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계 8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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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2,533회 작성일소설 읽기 : 파계 89화
파계 4권 - 14화
두둥― 두등― 두등― 두등―
대북소리와 함께 갑자기 빠르게 터져 나오기 시작하는 소북소리를 따라 나머지 거한들도 쇠판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런데 그렇게 쇠판을 모두 내려놓자, 비어 있던 공간에 좌우 폭이 열 장에 이르는 네모난 흑색 쇠판이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비무대?’
다리로 받치고, 높이 세워져 있지 않았을 뿐이지, 거대한 쇠판의 모양은 사람들에게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물론 상인들의 경우에는 맨땅에 흙도 묻히지 않고 누군가 지나갈 수 있게 발판을 만든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이 있었다. 혹은 보기에 밋밋하니 뭔가 그럴듯하게 보이려고 했나 보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말이다.
하지만 이곳에는 상인들보다 무림인들이 많았고, 그들의 작은 중얼거림을 통해 쇠판은 비무대가 확실해, 라는 쪽으로 조금씩 굳어져갔다.
그러나 비무대처럼 보이는 쇠판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거기까지였다. 철근문의 거한들이 나온 문에서 이번에는 하늘거리는 옷자락을 흩날리며 백여 명에 이르는 아름다운 여인들이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열락문이다!”
사람들은 철근문 때보다 일찍 여인들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알아냈다.
물론 여인들의 가장 앞에는 문주 매소옥과 그녀의 두 딸이며 무한에서 적청쌍미라고 불리는 매 자매가 그 아름다움을 맘껏 뽐내면서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기 때문에 정체를 알아내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드딩― 드딩― 드드딩― 드딩!
비파(琵琶) 소리였다.
어느새 북의 웅장함은 사라지고, 비파의 빠르고 현란한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다. 그리고 그 소리에 맞추어 열락문의 여인들은 소매 끝에 달린 천을 좌우사방으로 휘날리며 황홀해질 정도로 아름다운 춤을 선보였다.
“아!”
“아!”
순간, 사람들은 감탄성을 내질렀다.
여인들의 소매 속에서 오색 빛의 조각들이 뿜어져 나오며 그녀들이 지나오는 길을 뒤덮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인들의 행렬이 사람들이 앉은 곳을 지날 때쯤, 또다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여인들이 눈송이처럼 던져대며 바닥을 뒤덮어가던 그 조각들이 종이가 아니라 비단을 잘라낸 것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비단을 잘라 길을 만든다.
그 단순한 표현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는 이곳에 많은 상인이 있기 때문에 쉽게 설명할 수 있었다.
얼마나 많은 오색의 비단이 있어야 하는지, 그 비단들을 구하려면 얼마나 많은 돈이 드는지, 그렇게 막대한 거금을 들여 사서 비단들을 쓸모없게 모조리 조각내려면 얼마의 시간이 드는지, 그리고 그런 일을 마음먹으려면 얼마나 배포가 커야 하는지에 대해 이곳에 자리한 상인들은 침이 마르도록 쏟아낼 능력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어떤 사람도 그러한 점에 대해 묻지 않았다. 그들은 그저 열락문의 기녀들이 색혼공을 바탕으로 펼치고 있는 춤에 빠져 들어가고 있을 뿐이었다.
기녀들의 달콤한 체향과 그녀들의 얼굴을 물들이고 있는 붉은 색기,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아름답게 표현하고 형상화시키는 몸짓에 사람들은 황홀경을 느끼고 있었다.
징~!
“……!”
“……!”
열락문의 기녀들은 어느새 공간의 끝에 다다라 철근문의 무사들과 반대편에 멈춰 서 있었고, 묘한 분위기에 젖어들어 멍해 있던 사람들은 그들의 이성을 일깨우는 징 소리에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그들은 소리의 근원지로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누구지?’
철근문의 무사들이 나오고 열락문의 기녀들이 나온 곳을 통해 청의를 입은, 뚱뚱하지도 않고 마르지도 않은 균형 잡힌 몸매를 가진, 멋스럽게 콧수염을 기른 장년의 사내가 징을 치며 걸어 나왔다.
하지만 사람들이 순간 그러한 의문을 떠올린 것은 조금 전의 여운으로 머리가 멍해 있었기 때문이었고, 그들은 곧 징을 들고 나온 장년인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경 보주!”
