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계 9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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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2,487회 작성일소설 읽기 : 파계 92화
파계 4권 - 17화
범대염은 자신에게 축하 말을 할 때도 서육백을 통해 자신과 장내의 반응을 살피고는 앞으로 나서더니, 지금은 서육백과 두습의 비무를 통해 대략적인 실력을 가늠하고서야 비무에 나선 것이다.
게다가 짧은 몇 마디의 말로 자신은 대범한 무인이고, 서육백은 소심한 인물이라는 느낌을 사람들에게 전달했으니, 그 심계가 꽤나 깊은 자가 분명했다.
‘그러나 무림에서 실력이 받쳐주지 않으면 소용이 없지.’
오칠은 점점 격렬해지는 서육백과 범대염의 비무를 지켜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이전의 비무를 통해 어느 정도 힘이 소진된 서육백의 빠른 몸놀림을 효과적으로 차단하며 무차별적으로 몰아붙이는 범대염이 실력은 영 아니라고 결론지었다.
‘저 정도로는 커다란 욕심을 채우기 어려운 일이지.’
서육백 정도는 손 안에서 굴릴 머리와 무공을 갖고 있다면, 훗날 한 지역의 제일 문파를 꿈꿀 수 있을지 모른다.
하나, 오칠은 범대염의 욕심이 그 이상일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범대염 같은 자는 그 정도로는 자신의 욕심을 충족시킬 수 없는 자였다.
그래서 오칠은 범대염이 상종할 놈이 못 되는 자라고 결론지었다. 만약 자신에게 어떤 수작을 걸어온다면, 아주 작살을 내버리겠다는 생각도 하면서 말이다.
“그만!”
갑자기 이 소리 외침과 함께 경모혁의 신형이 단상을 박차고 비무가 벌어지는 장내로 날아갔다.
그리고 막 서육백의 어깨로 떨어지는 범대염의 목도를 발로 걷어찼다.
“이쯤에서 멈추는 것이 좋겠소.”
두 사람 사이에 선 경모혁은 약간 싸늘한 눈길로 범대염을 바라보았다.
공격을 방해받은 범대염의 눈빛이 아주 잠깐 날카로워졌지만 그것은 아주 순간이었고, 곧 얼굴에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뒤로 물러났다.
“한 번 집중하면 손을 쉬이 멈추지 못하는 성미인지라, 힘이 과하였소.”
어찌 들으면 사과하는 듯하지만, 실력도 안 되는 이를 상대로 너무 힘을 주었다는 뜻이나 마찬가지였다.
당연히 서육백의 얼굴은 수치심에 붉게 물들었다. 그러나 아직도 범대염의 목도를 막느라 욱신거리고 있는 손의 고통을 생각할 때, 이 이상 싸우는 것도 무리임을 인정해야 했다.
“내가 패했소.”
서육백은 경모혁에게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축 처진 어깨로 그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러나 정사를 떠나서 무림엔 패자를 향한 시선은 존재하지 않는 법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술이 취해 벌게진 얼굴로, 처음 승리했던 서육백에게 그랬든 범대염을 향해 박수를 치고 승리를 축하했다.
‘누가 나올 것이냐!’
범대염은 한 번 승리를 했으니, 이제 앞으로 어떻게 두 번을 더 이겨야 하는가를 고심했다.
물론 그 범위에는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포함된 것은 아니었다. 그가 상대하기 벅찬 몇몇 고수만이 그의 신경을 쓰이게 만들었다.
그래서 그 몇몇의 고수는 이런 여흥 같은 비무에는 자존심 때문에라도 나서지 말아주었으면 하고 생각했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그들을 이긴다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현실은 늘 그렇듯,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매우 드물었고, 그래서 범대염과 겨뤄보겠다며 걸어 나온 장년의 사내는 그가 꺼려하는 고수들 중 한 명이 되고 말았다.
“남궁관보요.”
진열장에서 목검을 골라들고 범대염 앞에 선 남궁관보는, 젊어서 수많은 여인들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들었을 것이 분명했다.
매끈하게 틀어 올린 머리에 조금 흰머리가 있고, 눈가엔 잔주름도 있었지만 그래도 잘생겼다고 생각이 될 정도로 뛰어난 외모의 소유자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잘생긴 외모는 오칠의 느낌과는 다른 것이었다.
