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계 9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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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2,568회 작성일소설 읽기 : 파계 91화
파계 4권 - 16화
오칠의 시선은 약간의 의도를 담고 검룡천화장의 손우익에게 잠시 멈췄다가 다른 쪽으로 돌려졌다.
그리고 그 잠깐뿐이라도 손우익은 오칠이 시선을 통해 이번이 무적 정의파와 검룡천화장이 마찰을 일으키지 않을 수 있는 명분을 얻을 기회라는 걸 암시한 것임을 눈치 챘다.
‘만약 그러한 의도가 확실하다면 우리에게는 결코 거부할 수 없는 조건이 분명하지.’
갑작스런 비무대회에 황당함까지 느끼고 있던 손우익은 이 비무 참가에 대해 심사숙고하기 시작했다.
“오 장문인께 묻고 싶은 것이 있소!”
갑자기 들려온 말에 웅성거리던 장내에 다시 침묵이 감돌았다.
“우리 쪽의 대표가 오 장문인과 비무할 자격을 얻으면 어찌 되는 것이오? 우리도 그 결과에 해당되는 것이오?”
말을 한 이는 초대받지도 않았는데 흑천맹의 대표로 찾아온 제갈모학이었다.
그는 지금 자신들 사파 연합도 무적 정의파와 친구가 될 수 있느냐고 묻는 것이다. 무한의 정파 무림인들을 모아놓고 천목보 등이 새로이 정파문으로 거듭나려고 하는 이 자리에서 말이다.
당연히 사람들은 오칠의 입을 주시하게 되었다. 그가 어찌 말을 할지 너무나 궁금한 것이다.
“남아가 한번 내뱉은 말을 다시 주워담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 우리 무적 정의파는 나를 비롯해 가장 아래에 있는 사람까지 신의를 중요시하고, 말을 함에 있어 천금을 내미는 것처럼 여기고 있소.”
“그렇다면 오 장문인의 대답은?”
보다 분명한 대답을 원하는 제갈모학의 도전적인 물음에 오칠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흑천맹이 자격을 얻는다면 우리 무적 정의파는 의를 나눈 친구로서 흑천맹을 대할 것이오.”
웅성웅성.
사람들은 도저히 입을 다물 수 없다는 듯 소란스러워졌다.
이곳에 모인 무림인들은 거의 전부가 정파인들이었으니, 오칠의 말이 얼마나 놀라운 일이겠는가. 하나, 그들은 오칠의 말에 토를 달 수가 없었다.
신의를 중요시하고, 한 번 입에 담은 말을 천금처럼 무겁게 여기어 반드시 지키겠다고 하는, 가장 정파인다운 소리를 하는데 문제 삼을 수는 없는 일인 것이다.
“오 장문인의 말에 이 제갈 모는 감동했소!”
진짜 감동했는지 어쨌는지 그 정확한 진심은 알 수 없지만, 제갈모학은 일어나 포권을 취하며 살짝 머리까지 숙였다.
‘그렇다면 우리가 반드시 그 자격을 가져야 한다.’
제갈모학은 갑작스런 천목보의 이탈로 생겨날 문제들이 이 비무를 통해 해결될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러나 그는 바보가 아니었다.
저 앞에 백천맹의 머리라고 하는 공야정진이 있는데, 자신들이 자격을 얻도록 방관하고 있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제갈모학은 그가 데리고 온 철심각(鐵心閣)의 네 각주들 중 누굴 내보내야 할지에 대해 신중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하면 이 비무대회를 모두가 허락한 것으로 알고 시작해보도록 하겠소. 경 보주, 비무대회의 세부적인 규칙은 어찌해야 하겠나?”
오칠은 그의 옆에서 보좌하듯이 공손하게 서 있는 경모혁을 돌아봤다.
경모혁은 잠시 생각을 하는 듯하더니 입을 열었다.
“이 비무는 응당 오늘의 개파식을 축하하는 여흥으로서 치러져야 할 것입니다.”
경모혁은 경가장에 있는 나무로 만든 수련용 무기들을 사용해야 할 것이며, 바닥에 깔아놓은 철판을 비무대로 하여 그 밖으로 벗어나면 지는 방식을 취하고, 위험한 상황은 최대한 막기 위해 그 자신을 비롯한 모두가 참관인의 자격으로 비무를 객관적으로 판단하여 승패를 결정해야 할 것이라 말했다.
