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계 11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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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2,610회 작성일소설 읽기 : 파계 117화
파계 5권 - 17화
“흥!”
냉음설은 싸늘하게 코웃음 쳤다.
그러나 그 얼굴에는 더욱 매혹적이고 색기 가득한 미소가 지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공병악은 그 미소가 결코 좋은 의미가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냉음설은 남자와의 관계를 부끄러워하는 여자가 아니었지만, 남자에게 장난감 취급 받는 것을 좋아하는 여자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저렇게 매혹적인 표정은 야마오를 죽이고 싶다는 마음을 표현한 것과 다름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냉음설의 진정한 속내야 어찌 되었든 야마오의 하나뿐인 시선은 더욱 끈적끈적해지고, 당장이라도 냉음설을 덮치고 싶다는 감정으로 붉게 물들어갔다.
“성난 고양이를 얌전하게 만드는 것만큼 흥미진진한 것은 없을 거요. 사실. 내가 태어난 곳에서는 그런 재미가 별로 없거든. 거의 전부라고 할 정도로 여자들이 순종적이지. 하지만 이곳에 있는 여자들은 조금 달라서 재미가 있소. 특히 저 여자는 그러한 재미가 더욱 클 것 같단 말이오.”
“나를 얼마나 얌전하게 만들지 기대되는군요.”
냉음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움직임 하나에도 남자들을 묘하게 흥분시키는 뭔가가 있었는데, 아마도 냉음설이 고의로 그러한 분위기를 발산하는 것이 분명했다.
“크크크! 정말 당찬 여자가 아닌가! 남의 집 안에 들어왔는데도 제집처럼 여기고 있으니, 보면 볼수록 탐이나. 어떻소? 저 여자를 내게 주는 거요?”
공병악은 무표정했다.
그리고 힐끔 고개를 돌려 냉음설과 시선을 마주쳤다.
―저 자식의 혀를 뽑아버리겠어요.
냉음설의 전음에 공병악은 안된다고 답했다.
―고의로 우리를 격동시키는 거다.
―알아요. 하지만 저따위 왜놈에게 당하는 굴욕을 참고 있을 정도로 난 만만한 여자가 아니에요.
―알지. 하지만 교주님은 저자를 비롯한 해적들이 필요하다고 하셨어.
―저자를 죽이면 나머지 해적들은 우리가 두려워서라도 항복하게 되어 있어요.
―내가 보기엔 그럴 것 같지 않다. 저자를 죽이면 오히려 우리에게 반감을 가질 거야. 죽기 살기로 덤벼들겠지.
―그럼 모두 죽여 버리면 돼요.
―안 돼. 적당하게 손을 써서 굴복시켜라.
명령에 가까운 공병악의 지시에 냉음설은 사나운 눈빛을 뿜었다.
하지만 곧 그녀의 눈동자엔 알았다는 수긍의 빛이 어렸다. 그녀는 공병악의 상대가 될 수 없기에, 철저하게 힘에 좌지우지되는 혈천신교에선 강자의 말에 순응해야 하기 때문이다.
“너무 오래 걸리는군.”
여전히 느긋하게 앉아 있는 야마오는 서로를 바라보며 침묵하는 공병악과 냉음설을 향해 어서 대답을 하라는 듯 다그쳤다.
“방주가 나의 사제를 다룰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원하는 대로 될 것이오.”
“하하하! 힘이 있다면 가져보라 이건가? 좋아!”
야마오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그가 앞으로 나선 것은 아니었다. 대신 날카로운 휘파람을 불자 사방에서 순식간에 백여 명의 사내들이 나타났다. 그리고 조금 뒤에는 더욱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야마오 등이 있는 곳을 중심으로 다섯 장의 거리를 두고서 둥글게 공간을 만든 채로 수백의 해적들이 주변을 가득 채웠다.
“명령을 할 수 있는 것도 힘이지.”
야마오의 당당한 말에 공병악은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 자신은 뒤로 물러났다. 자신은 상관하지 않겠다는 걸 분명하게 표현한 것이다.
“누가 이 여인을 내게 바치겠나!”
