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계 11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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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2,708회 작성일소설 읽기 : 파계 112화
파계 5권 - 12화
“딴 세상 같지?”
“뭐가 말입니까?”
“어디선 자신들의 터전을 움켜잡고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아등바등 용을 쓰는데, 여기는 그냥 평화롭기만 하잖아.”
그들이 십여 일 동안 있었던 어촌 마을과 이곳 은시의 객잔을 비교하며 말하는 것이다.
“그렇군요.”
노백은 씁쓸한 음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 사는 모습이 모두 똑같을 수는 없지만 이렇게 차이가 나는 삶의 모습을 보면 어떻게든 잘 먹고, 잘 살아보고자 하는 사람들의 노력이 이해가 된다.
“손님, 일단 입가심을 하고 계십시오.”
주둥아리가 꼭 봉해진 작은 술 단지와 함께 안주로 먹을 수 있는 소채 등을 가져온 점소이는 그것들을 공손하게 탁자에 올려놓았다.
“오늘은 금 대협께서 사시는 겁니다!”
다른 음식도 빨리 가져오라고 말하며 오칠이 막 술 단지의 봉해진 주둥아리를 개봉하려는데 객잔의 입구로 네 명의 남녀들이 들어섰다.
‘응?’
물론 많은 사람들이 들락거리는 객잔에 손님들이 들어왔다고 해서 오칠이 관심을 가질 이유는 없었다.
그들이 가슴에 금박으로 ‘천(天)’ 자를 새긴 흰옷을 입었고, 그래서 사람들이 열혈군 천군의 후기지수들이라고 수군거린다고 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하지만 그들 네 사람들의 등장에 오칠은 살짝 흥미로운 표정을 지으며 시선을 보냈다. 그들 중에 눈에 익은 사내가 있었던 것이다.
‘그때 그 사람이군.’
눈에 익은 사내는 과거 오칠이 소림사에서 광인인 척하며 있을 때 작은 인연이 있었던, 화산파 장문인의 대제자 금원종이었다.
‘수염을 멋지게 길렀군.’
금원종의 모습은 육 년 전과 크게 달라진 점이 없었다.
그저 수염이 좀 더 수북해지고, 은연히 드러나는 기세는 더욱 날카로워졌으며, 눈동자에선 세월 속에 절로 축적된 경험으로 인해 피어나는 노련미가 느껴질 뿐이었다.
“아는 사람이 있습니까?”
노백은 오칠이 누군가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이 매우 드문 일이라는 것을 알기에 궁금했던 것이다.
“그냥 옛날에 옷깃 한 번 스친 정도.”
“옷깃 한 번 스치는 것도 전생에 수백 번의 인연이 있기에 가능하다고 하잖습니까. 가서 잘해보십시오.”
“그걸 농담이라고 하는 거냐? 딴 데 가서는 그런 농담 하지 마라. 나니까 참지, 딴 사람은 네 농담 들으면 주먹부터 날리려고 할 거다.”
오칠의 타박에도 노백은 찻물을 마시며 어깨를 으쓱였다.
사실 오칠은 노백이 하는 말이 어디서 유래되었는지를 알고 있었다. 그 말은 화엄경(華嚴經) 동종선근설(同種善根說)에 나오는 글귀의 일부였다.
일천 겁 동종선근자(同種善根者)는 일국동출(一國同出)이며, 이천 겁 동종선근자는 일일동행(一日同行)이라.
즉, 일천 겁의 같은 인연으로 해서 같은 나라에 태어나고, 이천 겁의 같은 인연으로 해서 같은 하루를 동행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외에도 몇 마디의 글귀가 더 있었다.
삼천 겁은 하룻밤을 한 집에서 지낸다.
사천 겁은 한 민족으로 태어난다.
오천 겁은 한 동네에 태어난다.
육천 겁은 하룻밤을 같이 잔다.
칠천 겁은 부부가 된다.
팔천 겁은 부모와 자식이 된다.
