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계 98화
무료소설 파계: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2,753회 작성일소설 읽기 : 파계 98화
파계 4권 - 23화
“많은 분들이 계시는군요.”
그러니 예의상으로라도 소개를 시켜 달라는 뜻이었다.
평소의 오칠이었다면, 바로 발치에 누가 엎드려서 피를 질질 흘리고 있다 해도 관심을 두지 않았을 테지만, 지금 오칠은 분위기를 좀 더 온화하게 만들어서, 좋게 좋게 손중헌을 설득해야 할 목적이 있는 것이다.
“이분들은 장원에 머물면서 내게 고견을 들려주시는 분들이오.”
손중헌은 모두가 무림에서 위명이 자자한 고수들이라며 흡족한 표정으로 한 명 한 명씩 이름과 별호를 말해주었다.
오칠은 그러냐며 일일이 정중하게 포권을 하고, 인사를 나누면서도 속으로는 대충 흘려 넘기고 있었다. 무슨 검이니, 도니 하는 말이 꼭지에 달린 별호들엔 관심도 없었고, 다시 볼 일도 없을 터인데 깊이 알아서 무엇 하겠는가 말이다.
“할아버님.”
그렇게 십여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소개하는데, 정자로 두 명의 젊은 남녀가 들어왔다.
손우익의 아들딸인 손이종과 손여설이었다.
“오 장문인을 뵙습니다.”
손이종은 조부와 여러 식객들에게도 인사를 건네고 마지막으로 오칠에게 포권을 해보였다.
나이 차는 거의 없었지만, 오칠은 일문의 수장이고 그는 그러한 신분이 아니니, 먼저 인사를 하는 것이 예의인 것이다.
그러나 그 행동이나 표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그의 부친은 지난번 비무에 크게 연연해하지 않았으나, 아들인 그는 달랐던 것이다.
“안녕하세요. 예전에 본 적이 있었지요?”
오칠은 표정이 좋지 않은 손이종과는 상반되는 밝은 얼굴로 인사를 건네는 손여설에게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그때 일은 잘되셨습니까?”
오칠은 그냥 인사만 하고 무시하려다가 생각을 바꿨다.
그러한 인연을 걸고서라도 분위기를 좋게 하는 것이 좋겠다 싶었던 것이다.
“일급 장인을 만나지는 못했지만, 좋은 검을 얻었지요.”
손여설은 허리에 차고 있는 검을 손으로 두드리며 활짝 웃었다.
“허험!”
손우익의 헛기침이 들렸다.
자리가 자리이니만치 그러한 사소한 대화는 이제 그만 하라는 의미였다.
“이런, 제가 결례를 했군요.”
오칠은 부친의 지적에도 시선을 돌리지도 않고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손여설에게서 고개를 돌려 손중헌을 바라봤다.
그리고 이제 자신이 찾아온 용건을 말했으면 싶다는 의미의 말을 건넸다. 그러니 자리를 옮기거나 다른 이들에게 자리를 피해달라고 하는 것이 어떠냐고 말이다. 하지만 손중헌은 그에 대한 대답은 않고 지난번 손우익과 오칠의 비무에 대해 말을 꺼냈다.
“아들 녀석에게서 오 장문인의 무공이 꽤 경지에 올랐다는 말을 들었소. 그런데 나이가 들면 눈으로 보지 않고는 잘 믿지를 못해서… 어떻소, 지금 여기서 이 늙은이의 안목을 넓힐 기회를 주지 않으시겠소?”
오칠은 하하하, 웃으며 일단 대답을 회피했다.
하지만 속으로는 빌어먹을 노인네, 라며 투덜거렸다.
“그저 유흥에 불과했던 일이고, 그러니 누가 이기고 지는 그런 것엔 별로 의미가 없던 비무였습니다. 손 대협이 그리 말씀하신 것도 그저 저의 체면을 생각해서 한 말일 겁니다.”