오칠이 아름답다, 매혹적이다, 황홀하다, 라는 느낌이라면 남궁관보는 말없이 묵묵하고, 차분히 가라앉은 분위기 때문에 뭔가 정확히 꼬집을 수 없는, 굳이 표현하자면 차가운 매력이 느껴지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외모 때문에 사람들이 남궁관보를 향해 놀란 눈빛을 보내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단순히 그 이름이 갖는 커다란 위명 때문이었다.
빙검(氷劍) 남궁관보.
흑천맹 철심각(鐵心閣)에서도 가장 뛰어난 후기지수들만 모여 있다는 흑각(黑閣)의 각주이며, 흑천맹을 구성하는 문파들 중에서도 가장 강성한 오대문파의 하나인 남궁세가 가주의 아우가 바로 그였다.
그러나 그런 현재의 지위가 남궁관보가 가진 명성의 모든 것은 아니었다. 약관의 나이에 무림 출도하여 그동안 두 개의 강성한 장강수채와 세 개의 거대 산채를 홀로 괴멸시켰고, 흑천맹에 들어가 철심각 각주를 맡게 되는 팔 년 전까지 그의 손에 무너진 문파와 죽은 고수들은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가히 살귀라고 불려도 모자랄 잔혹한 명성을 가진 인물인 것이다. 하나, 그의 별호가 살귀가 아니라 빙검인 것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감정이 어린 표정을 짓지 않는 그의 괴이한 성정 때문이었다.
지금도 그의 얼굴은 그 특유의 냉막한 표정 외에는 보이지 않고 있으니, 그를 상대해야 하는 범대염의 몸이 긴장으로 인해 딱딱하게 굳어버리는 것도 충분히 이해할 만한 일인 것이다.
“남궁 대협께서 이런 자리에 나서시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소.”
장내가 웅성거리는 것은 사람들이 그만큼 놀랐다는 뜻이지만, 이 살귀를 직접 상대해야 하는 범대염만큼은 아닐 것이다.
사실, 제갈모학과 함께 앉은 이들은 모두 철심각의 각주들이고, 그 한 명 한 명이 가볍지 않은 명성을 가진 만큼 누가 나온다고 해도 범대염으로서는 결코 쉽지 않은 비무가 될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명성이 큰 만큼 자존심이 강할 테고, 그래서 가장 명성이 떨어지는 황각(黃閣)의 각주 정도가 나서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도 매우 강한 고수지만, 어떻게 머릴 굴리다 보면 장외패로 끌어갈 수 있는 가능성은 있었으니까.
하지만 남궁관보라니!
이건 말 그대로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었다.
“시작하겠소.”
남궁관보는 범대염의 조롱기가 다분한 말에도 별 대꾸 없이 목검을 비껴들었다.
‘빌어먹을!’
범대염은 이대로 물러나고 싶었다.
남궁관보는 그저 목검을 비껴들고 똑바로 시선을 보내는 것뿐이었지만, 순간 그의 전신을 싸늘하게 압박하는 기운은 이 비무가 절대 유익할 수 없다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현실은 그가 물러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여흥에 불과한 비무라 할지라도 비무는 비무! 상대가 강하다고, 두려움을 느낀다고 도망칠 수 있는 자리가 아닌 것이다.
게다가 자신은 일파의 수장이 아닌가.
자신이 물러나면 그 자신뿐만이 아니라, 패력도문까지 망신을 당해 다시는 그 명예를 회복할 수 없을 것이다. 즉, 그의 가문은 완전히 존재감을 잃고 사라지는 것과 다름없는 것이다.
‘차라리 싸우고 패하는 것이 낫지.’
그래서 범대염은 손에 쥔 목도를 좀 더 세게 움켜쥐었다.
이제 그는 여흥을 즐기는 것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싸울 수 없다. 지금 이 순간, 그의 실력을 맘껏 쏟아내야만 이제까지의 작은 이름이라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차핫!”
범대염은 크게 소리치며 무극팔로도(無極八路刀)의 광폭한 초식으로 목도를 휘둘렀다.
