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계 107화
무료소설 파계: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2,328회 작성일소설 읽기 : 파계 107화
파계 5권 - 7화
화유상 등이 그들에게 달려들 때 수하들은 모두 등평도수를 떠올렸지만, 똑같이 놀라긴 했어도 염추패는 그것이 등평도수가 아니란 걸 분명히 알고 있었다. 만약 화유상이 진짜 등평도수를 사용했다면 염추패는 진작 도망쳤을 것이다.
그런데 오칠이 지금 진짜 등평도수를 펼치고 있었다. 발끝으로 수면을 톡톡 밟으며 달려오는 모습은 마치 신선이 구름을 밟는 것처럼 가볍고, 경쾌하며, 엄청나게 빨랐다. 눈 깜빡할 사이에 벌써 수하들이 타고 있는 쾌속선에 올라설 정도로 말이다.
“으아~!”
수적은 용기를 북돋기 위해 고함을 내질렀다.
다른 수적들도 동료의 기합에 힘입어 소리를 지르고 아미자를 휘둘렀다.
펑―
펑―
하지만 아미자는 하늘로 튕겨 올라가고, 수적들은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절명하여 물속으로 잠겨 들어갔다.
“죽기 싫으면 도망쳐.”
오칠은 손에 든 나무 노를 마치 만근 철퇴라도 된다는 듯 아래로 내리찍으며 차분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우웅―
하지만 나무로 만들어진 노에선 그의 목소리와는 다른, 너무나 가슴 섬뜩한 굉음이 터지며 수적들과 쾌속선을 일거에 박살내버렸다.
쾅―!
“크악!”
“아악!”
비명을 지른 수적들은 나름대로 사지가 멀쩡한 상태로 죽은 자들이었다.
그러나 그 몇을 제외한 수적들은 온몸이 분시되는 듯한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참혹하게 박살나며 수면 위로 흩뿌려졌다.
“후퇴다! 모두 도망쳐!”
염추패는 목이 터져라 소리쳤다.
하지만 그의 결정은 너무 늦은 것이었다. 그가 도망칠 것인가, 자존심을 세우고 더 버텨볼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는 사이에 세 척의 쾌속선이 박살나고, 그 안에 타고 있던 수적들이 모두 오칠에게 목숨을 잃은 것이다.
“…….”
배의 절반이 작살나고, 절반의 숫자를 잃은 수적들은 채주 염추패와 함께 저 멀리 사라졌다.
오칠은 눈을 감은 채로 잠시 말이 없었다.
방금 전에 자신의 손에 죽어나간 수많은 목숨들을 떠올리며 좋지 않은 기분을 지우려고 하는 걸까?
모를 일이었다.
오칠은 그저 한쪽이 박살나 슬며시 가라앉기 시작하는 쾌속선 끝자락에 말없이 서 있다가 눈을 뜨고는, 노백이 타고 있는 쾌속선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너무 늑장을 부렸나 보군.”
오칠은 손에 쥐고 있는 노를 집어던지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노백을 보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속으로 염불을 읊조리며 그의 손에 죽은 수적들의 명복을 빌었지만 그것도 아주 잠깐이었고, 정작 그가 신경 쓰고 있었던 것은 중형선의 존재였다.
중형선은 없었다.
분명히 저 십여 장 앞에 있어야 했지만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하지만 오칠은 그렇게 중형선이 사라질 줄 알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도망치자고 선주를 다그치던 상황이나, 작지 않은 부상을 입은 화유상 등이 멀뚱히 기다리고만 있지 않을 거라는 짐작만으로도 충분히 예측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오칠은 그걸 미리 예측하고도 왜 선주에게 움직이지 말라고 말해두지 않은 걸까?
생각해보면 이유는 간단했다. 그래보았자 화유상의 협박에 선주는 어쩔 수 없이 배를 움직여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앞으로 생겨날 불확실한 두려움보다는 코앞의 서슬 퍼런 칼에 더 무서움을 느끼는 법이니 말이다.
다만 오칠은 좀 더 빨리 수적들을 쫓아버렸으면 중형선이 완전히 모습을 감추기 전에 쫓아가서 다시 탈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을 느끼고 있는 중이었다.
“그것보다…….”
오칠은 거의 가라앉은 배에서 몸을 날려 수면을 서너 번 디디고는 노백이 있는 쾌속선에 내려섰다.
“중형선이 사라졌습니다.”
노백은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냐는 듯 말했다.
하지만 오칠은 그렇게 순진한 생각을 하는 네가 멍청한 것이라고 말해주고는 이제 어떻게 할지에 대해서나 생각하라고 했다.
“일단 강가로 가야 할 것 같습니다.”
“무슨 수로?”
“예? 당연히 이 배를 타고…….”
노백은 말하다 말고 쾌속선의 밑바닥을 쳐다보았다.
