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계 8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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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2,764회 작성일소설 읽기 : 파계 87화
파계 4권 - 12화
무이관심(武以觀心:무로서 덕을 살피다).
노백이 어릴 적 그의 부친은, 무(武)란 그것을 펼치는 사람의 도덕과 정신을 드러내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그 정신의 곧고 구부러짐에 따라 무의 형태 또한 변화한다는 것이다. 무림인들이 스스로를 사파와 정파로 구분하는 것도 바로 그러한 이치가 아니겠는가.
하장여서생 상장사맹호(下場如書生 上場似猛虎:평소에는 서생과 같고, 싸움에는 맹호와 같다).
또 노백의 부친은, 무(武)를 익히는 사람은 무와 덕을 골고루 닦는 과정 속에서 무를 정돈하여 익히고, 무를 펼칠 때의 자신을 다스려야 한다고 했다.
그러니 평소에는 마치 서생과 같이 단아함을 잃지 않은 채로 예를 갖추어 생활하고, 비무와 대적 시에는 맹호와 같이 신속하고 사나워야 한다는 것이다.
무를 익힌다는 것은 그저 사람을 때리고 죽이기 위함이 아닌, 나 자신을 바로 보고 나의 약함을 인정하며, 그러한 약함을 강함으로 변화시키는 하나의 방법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그 강함을 알게 되었을 때에 세상과 옳게 화합할 수 있을 것이라 부친은 말했었다.
‘무공을 수련하는 자는 그래야 한다. 무인으로서 자신을 부끄럽지 않게 해야만 하는 것이다.’
노백은 지난 날 그렇게 배워왔다.
그리고 지금껏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런데 오칠은, 자신은 그렇지 않다 말하고 있었다. 자신을 위해 익히고, 자신을 위해 싸웠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세상과 화합하려고 하는 무인의 자세가 아니었다.
“아! 이제야 당신이 왜 그렇게 밑바닥으로 떨어지기만 하는 자리에서 꿋꿋하게 남아 있는 것인지 알겠군.”
오칠은 그래서였군,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
“무인이란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 건가? 이득과 명예를 얻고자 노력하지 말고, 자신을 다스리며,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충실한 삶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믿고 있기 때문인 건가?”
“…….”
노백은 오칠의 조롱하는 듯한 말에 화를 내기보다, 저도 모르게 그 말을 음미해보고 있었다.
지금의 자신이 스스로가 믿고 있는 무인이 되기 위해 노력했기 때문에 얻어진 결과인가에 대해 자문해보았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답은 그리 오래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맞소.”
“맞다고?”
“그렇소. 난 무인이고, 내가 믿고 있는 무인의 본분을 후회하지도 않소. 그래서 내가 포쾌가 되었다고 해도 상관없소. 무인은 자리를 가리지 않고, 무인은 빈부에 연연하지 않으며, 무인은 단지 나약함을 벗어나 강함을 얻는 것에 가장 큰 기쁨을 얻기 때문이오!”
오칠은 사나운 눈빛으로 노백을 쳐다보았다.
그의 말이 너무나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말이다. 하지만 노백은 그런 오칠의 눈빛을 눈도 깜빡이지 않고 마주 쳐다보았다. 자신의 의지는 결코 꺾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할 말이 없군.”
오칠의 사나운 눈동자는 다시 평소의 나른한 눈동자로 돌아왔다.
그리고 큰 부상에도 꿋꿋이 견디어낸 노백을 향해 싱긋 웃음을 지었다.
“번화가로 가서 술이나 한잔 하자.”
“난 포쾌요. 그리고 난 당신을 잡기 위해 여기에 있는 것이오.”
“그런 몸으로는 날 잡을 수 없잖아.”
부상을 참고 견디며, 가까스로 서 있는 노백이 오칠을 어찌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난 지금 몸을 움직일 수 있으니, 그만큼 당신을 잡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오.”