“겸손이 과하시구려. 유흥이라도 비무는 비무. 진검은 아니었으나 목검도 검이니 그 결과는 분명 실력의 고하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겠소.”
그러니 빼지 말고 한번 보여 달라는 말이었다.
‘이 늙은이가 꼭 칼 맛을 봐야 직성이 풀리겠다는 거야?’
오칠은 속으로 싸늘하게 코웃음을 쳤지만, 겉으로는 더욱 부드럽게 말을 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오늘 제가 찾아온 것은 그저 양쪽의 관계를 좋게 지속시키는 것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자 함입니다. 그러니 검이 난무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되는군요.”
“허허허! 내 생각은 조금 다르오. 무인에게는 손을 나눠보는 것이 바로 대화를 나누는 것과 다름없는 것이 아니겠소.”
손중헌은 단단히 작정을 한 모양이었다.
오칠이 아무리 말을 해도 계속해서 보여 달라, 보여 달라 하며 어린아이가 떼를 쓰듯 강요하고 있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손중헌이 정확히 뭘 요구하는지 명확하지 않았다.
그의 앞에서 검법을 시현하라는 것인지, 그와 한 판 비무를 하자는 것인지, 아니면 이곳에 있는 누군가와 한번 싸워보라는 것인지 정확하게 무얼 하라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제가 볼 때, 오 장문인께서는 여흥을 즐기는 비무 외에는 관심이 없으신 것 같습니다.”
* * *
손중헌과 오칠이 보여 달라, 안 된다, 하며 실랑이 아닌 실랑이를 벌이는 사이로 갑자기 식객 한 명이 끼어들었다.
‘이놈은 뭐야?’
오칠은 갑자기 대화에 끼어든 식객에게 시선을 돌렸다.
별호는 쌍비권(雙臂拳), 이름은 홍과명이라고 했던 자였다. 다른 식객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젊은 자로, 얼굴이 제법 반반한 사내였고, 나이는 대략 이십 대 후반쯤으로 보이는데, 양팔이 조금 긴 것이 특징이랄까.
그러나 오칠은 그런 것에는 아무 관심도 없었고, 다만 왜 저놈이 이 대화에 끼어들었나 하는 것에 조금 짜증이 날 뿐이었다.
“하니 장주님께서는 오 장문인께서 흔쾌히 나설 수 있도록 여흥거리를 만드시는 것이 어떠하신지요?”
오칠의 미간이 아주 살짝 찌푸려졌다.
그러나 오칠의 그런 반응은 순간적으로 일어난 것이었고, 사람들의 이목이 모두 홍과명과 그거 좋은 생각이오, 하며 허허허 웃는 손중헌에게 쏠려 있었기에 아무도 눈치 채지는 못했다.
다만 여전히 오칠에게만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는 손여설이 그 감정 변화를 조금 느낀 듯했지만, 그녀 역시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사실, 그녀가 이 상황에서 조부인 손중헌의 말을 막거나 하면서 오칠의 편을 드는 것도 말이 안 되는 일인 것이다.
“그럼 여흥거리로 하려면 어찌해야겠나?”
“우리 중에 한 사람이 오 장문인과 손속을 겨루어 그 승자의 청을 장주님께서 들어주시는 겁니다.”
한마디로 무적 정의파의 개파식 때처럼 상이 걸린 비무를 열자는 것이었다.
“난 좋은 방법이라 생각되는데, 오 장문인은 어찌하시겠소?”
오칠은 부드럽게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그의 내심은 싸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끝까지 비무로서 자신을 시험해봐야 하겠다는 손중헌이나, 때 아니게 끼어들어서 이상한 제안을 한 저 홍과명이란 놈에게 짜증이 났다.
신분이니, 지위니 하는 걸 따지고 싶지는 않지만 자신이 누구이던가.