구천 겁은 형제, 자매가 된다.
일만 겁은 스승과 제자가 된다.
과거 노스님은 그렇듯 사람의 인연은 매우 소중하며, 작은 인연을 소중히 여겨 큰 인연으로 성취하면 그보다 더 귀한 인연이 없을 것이라고 말했었다.
그래서 오칠은 노백의 말을 농담으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도대체 단순한 만남을 전생의 인연이라는 그럴듯한 말로 꾸밀 이유가 무엇인가. 그저 만남은 만남일 뿐이고, 그 이상의 의미는 자신만의 판단으로 생겨나야 하는 것이어야 했다.
“음식 나왔습니다!”
점소이가 요리가 담겨 있는 쟁반을 양손에 들고 다가왔고, 탁자 위에는 곧 일곱 가지의 군침 도는 향기를 풍기는 요리가 놓였다.
“좋은데.”
오칠은 요리가 매우 흡족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술 단지의 주둥아리를 막고 있는 기름종이를 뜯어냈다.
“흠.”
순간, 향긋한 냄새가 오칠의 후각을 자극하고, 오칠은 노백의 잔과 자신의 잔에 서봉주의 맑은 술을 그득하게 따랐다.
“마시자.”
들어올린 두 개의 잔이 부딪치고 오칠과 노백은 단번에 술을 들이켰다.
“캬~ 좋다!”
오칠은 입가를 쓱 닦고서 매콤하게 양념이 된 고기 한 점을 집어 먹었고, 노백도 향설주만은 못하다면서도 연거푸 두 잔을 더 마셨다.
“이봐, 우리도 저 술로 갖다 주게.”
오칠이 앉은 자리를 중심으로 퍼져나가는 서봉주의 향기는 일 층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을 매혹시켰다.
그러나 서봉주는 그 가치에 알맞는 비싼 술이고, 그래서 서봉주를 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손님들은 얼마 되지 않았다. 하지만 금원종과 그 일행은 그러한 능력이 충분했기에 곧 그들의 탁자에도 서봉주가 담겨 있는 술 단지가 놓였다.
“능 소저가 없는 것이 안타깝군요. 금 대협과 능 소저가 한자리에 있어야 축하하는 이 자리가 더욱 빛을 발할 텐데 말입니다.”
“하하하! 혼례를 준비하기 위해 돌아간 능 소저를 지금 찾아서 어쩌겠다는 건가!”
“신랑 될 금 대협께서 여기 계시니, 신부 될 능 소저께서도 같이 있으면 더 좋겠다는 것이지요!”
“하하하! 그렇게 말하니 아주 틀린 말도 아닙니다!”
“얼굴을 붉히시는 것을 보니 매화신검께서도 부끄러움을 타시는가 봐요!”
“이거 사문으로 돌아가기 전에 술 한잔 사라고 해서 왔는데, 모두가 날 골려주려고 작정들을 하셨구려.”
“하하하! 오늘이 아니면 언제 또 금 대협을 골려준단 말입니까!”
“맞습니다! 오늘이 아니면 안 되지요!”
금원종과 일행인 남녀들은 즐겁게 웃고 떠들었고, 그 소리가 작지 않아서 오칠은 그들이 무엇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지 대충 눈치 챌 수 있었다.
‘혼인을 하는가 보군. 그럼 신부는 그때의 그 철없는 아가씨인가?’
오칠은 예전에 금원종과 같이 있던 두 사람도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주 잠깐에 불과한 만남이었지만 당시 여인이 금원종에게 갖는 감정 또한 어느 정도 눈치를 챘었다.
“금 대협의 처남 될 사람이 저기 오는구려.”
객잔에 들어서는 또 한 명의 사내.
그는 금원종의 사제인 비천폭풍검(飛天暴風劍) 능진철이었다. 그 역시 과거와 달라진 것은 수염과 날카로운 기세 정도였다. 다만 왼쪽 뺨에 새겨진 가느다란 칼자국이 그를 더욱 차가워 보이게 만든다는 것이 큰 변화라면 변화일 것이다.