야마오가 그의 수하들을 향해 왜어로 소리쳤다.
그리고 냉음설을 제압하여 자신에게 바치는 자에게는 금 다섯 냥과 두 명의 여자를 주고, 열 명의 수하를 밑에 두는 조장의 지위를 주겠다고 말했다.
재물과 여인.
그것만으로도 마음이 움직일 포상이었고, 조장의 지위에 오를 수 있는 명예까지 선사하니 해적들은 너도나도 나서겠다고 아우성을 쳤다. 그러나 선택은 야마오에게 있고, 그의 지목을 받은 사내 하나가 득의양양한 웃음을 지으며 냉음설과 싸우기 위해 앞으로 나섰다.
“먹음직스런 계집이군.”
앞으로 나선 사내가 왜어로 말을 했기에 냉음설은 그 뜻을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알아듣지 못한다고 해도 냉음설은 사내의 시선을 통해 그가 어떤 의미의 말을 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왜놈들은 하나같이 아래에 있는 물건을 주체하지 못하는 원숭이들이라는 말이 맞는 말이었나 보군요!”
사내를 향해 말한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시선은 자신의 몸을 원하는 야마오에게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야마오의 뒤에 있는 츠바사를 향한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두 사람 다 냉음설의 말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야마오는 여전히 끈적끈적한 시선을 보냈고, 츠바사는 담담한 시선으로 결과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꺄홋!”
사내는 힘찬 기합이라기보다는 뾰족한 외침에 가까운 소리를 지르며 허리에서 뽑은 장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냉음설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제압하는 것이었기에 장검은 칼날이 아니라 칼등을 앞으로 하고 있었다.
그런 칼에는 전혀 위압감을 느끼지 않는 냉음설은 기다리지도 않고 앞으로 마주 걸어가 정확히 칼면을 손으로 후려쳤다.
쩡―
“윽!”
장검을 뒤흔드는 충격은 그대로 사내의 손을 통해 어깨까지 전해졌고, 자신의 팔을 주체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놀라고 있는 사내의 가슴으로 냉음설의 발끝이 내질러졌다.
빠각!
“컥!”
가슴뼈가 박살나는 소리와 함께 사내는 붉은 핏물을 울컥 쏟아내며 주저앉았다.
그리고 그대로 땅에 코를 박으며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
동료가 너무도 쉽게 죽어버린 것에 대해 해적들은 무겁게 침묵했다.
사람 하나를 가볍게 죽이고도 태연하게 다음, 하고 말하는 냉음설을 보면서 내심 큰 충격을 받은 상태기도 했다. 사람이 죽었다는 점 때문이 아니라 여자가 이토록 강하고, 사람을 죽이고도 당당하다는 점이 그들을 놀라게 한 것이다.
하지만 야마오가 별다른 감흥도 없다는 듯 시체를 치우라고 말하자 그들은 당황했던 감정을 추스르고 그들 특유의 감정을 표출하기 시작했다. 죽여야 할 적을, 죽이고 싶은 적을 향해 적개심으로 가득 찬 투지를 불태우는 것이다.
“너, 너!”
야마오는 이번엔 두 명을 지목했다.
그리고 곧 그 둘은 칼을 뽑아들고 냉음설의 양편에 섰다. 상대가 강하면 그에 맞게 대적하는 것이 그들로서는 조금도 부끄러운 일이 아닌 것이다.
“꺄홋!”
“꺄핫!”
여지없이 터져 나오는 뾰족한 외침과 함께 칼등을 세운 두 개의 장검이 냉음설의 좌우로 베어져갔다.
쨍! 쨍!
냉음설은 양손을 살짝 들어 장검을 동시에 쳐내고 앞으로 성큼 나아가 양쪽에 위치한 해적들의 턱을 발로 쳐올렸다.
뻑! 뻑!
아주 순간의 차이였을 뿐, 해적들은 동시에 턱이 깨지고, 동시에 공중에 떴다가 동시에 바닥을 나뒹굴면서 일어나지 못했다.
“좋아!”
해적들이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두 시체를 치우자 야마오는 무릎을 치며 다시금 세 명의 해적을 지목했다.
