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계 12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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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2,668회 작성일소설 읽기 : 파계 120화
파계 5권 - 20화
“이보시오, 화 소협!”
막 보조문을 나서던 화유상은 뒤에서 그를 부르는 소리에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어제저녁, 다시는 볼 일이 없을 거라고 믿었던 그들을 만난 이후 내내 기분이 좋지 않았고, 혹시라도 수적들과 있었던 싸움의 진실이 드러나면 어찌할까 걱정되어 밤잠을 이루지 못했던 화유상은 그냥 조용히 혼자서 술을 마시고 싶어 맹을 나서는 중이었다.
그런데 그런 화유상의 기분을 더욱 불편하게 만드는 사람이 뒤에서 부르고 있으니, 어찌 얼굴 표정이 좋을 수가 있겠는가.
“상관 소협이시군요.”
뒤에서 화유상을 부른 사람은 어젯밤 여러모로 낭패를 입었던 상관현표였다.
그리고 그는 어제의 일을 따지기 위해서 오늘 내내 모습을 볼 수 없었던 화유상을 찾아낸 것이다.
“어딜 그리 바삐 가시오?”
누가 보아도 기분이 썩 좋아 보이지 않는 얼굴로 다가오는 상관현표를 보며 화유상은 어떻게 어제의 일을 변명해볼까 고민했다.
하지만 상관현표는 그가 고민할 여유도 없이 빠르게 다가와서 분노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화 소협은 내게 무슨 악감정이라도 있으시오? 아니면 내가 어제 화 소협을 위해 마련한 자리가 불편하기라도 했었소? 난 어제 화 소협이 내게 모욕을 주기 위해 작정이라도 한 줄 알았소!”
“상관 소협, 일단 제 말을…….”
“하하. 어제는 몇 마디 말도 없이 사라져버리더니, 오늘은 내게 할 말이 많단 말이오? 화 소협은 내가 그렇게 만만한 사람으로 보이시오!”
상관현표의 너무도 큰 목소리와 주변에 있는 많은 사람들의 이목도 개의치 않고 쏟아져 나오는 노골적인 폭언에 화유상의 얼굴빛이 붉게 물들었다.
그건 상관현표가 생각보다 더 분노하고 있다는 걱정과 자신이 이렇듯 무시를 당해야만 하는 것인가에 대한 자괴감이 동시에 엇갈리는 표정인 것이다.
‘우선 이 자리를 벗어나…….’
화유상은 상관현표를 억지로라도 잡아끌어서 다른 조용한 곳으로 자리를 옮기려 했다.
그런데 어디로 가야 하나, 하며 고개를 돌리던 화유상은 정말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얼굴들을 또 보게 되었다. 바로 어제 보았던 오칠과 노백을 말이다.
‘이놈이!’
가뜩이나 열이 올라 마구 고함을 지르고 있던 상관현표는 순간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자신의 말을 경청하며 수십 번이고 용서를 빌어도 모자랄 화유상이, 다른 곳에 시선을 돌리고서 전혀 듣고 있지 않은 표정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어제처럼.
“화 소협!”
상관현표는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얼굴로 버럭 소리쳤다.
이대로 어디 장소를 잡아 비무를 해서라도 크게 혼내주리라 마음먹었다.
하지만 그런 분노의 부름에도 화유상은 멍하니 한곳만 바라보았다. 그러니 열이 잔뜩 오른 상관현표라 해도 궁금증이 일어 화유상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저들은?’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어젯밤 화유상을 지금처럼 멍하게 만들고,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다급히 객잔을 떠나게 한 자들이었으니까.
“화 소협, 저들이 대체 누구요?”
상관현표는 화유상의 어깨를 잡고 강하게 흔들었다.
“예? 아, 저들은…….”
깜짝 놀라 당혹스러움을 제대로 감추지도 못하는 화유상은 말을 더듬거렸다.
“그… 그냥 얼마 전에 우연히 얼굴을 익힌 사람들입니다.”
그 말 외에는 어떻게 설명할 수가 없었다.
오칠과 노백에 대해서 그 자신도 모를뿐더러, 자세히 말을 하게 되면 은시로 오는 배에서 같이 탔던 일과 해적들과 싸운 일들에 대해서 이야기해야 하고, 그러다 보면 몇 가지 감추고 거짓을 첨가한 일들이 드러나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화 소협도 누군지는 모른단 말이오?”
“아, 예. 그냥 얼굴이 익어서 봤을 뿐입니다.”
“…….”
당연히 상관현표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단순히 얼굴만 알고 있는 자들을 보고서 이리 놀라는 것도, 당황하여 말까지 더듬는 것도 전혀 말이 안 되는 상황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상관현표는 오칠 등이 누구인지에 대해 알아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도대체 화유상과는 어떤 사이이고, 무슨 일이 있었는가에 대해서 꼭 알아두어야 이 답답한 마음이 풀리게 될 것이니까.
‘도대체 저들이 여긴 왜 나타난 거야?’
화유상은 속이 탔다.
