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계 108화
무료소설 파계: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2,623회 작성일소설 읽기 : 파계 108화
파계 5권 - 8화
“……?”
한데, 오칠이 막 강가에 올라서서 어디 비를 피할 곳이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는데 웬 아이가 억수같은 비를 그대로 맞으며 그를 빤히 쳐다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내가 등평도수를 펼치는 걸 본 건가?’
소년은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나 표정에 담긴 감정은 그게 다가 아니었다. 놀람과 당황, 다급함 등등의 감정도 담겨 있어 오칠을 의아하게 만들었다.
“꼬맹아, 여긴 위험하니까 위로 올라가.”
장강의 범람이 무서운 것은 너무나 갑작스럽고 빠르게 수위를 높이고 그 물살이 거칠어지기 때문이다.
아마도 한 식경도 안 되어서 아이가 선 곳까지 물이 차오르고, 장강의 거친 물살은 그 주변의 모든 것을 휩쓸고 지나갈 것이 분명했다. 거기다 그 물살엔 위험천만하기 그지없는 부유물이 섞여 있어서 어느 순간 크게 다칠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아이는 오칠의 말에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는 건 아이가 오칠을 보고 있었던 것도 아니라는 의미가 아닌가.
“인마, 뭘 멍청히 서 있는 거야?”
오칠의 성정대로 하자면 더 이상 아이에게 상관치 않아야 했다.
그냥 무시하고 그와 노백이 쉴 만한 곳을 찾으러 저 위로 올라가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무한에서 한동안 아이들과 당과를 먹으며 지냈기 때문인지 이 어린 녀석의 표정이 너무 신경 쓰였다.
‘어쩔까…….’
잠시 고민하던 오칠은 곧 멍해 있는 아이의 어깨를 잡고 따듯한 공력으로 덜덜 떨리는 아이의 몸을 안정시켜주었다.
그리고 다시 물었다.
“무슨 일이야?”
“형이… 형이… 형이 저기서 나오질 않아요!”
아이는 그제야 오칠의 존재를 확인했다는 듯 잠시 놀란 표정을 짓다가 잔뜩 겁먹은 얼굴로 울먹이며 말했다.
오칠은 어떻게 된 상황인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두 형제는 근방에서 놀고 있다가 형은 물살에 휩쓸렸고, 동생은 어떻게 할 줄을 몰라 잔뜩 겁을 먹은 채 마냥 서 있었던 것이다.
“언제 빠진 거냐?”
오래전에 빠져서 이미 죽었을 거라고 생각하며 물은 것이지만, 의외로 아이의 대답은 방금 전이라는 것이었다.
“어디였냐?”
아이는 손을 들어서 오칠이 왔던 방향보다 조금 더 아래쪽을 가리켰다.
‘그럼 내가 보지 못할 수도 있었겠군.’
하지만 한편으로는 아이가 말한 방금 전이라는 말이 믿을 것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물살에 흘러가는 아이의 형이 자신의 이목에 포착되지 않았을 리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가 온 방향보다 아래쪽이라면 발견하지 못했을 가능성도 있긴 했다.
“여기 이 아저씨를 잘 보고 있어라.”
오칠은 굳이 이렇게 고생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곧 바닥을 박차며 거친 물결 위로 뛰어들었다.
타탁!
움직임을 종잡을 수 없는 거친 물살 위로 등평도수를 펼치는 것은 너무나도 힘든 일이었지만, 오칠의 신형은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수면을 박차고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어디냐?’
넉 장이나 솟구쳐 오른 오칠의 눈은 장막 같은 빗줄기 사이를 매섭게 뚫고 지나가 아이의 존재를 찾기 시작했다.
죽었을까?
가라앉았을까?
몇 가지 가능성 높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오칠의 날카로운 눈은 수면을 집요하게 탐색했고, 다시 물 위로 떨어지는 신형은 또다시 수면을 박차고 위로 솟구쳐 올랐다.
‘정말 지랄 같은 날씨군.’
오칠은 약간 피곤해졌다.
