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계 10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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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2,678회 작성일소설 읽기 : 파계 103화
파계 5권 - 3화
“하하하하!”
생각에 잠겨 있던 노백의 시선이 커다란 웃음소리에 이끌려 갑판 중앙으로 향했다.
오칠과 노백이 타고 있는 배는 물건과 사람을 동시에 운송하고 있는 중형선이었다. 중형선은 최대 육십 명(노잡이 열네 명 제외)이 승선할 수 있으며, 기타 장비 등을 고려할 때 보통은 사십에서 오십 명이 탑승하고, 불의의 상황을 대비하여 다섯 명까지 탈 수 있는 소선 두 척까지 배 양쪽에 매달고 운용하고 있었다.
즉, 오칠과 노백이 탄 배에는 오십 명 이상의 사람들이 타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특별한 몇몇을 위한 선실 외에는 숙실이 없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이 갑판에서 지내야 하기 때문에 갑판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런데 지금 노백이 보고 있는 갑판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분명 승선 인원은 오십 명 이상인데, 갑판에 올라 있는 사람은 그 절반을 조금 넘는 정도에 불과한 것이다.
아무리 가을을 넘어서고 있다 해도 이곳 호북을 관통하는 장강은 여전히 따스한 바람이 일고 있었고, 선실의 답답함보다는 갑판의 시원함이 더 낫다는 것을 고려해볼 때 지금과 같은 갑판의 모습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지금 갑판의 중앙을 중심으로 해서 넓은 공간을 고작 다섯밖에 되지 않는 사내들이 차지하고 앉아서 하하, 허허거리며 떠들어대고 있었고, 그들이 허리에 차고 있는 도검의 위압감 때문에 아무도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가 앉으려 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무시해.”
눈을 감고서 느긋하게 난간에 기대고 있던 오칠의 말에 노백의 어깨가 움찔했다.
가면을 쓰고 있어서 노백이 눈살을 찌푸리는 것이 보이지 않을 텐데, 오칠은 잘도 노백의 불편한 심기를 알아챈 것이다. 아마도 오칠이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면 노백은 갑판을 제 안방처럼 여기고 있는 자들에게 적당한 훈계의 말을 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을 것이 분명했다.
“아무리 무한에서 멀어졌다고 해도 네가 지금 어떤 처지인지를 잊으면 안 되지.”
“하지만 저 사람들의 행동이 너무 과하지 않습니까.”
노백은 사람들이 단순히 저들의 도검을 보고 겁을 먹은 것이 아니라, 저 다섯 중에 한 명이 고의로 기세를 흘려 위압감을 주면서 아무도 다가오지 못하게 함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너 싸움하기에는 아직 무리 아니냐?”
한쪽 눈만 살짝 뜨고 바라보는 오칠의 시선에 노백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의 몸 상태로 봐서 셋 이상은 힘들 겁니다.”
그 말은 노백도 저 다섯 사내들이 어느 정도 실력을 갖춘 무림인임을 느끼고 있다는 말이었다.
“싸움이라는 것도 머리싸움이야. 승부가 뻔히 보이는데 왜 사서 고생하려고 하냐?”
“형님이 있잖습니까.”
오칠이 피식 웃었다.
“네가 일으킨 문제에 왜 나까지 끌어들이려고 해. 분명히 말하는데, 그런 일은 안 도와준다. 내가 왜 너한테 무공을 알려줬겠냐? 너 혼자 알아서 하라고 알려준 거야.”
“형님의 정체 때문에 입막음하려고 알려준 거 아닙니까?”
오칠은 다시 웃었다.
자신이 배화교의 교주라는 것에 대한 약간의 비난이 섞인 반박인 것이다. 물론 노백은 오칠을 따르겠다고 분명하게 작심했고, 배화교의 무공까지 배워 익히고 있었기 때문에 문제 될 일은 없었다.
“그런 걸로 입막음을 하려고 했으면 널 꺼내주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냥 목만 뎅강 잘라버리면 되는데 왜 쓸데없이 무공을 알려주고 이렇게 귀찮게 데리고 다니겠냐? 다 의동생을 생각하는 이 형님의 대해와 같은 마음 때문인 것이야.”
이번엔 노백이 웃었다.
웃으라고 하는 농담도 아닌, 진실을 말하듯 거짓말을 저리 당당히 하고 있으니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사람이었다.
“아무튼 너 혼자 있을 때라면 모를까, 나하고 있을 때는 자중해.”
“알겠습니다.”
노백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크게 웃으며 떠들어대고 있는 사내들이 신경에 거슬리긴 했지만, 오칠의 말은 그에게 절대적인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저놈들 은근히 우리를 견제하고 있는 거야.”
노백의 편치 않은 심기가 진정된 것이 아니란 걸 알고 있기 때문인지, 오칠은 조금 더 설명해주겠다며 그대로 꾹 다물어져 있을 것 같던 입을 열었다.
“무슨 말입니까?”
“배에는 저들 말고 무기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우리 둘뿐이잖아. 당연히 우리의 존재가 신경 쓰이겠지.”