그래서 오칠을 향해 걸어가는 상관현표의 뒤를 바로 쫓아갔다. 여차하면 대화를 끊고, 사정을 설명한다는 핑계로 상관현표를 오칠 등과 떨어트려놓을 생각인 것이다.
“당신들이 여기엔 무슨 일로 온 거지?”
오칠은 자신을 향해 똑바로 걸어오는 상관현표를 빤히 쳐다보다가 그의 물음에 피식 웃었다.
상관현표의 말투는 분명 자신을 하수로 여기는 것이었다.
하지만 오칠은 그가 어떠한 점을 근거로 그렇게 생각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자신과 노백은 분명 무림인처럼 무기를 갖추고 있고, 노백은 가면까지 써서 기묘한 분위를 풍기고 있지 않은가.
그저 고생스런 여행과 외모를 깔끔하게 정리하지 않은 이유로 추레해 보인다는 것 말고는 무시당할 만한 이유가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가문도 좋고, 어느 정도 무공도 강하고, 촉망되는 후기지수로서 열혈군에 소속되었다는 것 때문인가?’
그런 것들이 차곡차곡 쌓여 상관현표의 오만함을 부추기는 걸 수도 있었다.
물론 출신과 성장 과정이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이겠지만, 어찌되었건 상관현표는 무림에서 살아가는 데 결코 좋지 않은 습관을 몸에 익힌 것이 분명했다.
무림엔 드러나지 않은 기인이사가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많고, 그런 이들은 외모나 나이로서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그건 많은 무림인들이 알고 있으면서도 쉽게 잊어버리는 교훈이기도 했다.
‘이놈이!’
오칠의 웃음에 상관현표는 눈초리를 날카롭게 치켜떴다.
그리고 오칠이 의자에 앉아 있다는 점을 감안하여, 옆쪽에 있는 서기에게 누군데 이곳에 앉아 있느냐고 물었다. 그래도 어느 정도 신중한 면을 보이는 것이 아주 애송이는 아닌 것이다.
“아, 예. 그분은…….”
하지만 서기는 끝까지 대답할 수 없었다.
오칠이 손을 들어 그의 말문을 막아버린 것이다.
“내 이름은 오칠. 들어봤어?”
상관현표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의 뒤에 서 있는 화유상은 그래도 귀에 익은 이름이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갸웃하고 있었으나, 상관현표에겐 전혀 기억에 없는 이름이었던 것이다.
만약 무적 정의파의 장문인이라거나 경천미공자라는 별호를 들었다면 단번에 오칠의 정체를 파악했을 것이나, 오칠은 그렇게 친절하게 자신을 소개하지 않았고, 상관현표는 오칠의 건방진 태도에 분노하여 더 이상 캐물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리고 두 사람 사이에 형성되기 시작한 문제는 자연스럽게 무림인들이 흔하게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으로 흘러갔다. 바로 말보다 주먹이 빠르다는 것으로 말이다.
“그런 시정잡배 같은 이름 따위는 들어본 적이 없다. 그런 당신은 연환쌍도(聯環雙刀) 상관현표는 아는가?”
상관현표는 자신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만큼 오칠이 자신을 알아주기를 바랐다.
사실 연환쌍도라는 별호가 후기지수들 사이에서는 나름대로 유명했고, 그런 만큼 무림인들 중에서 알고 있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오칠은 후기지수들의 별호까지 기억할 사람이 아니었다. 경모혁이 알아두는 것이 좋다는 무림의 절정고수들도 귀담아듣지 않았는데, 후기지수들의 별호를 알 리가 없지 않겠는가.
“아니.”
오칠은 그게 누구냐? 하는 눈으로 바라봤고, 상관현표는 애써 참아 넘기며 자신의 가문까지 들먹였다.
“그럼 석문의 창천도문에 대해선 들어보았겠지?”
이번엔 오칠도 아는 문파의 이름이었다.
창천도문(蒼天刀門)은 호남 석문(石門)에 자리한 문파로서, 정파문 중에서도 매우 강성한 세력을 가진 곳이었다. 그곳의 문주가 절정고수로 대표되는 칠절신군(七絶神君) 중에서 환도신군(幻刀神君)이라는 점이 더욱 명성을 드높이고 있기도 했다.
“들어본 적은 있지.”
“내 가문이 창천도문이다.”
“흠, 그곳의 공자셨군. 그런데 나에게 온 용건이 뭐야?”
오칠은 서로의 이름을 알았으니, 이제 어쩔 거냐는 시선으로 상관현표를 빤히 쳐다보았다.
‘감히!’
상관현표는 솔직히 당혹스러웠다.
자신의 이름은 모른다 치더라도, 창천도문 하면 웬만한 무림인은 주눅이 들기 마련이었다. 그 가문의 힘뿐만이 아니라, 그의 부친인 환도신군의 명성은 그렇게 대단한 것이다. 그런데 오칠은 전혀 개의치 않고 있으니 당황스러울밖에.
‘뭔가 대단한 배경을 숨기고 있나?’