무한의 절반을 발치에 둔 문파의 수장이고, 객관적으로 봐도 검룡천화장을 압도하는 힘을 가진 문파의 지존이었다. 그의 밑에는 검룡천화장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숫자의 고수들도 수두룩했다. 아닌 말로 경모혁만 하더라도 이곳에서 이길 자가 없을 테니까.
한데 그런 자신이 잘 지내봅시다, 하며 찾아왔는데 이리 무시하는 짓거리를 하고 있다니! 설마 나이가 어리다고 무시하는 걸까?
오칠의 지금 마음 같아서는 몽땅, 깡그리 도륙을 해버리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오칠은 참았다. 어디 그렇게 원하면 한번 놀아주겠다 하는 마음으로 분노를 안으로 갈무리했다.
“장주님께서 꼭 그렇게 제 실력을 보고 싶으시다면 더 이상 거절하기도 어렵군요. 좋습니다. 무인이 무공을 펼쳐 보이는 걸 망설이는 것도 예가 아니겠지요. 그런데… 어느 분이 나와 비무를 하시겠소?”
오칠은 느긋한 눈빛으로 검룡천화장의 식객들이라는 사람들을 쓱 훑어보았다.
설마 처음부터 쭉 염려스런 표정을 짓고 있는 손우익이나 불안한 얼굴의 손이종, 혹은 노골적으로 관심의 눈빛을 주고 있는 손여설이 비무를 하자고 하지는 않을 테니까. 게다가 손중헌은 나이도 그렇고, 체면 때문에 나서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
“…….”
식객들은 슬며시 오칠의 시선을 피하기 시작했다.
그들도 이미 오칠이 손우익을 패배시켰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게 사실인지, 아니면 또 다른 속사정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하오배들을 규합하여 무한을 지배하고 있던 열락문과 철근무, 그리고 천목보까지 제압하여 복속시킨 사람이 바로 오칠이 아니던가.
그러니 오칠의 무공이 강할 것이라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고, 그들이 제법 이름을 날리고 있는 낭인들이라고는 하지만 여기 있는 군자검 손우익을 이길 자가 아무도 없음을 감안할 때, 오칠을 상대하고자 하는 것은 무모한 일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설사 식객으로서 주인의 체면 정도는 세워주어야 하는 의무가 있다 해도, 그런 것도 다 상황과 상대에 따라 유동 있게 대응해야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무리 생각해도 무적 정의파의 장문인은 가볍게 대할 인물은 아닌 것이다.
게다가 그들은 처음부터 비무니, 뭐니 하는 것에 내심으로 전혀 찬동하지 않았다. 그냥 끼어들 자리가 아니다 싶어서 침묵하고 있었던 것인데, 그들 사이에서도 오만방자하고 장주에게 노골적으로 아부를 떤다고 무시하고 있던 홍과명이 마치 자신들의 대표인 양 자기 마음대로 떠들어댔을 뿐이다.
그러니 자신들에겐 오칠과 싸워야 할 의무가 없었다. 만약 그래도 굳이 따져야 한다면 유독 혼자 고개를 빳빳이 들고서 오칠을 똑바로 노려보고 있는 홍과명이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그렇겠지. 댁들도 내키지 않는 것이 당연하지.’
오칠은 시선을 회피하면서 아무 말도 없는 식객들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얼굴이 살짝 굳은 손중헌에게 고개를 돌렸다.
“이분들도 쉽게 마음을 정하기기 어려운 모양입니다. 그럼 이러는 건 어떻습니까? 장주님께서도 들으셨겠지만 전 개파식 비무에서 무기를 사용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손 대협께서 공정한 대결을 원했고 그래서 목검을 들었습니다. 그럼 이번에도 같은 제안을 드리죠. 전 무기를 사용하지 않겠습니다.”
그렇게 딱 잘라 말한 오칠은 자리에서 일어나 정자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두 손을 늘어트리고는 누구라도 나서보라는 듯 가만히 정자 안을 바라보았다.