몇 명이 경악에 찬 음성으로 소리쳤고, 모든 사람이 그 목소리에 담긴 감정에 동화되어 눈동자를 크게 떴다.
‘말도 안 돼!’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무한 사파 제일 고수였던 그가 징을 치고 나오다니! 철근문의 문주가, 열락문의 문주가 그럴 수는 있어도 그까지 행렬의 선두를 맡고 있다는 것은 도저히 상상치도 못했던 일이었다.
더구나 모든 사람이 이번 무적 정의파의 등장을 천목보의 변신을 위한 연극 정도로 생각하지 않았던가.
드딩― 드딩― 드드딩!
징~!
두둥― 두등― 두등―!
징~!
삐리~ 삐리삐리~ 삐리리~!
징~!
사람들의 놀란 감정과 복잡한 심경을 흩어놓기라도 하겠다는 듯 사방에서 가지각색의 악기가 경쾌한 장단의 소리를 뿜어냈다.
들리는 소리와 보이는 광경이 일치하는 것은 청의를 걸치고 징을 치는 경 보주의 모습뿐이었지만, 사방에서 들려오는 음악 소리에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흥겨운 마음이 드는 자신의 감정 변화에 황당함을 느껴야 했다.
음악에는 묘한 힘이 있었다. 마치 열락문의 기녀들이 뿜어내던 가슴 뛰게하는 두근거림과 비슷한, 뭔가 마음을 흥겹게 만드는 힘이었다. 말 그대로 그것은 음공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모를 것이다. 지금 들려오는 음악이 배화교에 은밀히 전승되는 경심쾌악(心輕快樂)이라 하는 행진악(行進樂)이라는 것을.
사람들 중에는 고수가 적지 않았지만, 열락문의 여인들이 섭혼공이라 하는 사공을 바탕으로 춤을 추었다고 생각하지 못했던 것처럼, 그들은 음악을 통해 배화교를 떠올릴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왜 눈치 챌 수 없는 걸까?
이백 년을 넘어서도 아직까지 마교에 대한 경계심을 버리지 못한 정사맹이 아니었던가. 지금도 마교의 재등장을 대비한다는 명목 하에 맹을 유지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하지만 이유는 간단했다. 그들은 마교에 대해 잘 모르고 있는 것이다.
과거 마교와의 싸움을 겪었던 정사 무림이지만, 그때도 그들은 지금처럼 마교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들과 싸우면서 어느 정도는 무공에 대한 정보를 얻었지만, 마교의 사상과 종교적 근원, 그들의 생활 등등에 대한 것에는 아무런 정보도 얻지 못했다. 아니, 그들은 그러한 것에 관심이 없었다. 그저 마교는 죽여야 할 대상이었고, 그래서 싸우고, 죽일 뿐이었던 것이다.
더구나 칠 대 교주의 갑작스런 죽음과 함께 크게 패하고 흩어진 교인들은 성지를 떠나면서 불태워버리는 등의 방법으로 그들에 대해 알 수 있는 어떤 것도 남겨놓지 않았기에, 정사 무림인들이 뒤늦게라도 얻을 수 있는 정보는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기록을 남기는 것에 대해 투철하지 않았던 무림인들은 당시 파악했던 정보조차 후인들에게 제대로 전달하지 못했고, 현재의 무림인들은 그저 구두로, 혹은 전설 같은 이야기로만 이백여 년 전에 있었던 마교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밖에 없었다.
마교에 대한 복수심이 가장 강했다는 마복동에서도 경험담 정도만을 간단하게 적은 책 한 권이 남겨져 있다고 하니, 무림인들이 갖는 마교에 대한 두려움은 참으로 추상적이다, 라고까지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저 사람은?”
사람들은 새롭게 모습을 드러낸 어떤 인물을 향해 시선을 집중했다.
경 보주가 문을 통해 천천히 걸어 나오고, 곧바로 청의를 걸친 네 명의 사내들, 사두문이란 이름을 걸고 요즘 한창 이름을 얻고 있는 왕공단 등 네 명의 대장이 지붕 없는 가마를 어깨에 짊어지고 나타났는데, 그 단조로운 형태의 가마 위에는 백색의를 입은 너무도 아름다운 미남자가 오연히 서서 연무장을 내려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저 미남자가 무적 정의파의 장문인이구나!’
