상은 여전히 의문의 시선을 던지고 있는 사제들의 눈앞에서 조각난 갑판을 집어 들었다.
그것은 조각마다 한 척 정도의 크기였는데, 화유상은 그러한 조각을 한 가득 품에 안고는 난간으로 다가가 섰다.
“살아 있는 것을 후회하게 만들어주마!”
다짜고짜 그렇게 소리치는 화유상을 보며 염추패는 코웃음 쳤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곧 기묘하게 변해갔다. 화유상이 뭔가를 물 위로 던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무엇이 발을 올려놓을 수 있을 크기의 나뭇조각이고, 그 조각들이 자신들이 타고 있는 쾌속선과 중형선 사이에 조밀하고도 안정적으로 던져지는 걸 보고는 당황스러워했다.
“어서 저 나무 조각을 치워!”
수적들은 어리둥절했다.
저깟 나뭇조각이 물 위에 떠 있는 것으로 무슨 큰일이 생긴다고 저 난리를 친단 말인가. 하지만 곧 그들도 염추패의 다급함을 이해할 수 있었다.
화유상이 중형선에서 몸을 날려 나무 조각을 밟으며 그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오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등평도수(登萍渡水).
물 위를 수평으로 빠르게 걷는 절정의 경공을 가리키는 말이다. 수적들은 화유상의 모습에서 바로 그 대단한 경공을 떠올리고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하지만 화유상은 등평도수를 펼치는 것이 아니었다. 그가 디딤으로 삼는 것은 수면이 아니라, 부유력이 매우 강한 나뭇조각이었으니까. 물론 둥실 떠다니며 흘러가는 나뭇조각을 밟고 달리는 것만 해도 충분히 칭찬해줄 만한 솜씨이긴 했다.
그러나 나뭇조각을 디딤판으로 삼기 좋게 만들고, 저리 조밀하게 물 위에 올려놓는다면 어느 정도 몸이 가볍고 경공 수련에 노력을 아끼지 않은 무림인들에겐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그 좋은 예로 우리도 돕겠습니다! 하고 소리치며 화유상의 뒤를 따라 그 사제들과 녹명원까지 물 위를 달리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바로 밟기 좋은 나뭇조각을 디딤판으로 삼아서.
“흩어져라!”
염추패는 수하들을 향해 다급히 소리쳤다.
중형선의 길목을 막을 수 있게 반원형 포위망을 구축하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열 척의 쾌속선은 한 장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고 있고, 지금 그들에게 다가오고 있는 화유상에게 그 정도의 거리는 한 걸음이면 너끈하게 넘어 다닐 수 있는 정도에 불과했다.
“이놈들, 이미 늦었다!”
재빨리 노를 저어 거리를 벌리고 좌우로 흩어지는 쾌속선 사이로 득의에 찬 화유상의 외침이 들려왔다.
그리고 그의 신형은 쾌속선 하나에 내려서고 수적들을 향해 지체 없이 도를 휘둘렀다.
샤악―
“악!”
“억!”
단 일도에 두 명의 수적이 피를 뿜으며 나동그라지고, 나머지 수적들은 당황스러워하면서도 손에 들고 있는 아미자로 화유상을 향해 찔렀다.
“흥!”
챙―
코웃음과 함께 휘둘러진 도는 두 개의 아미자를 쳐내고 그 사이로 파고들어 수적들의 양팔을 긋고 지나갔다.
수적들은 팔을 부여잡으며 뒤로 물러나고, 폭이 좁은 쾌속선이기에 뒤쪽에 있던 동료들도 어쩔 수 없이 함께 물러나야 했다.
그러나 수적들은 자신들의 다급한 뒷걸음질로 인해 그들이 화유상을 상대할 만한 방법을 깨닫게 되었다. 바로 화유상이 흔들리는 배 위에서 싸우는 것에 익숙지 않다는 점을 이용한 방법이었다.
* * *
“배를 흔들어!”
한 명이 소리치자 다른 수적들도 즉각 그 의미를 깨닫고는 배를 양쪽으로 흔들었다.
“크!”
앞으로 달려들려던 화유상은 황급히 균형을 잡으며 멈춰 섰다.
배가 흔들리는 것은 물 위에 떠 있는 나뭇조각을 밟고 달리는 것과는달랐다.
빠르게 앞으로 달려가면 순간적인 균형을 잡기가 용이하지만, 한곳에 서서 몸을 흔들면서 상대의 공격을 피하고 도를 휘둘러야 하는 것은 잠깐의 균형 감각이 아니라, 배의 흔들림에 완전히 익숙해져야 가능한 것이다.
더구나 쾌속선은 폭이 좁아서 그 흔들림이 더욱 컸고, 강물의 유속도 느린 것이 아니기에 쾌속선은 기우뚱거리며 조금씩 하류로 흘러가고 있었다.
하지만 단순히 쾌속선의 흔들림으로 화유상을 공략하겠다는 수적들의 생각은 너무나 안이한 것이었다. 화유상 정도의 무공 실력이면 균형을 잡기 위해 잠시의 멈칫거림은 있어도 그 상태로 계속해서 당황하고 있을 리는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