“알아, 알아. 그게 무인의 자세라는 말이지? 좋아, 나도 인정할 테니 이제 그 하품만 나는 이야기는 그만 하자고. 그럼 우리 둘 사이의 작은 문제를 해결하면 되겠지?”
오칠은 품에 손을 넣고 호패를 꺼내들었다.
“지난번, 호패를 꼭 지니고 다니라는 당신의 충고를 잊지 않았거든.”
노백은 오칠의 호패를 보고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호패가 있는데도 왜 도망을 쳤으며, 왜 자신과 싸우기까지 했는지 이해할 수도 없는 표정이었다.
“그게 나니까. 당신이 믿고 있는 무인의 자세에 충실한 만큼, 난 나의 감정에 충실하거든.”
노백은 도대체 무슨 감정에 충실했단 말이오? 라고 소리쳤다.
오칠은 어깨를 으쓱였다.
“몰라. 지금은 잊었어. 지금은 술 먹고 싶다는 감정에 충실하고 있으니까, 이전의 감정 같은 것은 신경 쓰지 않아.”
노백은 할 말을 잊었다.
오칠의 정신 상태는 그가 감히 추측할 수 없는 경지에 있는 것이다.
“어때, 이제는 나하고 술 한잔 할 수 있겠지?”
“팔이 이 모양이라 힘들 것 같소.”
노백은 잘 움직여지지도 않는 자신의 양팔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더구나 그의 가슴도 가볍지 않은 부상으로 계속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걱정 마. 술은 다른 사람이 먹여줄 거야.”
오칠은 그렇게 말하며 먼저 걸어갔다.
노백은 머뭇거렸다. 하지만 무인이라면 그깟 고통은 참을 수 있어야 한다는 말로 오칠이 그의 투지를 불타오르게 했기에, 노백은 오칠의 뒤를 따라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두 사람은 동남구로 향했고, 천상루의 최상층에서 의원에게 치료를 받은 뒤에 어둔 밤이 될 때까지, 그리고 그 밤이 다시 태양을 만나 환하게 밝아질 때까지 술을 마시고 형제의 의를 맺었다.
물론 오칠이 형이 되었다. 나이는 그가 더 어렸지만, 자신이 더 강하고 누구도 자신의 머리 위에 있어서는 안 된다는 이유를 들어서 말이다. 그리고 취한 노백은 그 말에 수긍하며 오칠의 아우가 되었다.
구차하고, 짜증나고, 신경 쓰이는 관계가 싫다던 오칠.
오칠은 왜 노백과 의형제를 맺은 것일까.
왜.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어쩌면 오칠은 자신의 감정에 충실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노백의 고지식함이 마음에 들었다는 자신의 감정에 말이다.
아니면 그냥 취했기 때문이라는 이유일지도. 혹은 의형제조차 귀찮다 싶으면 자신의 마음대로 내쳐버릴 수 있는 관계라 믿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런 모든 것들도 확실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추측이고, 짐작일 뿐인 것이다.
다만 무엇보다 분명해진 것은, 오칠이 변화해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 자신조차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는 미묘한 변화 말이다.
제39장. 사람을 모으고, 개파(開派) 고(告)하다
때는 여름을 보내고, 가을을 불러들이는 구월 초순.
얼마 전까지 무한 제일 사파문이었고, 무한을 비롯해 호북 전체, 그리고 중원 전역으로 알게 모르게 상권의 가지를 뻗치고 있는 천목보의 총단인 경가장의 정문엔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안녕하시오!”
“오~ 이거 오랜만이오!”
“잘 지내셨소?”
“하하하! 보시다시피!”
고급스런 비단옷에 손가락마다 두꺼운 금붙이를 끼고 있는 풍채 좋은 사내들이 하하, 웃음을 지으며 손을 잡고 어깨를 두드리면서 인사를 나누었다.
그들은 척 보기에도 상인의 모습.