오칠은 천으로 싸둔 묵철곤을 허리에 달고 있었고, 노백은 평소에는 한 척 단창이지만 길게 늘이면 한 장이나 되는 가문의 가보인 조화창(造化槍:지금은 아무도 알지 못하지만, 단철방 화 방주의 선조가 만들었다)을 등에 매고 있었다.
게다가 노백은 척 보아도 의심스럽기 그지없는 가면을 쓰고 있으니 더욱 신경이 쓰일 것이었다.
“그렇겠군요.”
“내가 우리 대화가 들리지 않게 손을 써두지 않았다면 벌써 무기를 빼들고 달려와서 싸우자고 난리를 쳤을 거다. 아마도 지금 우리가 물고기처럼 입만 뻥긋거리는 걸 이상하다 생각하고 있겠지.”
“……?”
노백은 그게 무슨 말인가, 하고 의아한 시선으로 오칠을 바라보았다.
이에 오칠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내공으로 막을 만들어 자신들의 대화가 다른 이들에게 들리지 않게 했다고 말해주었다. 그리고 노백은 자신으로서는 추측하기조차 힘든 경지에 오칠이 이르렀음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쟤네들 열혈군 애들이야.”
“열혈군이라면 정파의 후기지수들이 모여 있다는 백천맹의 열혈군 말입니까?”
노백은 무림에 대해 그리 해박하지는 않았지만 열혈군이니, 철심각이니 하는 말은 들어본 적이 있는 것이다.
“저 중에 가장 나이가 많고 백의를 입은 자의 가슴에 지(地)자가 새겨져 있잖아. 그게 열혈군 지군(地群)에 있는 애들이 입는 옷의 특징이거든.”
일단 열혈군은 백의로 옷을 통일한다.
그러고 나서 상의 가슴 부위에 천군은 금박으로 천(天)자를 새기고, 지군은 은박으로 지(地)자를, 인군은 동박으로 인(人)자를 새겨 소속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런데 다른 네 명은 복장이 다르군요.”
오칠의 말대로 한 명은 백의에 지(地)자를 새겨 열혈군 지군이라는 걸 드러내고 있지만, 나머지 네 명은 각기 다른 고급스런 비단옷을 입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이번에 열혈군으로 들어가는 애들이겠지.”
그 네 명은 상대적으로 나이가 어려 보였고, 열혈군은 딱히 때를 정하여 사람을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오칠의 생각이 맞을 것이다.
‘그래서 저자가 저리 오만하게 구는 건가?’
노백도 백천맹의 열혈군이 무림에서 어느 정도로 대단한 곳인지는 대충 알고 있었다.
더구나 지군이라 하면 최고는 아닐지라도 제법 규모 있는 방파의 청년 고수라는 의미이고, 그 능력도 인정받고 있다는 뜻이니 저리 위세를 부리는 것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저들은 정파가 아닌가.
나보다는 우리를 외치고, 협과 의를 내세워 무림을 이끌어가자고 주장하는 자들이었다. 그런데 지금 보이는 저자들의 모습은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고작 다섯이서 갑판의 중심을 꿰차고 앉아서는 뭐가 그리 재미있고 유쾌해서 주위가 떠나가라 웃고 떠들면서 배에 타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고 있느냐 말이다.
저런 모습은 노백에게 정파니, 사파니 하는 구분에 대한 의문만을 던져줄 뿐인 것이다.
“세상이 어찌 좋은 사람들로만 가득하겠냐.”
이제는 아주 바닥에 누워서 졸린 듯한 말투로 중얼거리는 오칠의 말을 노백은 가만히 듣기만 했다.
“누군가 그러더라. 인생은 고통스런 것이다. 아무리 즐거워도 곧 이어서 고통이 찾아오게 된다. 바로 생(生)이 있으면 사(死)가 오는 것과 같다. 그래서 사람이 살아가는 세상을 사바(娑婆:중생이 갖가지 고통을 참고 견뎌야 하는 세상)라고 부르고, 인고(忍苦)라고도 부른다고.”
노백은 오칠의 중얼거림에 어떤 의미가 담겨 있을까 가만히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그가 생각에 빠져 있는 중에도 오칠은 자신의 말을 계속 이어갔다.
“내가 남을 배려하는 노력이 큰 만큼 남이 나에게 끼치는 괴로움을 참기는 더 힘들다. 그래서 더욱 큰 노력으로 참아야 하는 것이 사바, 즉 인생인 것이다, 라고 어떤 사람이 말하더라.”
물론 오칠이 말하는 어떤 사람은 노승이었다.
“그러니 참을 자신이 없으면 하지 마. 사흘 전에 이미 과거의 넌 사라졌다. 이제부터 네가 살아야 할 삶은 그냥 너를 위해 사는 거야.”
마지막 말은 거의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작았다.
오칠은 말을 하면서 그대로 자신만의 세상으로 빠져들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래서 오칠은 노백의 중얼거림을 듣지 못했다. 아니, 듣지 않은 것처럼 무시해버렸다.
“나를 위해 사는 게 무엇일까요?”
오칠도 그 해답을 알지 못했다.