“당연히 그래야겠지. 경 보주는 비무에서 불미스런 일이 발생하지 않게 잘 살펴보게.”
“예, 오칠님.”
경모혁은 공손하게 머리를 숙였고, 여전히 그가 이번 무적 정의파의 개파를 막후에서 공작했다고 생각했던 이들의 마음을 흔들리게 했다.
다만 경모혁이 왜 오칠을 장문인이라 칭하지 않고 이름을 부른 것인지 사람들은 그것이 약간 의아했다. 오칠이 누구에게든 그렇게 자신을 부르라 했다는 것을 그들은 알지 못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조금 뒤, 경모혁의 지시로 나무로 만들어진 병기와 상금으로 주어질 황금 백 냥이 장내에 준비되었다.
“금 문주.”
오칠은 단상 아래에 열락문 문주 등과 함께 자리를 잡고 앉아 있던 금철산을 불렀고, 금철산은 벌떡 일어나 머리를 숙였다.
“예, 오칠님.”
“나 또한 비무에 참가하는 것이니, 이 곤과 황금 백 냥을 그대에게 맡기겠다.”
오칠은 손에 들고 있던 묵철곤을 금철산에게 던졌고, 금철산은 묵철곤을 공손히 받아들어 황금 백 냥과 함께 그의 앞에 가지런히 놓아두었다.
그리고는 누구도 손을 댈 수 없다는 듯 온몸에 힘을 꽉 주고 눈을 부라리니, 언뜻 우스워 보이면서도 그 기세가 가볍지 않아 그와 눈을 마주치기가 꺼려질 정도였다.
“자, 이제 시작해봅시다. 누가 나서시겠소?”
오칠이 의자에 앉아서 장내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사람들은 잠시 서로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흑천맹에서도 나설 의향을 보였으니, 먼저 시작하는 것이 부담스러운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무림인들은 술에 취해 있었고, 그것이 그들을 더욱 호기롭게 만들었다.
“이 몸이 먼저 나서겠소.”
피부가 가무잡잡하고, 단단한 인상을 가진 장년인이 벌떡 일어나 비무대로 지정된 쇠판으로 걸어 나왔다.
“난 금마장 장주 두습이라 하오.”
금마장(金馬莊)은 마방(馬房)을 생업으로 삼는 곳으로, 그래서 무림 문파이며 상인 가문이라는 양쪽의 입장으로 개파식에 참석했다.
“무기를 고르시오.”
경모혁이 병기 진열장을 가리켰다.
금마장은 마방을 하는 만큼 장원 사람들 모두 승마 실력이 매우 뛰어나다고 알려졌다. 하지만 그들이 더 자부심을 갖는 것은 선풍십팔도(旋風十八刀)라 하는 도법이었다. 그래서 두습은 한쪽에 놓인 갖가지 나무 병기로 가득 찬 진열장으로 다가가 살펴보다가 약간 두껍고 긴 목도를 집어 들었다.
“난 이것으로 하겠소.”
목도를 이리저리 휘둘러보며 두습은 쇠판에 서서 주변을 쓱 둘러보았다.
“누가 나와 함께 놀아보겠소?”
“내가 상대해드리리다!”
가볍게 공중으로 훌쩍 날아올라 두습의 앞에 내려선 사람은 창응방 방주 서육백이었다.
그는 이번 비무를 통해 확실하게 무적 정의파와의 관계를 공고히 하려는 생각인 것이다.
“무기를 고르시오.”
“난 이 두 손이 무기라오.”
서육백은 양손을 갈고리처럼 구부리며 히죽 웃었다.
자신의 본래 무기를 사용하는 것이 아닌 나무로 만들어진 연습용 병기를 사용한다는 규칙이 있다면, 자신처럼 맨손으로 응조권을 사용하는 사람이 더욱 이득이라는 득의의 미소였다.
그는 이번 비무가 자신에게 매우 유리하며, 반드시 오칠과의 비무 자격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두습은 그런 서육백의 웃는 얼굴에 내심 코웃음을 쳤다.
목도라고 해도 재질로 볼 때, 단단하기 그지없다는 청피목(靑皮木:물푸레나무)으로 만들어진 것이 분명하고, 그렇다면 약간의 강도와 날카로움에만 차이가 있을 뿐, 이 목도는 쇠로 만들어진 도검과 크게 다를 것이 없기 때문이었다. 즉, 자신이 불리할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하지만 두습은 속마음을 감추고 목도를 내밀어 기수식을 취했다.