아무리 세상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막강 내공을 소유한 그라 해도 공력이란 한계가 있는 것이고, 특히나 공력을 극도로 소모하는 등평도수의 연이은 시전은 피곤함을 더욱 가중시키고 있었다.
‘내가 왜 이러고 있는 거야?’
귀찮은 걸 싫어하는 자신이 죽었을 가능성이 높은 아이를 찾겠다고 이 날씨에 방방 뛰어다녀야 하는 것이 갑자기 기분을 더럽게 만들었다.
아니, 어쩌면 그냥 자신이 지쳐가고 있다는, 백 장 밖에서 나뭇잎 떨어지는 것까지 정확하게 포착할 수 있는 자신의 이목이 고작 아이 하나 찾지 못하고 있다는 것 등등이 기분을 불쾌하게 만들고 있는지도 모른다.
‘저기다!’
하지만 오칠은 끝내 포기하지 않았고, 처음 수색을 시작한 곳보다 삼백여 장 이상 아래로 내려온 끝에 부러진 나무에 의지하고서 이리저리 출렁이며 흘러내려가고 있는 아이를 발견해냈다.
타탁!
수면을 박차고 빙그르 회전하며 날아간 오칠은 정신을 잃은 듯해 보이는 아이를 잡아채고 강가 쪽으로 다시 몸을 날렸다.
“후… 후… 후……!”
땅에 내려선 오칠은 재빨리 아이가 숨을 쉰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바닥에 주저앉아 숨을 골랐다.
정말 지쳤다. 온몸을 두들겨대는 빗방울이 너무나 시원스러울 정도로 온몸이 열기로 가득했다. 하지만 오칠은 금방 몸을 안정시키고 일어나 섰다.
“이 녀석도 노백만큼이나 팔자 좋은 녀석이군.”
얼굴이 창백하지만 살아 있다는 것도, 그리고 지금의 상황이 자신과는 상관없다는 듯 여유롭게 정신을 잃고 있는 것도 딱 노백하고 비슷한 모습이었다.
‘의식이 없다는 것은 사람에게 휴식과 같은 걸까? 그렇다면… 죽음이야말로 가장 마음 편해지는 길이겠군.’
오칠은 아이를 등에 업으며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러나 곧 코웃음 치며 생각을 멈췄다. 그 어떤 상황에서든 산 자에게 죽음을 생각해야 할 이유란 없는 것이다. 죽음은 그저 죽을 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니까 말이다.
“꽤나 멀리 오긴 했구나.”
삼백여 장의 거리를 목적을 두고 등평도수의 수법으로 움직일 때는 시간이 그리 길게 걸리지 않은 것 같지만, 아이를 등에 업고 비를 맞으며 걸어가면 그 거리감이라는 게 전혀 다르게 느껴지는 법이다.
하지만 오칠은 은근하게 공력을 돋워(아이의 몸을 따듯하게 하는 효과) 몸 한 치 밖으로 강기막을 형성하여 억수같이 쏟아지는 빗방울을 막아내고, 근처에 어디 몸을 피할 만한 곳이 있나 살피면서 멀게 느껴질 수도 있는 거리를 느긋한 마음으로 걸어갔다. 그렇게 한 식경쯤 걸려서 등에 업은 아이의 동생이 기다리고 있는 곳에 당도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곳에는 전혀 예상치 못한 새로운 인물이 있었다. 오칠에겐 좀 꺼려지는 인물이어서 재빨리 강기막을 없애버렸다.
“네놈은 누구냐?”
아이와 같이 기다리고 있던 늙은이가 물었다.
하지만 그냥 늙은이가 아니었다. 잔뜩 물에 젖어 가뜩이나 허름한 가사(袈裟:승려가 장삼 위에, 왼쪽 어깨에서 오른쪽 겨드랑 밑으로 걸치는 법복)를 후줄근하게 입고 있는, 왜소하기 그지없는 몸집의 늙은 중이었다.
바로 그래서 오칠이 꺼려하는 것이다. 중을 상대하는 것은 마음이 편치 않은 일이니까.