노백에게 그가 해준 말은 그 자신이 추구하는 삶일 뿐이고, 그 삶을 배울 것인가, 아니면 자신만의 무엇을 찾을 것인가는 노백 스스로의 선택과 노력이 필요한 것이니까 말이다.
그래서 오칠은 잠이 든 것처럼 조용히 침묵하면서 아무 생각도 없이 몽롱함에 젖어 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한데,
웅성웅성.
갑판이 갑자기 소란스러워졌다. 모든 것을 무시하려고 했던 오칠도 어쩔 수 없이 눈을 떠야만 했다.
“뭐야?”
오칠의 물음에 노백이 즉각 대답했다.
“수적인 것 같습니다.”
제45장. 수적(水賊)
“수적이라…….”
오칠은 그 말을 음미하듯 가만히 읊조렸다.
그러나 곧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것처럼 다시 눈을 감았다.
“그냥 지켜보실 겁니까?”
노백은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 열 척이나 되는 쾌속선을 바라보며 물었다.
“수적도 산적들하고 똑같아. 적당히 통행세만 받고 돌아갈 테니 괜히 참견해서 소란 일으킬 필요는 없지.”
“하지만 통행세만 받고 물러나지 않으면 어찌합니까?”
“그때는 다르게 대응해야겠지.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곳의 선주는 나나 네가 아니라, 지금 갑판으로 올라오고 있는 저 사람이란 거다. 그리고 이 일을 해결해야 할 책임도 그에게 있고 말이야.”
오칠은 눈을 감고 있으면서 잘도 갑판에 올라서고 있는 장년인을 손으로 가리켰고, 장년인의 좋지 않은 안색으로 판단할 때 그가 선주인 것이 확실해 보였다.
어쨌든 노백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수적들과 선주, 그리고 불안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 또한 시끌시끌하게 웃고 떠들던 것을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나 있는 다섯 명의 사내들을 향하고 있었다.
“선주, 어찌할 생각이오?”
오칠이 열혈군 지군의 인물이라 말했던 사내, 화유상이 선주를 바라보며 물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수적들이 다가와 협상하자고 제안하기를 기다리며 품에 넣어두고 있는 은자 사십 냥을 만지작거리고 있던 선주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되물었다.
“수적들을 어찌 처리할 생각이냐고 묻는 것이오.”
“…….”
선주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이 젊은 사내가 어느 곳에 속한 인물인지 알고 있었다. 그들과 같은 사람들은 세상을 좌지우지하는 힘의 흐름을 파악해 둬야하는 것이 필수적인 일이고, 그래서 화유상이 백천맹 열혈군 지군의 인물임을 단박에 알아보고 몇 개 없는 선실까지 내준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이 사내는 지금 참으로 난감한 뭔가를 하려고 계획 중인 것이다. 아마도 수적들과 협상하고, 돈을 주어 그대로 지나가는 것을 반대하려는 것이겠지.
하지만 그렇다면 선주 자신에게는 참으로 곤란한 상황이 발생하게 될 것이다. 그들이야 육지에 내리면 그만이지만, 자신은 쭉 이 장강을 오가며 수적들을 상대해야 하고, 수적들에게 밉보이기라도 하게 되면 반드시 어떤 보복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지금 그들에게 다가오는 수적들은 근방에서 가장 유명한 현묘채(賢猫寨)였다.
호북 장강의 의도(宜都)와 공안(公安) 사이를 오가면서 수적질을 하는, 인원이 자그마치 백 명에 달하는 수채인 것이다. 더구나 관의 이목이 쏠리지 않도록 적당한 통행세 합의를 통해 영리하게 수채를 운영하면서도 거부당할 시엔 집요하고 잔혹하게 보복하기로 유명한 자들이 현묘채였다.
“대협, 이곳의 일은 저에게 맡기시는 것이…….”
화유상을 설득하려고 했던 선주는 채 말을 끝내지 못하고 입을 다물어야 했다.
순간 화유상의 눈빛이 매섭게 빛나며 그의 가슴을 서늘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화유상은 선주의 평화적이고 실리를 우선시한 협상에 결코 찬동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분명하게 드러낸 것이다.
‘도대체 왜 일을 어렵게 만들려고 하는 거야?’
선주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돈을 내라는 것도 아니고, 피해가 가지 않도록 잘 해결할 테니 그냥 가만히만 있어달라는데, 왜 그걸 못하게 하느냔 말이다.
하지만 화유상에게는 그렇게 해야만 하는 분명한 목적이 있었다.
‘지금과 같은 때야말로 나의 실력을 보여줄 때다!’
화유상은 바로 뒤에서 그를 지켜보고 있을 일행의 기대 어린 시선을 생각하며 내심 더욱 단단하게 마음을 다지고 있었다.
아니, 더 정확히는 그의 사제들과 같이 있는 녹명원이라 하는 소년에게, 아니 나이가 열일곱이었으니 청년이라 불리어도 될 녹명원의 시선을 신경 쓰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화유상이 녹명원에게 관심이 있어서는 아니다. 녹명원이 아무리 잘생긴 청년이라 해도 화유상은 남색에는 전혀 관심이 없으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