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계 10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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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2,463회 작성일소설 읽기 : 파계 100화
파계 4권 - 25화
제43장. 감사하는 마음으로 보시(布施)하다
‘주점에 가기 전에 녀석들이나 보고 갈까?’
오칠은 그런 생각을 하며 검룡천화장의 정문을 나섰다.
이제는 그가 누구인지 알게 된 경비무사들은 잔뜩 긴장해서 그의 일거수일투족에 촉각을 곤두세웠지만, 오칠은 그냥 정문을 나서서 그가 왔었던 길로 걸어갔으니 그들이 별달리 반응할 것은 없었다.
그런데 사람들의 왕래가 별로 없는 골목으로 들어가려던 오칠은 우뚝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내게 무슨 할 말이라도 있나?”
오칠은 정문까지 배웅하겠다더니 밖으로 나와서까지 뒤를 따르고 있는 손여설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그 말투도 평소의 오칠로 돌변했다. 공적인 자리나 특별한 이유가 있다면 모를까, 고작 손여설을 상대하는데 연기를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설사 그의 조부나 부친에게 말한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이제 원하는 걸 얻었으니까 말이다.
“네. 할 말이 많아요.”
손여설은 아까와는 말투부터 달라진 오칠의 갑작스런 변화에도 싱글거리며 대꾸했고, 오칠은 그럼 해보라는 듯 가만히 그녀를 응시했다.
“어디 가서 차라도 마시면서 이야기하죠.”
“나랑 다관에 가자는 말인가?”
“거기도 나쁘지 않겠네요.”
“난 그러고 싶지 않으니, 그냥 여기서 이야기해.”
“너무 할 말이 많아서 여기서 이야기하려면 오늘 밤을 새야 할 거예요. 그래도 괜찮겠어요?”
“…….”
오칠은 이 당돌한 아가씨를 설득하기란 애초에 불가능하다는 걸 깨닫고 다시 걸음을 재개했다.
할 말이 있다면 할 것이고, 아니면 알아서 포기하고 돌아갈 테니 이제 신경 그만 쓰자는 생각이었다. 게다가 손여설이 자신에게 보내는 관심은 충분히 알고 이해도 하지만, 전혀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그로서는 별로 상관하고 싶지도 않았다.
“어디로 가는 거죠?”
“가려고 했던 곳으로 간다.”
“그곳이 어디인데요?”
“할 말이란 게 그건가?”
“지금은 그래요.”
“…….”
오칠은 침묵했다.
그리고 동북구로 접어들어 평소 당과를 사주던 아이들이 몰려 있는 곳으로 가는 동안에도 쭉 침묵했다.
옆에서는 손여설이 여기는 어디냐, 이리로는 왜 가냐 등등의 별별 잡스러운 질문을 쏟아 붓고, 이건 예쁘다, 어디어디에 이런 것과 비슷한 걸 본 적이 있다 등등의 의미 없는 말들을 끊임없이 재잘거렸지만, 오칠은 끝까지 침묵하며 그녀를 무시했다.
하지만 손여설은 집요했다. 오칠의 무시에도 전혀 기분 나빠하지 않고 그를 따라왔으니까.
“오칠님!”
여지없이 사람들로 북적이는 시장 한편에 몰려 있던 대여섯 명의 아이들이 우르르 오칠을 부르며 몰려왔다.
“왜 이리 오랜만에 오셨어요? 얼마나 기다렸다고요!”
가장 작은 아이가 오칠을 향해 반갑게 웃으면서도 입을 삐죽이며 투덜거렸다.
오칠은 그런 아이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튕기며 히죽 웃었다.
“녀석아, 나 때문이 아니라 당과를 먹고 싶어 그렇게 기다린 거겠지.”
“헤헤! 맞아요. 얼른 당과 사주세요.”
오칠은 너무나 솔직한 아이의 대답이 더없이 흡족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사줄게요.”
그런데 아이들만큼이나 오칠을 기다리고 있던 당과 장수 고씨에게 가려는 오칠의 소매를 손여설이 붙잡았다.
“됐어.”
“내가 산다니까요.”
손여설은 오칠보다 앞장서서 당과 장수에게 갔다.
“당과 주세요.”
고씨에게 당과를 주문한 손여설은 오칠의 옆에서 머뭇거리고 있는 아이들에게 손짓했다.
“너희들 당과 먹고 싶으면 빨리 와.”