“험!”
손중헌은 낮은 헛기침과 함께 슬며시 식객들을 둘러보았다.
저렇게까지 하는데 누구라도 나서야 하는 게 아니냐는 무언의 압박인 것이다.
식객들은 어색한 얼굴로 하늘을 보고, 땅을 보고, 탁자에 놓인 찻잔을 보았다. 혹은 머리를 긁적이고, 다리를 들어 발바닥을 살피는 자도 있었다.
손중헌은 내심 깊은 한숨을 쉬었다.
내가 뭐 하러 저런 놈들을 데리고 있으면서 비싼 밥을 먹였나, 하는 후회감이 물밀듯이 밀려왔던 것이다.
그런데 순식간에 쓸모도 없는 식충이로 전락한 식객들 사이에서 한 명이 벌떡 일어났다.
“제가 하지요.”
손중헌의 얼굴이 밝아졌다.
자리에서 일어난 사람은 비무를 제안하고, 은근히 오칠을 비아냥거렸던 쌍비권 홍과명이었다.
“오~ 홍 소협이 나서시겠소?”
손중헌의 반기는 얼굴에 홍과명은 자신만만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미흡하게나마 권에 성취가 있어 오 장문인의 상대 정도는 해드릴 수 있을 듯합니다.”
별호가 쌍비권인 자가 미흡하게 권에 성취가 있다는 말은 말도 되지 않는 것이었지만, 어쨌든 그렇게 나서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어디인가.
한데 그렇게 싸우겠다 말을 하는 홍과명은 정자 밖에 있는 오칠을 보는 것이 아니라, 손중헌의 옆에 서 있는 손여설을 보고 있었다. 다른 이들은 그저 손중헌을 바라보나 생각했지만, 그 시선은 분명 손여설을 향하고 있었고, 그 눈빛은 뭔가를 갈구하는 듯 애절하기까지 했다.
‘이제부터 잘 보시오. 저 기생오라비 같은 자를 꿇리고 소저의 그 시선을 내게 돌려놓을 테니까.’
언뜻 비무를 향한 투지로 가득해 보이는 얼굴과는 달리 홍과명은 그렇게 속마음을 다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마음을 다지는 홍과명의 시선에도 손여설은 그를 보고 있지 않았다. 그녀는 정자로 온 이후부터 쭉 오칠에게서 조금도 시선을 돌리지 않고 있었고, 지금도 역시 밖에 서 있는 오칠만을 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손여설의 모습이 홍과명의 투지를 더욱 크게 불태우고 있었다.
왜?
이유는 간단했다. 홍과명은 손여설을 좋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이곳 검룡천화장에 식객으로 들어온 것도 손여설과 좀 더 가까이 있기 위해서였고, 사문인 공동파로 돌아가지 않는 것도 다 손여설 때문이었다.
그리고 오칠을 비아냥거린 것도 손여설이 그만을 보고 있어 마음에 울화가 찼기 때문이며, 비무를 핑계로 장주에게 청을 할 수 있게 해달라고 한 것도, 그 자신이 장주에게 손여설을 달라는 청을 하여 자신의 여인으로 만들기 위한 속셈이었던 것이다.
한데 그는 오칠을 이길 자신이 있었던 걸까?
그는 그 자신이 나름의 명성은 있지만 손우익에게도 상대가 안 되는 실력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어찌 오칠과 비무할 생각을 한 걸까.
사실 홍과명도 오칠을 이길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그건 오칠이 검을 들었을 때의 이야기였다. 아니면 지금 허리에 차고 있는, 중원 최고의 명장이라고 하는 화웅섭이 만든 곤을 들었을 때나.
그러나 오칠이 맨손으로 하게 된다면, 아니 홍과명은 오칠이 맨손으로 비무할 것이라는 걸 짐작하고 있었고, 권이라면 필승의 자신을 가진 그는, 바로 이때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