‘정말 잘생겼군!’
‘무한의 여인들이 마음이 싱숭생숭하여 밤잠을 못 이룬다는 소문이 있더니만!’
오칠의 존재만으로도 사람들은 그 단순한 모양의 사인교가 빛을 발한다고 느낄 정도였다.
하지만 그러한 느낌보다 사람들은 미남자의 등장에, 그리고 그가 누구인지에 대해 더욱 촉각을 곤두세웠다. 특히나 손이종의 신경은 더욱 예민하게 곤두섰다.
그는 저 사인교에 올라 있는 인물을 본 적이 있었고, 저 인물을 보았을 당시에 자신과 여동생이 나누었던 대화가 참으로 바보 같던 것이었음을 기억해냈기 때문이다.
“장문인을 뵈옵니다!”
먼저 화려하고, 독특하게 등장하여 단상 아래에 모여 있던 철근문과 열락문의 인물들이 일제히 한쪽 무릎을 꿇으며 소리쳤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광경을 통해 미남자가 무적 정의파의 장문인이라는, 자신들의 짐작이 맞다는 것을 확인했다.
오칠.
동구 지역을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던 천목보를 패배시키고, 철근문과 열락문까지 대외적으로 하부 문파로 만들어 무한의 세력 판도를 일순간에 뒤흔든 무적 정의파의 장문인이 바로 저 아름다운 젊은 사내를 지칭하고 있는 것이다.
경천미공자(驚天美公子).
사실 오칠에게 붙여진 그 대단한 별호만으로도 짐작할 수 있는 일이 아니겠는가.
징~!
사람들을 흥겹게 만들던 경심쾌악(心輕快樂)의 음률은 어느덧 사라지고, 장내에는 경 보주가 만들어내는 징 소리만이 잔잔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징~!
소리와 경 보주의 걸음이 일치되고, 그의 걸음은 가마를 짊어지고 뒤에서 따르고 있는 왕공단 등의 걸음과 일치되었다.
징~!
무겁지도 않고, 가볍지도 않은 울림.
조금 전까지 사람들의 감정을 좌지우지하던 행렬들에 비해 참으로 소박하고 조용했지만, 앞장선 경 보주와 사람들을 굽어보는 오칠의 존재만으로도 주위는 커다란 압박감에 내리눌리고 있었다.
그리고 가마가 비단 조각이 풍성하게 깔린 길을 지나 단상의 밑자락에 다다르고, 오칠이 가벼운 몸놀림으로 가마에서 내려와 단상 위로 올라설 때까지 장내는 그러한 위압감에 눌려 조용하게 침묵했다.
오칠은 단상에 올라 아래에서 그를 향해 시선을 집중한 사람들을 쓱 둘러보고는 가볍게 미소 지었다. 한쪽 무릎을 꿇고 있던 열락문과 철근문의 인물들은 그제야 일어서서 오칠을 공경의 자세로 바라보았다.
“초대에 응하시어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해주신 여러 강호 동도들께 감사드리오. 본인이 바로 무적 정의파의 장문인을 맡고 있는 오칠이라 하오이다.”
포권을 취하며 인사하는 오칠의 자세는 오만하지도 않고, 가볍지도 않게 딱 적당했다.
어떻게 보면 젊고 아름다운 사내이기에 그 모습은 진중한 듯하면서 신비롭기까지 했다. 뭐라고 할까, 참으로 정파인다운 모습과 언행을 완벽하게 보여주고 있다고나 할까.
그래서 오칠의 위압감을 발산시키는 등장에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던 사람들까지 약간의 감동 비슷한 것을 받으며 박수를 치고 그 인사에 호응했다.
사실, 처음의 행렬을 시작으로 오칠의 등장까지 그 모두가 충분히 박수를 받을 만큼 특이하고 놀라운 것이 분명했으니까 말이다.
“무적 정의파의 개파를 여러 강호 동도들 앞에서 천지신명께 고하겠소이다!”