하지만 아이들은 오칠의 눈치를 보며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꿀꺽꿀꺽 침 삼키는 것만 봐도 당장에 달려가 먹고 싶을 테지만, 가만히 서 있는 오칠의 존재가 그들의 발을 붙잡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곧 오칠이 가서 먹어라, 하며 말을 하자 우르르 달려가 너도나도 당과를 달라고 고씨를 보챘다.
“내가 내는 거니까 마음껏 먹어.”
손여설은 아이들에게 당당하게 말을 하고는 어떠냐, 하는 얼굴로 오칠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오칠은 그녀를 보고 있지 않았다. 그냥 한쪽에 놓인 돌 위에 앉아서 딴생각을 하는 듯 하늘을 보고 있었다.
“쳇!”
손여설은 기분이 상해 입을 삐죽였지만, 곧 오칠의 옆으로 다가가서 자리를 잡고 앉았다.
“무슨 생각해요?”
“아무 생각 안 해.”
“어딜 보는 거죠?”
“아무데도 안 봐.”
오칠의 무성의한 대답에 드디어 손여설의 인내가 한계를 드러냈다.
하지만 빽 소리치기보다 그녀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냥 스스로 분노를 삭이려는 것이었다. 평소의 그녀라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지금의 그녀는 그렇게 꾹 참아내고 있었다.
“어? 오칠님이 또 당과를 사주시나 보다!”
“우리도 가서 당과 먹자!”
그런데 그렇게 입을 다물고 침묵하는 손여설의 아미가 찡그려졌다.
오칠에게 잘 보이기 위해 아이들에게 당과를 사주겠다고 했지만, 점점 더 많아지는 아이들을 보자 슬슬 짜증이 난 것이다.
게다가 자신이 관심이 있다는 걸 이렇듯 드러냈는데도 무시하고만 있는 오칠 때문에 손여설의 기분은 나빠진 상태였으니, 아이들의 모습이 더욱 신경에 거슬렸던 것이다.
그래서 손여설은 벌떡 일어났다. 아니, 일어나려 했다.
“놔둬.”
이제 그만 먹어, 라고 소리치려던 손여설은 오칠의 말에 입을 다물고 다시 돌 위에 앉았다.
“돈이 아까워서가 아니라, 재들 너무 버릇이 없잖아요. 고마워하지도 않는 것 같고요.”
조금 전까지는 오칠에 대한 분노를 삭이고 있던 손여설은 혹시 오칠이 자신을 속 좁은 여자로 볼까 걱정이 되어 변명을 늘어놓았다.
하지만 오칠은 다시 침묵했고, 손여설은 더욱 급한 마음에 별의별 이야기를 다 꺼내서 자신의 생각을 정당화시키려 했다. 그런데 그녀의 한마디가 우연하게 오칠의 말문을 열게 만들었다.
“공으로 밥을 먹는 중들도 보시를 받으면 감사하는데, 저 아이들은 너무도 은혜를 몰라요. 그런 걸 알게 하기 위해서라도 잘못을 알려주어야 하지 않겠어요?”
중이라고 지칭하는 것부터가 손여설에겐 스님에 대한 존경심이 없음을 나타내는 것이고, 그렇다는 건 그녀가 불교에 대해 문외한이라는 뜻이며, 보시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을 할 자격도 그녀에겐 없다는 의미와 같았다.
하지만 오칠은 그녀가 자격을 갖추지 못한 것에 대해 걸고 넘어질 생각은 없었다. 다만 과거 노승에게서 들었던 보시에 대한 의미가 떠올랐을 뿐이다.
“보시가 뭐라고 생각하지?”
일순 손여설의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곧 보시는 남에게 베푸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어디서 들었는지 그걸 시혜(施惠)라고 말한다면서. 아마도 절에 가는 그녀의 모친이나 혹은 고모, 이모 등에게 들었을 것이다.
“보시는 베푸는 것이 아니다.”
“베푸는 것이 아니라고요? 그럼 보시가 뭐죠? 손을 내미는 사람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 혹은 돈을 주는데 그것이 베푸는 것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요?”
손여설은 자신의 생각이 틀리다는 걸 인정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오칠은 그 자신도 아직까지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노승이 말해주었던 보시에 대한 의미를 말해주었다.
“내가 누군가에게 은혜를 베풀고 있다는 의식이 있다면 그건 보시가 아니다. 왜냐하면 보시는 내 안의 탐욕을 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보시의 행위를 통해 감사해야 하는 것은 보시를 받은 사람이 아니라 보시를 행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 말도 안 되는 말이 어디 있어요?”