하지만 늙은 중이 묻는 말투나 목소리가 참으로 투박하여 중이 맞기는 맞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 괴이한 느낌을 풍겼다.
“지나가는 행인입니다.”
오칠은 전혀 성의 없는 퉁명스런 말투로 대답하며 늙은 중에게서 시선을 돌려 노백이 잘 있는지 확인했다.
늙은 중의 아미가 슬쩍 찌푸려졌다. 오칠의 말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오칠은 그런 늙은 중의 기분을 무시하고 등에 업고 있던 아이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형은 괜찮아요?”
아이의 동생이 얼른 달려와 형을 붙잡고서 물었다.
“잠시 정신을 잃은 거다. 너 집이 어디냐?”
오칠은 비가 멈출 때까지 아이의 집에서 신세를 질 생각이었다.
“내가 알고 있으니 아이를 업고 따라와.”
대답은 아이가 아니라 늙은 중이 했다.
오칠은 그런 늙은 중의 뒷모습을 쳐다보다가 아이에게 시선을 주었다.
“저 중은 뭐냐?”
“며칠 전에 우리 마을로 탁발하러 오신 노스님이세요. 저분, 대단한 분이세요. 커다란 폭우가 쏟아질 것을 진작 아시고는 우리 마을 사람들에게 높은 산으로 피해 있어야 한다고 하셨거든요. 그런데 형과 저는 여기서 놀다가…….”
아이의 말은 더 들을 것도 없었다.
대충 요약하자면, 늙고 왜소하지만 신통력이 있는 중이고,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그를 생불처럼 생각한다는 것이다.
‘느껴지는 기운이 예사롭지 않은데… 소림승인가?’
오칠은 아이를 등에 업고, 노백을 어깨에 걸치며 저 앞에서 걸어가는 노승에 대해 생각했다.
겉으로는 초라한 늙은이처럼 보이지만 감추어진 기운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니었다. 노인은 애써 그런 기운을 드러나지 않게 하려고 하는 듯하지만 오칠의 감각까지 속일 수는 없는 일인 것이다.
생각해보면 소림사의 몇몇 승려들이 세상에 나가 탁발을 하고 있으니 저 늙은 중도 그중에 한 명일 가능성이 높았다. 다만 그 위치가 어느 정도일까 하는 것이 문제인데, 오칠의 느낌상 꽤나 높은 배분의 중이 틀림없었다.
‘대략적인 나이로 봐서는 광 자 배열인 거 같은데…….’
오칠은 괜히 소림승과 얽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걱정이 되었다.
뭐, 걱정이라고 해봐야 아주 약간의 귀찮음 정도겠지만, 어쨌든 괜히 소림과 얽히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에 대해 알 리가 없으니.’
설혹 소림사에 붙들려 있던 자신에 대해 안다고 해도 오랜 세월이 지나 얼굴까지 변한 자신의 정체를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래서 오칠은 우선 마을에 가기로 했다. 저 늙은 중과의 일은 그 다음에 생각할 문제였다.
* * *
늙은 중을 쫓아 아이와 함께 간 곳은 한 식경 거리에 위치한 마을이었다.
물론 천천히 걸어갔기에 그렇게 오래 걸린 것이고, 빠른 걸음이면 반각이면 충분한 거리였다. 하지만 그곳은 더 이상 마을이 아니었다. 강에서 가까운 곳에 있다는 점 때문에 짚으로 덥혀 있는 지붕 꼭대기만 남기고 범람한 장강에 푹 잠겨버린 곳을 마을이라 부를 수는 없으니까 말이다.
‘저 중이 산으로 피하라고 조언을 했다고 했지.’
아이가 했던 말을 기억해낸 오칠은 마을에서 강의 반대쪽으로 향하는 늙은 중의 뒤를 말없이 따라갔다.
그리고 산의 중턱쯤 다다랐을 때에 나무를 베어내고 만든 좁은 평지 위로 십여 채의 오두막이 지어진 곳에 당도했다. 그곳에 마을 사람들이 피해 있었던 것이다.