그리고 팔 하나쯤은 잘라도 된다는 말에 해적들은 칼등이 아닌 칼날을 날카롭게 세우고 사나운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그런다고 달랐을까. 두 명에서 세 명이 되었다고 달라지는 점이 있었을까.
야마오는 냉음설에게 죽고 다친 해적이 서른여섯 명이 되고, 싸우기 위해서인지 죽기 위해서인지 알 수 없게 되어버린 이유로 냉음설의 앞에 선 해적이 아홉 명이 되었을 때에서야 숫자로는, 투박한 싸움에만 익숙한 해적들로는 냉음설을 제압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는 겁을 먹고 잔뜩 긴장해 있는 아홉 명의 수하들을 뒤로 물러나게 했다.
“제가 나설까요?”
츠바사가 야마오의 뒤에서 조용히 왜어로 물었다.
하지만 야마오는 고개를 저었다. 이제는 자존심 문제다. 서른여섯 명이나 죽고 아홉 명을 겁먹게 한 여자를 자신이 처리하지 못하면 우두머리로서 수하들의 신용을 잃게 될 것이다.
더구나 독룡방의 해적들은 은근히 책사인 츠바사를 방주인 야마오보다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백 명도 채 안 되었던 독룡방이 이만큼 커진 것은 츠바사가 합류한 시점부터였고, 선박에 관련한 모든 일을 통괄하고 해적들로서는 상상도 못하는 뛰어난 계책을 생각해내는 것은 물론, 가끔씩 큰 건수에 직접 참여해 보여주는 츠바사의 검술은 분명 야마오와도 견줄 수 있는 실력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벌써 마흔을 중반이나 넘어간 야마오와 이제 서른을 넘어선 츠바사는 여러모로 비교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야마오가 츠바사를 자신의 후계자로 생각한다고 해도 수하들에게 드러내지 않고 있을 뿐, 그 자신보다 더 츠바사의 검술이 뛰어나다는 걸 알고 있다고 해도 신경이 쓰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야마오는 츠바사가 나서는 것을 막고, 자신이 직접 나서려는 것이다. 아직 자신이 늙지 않았다는, 아직까지 이빨이 뽑히지 않은 호랑이라는 것을 수하들에게 보여줄 필요성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그 가녀린 손이 얼마나 매서운지 한번 보자.”
스르릉!
야마오는 허리에 차고 있던 왜검을 차분하게 뽑아 양손으로 굳게 잡았다.
그리고 그 동작을 보는 냉음설의 눈동자는 매섭게 빛났다. 야마오의 검술이 다른 해적들과는 확실히 다르다는 것과 쉽게 상대했다가는 낭패를 당할 수도 있다는 것을 발검 동작 하나만으로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야마오가 뽑아든 왜검은 다른 해적들이 휘두르던 칼과는 확연히 달랐다. 진정한 왜검. 뛰어난 장인의 손길이 묻어나는 명검이 분명했다.
“…….”
야마오는 그의 수하들처럼 무모하게 달려들지 않았다.
그는 해적에 불과했지만, 그가 익힌 검술은 결코 어중이떠중이가 익힐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가게류(陰流:음류).
한 지방의 호족(豪族)이었던 아이스 이코오사이 히사타다로부터 시작된 가게류는 원숭이의 신(神)이 전한 검술이라 하여 엔삐 가게류라고도 불렀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기술에 앞서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의 중요성을 강조할 정도로 수양에 심혈을 기울여야 하며, 그만큼 연륜을 더해갈수록 날카로워지는 검술이다.
즉, 지금 야마오의 가게류는 매우 원숙한 단계에 이르러 있다는 뜻이다.
‘간지러워.’
냉음설은 살짝 기울어진 채 상단을 겨누고 있는 야마오의 왜검이 그녀의 미간을 향해 있다는 것에 점점 압박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건 그녀의 기분을 불쾌하게 만들었고, 그로 인해 그녀의 미소는 더욱 매혹적이고 뇌쇄적인 색기를 발산했다.
타탁.