오칠의 태도가 너무나 당당했으니 그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면 가면을 쓰고 있는 자의 자세가 범상치 않았다. 제법 단련된 무인의 기세가 느껴진다고나 할까.
‘하지만 이놈은…….’
그에 비해 오칠은 아니었다.
허리에 무기를 차고 있기는 한데, 앉은 자세나 풍기는 분위기가 별 게 없었다. 무림인이기는 한데, 고수는 아니라는 느낌인 것이다.
‘상관없다.’
상관현표는 너무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상대의 행색이나 나이를 고려할 때, 어느 정도 배경이 좋다고 해도 자신은 전혀 꿀릴 것이 없었다. 가문과 부친의 명성만으로도 무림 어느 곳에서도 대접 받을 수 있었고, 자신의 무공 또한 가벼운 것이 아닌 것이다.
“화 소협과는 무슨 사이냐?”
상관현표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누구?”
“내 뒤에 있는 사람과는 무슨 관계냐고 묻는 것이다.”
화유상은 다급히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상관현표의 날카로운 시선을 무시하고 오칠이 말을 못하게 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의 걱정은 오칠의 대답으로 인해 아무것도 아니게 되어버렸다.
“아무 관계없어. 그냥 얼굴만 아는 사이지.”
오칠의 대답은 전혀 틀린 말이 아니었다.
사실이 그러했으니까. 그저 은시로 오는 선상에서 서로를 보았고, 각자 다른 목적을 가지고 수적들과 싸운 것이 아니던가.
물론 노백과의 사이를 묻는 거라면, 노백이 화유상과 그의 사제들을 수적들에게서 구했으니 생명의 은인이니, 뭐니 하는 말을 꺼내야 했겠지만 말이다.
“지금 나랑 장난을 하자는 거냐!”
“상관 소협, 이 사람의 말은 사실이오. 우리는 그저 얼굴만 알고 있는 사이에 불과하오.”
화유상은 굳이 이렇게까지 변명을 해야 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도 어떻게든 상관현표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이미 상관현표의 눈동자엔 오칠과 한판 싸워야만 직성이 풀릴 것이라는 감정으로 꽉 들어차 있었다. 그리고 더 이야기해볼 것도 없다는 듯 오칠에게 일어서라고 소리쳤다.
“나서라. 날 기만한 대가를 치르게 해주겠다!”
“어이없군.”
오칠은 일어서지 않았다.
상관현표의 이 억지 도발에 대응할 필요성도 못 느꼈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겠다는 생각은 아니었다. 조용히 해결할 생각이었다면 진작 신분을 밝혔을 것이다.
“네가 처리해라.”
“예?”
오칠의 눈짓에 노백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가면을 쓴 그의 표정이 보일 리가 없었고, 오칠은 설사 그런 표정을 보았다고 해도 무시할 사람이었다. 그래서 노백은 앞으로 나설 수밖에 없었다. 내키지는 않더라도 아우 된 자로서 해야만 하지 않겠는가. 그가 위험에 처했을 때 오칠이 구해주러 온 것처럼.
물론, 그때와 지금의 상황은 확연히 다른 차이가 있었지만 말이다.
“흥, 뒤로 숨겠다는 말이냐!”
상관현표는 이로써 확신하게 되었다.
오칠은 그저 데리고 다니는 호위무사가 강할 뿐, 겁쟁이에 불과하다는 걸 말이다.
“아우가 먼저 상대하는 것은 당연한 거요.”
노백은 상관현표가 단단히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아서 그렇게라도 말해야 했다.
“아우?”
“그렇소. 우리는 의형제 사이입니다. 하니, 대신 나서는 이유로는 충분하다고 생각하오.”
“흥, 좋다!”
상관현표는 널찍한 공간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노백도 그를 따라 자리를 옮기고 등에 차고 있던 조화창을 꺼내들었다.
“말려야 할까?”
경비무사는 동료에게 귓속말로 조용히 물었다.
동료 경비무사는 그게 진담으로 하는 말이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우리가 무슨 수로 말려?”
“하지만 오장이 굽실거리던 사람의 아우잖아. 저러다 다치기라도 하면 우리한테 책임이 떠넘겨질지도 모른다고.”
“연환쌍도 상관현표는 열혈군 지군에서도 알아주는 고수라고. 그런 사람이 싸우겠다고 작정을 했는데 우리가 어찌 말릴 수가 있겠나. 그리고 서로 합의한 싸움이야. 저 사람도 순순히 받아들였고, 제 아우를 내보낸 사람도 저 사람이라고. 우리가 책임질 일은 없어.”
“그럴까?”
“그럼, 우린 그냥 구경이나 하자고. 간만에 볼 만한 싸움이 될 것 같으니까 말이야.”
감히 끼어들 수가 없어 보고만 있었던 경비들은 난감해하면서도, 이제부터 벌어질 긴박한 싸움에 주변에 몰려든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기대감 가득한 눈을 하고서 상관현표와 노백에게 이목을 집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