역시 손여설은 오칠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그녀도 오칠처럼 그 보시의 의미를 이해하고 싶지 않은지도 모른다. 자신이 내어주었으면 감사하고 받아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생각하고 있으니까.
‘나도 다를 것이 없지.’
자신의 만족을 위해, 자신의 외로움을 채우기 위해 당과를 사주는 것이고, 그런 것은 감사를 요구하는 손여설의 생각과 별반 다를 것이 없는 것이었다.
“주군!”
오칠이 다시 침묵하고, 손여설은 자신으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말을 한 오칠을 이상하게 쳐다보는데, 갑자기 장내로 사두문의 대형인 왕공단이 나타났다.
그는 무척이나 다급했던지, 손여설은 거들떠도 보지 않고 여기 계실 줄 알았다면서 다짜고짜 오칠에게 큰일이 났다고 했다.
“무슨 일인데?”
“노백님이 옥에 갇히셨습니다.”
“뭐?”
오칠은 그게 무슨 황당한 말이냐는 듯 일어나 되물었다.
노백은 포쾌였다. 포쾌가 옥에 갇혔다는 말만큼이나 이상하고 괴이한 말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왕공단이 무식할지언정 허튼소리를 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오칠이 더 잘 알고 있었다.
“누구에게 들었냐?”
“경 보주님이 알려주셨습니다. 주군께 빨리 전해야 한다면서 냉 아우는 검룡천화장으로 가보라고 했고, 구 아우, 양 아우는 주점으로, 그리고 저는 이곳으로 온 겁니다.”
경모혁은 오칠과 노백이 의형제를 맺었다는 걸 알고 있었고, 그래서 서둘러 소식을 전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오칠은 문득 노백으로 인해 이런 귀찮은 일이 생길 줄은 생각도 못했네, 하고 생각하면서 왕공단에게 경모혁이 경가장에 있는지 물었다.
“주군을 뵈면 제형안찰사사 전옥서에서 기다리시겠다고 전하라 하셨습니다.”
제형안찰사사(提刑按察使司)는 성(省)의 형, 옥(獄)을 다스리는 중심 관청이고, 전옥서(典獄暑)는 죄인을 가두어 형벌을 집행하는 하부 기관이었다.
즉, 경모혁은 전옥서에서 오칠이 노백을 만날 수 있게 손을 써놓고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알겠다. 넌 여기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저 아이들이 다 먹으면 당과 값을 지불해라.”
오칠은 알겠습니다, 하고 대답하는 왕공단과 대체 무슨 일이야? 하며 쳐다보는 손여설을 남겨두고 제형안찰사사 전옥서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손여설은 깜짝 놀라 오칠을 따라가려 했지만, 너무도 쾌속한 신법을 펼친 오칠의 신형은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졌고, 손여설은 평소 전옥서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두지 못한 자신을 원망했다.
손여설은 옆에 있는 왕공단에게 전옥서가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다. 당장 대답하지 않으면 큰일을 당할 것이라는 듯 매섭게 노려보면서.
하지만 왕공단의 대답은 그녀를 허탈하게 만들었다.
“나도 모르오.”
그곳은 하오배들에게 염라대왕이 사는 곳과 다름없는 곳이라 그곳 이야기만 들어도 귀를 막았다는 것이다.
‘이런 바보 멍청이가!’
손여설은 너무도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모른다는데 달리 방법이 없지 않은가. 그래서 손여설은 지나가는 행인을 붙잡았다.
“전옥서가 어디 있죠?”
행인은 그것도 모르냐는 듯 코웃음을 치려다가 손여설의 싸늘한 눈빛을 받고는 얼른 대답해주었다.
손여설은 서둘러 행인이 알려준 곳으로 달려갔다. 지금 오칠을 보내면 다시 볼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손여설의 경공은 평소 그녀가 펼쳤던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빨랐고, 그래서 그녀의 모습은 시장에서 순식간에 사라졌다.
“저 아이들이 다 먹을 때까지 기다리란 말이지?”
오칠과 손여설이 사라진 곳엔 왕공단만 덩그러니 남게 되었다.
왕공단은 오칠이 앉아 있던 바위에 털썩 앉아서 아이들이 당과 먹는 모습과 바쁘게 당과를 만들어 파는 고씨를 빤히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렇게 보고 있자니, 왕공단도 당과가 먹고 싶어졌다.
이내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고씨를 향해 그 험악한 얼굴로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당과 하나 주쇼!”
<다음 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