적당한 공격으로 상대를 살피는 등의 일반적인 방법은 남궁관보에게 전혀 통하지 않을 것이기에, 처음부터 온 힘을 다한 공격을 펼쳤다.
카칵! 카카카칵!
하지만 범대염의 목도는 남궁관보의 목검에 막히며 제 갈 길을 찾지 못하고 이리저리 튕겨나가기만 했다.
아무리 애를 써도, 뭔가 길을 찾아 목도를 휘두르려고 해도 도저히 틈새를 찾을 수가 없는 데다, 남궁관보의 무감각한 얼굴로 인해 제대로 먹히고 있는지 어쩐지도 알 수 없으니, 범대염은 점점 절망감만을 느낄 뿐이었다.
콰직!
“윽!”
범대염은 공격을 견디지 못한 그의 목도가 산산조각 나며, 자신의 얼굴로 날아오는 것을 피해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어느새 그의 목젖에 바짝 다가와 있는 목검을 따라 시선을 올리고는 허탈한 한숨을 쉬었다.
“내가 졌소.”
남궁관보는 대꾸도 않고 목검을 거두어 한 걸음 물러나 섰다.
범대염은 남궁관보가 이겼다는 경모혁의 음성과 남궁관보를 향해 갈채를 보내는 사람들의 환호를 들으며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사실, 남궁관보와 싸워서 아무런 부상도 입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라 여겨야 했다. 그러나 그의 가슴속에 자리한 욕심은 아직도 그걸 인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가슴을 꽉 채우고 있는 커다란 욕심을 언제고 꼭 터트리겠다는 생각을 술을 마시면서 곱씹어갈 뿐이었다.
* * *
―누가 나올 거 같나?
오칠은 옆에 서 있는 경모혁에게 전음으로 물었다.
―아마도 유신명이 나올 것입니다.
―유신명? 그가 누구지?
―열혈군(熱血群) 천군(天群)의 군장입니다.
―철심각 최고수를 상대하려면 그에 맞는 실력자가 나서야 한다는 말이군.
오칠은 경모혁이 알려준 유신명이란 자를 향해 시선을 보냈다.
그리고 우연인지 무엇인지, 유신명의 시선과 오칠의 시선이 잠깐 동안 마주쳤다.
‘무슨 꼬챙이 같군.’
오칠이 유신명을 보고 느낀 감상이었다.
검은 턱수염을 가슴까지 길게 기른 그는 팔다리가 길었지만, 전체적으로 살집이 없어 외견이 마치 날카로운 꼬챙이처럼 느껴지는 자였다. 그러나 아마도 그러한 신체적 특징이 그의 무공을 더욱 강하게 하는 것이 분명했다.
“신창!”
“신창!”
작은 탄성들이 장내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경모혁의 말대로 백천맹의 대표로 유신명이 나왔는데, 사람들은 그를 향해 신창이라 부르며 기대감 가득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유신명의 별호가 신창인가?
―그렇습니다. 그의 이십팔섬추혼창(二十八閃追魂槍)은 무림 제일의 창법이라 불리고 있습니다.
―그래?
오칠은 얼마 전 크게 싸우고 의형제를 맺은 노백을 떠올렸다.
그리고 방망이로 창법을 펼치던 노백과 비교할 때 유신명이 어느 정도의 실력을 보여줄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좋은 놈이군.”
유신명은 진열대에서 창날 대신 둥글게 헝겊으로 감싸진 연습용 목창을 집어 들어 무게를 가늠해보았다.
그리고 창처럼 가볍게 찌르고 휘둘러보더니 만족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통성명은 필요 없을 것 같소만?”
유신명은 외모와는 조금 어울리지 않게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고, 남궁관보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럼 어디.”
유신명은 남궁관보와 넉 장의 거리를 유지한 채 목창을 앞으로 겨누었다.
“…….”
남궁관보의 표정은 변함없었지만, 목검을 잡은 그의 손은 자연히 정면을 막아서듯 앞으로 내밀어졌다.
뭔가 여유로운 분위기를 풍기던 유신명의 전신에서 갑작스럽게 솟구치는 날카로운 예기가 절로 남궁관보를 움직이게 만든 것이다.
‘흠, 확실히 지금까지의 놈들하고는 다르군.’