이곳저곳에서 미세하게 물이 세고 있었다. 한두 군데라면 옷을 벗어 막을 수도 있겠지만, 그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틈새였다. 도대체 언제 이리 많은 구멍이 생긴 걸까?
“내가 이 배에 올라설 때부터 이랬던 것 같다.”
오칠이 온 이후로는 수적들이 배 근처로 접근할 수도 없었다.
그러니 오칠이 오기 전, 노백이 혼자서 고군분투하고 있을 때에 수적들이 배를 가라앉히려고 칼질을 했었던 것이다. 다행히도 당시에 큰 구멍이 생기지는 않았지만, 처음엔 티도 안 나던 구멍들이 점점 벌어지면서 이제는 어찌 손을 써볼 수도 없는 상태까지 된 것이다.
“형님이 타고 온 배는……?”
오칠이 왔을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소선은 보이지 않았다.
물살에 흘러가 이미 저 아래로 사라져버린 것이다. 게다가 수적들이 몰살되어 비어버린 쾌속선들도 사라졌거나 박살이 나서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수영할 줄 아냐?”
오칠의 물음에 노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됐네. 수영으로 강가까지 가야지.”
노백은 너무 쉽게 말하는 것이 아니냐는 듯 오칠을 쳐다보았다.
사실, 어느 정도의 거리는 가능할 수도 있지만, 이곳에선 보이지도 않는 강가였다. 도저히 짐작할 수도 없는 그런 먼 거리를 물살을 헤치고 계속해서 수영해야 한다는 것은 그들이 무공을 익혔다 해도 너무나 힘든 일인 것이다.
“어서 저어.”
오칠은 물이 차오르고 있는 바닥에 털썩 앉아 노를 집어 들었다.
“이 배가 버틸 수 있을 때까지 노를 젓다가 배가 가라앉으면 그 조각을 뜯어서 부력을 얻으면 돼. 그럼 시간이 걸리긴 해도 지쳐 죽을 일은 없을 거다.”
노백은 한숨을 쉬면서 노를 집어 들었다.
오칠이 말한 방법 외에는 달리 떠오르는 것이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이런 낭패가 자신의 행동으로 인해 생겨난 것이기 때문에 달리 어떤 주장을 내세울 명분도 없었다. 뭐, 운이 좋아 지나가는 배라도 있으면 좋을 테지만, 그럴 가능성은 너무 희박해 보였다.
그리고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렇게 난감한 상황도 아닌 것 같았다. 두 사람의 힘으로 노를 저으면 꽤나 많은 거리를 갈 수 있을 테고, 나뭇조각으로 부력을 얻으면 나머지 거리를 수영해 가는 것이 크게 어렵지 않을 듯하니까.
하지만 실상은 마냥 낙관할 상황도 아니었다.
‘꽤 쏟아질 것 같은데.’
하늘이 검게 물들어가는 것이 오칠의 신경을 거슬리게 했다.
매우 거세게 비가 내리고, 아마 바람도 무척 강하게 불 것이다. 그리고 그런 상황이면 구멍 뚫린 배로 가기도, 나뭇조각으로 부력을 얻는다 해도 수영을 해서 가기에는 매우 힘겨운 상황이 될 것이 분명했다.
‘뭐. 죽지만 않으면 되지.’
오칠은 고민은 필요 없다고 결론지었다.
이보다 더욱 힘겹고 위험한 상황을 겪었었던 그가 걱정할 것이 무엇인가.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 인생이지만, 순간 순간 열심히 힘차게 나가다 보면 무엇이든 헤쳐 나갈 수 있을 정도로 단순한 것이 또 인생인 것이다.
“인마, 더 열심히 저어.”
“예, 형님.”
오칠은 그렇게 노백과 함께 망망대해와 같은 장강을 빠져나가기 위해 힘껏 노를 저었다.
제47장. 건축(建築)
쏴아아―
비가 쏟아졌다.
마치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듯 굵직한 빗방울들이 장벽을 친 것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장강의 범람(氾濫).
고래로 장강에 비가 쏟아졌다 하면 생겨나는 지독히도 잔인한 자연의 폭력이었다.
그리고 지금 호남을 비롯해 인접한 호북 남부엔 사월에서 칠월에 집중하여 비가 내린다는 특성을 무시하고, 구월을 넘어가는 이 시점에 난데없이 장강을 범람시킬 정도의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던 것이다.
“지랄 같은 날씨군.”
눈알만 한 빗방울이 수면을 강하게 때려대는 모양만으로도 등골을 오싹하게 하는 장강의 수면 위 어느 한 곳에서 하늘을 원망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거대한 배도 순식간에 빗물로 가득 채워 가라앉힐 것 같은 이런 날에 어떤 정신 나간 선주가 배를 띄워 놓기라도 한 걸까?
