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계 99화
무료소설 파계: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2,446회 작성일소설 읽기 : 파계 99화
파계 4권 - 24화
‘내 별호가 왜 쌍비권인지 알게 해주지!’
홍과명은 저도 모르게 지어지는 웃음을 참기 위해 애쓰면서 정자 밖으로 향했고, 손중헌을 비롯한 사람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곧 벌어질 비무를 보기 위해 그 뒤를 따라 나와서 각자 구경하기 좋은 위치를 찾아 자리를 잡았다.
“내 소개를 다시 하리다. 나의 사문은 공동파요.”
그리고 속가제자이면서도 장문인을 사부로 두었다고 한다.
한마디로 재능이 특출하고, 실력이 제법 되니 무시하지 말라는 말이었다. 또는 오칠이 아무리 일파의 수장이라고는 해도 구대문파의 명성에 비하겠느냐는 일종의 위세 부리기였다.
“이제 보니 대단하신 분이었구려. 진작 알아보지 못했으니, 나의 부족한 식견을 땅을 치며 한탄하고 싶은 심정이오.”
오칠은 진정 그러하다는 듯 한숨까지 쉬었다.
하지만 역시나 그 속내는 전혀 달랐다.
‘네놈이 나설 줄 알았다.’
오칠은 홍과명이 장주와의 대화에 끼어들 때부터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다.
또 그가 나서길 기다리고 있었다. 별호가 쌍비권이니 맨손으로 하겠다고 하면 나서리란 걸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오칠의 속내도 모르고, 홍과명은 이전에 비할 바 없이 기고만장해져서 어깨를 우쭐거렸다.
“혹시나 해서 말해두지만, 내 권에 맞았다가는…….”
“아~ 말은 이제 그만 하고 어서 비무나 합시다.”
오칠은 잔뜩 오만해져서 자신의 권이 어떻고, 맞으면 어떻게 되고 하는 등등의 말을 늘어놓으려던 홍과명의 말문을 막고서 비무할 자세를 잡았다.
“훗!”
대부분이 웃음을 참았지만, 유독 손여설은 그러지 못했다.
다른 누구보다 그녀에게 신경을 쓰고 있던 홍과명의 얼굴이 잔뜩 붉어졌다. 지독한 수치심과 분노에 휩싸인 것이다.
“내 주먹이 맵다 원망하지 마시오!”
홍과명의 신형이 바닥을 박차고 한 치의 높이로 떠올라 오칠의 정면으로 짓쳐 들어갔다.
둘 사이에 벌어진 넉 장의 거리는 순식간에 그 절반이나 줄어버렸다. 구름이 흘러가듯, 물이 흘러가듯 부드러우면서도 종잡을 수 없다는 행운유수(行雲流水)의 신법인 것이다.
후웅―
속을 상하게 할 수 있는 내가장력인 추수장(抽髓掌)의 손짓이 바람을 밀어내고 오칠의 가슴으로 밀려들어갔다.
오칠은 그런 홍과명의 움직임과 강하게 밀려들어오는 손짓을 묵묵히 쳐다보았다. 그리고 갑자기 한 걸음을 앞으로 내딛었다.
“어!”
“아!”
사람들의 깜짝 놀란 탄성이 들려왔다.
아니, 홍과명도 추수장을 펼치고 있지 않았다면 그렇게 탄성을 터트렸을 것이다.
오칠이 앞으로 한 걸음을 내민 순간, 그의 신형이 십여 개로 불어나 그 자신에게 들이닥쳤고, 갈피를 잡지 못한 추수장의 장력이 애꿎은 허공만을 친 것이다.
환영귀보(幻影鬼步).
오칠은 수십 개의 잔영을 만들어내 상대의 눈을 속이고, 공격의 방향을 잃게 만든다는 절정의 신법으로 농락하듯 홍과명을 지나쳐 그의 뒤쪽에 멈춰 섰다.