오두막의 구조도 엉성하고, 나무 속내 특유의 씁쓸한 냄새가 나는 것이 노승의 말 때문에 급하게 만든 것이 분명했다.
“이 녀석들아!”
오두막 앞에 서 있던 몇몇 사람들 중에서 한 여인네가 달려와 오칠의 옆에 있는 아이를 와락 껴안았다.
“네 형은 왜 이런 것이냐?”
어미인 듯한 여인네에 이어 아비인 듯한 사내까지 달려와 오칠의 등에 업힌 아이를 받아들며 걱정이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형이 물에 빠졌는데, 이분이 구해주셨어요.”
아이의 부모는 얼른 오칠에게 고맙다며 머리를 숙였다.
그리고는 오칠의 어깨에 얹어져 있는 노백을 보고는 서둘러 오두막 안으로 안내했다.
안에는 대여섯 명의 사람들이 더 있었고, 가운데엔 화롯불이 두 개나 피어져 있었다. 물에 젖은 몸을 말리기엔 더없이 좋은 상태였다.
“이분이 우리 아이를 구해주셨다지 뭔가!”
“아이고, 젊은 양반이 장한 일을 하셨구만!”
아이의 부모는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오칠에 대해 칭찬을 늘어놓고는 가장 잘 마른 바닥에 짚을 깔아서 그곳에 앉게 했다.
“너는 이리 따라와! 이 아비가 여기 있으라고 그렇게 신신당부를 했건만, 그걸 못 참고 소란을 일으키다니!”
아이들이 안전하게 돌아왔다는 기쁨이 가라앉자 부모들은 이제 혼날 차례가 되었다면서 정신을 차리지 않은 아이를 품에 안고, 혼이 날까 두려워 따라가지 않으려는 동생 녀석을 억지로 잡아끌고서 오두막을 나갔다.
그리고 곧이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걱정했는지 아냐는 둥, 노스님이 너희들 때문에 고생을 하셨다는 둥 하는 호통 소리 잘못했다고 울먹이는 아이의 소리가 들려왔다.
“차 드십시오, 노스님.”
화롯불에 올려놓은 주전자를 집어든 사내 하나가 늙은 중에게 투박한 질그릇을 내밀어 차를 따랐다.
참으로 초라한 모양에, 그 색깔도 칙칙한 색깔의 질그릇이어서 역시 시골의 어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늙은 중은 별로 개의치도 않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찻물을 참 좋구나, 하며 기분 좋게 마셨다.
“젊은 양반도 드시오. 몸이 따듯해질 테니까.”
오칠은 질그릇을 받아들고 그 안에 가득 찬 찻물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곧 자신도 후루룩 하며 마시니, 사내의 말대로 속이 후끈하게 달아오르는 것이 기분이 절로 좋아졌다.
‘무엇이건 그 마음에 따라 달라진다고 했던가?’
과거 노승은 외국의 어떤 고사(古事)를 빗대어 해골에 담겨진 물도 밤중에 목이 말라 마시면 더할 수 없이 맑고 시원한 물이 된다고 했었다.
지금 오칠이 마시는 찻물이 바로 그러한 노승의 말과 같지 않은가. 분명 이런 시골 어촌에서 먹는 차는 매우 질이 낮은 차일 테고, 그저 쓰디쓴 맛밖에 나지 않을 텐데도 지금 오칠의 속내를 따듯하게 채워주는 차 향은 차 중에서도 극품(極品)이라는 용정차(龍井茶)에 못지않았다.
“이름이 뭐냐?”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오칠의 어깨를 툭 치며 늙은 중이 말을 걸었다.
다른 사람들도 관심 어린 시선을 보냈다.
“그냥 오가라고 부르십시오.”
이름까지 알려줄 필요는 없었고, 성만 알려준다고 예의에 어긋나는 것도 아닐 것이다.
“난 광죽이라고 하는 땡중이다.”
광죽.
오칠은 그 이름을 듣고 그가 소림사의 중이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