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계 9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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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2,635회 작성일소설 읽기 : 파계 97화
파계 4권 - 22화
오칠은 그들 사이를 지나 태사의가 놓인 곳까지 천천히 걸어갔다.
“일어나라.”
태사의에 앉은 오칠은 오체투지한 자들에게 명했고, 그들은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켜 가부좌를 하고 앉아서는 감히 오칠을 마주볼 수도 없다는 듯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다.
“돌아갈 때가 되었지?”
오칠이 물었고, 수장들의 대표격인 화웅섭이 더할 수 없는 공경의 자세로 고개를 들어 입을 열었다.
“지난 나흘간 교주님께서 전해주신 말씀을 깊이 마음에 새겼으니, 이제 속하들은 그 말씀을 일족에게 전하는 소임을 충실히 수행하겠사옵니다.”
오칠은 개파식이 끝나고 나흘 동안 그를 찾아와 용서를 빌고, 새로이 충성을 다짐한 수장들에게 그동안 잊혔던 배화교의 경전아베스타의 내용을 전해주었다.
물론 그가 아는 것이 아닌 칠 대 교주의 기억을 그저 떠올리고 입으로 쏟아낸 것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오칠의 모습에 수장들은 그에 대해 아주 조금 남아 있었던 불신까지 완전하게 지워버렸다.
그들 배화교도들에게는 공자, 맹자의 말보다는 아베스타의 내용이 더욱 중하고, 금과옥조와 같았다. 그러니 완전히 잊히고 만 것이라 생각했던 그 귀한 내용을 전해주는 오칠의 존재가 얼마나 감격스러울 것이겠는가.
“아후라 마즈다의 말씀을 가슴에 담고 있는 한, 그대들의 존재는 그분께 영원토록 기억되리라.”
오칠은 왼손을 수평으로, 오른손은 그 위에 얹어 세로로 세우며 말했다.
바로 배화교의 상징인 성화를 표현하는 수인사였다.
“아후라 마즈다의 영광이 교주님께 전해지소서.”
수장들 역시도 손으로 성화의 모양을 표현하며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난 수장들은 다시 오칠에게 오체투지하고서 상체를 일으켰다 다시 엎드리기를 열 번이나 반복한 뒤에 조용하게 대전을 떠나갔다.
‘이제야 끝이군.’
오칠은 수장들이 완전히 사라지자 후련함을 느꼈다.
요 나흘간 그들에게 아베스타의 내용과 칠 대 교주의 기억 속에 있는 여러 교훈들까지 설명하고, 전해주느라 아주 진이 빠지는 시간들이었다.
‘그래도 무림 일통이니, 과거의 영광을 되찾자느니 하는 자들이 없어서 다행이지.’
오칠이 나름대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건 수장들 중에 호전적인 인물들이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순수하게 배화교의 신앙적 충성심으로 가득한 자들이었다. 그래서 오칠이 교주임을 자처하며 나타났을 때에도 화웅섭을 중심으로 쉽게 승복하지 않은 것이고 말이다.
사실, 과거의 기억은 무림인들에게는 물론, 배화교인들에게도 그리 좋은 기억이 아닌 것이다. 마교라는 이름이 그냥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 있는 악명은 아니었으니까.
물론 몇몇은 이백 년 전의 이야기를 듣고 그 꿈과 같은 과거를 오늘의 현실로 이끌고 싶어 하는 자들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건 역시 꿈으로 남아야 했다.
그리고 그럴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오칠이 교주로 있는 한은 그런 귀찮은 일은 절대 하지 않을 테니까.
‘그깟 무림 일통해서 뭐에 써먹어.’
오칠은 무림의 오랜 역사 동안 지존들이 꿈꿔오고 시도하고자 했던 최고의 가치를 단순히 귀찮은 짓거리로 결론지어버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쿠쿠쿵.
마침 다른 수장들을 배웅하기 위해 나갔던 경모혁이 대전으로 들어왔다.
“모두 떠났습니다.”
“그럼 이제 검룡천화장에 가야겠군.”
“제가 보필하겠습니다.”
“혼자 가는 게 좋겠어.”
“……?”
“좌사까지 가서 위압감을 줄 필요는 없잖아.”
검룡천화장에서도 오칠 혼자서 가면 보다 안심할 것이라는 뜻이었고, 경모혁도 그게 더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검룡천화장에 들렀다가 주점에서 자고 은시로 갈 거니까 그렇게 알아둬.”
“수로로 가실 생각이십니까?”
“응. 그게 편하니까.”
“정문에 마차가 준비되었습니다. 검룡천화장까지 타고 가십시오.”
“됐어. 걸어가는 게 편해.”
장원의 정문으로 가면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될 것이 뻔하기에 오칠은 후문으로 향했고, 경모혁이 그곳까지 배웅했다.
* * *
검룡천화장(劍龍千花莊)은 서북구의 중심에서 약간 위쪽으로 올라간 곳에 작은 동산을 등에 지고 위치해 있었다.