오칠은 저 아래에 앉아 있는 사람들보다 먼 단상 위쪽에 앉아있었지만, 유신명과 남궁관보가 흘려보내고 있는 기의 움직임을 명확하게 느끼고 있었다.
‘무림에는 저 정도의 고수가 얼마나 되려나?’
오칠이 아는 이들이라면 소림사의 무승들, 경모혁이나 화웅섭 정도였다.
‘흔하지는 않겠지.’
오칠이 판단할 때, 남궁관보나 유신명은 경모혁과 화웅섭에게 서너 수 정도 뒤지는 수준이었다.
아마도 백천맹이나 흑천맹에서도 저 정도의 고수들은 많다고 해봐야 스무 명 정도에 불과할 것이 분명했다. 물론 구대문파나 오대세가 등의 속내를 꼼꼼히 뒤져서 전대 고수까지 따져본다면 그보다는 더 많겠지만, 그래봤자 백 명이나 그보다 조금 더 많은 정도밖에 되지 않을 것이 아니겠는가.
‘배화교의 힘이 얼마만큼 강한지 대충 알겠군.’
만약 오칠 자신이 단단히 욕심을 부려 현재 남아 있는 배화교도들을 통합하고, 알고 있는 무공을 전수하여 세력을 키운 뒤 무림 일통을 노린다면, 지금처럼 정사가 분리되어 대립하고 있는 무림이 제대로 막아낼 수 있을까, 라고 생각해보니 확실하게 아니다, 라고 결론지을 수 있었다.
다른 건 둘째 치고, 자신이 고수들을 하나씩 하나씩 찾아가 죽인다면 무림에서 저항할 수 있는 체계는 완전히 무너져버릴 테니까.
‘무림을 너무 무시하는 걸까?’
세상이란 모르는 것이다.
어딘가에는 그보다 더욱 강한 고수가 있을지 모른다. 흔한 말로 기인이사가 모래알처럼 많다고도 하니, 죽여도 죽여도 계속해서 저항하는 자들이 나타날 수도 있는 것이다.
‘별 생각을 다 하는군.’
오칠은 자신의 생각에 내심 헛웃음을 지었다.
자신은 무림 일통이니, 배화교 천하니, 하는 것에는 아무 관심도 없었다. 과거 어릴 때는 무림 제일 고수가 되면 좋을 것이다, 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모두 의미 없는 것이었다.
물론 감정 결핍으로 의지가 사라졌기 때문일 수도 있고, 혹은 이미 자신이 강하기 때문에 그런 명성 따위에는 아무 관심도 없어진 것일 수 있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자신은 자유롭다는 것이다.
누구도 자신의 의지를 좌지우지할 수 없고, 스스로의 의지가 아니라면 결코 손끝 하나 움직이게 할 수 없다. 다른 사람은 인정하지 않는다 해도 이제 오칠은 스스로 완전한 자아를 갖춘 자신만의 천하제일인인 것이다.
“차합! 합! 합! 합!”
카카카카카카칵―!
유신명의 짧은 기합소리와 함께 목검과 목창이 맞부딪쳐가는 충격음이 장내에 울려 퍼졌다.
오칠은 더 이상의 상념은 멈추고 그런 유신명과 남궁관보의 비무에 시선을 집중했다.
카카칵! 카카카칵! 카카카카칵!
“하하하! 좋구나, 좋아!”
유신명은 무엇이 그리 흥이 나는지 연신 탄성을 지르고, 장단을 맞추듯 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나 그와는 반대로 남궁관보는 광폭한 바람을 일으키며 목검을 휘두르면서도 일체의 소리나 표정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송곳처럼 찔러오는 창날을 왼쪽, 오른쪽, 상하로 쳐내며 유신명의 틈새를 찾아 쉼 없이 공격할 뿐이었다.
“정말 대단하군!”
“역시 빙검과 신창이야!”
조금도 눈을 떼지 못하는 사람들은 두 사람의 현란한 비무에 탄성을 내뱉으며 연신 감탄을 표했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두 사람의 모습을 명확하게 볼 수 없었다. 두 사람의 현란한 움직임은 보통 사람은 절대로 파악할 수 없는 수준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