경가장이 본래 상인 연합인 천목보의 총단이었던 만큼, 정문으로 매우 많은 상인들이 몰려들고 있는 것은 이상할 것이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오늘 경가장은 상인 연합의 중심으로서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개파(開派).
경가장은 앞으로도 무한 상인 연합의 중심 역할을 할 것이지만, 오늘은 그보다 더욱 중요한, 그들의 종주(宗主)로 섬겨야 할 무적 정의파의 개파식을 개최하기 위한 향연장으로서의 역할을 맡은 것이었다.
“이크, 저리로 물러납시다.”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오늘의 특별한 상황에 대해 이야기하던 상인들은 화들짝 놀라며 한쪽으로 물러났다.
그들 상인들과는 다른, 약간의 위엄이 겉으로 묻어나는 부류의 사람들이 정문으로 향하기 위해 그들이 서 있던 곳을 가로질러 갔기 때문이다.
무림인(武林人).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부르는 사람들이었다.
오늘 무한의 새로운 강자로 올라설 무적 정의파의 개파식엔 호북 곳곳의 중소 문파들이 초대되었다. 그리고 그 문파들에서 온 무림인들이 상인들과 이리저리 뒤섞여 경가장의 정문에 당도하고 있는 것이다.
“사문과 성명을 말해주십시오.”
활짝 열려진 정문에는 십여 명의 경가장 접객당(接客堂)의 무사들이 좌우로 길게 책상을 늘어놓고서 경가장에 들어가려는 사람들을 맞이했다.
“이런 걸 꼭 해야 하나?”
등에 멘 쌍부(雙斧)의 묵직함과 사내의 부리부리한 눈매만 봐도 위압감이 밀려들어왔지만, 접객당의 무사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는 눈동자로 고개를 끄덕였다.
“보다 원활하게 손님들을 맞이하기 위함이니 양해해주십시오.”
그들은 상인이건 무림인이건, 그리고 제법 이름이 있는 어느 어느 문파의 유명한 고수라고 해도 예외 없이 사문과 이름을 적고서 들어가게 했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들이 맡은 임무였으니까.
“확실히 예전의 경가장이 아닌 듯싶습니다.”
각기 호위 무사들을 거느리고도 험악한 인상의 무림인들을 볼 때마다 내심 불안감을 느끼고 있던 상인들은, 당당하게 제 할 일을 하는 접객당 무사들의 모습을 보며 매우 놀라고 있었다.
사실, 천목보 총단으로서의 경가장은 이전에도 결코 호락호락한 곳은 아니었다. 하지만 사파문으로서라기보다는 상인 연합으로서의 색을 더 강조했던 만큼 자유로운 출입을 지향했고, 지금처럼 무사가 손님을 상대하지도 않았다.
그저 약간의 소란이 있어 상담인들이 부를 때에만 무사들이 정문에 나타났을 뿐인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다른 여타의 무림 문파를 방문한 것처럼 그 위세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아니, 지금 정문에 가득 몰려든 무림인들 하나하나의 면모를 따져본다면, 그리고 그런 무림인들을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맞이하고 있는 접객당 무사들을 본다면 경가장은, 아니 이제는 무적 정의파라 불릴 경가장은 분명 무한의 제일 문파라고 해도 전혀 손색이 없는 것이었다.
“오~ 저길 보시오!”
경가장의 새로운 모습에 대해 떠들어대던 상인들은 저 뒤쪽에서 오고 있는 한 무리의 사람들을 보고 자그맣게 놀란 탄성을 질렀다.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한가락 할 것 같은 무림인들도 상인들과 다름없이 놀란 눈빛으로 그 무리를 향해 시선을 집중하고 있었다.
“어디서 오셨습니까?”
접객당 무사는, 정문에 몰려 있는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집중시킨 채로 그가 앉은 책상으로 다가온 무리를 향해 물었다.