앞으로 내밀어진 야마오의 앞발이 빠르게 바닥을 디디고 왜나막신이 만들어내는 딱딱한 발소리에 이어 검이 날카롭게 냉음설의 정면으로 찔러 들어갔다.
슥―
단번에 가슴을 꿰뚫을 것 같은 소리.
하지만 그 소리의 끝은 냉음설의 명치가 아니라, 투명하리만치 하얗게 변한 손바닥이었다.
쩡―
지금껏 죽고 다친 해적들이 그랬듯 소요원음신공(逍遙元陰神功)의 공력으로 단단해진 냉음설의 손바닥에 막힌 검은 큰 진동으로 흔들렸고, 그 충격은 고스란히 야마오의 손으로 전달되었다.
하지만 야마오는 그의 수하들과 달랐다.
충격을 전해받자마자 뒤로 한 걸음 물러나면서 검을 잡은 손을 느슨하게 풀고 양팔을 흔들어 마비되는 것을 최소화한 것이다. 그리고 아주 약간의 힘이 생기자마자 다시 검을 꽉 움켜잡고 앞으로 한 걸음 나가서 냉음설의 팔꿈치를 노리고 검을 휘둘렀다.
챙―
“……!”
검이 불꽃을 일으키며 튕겨 나왔다.
팔꿈치 관절을 단번에 끊어버리겠다는 생각으로 힘껏 휘두른 것인데, 소매만 잘렸을 뿐 마치 강철을 벤 것처럼 튕겨버린 것이다.
“뭐냐!”
야마오는 그의 얼굴로 날아오는 냉음설의 하얀 손에서 멀어지기 위해 재빨리 왼쪽으로 몸을 틀면서 화난 음성으로 소리쳤다.
분명 잘라낼 수 있다고 믿었던 팔꿈치가 멀쩡했으니 화가 나는 것은 당연했다. 더구나 그는 공력이 모여 있는 손은 단단해져도 팔 전체가 그럴 수 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무림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야마오였지만 그의 생각은 틀린 것이 아니었다.
실제로 무림에 그러한 공력은 흔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냉음설이 익히 소요원음신공은 그랬다.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이 단단해지는 손보다는 약하지만 소요원음신공은 상체의 대부분을 단단하게 만들어버리는 효용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확실히 손처럼 단단해지는 것은 아니었기에 야마오의 검에 베인 냉음설의 팔꿈치가 멀쩡한 것은 아니었다. 약간의 생채기와 내부로 적지 않은 충격을 전해 받아 팔의 움직임이 이전보다 부자연스러웠던 것이다.
그래서 야마오의 뺨을 때려주려고 했던 냉음설의 손이 제대로 속도를 내지 못하고 야마오에게 피할 시간을 주고 만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틈이 생긴 이유가 자신의 공격 때문임을 눈치 챈 야마오는 왼쪽으로 움직인 순간에 아래로 떨어졌던 검을 그대로 빗겨 올렸다.
스아악―
매끈하게 공간을 가르고 올라오는 검이 냉음설의 옆구리를 그대로 베어버릴 듯했다.
하지만 냉음설이 그렇듯 쉽게 당할 거였다면 진작 해적들에게 제압되었을 것이다.
휘리릭!
베어오는 검날을 따라 빙글 회전한 냉음설의 신형이 석 장의 거리를 날아 바닥에 내려섰다.
“…….”
냉음설의 시선은 득의의 웃음을 짓는 야마오를 향하지 않았다.
그녀의 분노한 눈동자는 속살을 비출 정도로 길게 옷이 잘라진 그녀의 옆구리를 보고 있었다.
“죽일 테다!”
냉음설이 갑자기 뒤로 손을 휘저었다.
“으악!”
“아악!”
“어억!”
바로 뒤에서 냉음설의 매혹적인 뒷모습에 대해 음담패설을 떠들어대던 해적들이 직접적으로 얻어맞은 것도 아닌데 비명을 지르며 가슴을 부여잡고 나뒹굴었다.
고통스런 표정으로 낑낑거리며 일어서지도 못하는 걸 보면 내부적으로 강력한 충격을 받은 것이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