“벌써 끝이오?”
오칠은 그 공격이 다냐고 묻는 것이었고, 화급히 신형을 돌린 홍과명은 소양신공(小陽神功)의 공력을 두 팔로 끌어올려 주먹을 연달아 내질렀다.
훅! 훅! 훅!
일시에 일곱 방향을 때린다는 칠상권(七傷拳)이 오칠의 요혈 곳곳을 노리고 뻗어갔다.
게다가 조금 전처럼 눈을 현혹하는 신법을 펼친다고 해도 절대 피할 수 없게 연이어 펼친 칠상권의 권력은 일시에 수십으로 늘어나 오칠의 전신을 뒤덮었다.
한데 오칠은 신법을 펼쳐 피하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백팔마공 건곤대진력(乾坤大眞力)의 강맹한 힘을 주먹에 담아 앞으로 내질렀다.
쿵― 쿵― 쿵―
땅을 크게 울리는 오칠의 진각 소리와 함께 눈앞을 일그러트릴 정도의 수많은 칠상권의 권력이 허망하게 흩어져버렸다.
“읍!”
홍과명은 입을 꾹 다물어 기력이 날뛰는 것을 참아냈지만, 뒤로 밀려나는 걸음은 어쩔 수가 없었다.
하나, 그는 그대로 있을 수가 없었다. 오칠의 강맹한 권력은 계속해서 그를 향해 밀려들어왔기 때문이다.
“핫!”
홍과명의 다물어진 입이 열리고, 그의 신형은 공중으로 뛰어올라 이리저리 기우뚱거리듯 휘날렸다.
오칠이 뿜어낸 벽력신권(霹靂神拳)의 권력이 대단하여 홍과명이 행운유수를 펼쳤음에도 그 힘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하지만 어쨌든 그는 오칠의 공격을 피해냈고, 왼쪽으로 재빨리 내려선 그의 오른 주먹이 허리 뒤로 빠졌다가 앞으로 쭉 내밀어졌다.
후웅―
두 사람 사이가 무형의 힘에 의해 흔들리고 오칠은 양 손바닥을 포개 앞으로 내밀었다.
펑―
오칠의 양손에서 묵직한 폭음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오칠의 신형은 만근 거석처럼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말도 안 돼!”
홍과명은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그가 방금 펼친 권력은 공동파 권공 중에서 그 위력이 제일이라는 통비신권(通臂神拳)이었다. 한데, 오칠은 양손바닥으로 가볍게 막아낸 것이다.
그러나 실상 오칠은 가볍게 막아낸 것이 아니었다. 건곤대진력으로 손을 강철처럼 만들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방어였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결코 그렇게 손으로 막아내고서 멀쩡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아니, 그렇게 막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 분명했다.
“하압!”
불신의 외침을 토면서도 홍과명은 다음 공격을 잊지 않았고, 그의 주먹이 연이어 통비신권의 강렬한 권력을 쏟아냈다.
통비신권은 허공을 격하는 위력을 가진 만큼 기력의 소모가 엄청났지만, 점점 상황이 다급해지는 홍과명은 그러한 것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처음의 자신감이 거의 사라진 그는 온 힘을 다해 오칠을 공격해야 했던 것이다.
후웅― 후웅― 후웅―
오칠은 순간 오른발을 뒤로 빼고 앞발을 살짝 앞으로 하여 몸을 단단히 고정시켰다.
그리고 긴 호흡과 함께 주먹을 앞으로 내질렀다.
콰쾅―
건곤대진력을 일시에 끌어올려 내지른 벽력신권의 막강한 권력이 통비신권의 힘을 연이어 터트리고, 창백하게 질려 다급히 물러나는 홍과명의 가슴으로 들이닥쳤다.
“크윽!”
홍과명은 속에서 울컥 올라오는 핏물을 간신히 참아냈지만, 가슴뼈에 금이 간 듯 욱신거리는 고통을 참아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제 그만 포기하시는 것이 어떻겠소?”