오칠이 말을 마치자 경 보주가 한지를 펼쳐들며 내공이 실린 음성으로 소리치고, 그 음성은 드넓은 연무장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그리고 계속해서 글을 읽어나가니, 때와 장소를 말하고, 어떠한 마음으로 문파를 만들었으며, 무적 정의파를 정점으로 천목보, 열락문 등의 이름을 그대로 두어 체계를 유지한다느니, 어느 어느 사람들이 함께하여 정파의 기개를 세울 것이라는 등등의 긴 문장이 사람들의 머릿속으로 전달되었다.
“무적 정의파는 하늘과 땅에 고하고, 무림 동도들의 앞에서 당당히 이름을 드러냈소이다!”
경 보주는 힘껏 소리치고 그 커다란 울림과 동시에 오칠이 단상에서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오늘 무적 정의파가 개파하였음을 선언하오!”
“와~!”
“와~!”
오칠의 선포와 함께 어느새 사방에서 몰려든 수백의 사람들이 일제히 함성을 질렀다.
모두 무적 정의파의 이름 아래 모여든 열락문, 철근문, 그리고 천목보의 사람들이었다.
언제 저리 많은 사람들이 나타났나, 하는 얼굴을 하고 있던 수백 명의 손님들도 그들의 함성에 동화되어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치고, 무적 정의파의 개파를 축하했다.
그리고 경 보주의 손짓과 함께 음식과 술이 탁자에 놓이기 시작했다. 게다가 그 사이사이로 열락문의 아리따운 여인들이 오고가며 술까지 따르니, 장내는 너무도 빠른 개파식의 진행에 어리벙벙해했던 마음을 잊고 유쾌한 즐거움에 빠져 들어갔다.
하지만 몇몇은 그러한 분위기에 맞지 않게 슬쩍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너무 급해.’
공야정진도 그렇게 미간을 찌푸리는 이들 중 하나였다.
그리고 그의 눈에 비친 무적 정의파의 개파식은 뭔가 허술해 보인다는 것이었다.
무한의 절반을 차지하고, 앞으로는 무한을 대표하는 문파가 될 가능성이 높은 거대 문파의 개파식 치고는 너무 빠르고 간단하지 않은가 말이다.
마치 얼른 끝내고 사람들에게 이런 문파가 생겼다, 정도만 알리면 충분하다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러한 생각 때문에 무적 정의파가 천목보의 계략에 의해 탄생한 문파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더욱 커지게 되었다.
물론 경 보주가 직접 오칠의 등장을 극대화시키는 행렬의 선두를 맡아 복속된 자의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그러한 모습 역시 마음만 먹으면 하지 못하란 법은 없는 것이다. 다만 그렇게까지 해서 천목보가 얻으려는 것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 문제였고, 그래서 공야정진은 그 숨겨진 목적을 알기 위해 직접 무한에 온 것이었다.
공야정진을 비롯한 몇몇이 천목보의 속셈이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하는 그때, 갑자기 한 장년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오칠이 있는 단상을 향해 들고 있던 술잔을 내밀었다.
“이 몸은 안륙(安陸) 창응방(蒼鷹幇)의 방주 서육백이오! 우리 정파에 새로운 영웅이 탄생한 것을 석 잔의 술로 축하하고 싶소이다!”
창응방은 경신법과 응조권이 뛰어나다고 평가되는, 인원이 백 명 정도에 불과한 작은 방파였다.
아마도 그는 새로이 탄생한 거대 정파문과 좋은 유대 관계를 맺는 것이 좋다고 판단했을 것이고, 다른 어떤 사람들보다 먼저 무적 정의파와 그 장문인인 오칠의 비위를 맞추겠다고 작정한 것이 분명했다.
“본인이 영웅이라 칭해지는 것은 감당할 수 없는 말이지만, 날이 날이니 만큼 고맙게 듣겠소이다. 자, 나도 서 방주의 축하에 감사하는 의미로 석 잔의 술을 마시겠소.”
오칠은 더할 수 없이 광명정대한 정파의 인물처럼 부드럽게 웃으며 서육백과 더불어 석 잔의 술을 마셨다.
내밀었던 잔을 거두고 자리에 앉은 서육백은 내심 흡족하고 기꺼운 마음이 된 것은 불문가지. 이제 그는 무한의 강자이자, 호북 전체로 보았을 때도 막강한 힘을 가진 문파의 장문인과 안면을 트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