한데, 객잔으로 들어오는 그의 표정은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원래가 잘 웃지 않는 능진철이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지금처럼 심각한 표정으로 다니지는 않았다.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느냐?”
금원종은 그의 사제가 이런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 의아했다.
더구나 지금 능진철은 무언가를 확인하기 위해 지강(枝江)에 다녀오는 길이었기에 더욱 궁금증이 일었던 것이다.
“아, 맞다! 능 소협은 지강에 터를 잡고 있는 현묘채가 괴멸되었다는 말을 듣고서 직접 확인하고 오겠다며 다녀오는 길이었지요? 왜요? 그곳에서 무슨 좋지 않은 일이라도 있었던가요? 혹, 괴멸되었다는 수적들이 살아나서 능 소협의 바짓가랑이라도 잡아당기던가요?”
종남파 장문인의 막내 제자라는 신분을 가진 여초홍이 짐짓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하지만 농담을 하는 듯한 그 말 속에는 약간의 조롱기가 섞여 있었다. 마치 그깟 일로 지강까지 갔다 올 필요가 무엇이냐는 듯한 조롱이었다.
그리고 사실, 그녀는 그러한 마음으로 말한 것이었다.
능진철이 단순한 호기심 때문이 아니라, 그 현묘채와의 싸움으로 크게 다친 녹명원, 더 정확히는 그의 누이인 녹선향 때문에 현묘채를 찾아가려 했었는데, 그가 가기도 전에 현묘채가 괴멸되었다는 말을 듣고 확인하고자 갔다는 것을 비난하고 있는 것이다.
왜?
당연히 여초홍이 능진철에게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
하지만 여초홍의 그런 비난에도 불구하고 능진철은 대꾸도 하지 않았다.
아니, 뭔가 생각에 잠긴 것처럼 심각한 얼굴이 되어 술만 마셨다. 그리고 당연히 여초홍은 화가 났고, 참고는 있었지만 계속해서 능진철이 대답도 않고 자신의 말을 무시한다면 무슨 일을 벌일 것처럼 사나운 눈길로 노려보았다.
“허험! 이거 분위기 한번 썰렁하구만. 능 형, 그러지 말고 말 좀 해보게. 여 소저뿐만이 아니라 나 역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너무 궁금하단 말일세.”
무당파 대제자인 영현 도사가 늘 그렇듯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건네자 그제야 능진철도 술잔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지강으로 가보니 소문대로였습니다.”
“현묘채가 괴멸되었다는 것 말인가?”
“그렇습니다. 말 그대로 현묘채는 괴멸되어 있었습니다. 그곳에는 개 한 마리도 살아 있지 않고 다 죽어 있었죠. 물건 하나 파손된 것 없이 생명을 가진 것들만 죽어 있는 기괴한 광경이었습니다. 그런 을씨년스런 광경 때문에 그곳을 발견한 어부들은 겁이 나서 아무도 그곳의 물건을 훔쳐가지 않았다는군요.”
“……!”
“……!”
금원종 등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개 한 마리도 남겨두지 않고 멸절시켰다는 것은 매우 독한 마음을 먹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누군가 매우 대단한 복수심을 가지고 행한 일이라고 봐야 했다.
“내가 듣기로는 화 소협과 그 사제들에 의해 크게 힘을 잃은 현묘채가 그들의 영역을 노리는 다른 수채에게 공격을 당한 것이라고 하던데요?”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은 여초홍이 능진철의 말을 믿기가 힘들다는 듯 말했다.
더구나 그녀가 들었다는 이야기는 화유상이 속한 지군에서 흘러나온 이야기였으니, 그녀가 충분히 근거로 삼을 만한 것이었다.
“내가 이미 말했듯이 거기에선 생명을 가진 것들에게만 문제가 생겨 있었소. 수적들이 모아둔 재물도, 집들도 온전히 그대로였단 말이오.”