“창응방의 매서운 손맛은 익히 들어왔소. 오늘 그 손맛을 경험할 기회를 가지게 되었으니, 이 두습은 가슴이 다 뛰는구려.”
서육백도 그에 대응하듯 양손을 갈고리처럼 구부려 견제하듯 앞으로 내밀면서 기수식을 취했다.
“본인이야말로 금마장의 빠르고 힘찬 도법을 견식하게 되었음을 기쁘게 생각하오.”
정파의 인물들이 대개 그렇듯 매우 형식적인 대화를 통해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해 탐색하는 시간을 가졌다.
‘공명정대하고, 호탕한 정파인의 모습을 보여야 한다기에 어쩔 수 없이 하는 것이지만… 저 자식들 하는 꼴이 한 대씩 때려주고 싶을 정도로 정말 지루하군.’
오칠은 겉으로는 웃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하품을 하고 있었다.
이 비무는 무적 정의파의 이름을 초대된 이들에게 각인시키고, 밖으로 넓게 소문을 만들어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함은 물론, 자신에 대해 불신감과 의구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존재감을 확실하게 인식시키기 위해 계획된 비무였다.
그러나 이미 알고는 있었지만 정파인들의 하는 짓이란 정말 하품이 나올 정도로 지루하고, 형식적이기 그지없었다. 싸우면 싸우는 것이지, 상대가 어떠어떠하고, 진심도 아닌 칭찬은 뭐 하러 저리 주절주절 늘어놓는단 말인가.
“조심하시오!”
본격적인 비무의 시작은 두습이 먼저였다.
견제하듯 앞으로 내밀고 있던 목도를 뒤로 빼듯 돌렸다가 내리치며 서육백의 어깨를 노린 것이다.
“좋은 공격이오!”
빠르고 힘찬 목도의 움직임을 여유롭게 칭찬하며 서육백의 신형이 뒤로 빠졌다.
아니, 빠졌다고 생각한 순간에 공중으로 솟구쳐 두습의 뒤쪽으로 내려서고 있었다. 경공 방면에 뛰어나다고 하는 창응방의 진가를 드러내는 확실한 회피 동작이었다.
하지만 상대의 뒤로 내려선 만큼 단순히 회피 동작만은 아니었다.
슈악―
날카롭게 구부러진 손이 두습의 등을 노리고 휘둘러졌다.
뒤통수에 눈이 달리지 않았다면 피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고 날카로운 공격, 하지만 두습은 볼 수는 없어도 느낄 수는 있다며 목도를 뒤로 휘둘러 서육백의 손을 막고, 앞으로 한 걸음 움직여 몸을 뒤틀면서 서육백의 미간을 노리고 찔렀다.
“엇!”
서육백은 너무 간단하게 막혔다는 것에 당황하여 놀란 신음을 터트렸다.
게다가 목도는 베는 무기이고 찌르는 데는 효용성이 없었지만, 한 치 앞까지 찔러 들어온 목도를 그냥 무시할 수도 없었다.
티티팅―
날카롭게 단련된 손가락이 단단한 목도의 날을 튕겨내고, 왼쪽으로 빙글 회전한 서육백은 곧바로 두습의 허리를 노리고 양손을 내밀었다.
촤악―
두습이 황급히 뒤로 물러났지만 그의 옆구리 옷이 거칠게 찢어지고, 그의 얼굴은 당혹감으로 인해 붉어졌다.
그러나 일순간에 선기를 잡은 서육백은 두습이 당황했건 어쨌건 상관하지 않고 다시 몸을 회전시키며 두습의 오른쪽으로 돌고 어깨를 움켜잡으려 했다.
두습은 황급히 서육백의 날카롭게 세워진 손을 막기 위해 몸을 돌렸다. 하지만 서육백은 이미 반대쪽으로 움직인 상태. 두습은 이를 악물고 다시 서육백을 따라 몸을 돌렸다.
“아!”
“저런!”
보는 이들의 안타까운 탄성이 터져 나왔다.
두습은 도저히 서육백의 움직임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온 힘을 다해 좌우로 움직이며 공격을 시도하려는 서육백을 막기 위해 몸을 틀었지만, 매번 그런 서육백의 발끝만을 볼 수 있을 뿐이었다.