어느새 지척으로 다가오는 오칠이 배려하듯 부드럽게 말했다.
하지만 오칠은 말과 함께 주먹을 내지르고 있었고, 홍과명은 그 주먹을 막기 위해 양팔을 십자로 교차시키고 있었다.
뻑―
강렬한 타격음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홍과명의 얼굴은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오칠의 신형은 그대로 바닥을 치고 뛰어올라 크게 위로 들려진 발뒤꿈치로 홍과명을 내리찍고 있었다.
빡―
최대한 몸을 비틀어 오른 팔뚝으로 막아냈지만, 홍과명의 신형은 크게 충격을 입은 듯 비틀거리고 있었다.
“아직도 포기할 생각이 없으시오?”
오칠의 말투는 여전히 부드러웠지만, 그는 휘돌린 발등으로 홍과명의 옆구리를 가격하고 있었다.
오칠의 신형은 백팔마공 창공무진기(蒼空無盡氣)로 인해 깃털처럼 가벼웠고, 그런 가벼움을 통해 뿜어내는 섬전환마각(閃電幻魔脚)은 홍과명이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고 현란했다.
빡― 빠박― 빠바박―
하나하나의 타격음은 듣는 이의 등줄기를 아찔하게 만들 만큼 강렬했고, 이제는 그 자신의 의지가 아닌 듯 좌우로 휘청거리는 홍과명의 신형은 마치 광풍에 휘날리는 어린 나무처럼 애처롭기까지 했다.
털썩.
어느 순간 오칠의 발길질이 멈추고, 홍과명의 신형이 풀썩 바닥으로 쓰러졌다.
“으… 으…….”
부러진 뼈들과 몸 곳곳에서 아우성치는 지독한 통증에 홍과명은 이를 악물고 있었다.
하지만 자존심 때문에 간신히 정신을 잃지 않고 있는 것일 뿐, 그는 누군가 뺨이라도 한 대 때리면 그대로 혼절하고 말 상태였다.
“이런, 괜찮으시오?”
오칠은 상체라도 일으키려고 버둥거리고 있는 홍과명에게 가까이 다가와 물었다.
상체를 수그리고 내려다보며 안쓰럽다는 듯한 표정까지 짓는 오칠은 보는 이로 하여금 왠지 섬뜩하게 하는 무엇이 있었고, 그래서 손중헌을 비롯한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아무 말도 못하고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는 것이었다.
“살살 하려고 노력했는데, 홍 소협께선 생각보다 몸이 약하신 모양이오.”
의식이 가물가물해지는 와중에도 원독에 찬 눈빛을 보내던 홍과명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정신을 잃자, 오칠은 고개를 내저으며 손중헌에게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홍 소협은 보약이라도 드셔야 할 것 같습니다. 참, 그보다 우선 의원이 필요할 것 같은데…….”
오칠은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을 왜들 그러냐는 듯 쳐다보았고, 퍼뜩 정신을 차린 손이종이 의원에게 데려가겠다며 달려 나와서 홍과명을 업고 밖으로 사라졌다.
“흠, 손 대협과 비무할 때는 긴장감도 있고 그랬는데, 이번 비무는 너무 맥이 빠지는군.”
사람들은 오칠의 중얼거림이 진정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었다.
다만 오칠을 적으로 삼는다는 것은 거대 문파의 수장을 적으로 둔다는 의미 말고도, 좀 더 큰 용기가 필요하다는 걸 깨닫게 되었을 뿐이다.
“자, 그럼 비무에서 제가 이겼으니 장주님께 한 가지 청을 드릴 수 있는 자격이 있는 것이겠지요?”
“…….”
장주는 아무 말도 않고 오칠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달리 청할 것은 없고, 제가 여기 온 목적이나 마무리지었으면 합니다. 십 년의 상호 불가침 조약으로 협정을 맺는 것 말입니다.”