그리고 오칠은 사람들이 별로 왕래하지 않는 곳만을 이용하여 느긋하게 걸어가 미시(未時:오후 1~3시) 중반쯤에 그 검룡천화장의 정문에 다다랐다.
“어떤 용무로 오셨습니까?”
정문에 있던 두 명의 경비무사 중 좀 더 나이가 들어 보이는 무사가 습관처럼 허리에 찬 검의 손잡이를 잡고서 다가오는 오칠을 향해 물었다.
그 행색이 고급스럽고, 부채로 가리고 있던 얼굴이 드러나자 그의 적지 않은 삶에서도 본 적이 없는 굉장한 미남이었기에 무사의 어투는 절로 공손해졌다.
“오칠이란 사람이 왔다고 전하게.”
정파인으로서 찾아온 오칠의 말투는 더할 수 없이 부드럽고, 여유로웠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은 무사는 잠시 고개를 갸웃했다. 그 행색과는 달리 이름이 참으로 투박하고 촌스러웠던 것이다.
‘얼굴은 어디 대갓집 공자인데…….’
이름은 그 대갓집 아랫것들에게나 붙여질 이름이었다.
그리고 돈 있고, 위세 높은 집안의 공자라면 뒤에 호위무사나, 혹은 보필할 사람 몇은 거느리고 있어야 했지만 오칠은 달랑 혼자가 아닌가. 어쩌면 이러저러한 잡스러운 재주를 가지고 식객으로 들어오려 하는 자일 수도 있는 것이다.
지금만 해도 검룡천화장 안에는 열 명도 넘는 식객들이, 사실 말이 좋아 식객이지 할 일 없고 무공이 강한지 어쩐지 자신으로서는 확인할 수도 없는 낭인들이 굼벵이처럼 늘어져 있지 않은가 말이다.
하지만 또 오칠을 그들과 같이 치부하기에는 허리에 차고 있는 곤이 범상치 않았다. 묘하게 눈을 현혹시키는 흑광에다가 마치 살아 움직일 것 같은 용 문양하며, 게다가 오칠의 나이도 약관을 조금 넘어 보이니……….
그렇다고 그저 공자겠지, 대단한 사람인가보지, 라고 생각하기에도 뭔가 거슬렸다.
‘아구, 머리 아파!’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경비무사는 추측으로 생겨난 의구심을 바탕으로 상대를 어찌 대해야 할지 판단하는 것을 포기했다.
머리를 아무리 굴려봤자 모르는 것은 모를 수밖에 없는 것이고, 무엇이든 확신할 수 없으면 윗사람에게 맡기면 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그와 같은 하급 무사들이 어떤 상황에서든 안전하게 몸을 보전할 수 있는 가장 영리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경비무사의 옳은 판단이었다는 것이 금방 증명되었으니, 그의 보고를 받은 총관이 깜짝 놀란 얼굴로 다른 무사에게 명하여 손우익에게 소식을 전하게 하고, 그 자신은 화급한 걸음으로 정문으로 달려갔기 때문이다.
“저는 검룡천화장의 총관, 손대경입니다.”
총관 손대경은 장주의 셋째 사위로, 그 성도 원래는 다른 것이었다.
그런데 무한에서 정파 제일문이라고 하는 문파의 총관이면서도 호신할 수 있는 약간의 무공 정도만 알고 있는 그가 어찌 사위가 될 수 있었을까?
사실, 그 내막은 간단했다. 장주의 셋째 딸이 그가 아니면 죽어버리겠다는 협박과 단식까지 하는 오기를 부려, 장주가 할 수 없이 데릴사위로 받아들인 것이다.
그는 사위가 되고 뒤늦은 나이에 무공을 배웠으며, 무공에도 그리 재능이 없었다. 즉, 무림 문파의 일원로서는 매우 부족한 인물인 것이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그에겐 다른 쪽으로 재능이 있었다. 관리가 되고자 과거 공부를 하던 머리에다가, 그 자신도 몰랐던 상재(商才)가 바로 그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장원으로 들어와 채 삼 년도 되지 않아서 검룡천화장의 자잘한 대소사를 총괄하게 되었고, 오 년이 넘어서는 장원의 재산을 두 배나 불려놓았으니, 지금은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딸을 꼬여 결혼한 천덕꾸러기 사위가 아니라, 장주의 가장 자랑스러운 사위로 인정받고 있었던 것이다.
각설하고, 그런 손대경은 화급하게 달려온 걸음과는 달리 검룡천화장 총관으로서 조금도 부족하지 않은 태도와 언변으로 오칠을 대하며 장원의 내부로 이끌었다.
‘고풍스럽군.’
검룡천화장의 역사는 거의 이백 년이었다.