사람들은 역시 금마장은 말 위에서만 힘을 발휘하는구나, 라고 생각했고, 서육백의 승리로 끝날 것이라 결론지었다.
“하앗!”
그러나 두습은 구경하는 이들처럼 쉽게 결론짓고 질 수가 없었다.
그는 서육백의 동작을 좇는 것이 무의미함을 뒤늦게라도 깨닫고, 뒤로 멀찍이 물러나는 방법을 택한 것이다. 그리고 힘찬 기합과 함께 선풍십팔도의 초식들을 거미줄처럼 뽑아내며 서육백을 압박해갔다.
티티팅! 티티팅! 티티티팅!
“오!”
“아!”
신법의 이점을 차단시키는 정공적인 공격에 어쩔 수 없이 막을 수밖에 없었던 서육백은 연신 뒤로 밀려났다.
‘이겼다!’
두습은 조금 전까지 그를 괴롭히던 당혹스러움을 날려버리고 웃었다.
그들은 한계가 없는 맨땅이 아니라, 장외패가 있는 비무대에서 싸우는 것이었고, 두습에겐 이제 더 물러날 공간이 없기 때문이었다.
“차앗!”
결정적인 공격으로 패배를 안겨주겠다는 듯 두습의 힘찬 외침을 따라 목도가 빠르고 크게 좌우로 휘둘러졌다.
쇠판의 모서리에 몰린 서육백은 목검을 피해 더 이상 물러날 수도, 옆으로 피할 공간도 없었다. 누가 보더라도 장외패만이 남은 것 같았다.
‘방심이 틈을 만들었군.’
그러나 장내의 몇몇 고수들은 그런 사람들의 생각에 동감하지 않았다.
서육백이 아래로 낮게 엎드렸다가 솟구쳐 올라 목도를 걷어차고, 두습의 등 뒤로 내려서며 그의 등을 손바닥으로 격타해 쇠판 밖으로 밀려나게 만들면서 그들의 짐작이 맞았음을 증명했다.
“그만, 서 방주께서 이기셨소.”
순간, 다시 목도를 휘두르려던 두습은 경모혁의 날카로운 외침에 우뚝 멈추고,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곧 자신이 졌음을 승복하고, 손속에 사정을 두어 고맙다는 말을 한 뒤 자리로 돌아갔다.
짝짝짝!
“훌륭하오!”
“대단했소!”
“절묘한 신법이었소!”
사방에서 박수와 칭찬이 쏟아져 나오고, 서육백은 좌우로 포권하며 승리를 만끽했다.
그러나 그는 이제 한 번의 승리를 했을 뿐이다. 비무의 규칙대로라면 아직 두 번의 승리를 더 얻어야 하는 것이다.
“이번엔 나하고 한판 놀아봅시다!”
쾅!
술잔을 쭉 들이켜고 부술 듯이 탁자로 잔을 내려놓은 덥수룩한 수염을 기른 장년의 사내가 훌쩍 뛰어올라 무기 진열장에 내려섰다.
그리고 방금 패배하고 자리로 돌아간 두습처럼 두껍고 긴 도를 꺼내들어 쇠판 위로 걸어 나와서는 서육백을 향해 목도를 겨누니, 그는 패력도문의 문주 범대염이었다.
“범 문주께서는 늘 저의 뒤를 따르시는구려.”
서육백은 다짜고짜 목도를 들어 겨누는 범대염의 행동에 기분이 상한 듯 눈살을 찌푸렸다.
게다가 처음 개파식이 끝나고 서육백이 오칠에게 축하의 말을 전할 때도 범대염이 바로 그 다음으로 따라했음을 지적하며 너무 공교로운 우연이 아니냐는 듯 조롱기 어린 말을 했다.
그러나 범대염은 그런 말에 개의치 않고 히죽 웃었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소. 자, 잔말은 그만 하고 이제 붙어봅시다!”
그 행동만 보고 말만 듣자면 범대염은 전형적인 무인과 다름없었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그 앞에 있는 서육백은 싸움을 함에 있어 말만 많은 인물로 비쳐지고 있는 것이다.
‘저자, 생긴 것 같지 않게 음험한 속내를 가지고 있군.’
오칠은 흥미롭다는 듯 범대염에게 시선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