능진철의 말이 사실이라면 진정 이상한 일이었다.
여초홍이 들었던 말대로라면 그곳의 재물은 모두 사라져 있어야 하고, 건물들은 모두 불타거나 무너져 있어야 정상이기 때문이었다. 오죽하면 어부들도 그냥 돌아왔다고 하지 않는가.
물론 얼마 뒤엔 저주니, 귀신이니 하는 것들보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재물에 눈이 돌아갈 자들이 떼거지로 몰려와 그곳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될 테지만 말이다.
‘은형대가 꽤나 열이 받았던 모양이군.’
오칠은 능진철 등이 나누는 대화를 몰래 들으며 내심 쓴웃음을 지었다.
은형대 대주가 현묘채에게서 목숨 값을 받았다고 하더니, 저들의 말을 빌자면 가축까지 죽여 버릴 정도로 아주 집요하고 잔혹하게 뿌리를 뽑아버린 것이다.
뭐, 흔한 말로 기왓장 하나까지 남기지 않고 부셔버린 정도는 아니지만, 어쨌든 그들이 교주인 자신에게 갖는 충성님이나, 적이라고 간주한 자들에 대한 손속이 매우 잔혹하고 철저하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어쩌면 그들은 이백여 년 전에 그들이 정사맹에게 당했던 토벌로 인해 적에게는 동정심을 베풀 필요가 없다는 교훈을 얻었고, 확실히 실천하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오칠은 그러한 가치관과 행동력에 대해서는 공감하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크게 문제 삼고 싶지도 않았다.
“그들이 어떠한 수법에 당했는지 살펴보았느냐?”
금원종은 현묘채의 일에 흥미가 동한 모양이다.
그는 매우 진지하게 물었고, 그 일에 대해 신중히 생각해보려 한다는 자세를 취했으니까.
“죽은 현묘채 수적들의 숫자는 정확히 예순두 명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중에서 저항하려다가 죽은 수적은 열도 되지 않았습니다. 대부분의 수적들은 자신이 어떻게 죽었는지도 모르겠다는 평온한 얼굴로, 혹은 웃으며 목이 잘려 죽은 자들까지도 있었습니다.”
능진철은 그가 보았던 여러 가지 모습을 상세히 설명했다.
“저항하려다가 죽은 수적들도 무기를 제대로 뽑지도 못하고 죽은 것 같단 말이지…….”
금원종은 심각한 얼굴로 생각에 잠겼고, 다른 사람들도 어떻게 그리 되었는가에 대해 고민했다.
“독의 흔적은 있었소?”
여초홍의 사형이자 종남파의 대제자인 고범열의 물음에 능진철은 독에 관련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고 대답했다.
“그럼 은신술을 익힌 살수들의 소행이겠군.”
영현 도사는 달리 답이 있을 수 없다는 듯 결론을 지었다.
그리고 금원종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동감을 표시하자 다른 이들도 살수 외에는 해답이 없다는 것으로 생각을 굳히게 되었다.
“하지만 살수들이 무엇 때문에 현묘채를 괴멸시켰을까요?”
여초홍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의문을 제기했다.
사실, 그것이 금원종이 이 일에 흥미를 보이는 이유였다. 수적들이 죽었다는 것에, 혹은 수채들 간의 세력 다툼으로 괴멸되었다는 것은 신경 쓸 일이 아니었다.
수적들이나 산적들, 혹은 여러 무림 문파들 사이에서는 자주는 아니라도 어쩌다 한 번씩은 일어날 수 있는 일이고, 또 분명히 일어나는 일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하지만 현묘채의 괴멸은 그러한 종류의 세력 다툼과는 연관이 없는 듯했다.
수적들을 공격한 자들은 매우 고명한 은신술을 익혔고, 신속하면서도 빠르게 움직일 정도로 정예화 되었으며, 예순두 명이나 되는 자들을 일시에 죽일 정도로 숫자도 많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