그러면서 오칠은 품에서 하나의 문서를 꺼내들었다.
경모혁이 미리 준비해둔 양 문파 간에 지켜야 할 사항과 어떠한 사항에 대해서는 협정 파기가 된다는 등등의 사항들이 조목조목 적혀 있는 문서였다.
“여기에 많은 분들이 계셔서 굳이 참관인이나 공증인이 필요하지는 않은 것 같고, 읽어보시고 괜찮으시다면 서명을 해주십시오.”
오칠이 빙긋이 웃으며 건네는 문서를 받아든 손중헌은, 아무 말도 않고 그 내용을 읽어나갔다.
“서명하겠소.”
무슨 생각인지 손중헌은 쉽게 승낙했고, 역시 품에 넣고 온 세필과 먹물이 담겨진 통을 꺼내든 오칠은 그걸 건넨 뒤에 손중헌이 서명할 때까지 묵묵히 기다렸다.
“됐소?”
손중헌은 서명한 문서를 내밀었고, 오칠은 그걸 받아들어 확인도 하지 않고 품에 집어넣었다.
“그럼 저는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오칠은 손중헌과 손우익, 그리고 다른 식객들에게 가볍게 포권을 해 보이고는 정자를 나섰다.
“제가 배웅해드릴게요!”
이때, 손여설이 오칠을 따라나왔다.
그리고서는 당황하는 손우익과 언짢은 표정을 짓는 손중헌의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서 오칠을 끌고 정문이 있는 곳으로 사라졌다.
* * *
“무서운 자군.”
더 이상 차를 마시고 담소를 나눌 분위기가 아니기에 식객들은 자신들의 거처로 돌아갔고, 손중헌은 손우익과 둘만 남게 되었다.
그런데 오칠이 사라지고 나서 쭉 입을 다물고 있던 손중헌이 이 말을 꺼낸 것이다.
“오 장문인을 두고 하신 말씀이십니까?”
“그래. 그는 무서운 자야.”
“그의 무공은 확실히 고강했습니다. 저와 겨룰 때의 검법도 대단했지만, 권각술에도 그렇게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 못했습니다.”
“아니다.”
“예?”
“그의 무공을 두고 한 말이 아니야. 난 그 자체를 두고 한 말이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난 처음부터 고의로 그를 자극했다. 사파 세력을 제압한 자가 정파를 자처했으니, 그 진정한 속내를 끄집어내려고 했던 거지. 그런데 그는 정말 사파의 잔혹한 속성을 드러내더구나. 하지만 겉으로는 변함없이 정파인의 모습을 보여주려고 했어.”
“…….”
“아마 나의 도발에도 그는 사파의 속성을 감출 수 있었을 거야.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것이 그가 무서운 점이야. 그는 분노를 감추지 않는다. 하지만 보여주지 않을 것은 끝까지 보여주지 않을 능력이 있어. 다른 누구에게든 정파인으로 각인시킬 수 있는 거지. 그는… 조조와 같은 자다. 태평한 세상에선 순리에 거스르지 않는 자로 남겠지만, 어지러운 세상에는 간특한 영웅이 될 자야.”
“…….”
손우익은 부친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그래서 아무 말 않고 오칠의 제안을 받아들인 부친을 이해했고, 오칠에게 패배한 자신을 그럴 수 있다고 스스로 위로하고 설득했던 것이다.
‘지금의 무림이 평화롭다는 걸 다행으로 생각해야 할까?’
손우익은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하지만 무림이 언제 평화로웠던 때가 있었던가?
늘 검과 도가 난무하고, 죽음과 삶이 교차하는 곳이 무림이었다. 보이지 않을 뿐, 양육강식의 법칙이 가장 확실하게 적용되는 무림에 평화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손우익은 그렇게 믿고 싶었다. 지금의 무림은 간웅(奸雄)이 필요 없는 평화로운 시대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