마교가 사라지고, 검룡이 이곳 무한에 자리 잡은 뒤에도 변함없이 이 자리에서 쭉 이어져 왔으니 말이다. 그러니 장원은 몇 번의 증축이나 보수가 있었지만 옛 모습의 대부분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 장문인께서 오셨구려.”
왼쪽에서 귀에 익숙한 음성이 들린다 싶더니, 개파식에 왔던 손우익이 다가왔다.
“약속한 대로 장주님을 뵙기 위해 찾아왔소.”
오칠은 포권을 해 보이며 손우익에게 인사했다.
손우익은 잘 오셨다는 말과 함께 밝은 웃음을 짓고는 자신이 안내하겠다며 총관을 돌려보냈다.
‘의외로 털털한 인간이었군.’
손우익은 호북의 정파문 수장들이 거의 다 모인 자리에서 오칠에게 패했다.
그것이 진검을 사용하지도, 정식이라 말하기에도 어려운 비무였다고는 해도 패배한 것은 분명한 것이다. 그런데 지금 손우익의 표정은 그때의 패배에 대해 전혀 개의치 않는 표정이었다.
“아버님께서는 오 장문인께서 찾아오시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소이다.”
손우익은 약간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오칠은 그가 왜 그런 표정을 짓는 것인지 의아했지만, 곧 그의 말을 통해 이유를 알게 되었다.
“내가 오 장문인께 완패했다는 말을 듣고는 매우 화가 나셨소. 우리의 검법은 목검을 사용해 고하를 결정할 수 없는 검법이고, 그런 비무에 참가한 저를 나무라신 겁니다. 그리고 저를 이긴 오 장문인과 직접 겨루어보시겠다고까지 말하시지 뭡니까.”
손우익은 하하하, 웃으며 말했지만 오칠은 웃을 수가 없었다.
‘설마 장주가 진짜 비무하자고는 하지 않겠지?’
오칠은 손우익의 말을, 그리고 그의 부친인 장주의 말을 그냥 화가 나서 한 말이라 믿고 싶었다.
장주와의 비무가 겁나는 것은 아니다. 이길 자신이 없어서 그런 것도 아니다. 하지만 비무를 하면 당연히 이기게 되고, 이기게 되면 검룡천화장과의 사이가 틀어지게 될 것이다.
‘그럼 안 되는데.’
오칠이 귀찮게 왜 이곳을 찾아왔겠는가.
개파식 비무에서 손우익을 참가시키기 위해 왜 눈짓을 보냈겠는가. 오칠은 만약 손우익이 비무에 참가해서 그 자신과 비무할 자격을 얻지 않았으면, 어떤 다른 명분을 만들어서라도 검룡천화장주와 만나려고 했을 것이다.
왜?
그건 다 검룡천화장과 좋게 좋게 지내기 위해서였다.
누구나 예상할 수 있듯이 무적 정의파의 탄생이 그들의 신경을 자극했을 테고, 혹시라도 뭔가 일이 생기면 두 세력 간의 싸움은 순식간에 일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왜 싸워야 하는가.
물론 싸움이 일어나면 그냥 작살내버리면 그만이다. 하지만 그래서 무슨 이득이 있는가. 그로 인해 생겨나는 일로 인해 더욱 귀찮아질 뿐이다. 그래서 불가침 조약을 맺으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손우익의 말은, 오칠이 좋게 좋게 지내고자 했던 계획을 공염불로 만드는 것이었다.
“이쪽이오.”
손우익이 가리킨 문으로 들어선 오칠은 작은 연못과 그 옆으로 만들어진 정자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정자 안에는 십여 명의 사람들이 차를 마시고, 뭔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오칠은 그 사람들 중에서 유일한 노인이 검룡천화장의 현 장주 손중헌임을 알아보았다.
‘깐깐하게 생겼는데.’
머리와 수염이 온통 희어서 언뜻 보면 고고한 학을 떠올리게 만드는 인물이었다.
“아버님.”
손우익이 먼저 정자로 걸어가서 사람들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손중헌을 불렀다.
“무적 정의파의 오 장문인께서 오셨습니다.”
손중헌은 그 말에 힐끔 시선을 돌려 정자 앞에 선 오칠을 바라보았다.
“어서 오시오. 어려운 걸음을 하셨구려.”
누가 찾아왔을 때에 흔히 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고, 뭔가 날카롭게 살피는 듯한 눈으로 말한다면 그리 좋게 들릴 수 없는 말이었다. 그러나 오칠은 웃으며 대꾸했다.
“걸어서 반 시진이면 되는 거리가 어려울 것이 뭐 있겠습니까.”
오칠은 그렇게 말하며 정자 안으로 성큼 들어왔다.
그리고는 앉으라 권하기를 기다린다는 듯 미소 띤 얼굴로 손중헌을 빤히 바라보았다.
“허험, 앉으시오.”
오칠은 고맙습니다, 하고는 얼른 자리에 앉아 자신을 흥미롭게 쳐다보는 다른 사람들을 둘러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