사실, 떨리는 자신의 심리 상태를 들키지 않기 위해 노력한 것이지만, 무리의 무게감이 워낙에 커서 무사는 목소리에 긴장감이 어리는 것을 완전히 숨기지는 못했다.
“백천맹(白天盟)의 대표로 온 공야정진이오.”
백천맹(白天盟).
무림을 크게 양분하고 있는 두 세력 중 하나였다. 그리고 공야정진은 백천맹의 정보를 담당하는 천이각(千耳閣)의 각주로서 맹을 구성하는 거대 문파들의 대표들을 제외하고는 가장 막강한 지위를 거머쥔 인물인 것이다.
“이들은 나와 함께 온 사람들이오.”
공야정진의 뒤에는 예사롭지 않은 눈빛을 가진 세 명의 장년인들이 있었으나, 접객당의 무사는 그 숫자만 방명록에 적었을 뿐, 그들에 대해 따지지 않았다.
“이분들을 안내해드려라.”
백천맹을 비롯한 몇몇 무리는 그 중요도에 맞게 자리가 배정되어 있었기에 공야정진 등은 안내하는 무사를 따라 정문으로 들어갔다.
“아! 흑천맹이다!”
공야정진 등이 사라지고 얼마 뒤, 또 다른 무리가 나타나 사람들을 당혹시켰다.
흑천맹(黑天盟).
한때는 같은 울타리를 만들었으나, 백 년 전부터는 같이하기를 거부하고 떨어져나간, 사파문들의 중심인 흑천맹의 인물들이 나타난 것이다.
“흑천맹에서 온 제갈모학이라 하오.”
뒤로 네 명의 장년인을 거느린 제갈모학은 접객 무사를 날카로운 시선으로 직시하며 자신의 신분을 밝혔다.
순간, 무사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제갈세가의 일인인 제갈모학은 흑천맹의 정보를 담당하는 삼목원(三目院)의 제일 원주로서, 그 위명이 결코 공야정진에게 뒤떨어지지 않는 인물인 것이다.
“이분들을 안내해드려라.”
하지만 무사는 이전에 공야정진에게 그랬듯,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무사에게 명을 내렸다.
‘역시 천목보군.’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있을 뿐, 제갈모학의 속은 얼음 한 덩어리가 들어간 듯 싸늘해지고 있었다.
왜?
이유는 무사의 머뭇거림 없는 조치 때문이었다.
제갈모학과 그 무리는 초대를 받고 온 것이 아니었다. 천목보는 이제 사파문이 아니라, 무적 정의파라고 하는 이름을 갖고 정파문으로서 거듭나는 것이기 때문에 흑천맹을 초대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도 흑천맹에선 초대받지도 않은 곳에 사람을 파견했다. 그것도 매우 중요한 위치인 삼목원의 제일 원주를 말이다.
그러나 접객 무사는 당황하지 않았다. 일개 무사가 감히 그 명성을 비견할 수도 없는 인물이 나타났는데도 아주 미세한 떨림만을 보였을 뿐, 당황하지 않고 재빨리 조치를 취한 것이다.
즉, 천목보에서는 초대를 하지 않았음에도 흑천맹에서 사람이 올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는 말이었다.
‘경 보주를 만난다고 해도 별 소득을 얻지는 못하겠군.’
제갈모학이 무한에 온 것은 왜 정파로 전향을 했는지 따지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자신들이 올 것을 예측하여 접객 무사까지 준비를 갖추게 한 경 보주가 그에 대한 변명을 준비하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그러니 이번 방문은 아주 약간의 압박 외에는 별다른 의미를 갖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사문과 이름을 말해주십시오.”
제갈모학은 뒤에서 들려오는 접객 무사들이 방문객들을 맞이하는 음성을 듣고 왠지 가슴이 쓰렸지만, 표정에 드러내지 않기 위해 애쓰면서 그를 안내하는 무사를 따라 정문 안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