하지만 그 어딜 보아도 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시야를 가리는 굵은 빗줄기로 가득한 주변이라 해도 배의 윤곽조차 드러나지 않을 리는 없는데 말이다.
“견딜 만하냐?”
하지만 배는 없어도 사람은 있었다.
오칠.
난데없이 장강의 어느 한 곳에서 배를 떠나보내고, 구멍 뚫린 쾌속선에 의지하여 노를 젓던 오칠이, 지금은 나뭇조각 하나를 벗 삼아 폭우에 휘몰아치는 장강을 헤엄쳐가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의 옆에는 흰색 가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노백이 있었다. 그 역시 오칠이 잡고 있는 나뭇조각을 벗 삼고 있는 것은 불문가지. 다만, 그는 가면 때문에 겉으로 드러나지 않을 뿐, 오칠의 멀쩡한 얼굴과는 달리 꽤나 지쳐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오칠은 보지 않아도, 듣지 않아도 노백이 지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사실, 반나절 이상을 계속해서 헤엄쳐 왔고, 세 시진 전부터는 지랄 같은 비바람과도 싸워오고 있었으니 지치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 속이야 어떠하든 겉으로는 전혀 지쳐 보이지 않는 오칠이야말로 인간 같지 않은 존재라고 해야 할까?
“조금만 참아. 저기 뭔가 보이는 것이 강가에 다 온 것 같다.”
노백은 잘 움직이지도 않으려 하는 다리로 발질을 하며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는 오칠의 말을 믿지 않았다. 지금 들은 말은 오칠이 두 시진 전부터 한 식경 간격으로 했던 말이기 때문이다. 다만 오칠이 그렇게 거짓말을 하는 것이 지쳐 있는 그를 위로하려는 의도임을 알기에 가만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실상 노백은 희망이 꺾여갈 때마다 오칠의 바로 그 말 덕분에 정신을 차리며 힘을 내고 있었다. 절망감에 빠져 있을 때는 거짓임을 알고서도 듣고 싶은 것이 바로 그렇게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원하던 목적을 눈앞에 두었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강가다!”
하지만 이번엔 오칠이 거짓을 말한 것이 아닌 모양이다.
자신과는 비교할 수 없이 먼 거리를 볼 수 있는 오칠의 눈만이 아니라, 노백 자신의 눈에도 뭔가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노백은 있는 힘, 없는 힘을 죄다 끌어 모아 발질을 하고, 나뭇조각을 잡지 않아도 되는 한 손까지 물살을 휘저어 아직 흐릿하게 보이는 그곳을 향해 빨리 당도하려고 노력했다.
“헉… 헉… 헉……!”
이미 급격하게 떨어진 기온으로 인해 지친 숨소리를 따라 허연 입김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거세게 떨어지는 빗소리에 노백은 자신의 숨소리를 들을 수도, 허연 입김을 볼 수도 없었다. 그리고 그게 다행이라 생각하기도 했다. 아직 지친 것이 아니라는, 더 힘을 낼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질 수 있었으니 말이다.
“이런 빌어먹을!”
한데, 갑자기 오칠의 짜증스런 말소리가 들리더니 노백의 뒷덜미가 어떤 강력한 힘에 붙들려서 물 밖으로 들어 올려졌다.
‘왜지?’
노백은 누가? 라는 의문보다는 왜 자신이 공중으로 들어올려져야 하는가, 라는 의문에 빠져들었다.
당연히 그의 목덜미를 움켜잡은 사람은 오칠일 테지만, 그가 왜 이러는지 의문을 해소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노백은 자신의 발밑 두 장여 아래 수면으로 큼직하고 날카로운 나무들이 물살에 휩쓸려 흘러내려가는 걸 보고 의문을 풀 수 있었다. 그곳뿐만이 아니라 강가가 가까워질수록 별의별 부유물들이 진한 황톳물에 섞여서 잔뜩 위험스러움을 발산하고 있었다.
“힘들어 죽겠는데 별개 다 신경 쓰이게 하네.”
오칠은 너무도 가볍게 수면을 박차고 공중으로 솟구쳤지만 지금의 상황에 짜증이 났다.
그리고 더 이상 저 빌어먹을 물속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하며 단전에서 노도와 같은 공력을 끌어올려 전신 구석구석으로 휘돌렸다.
타탁! 타타타타타탁!
어깨에 노백을 걸쳐 메고 거칠게 흘러가는 장강으로 떨어지던 오칠은 발바닥으로 수면을 짧고 강하게 밟았다. 그리고 연이어 수면을 차듯이 밟으며 이백여 장 앞에 보이는 강가를 향해 내달렸다.
첨벙!
이백 장 가까이를 미친 듯이 달려서 거의 강가에 도착했다 싶을 때쯤 오칠은 공력을 거두고 허리까지밖에 오지 않는 물속에 내려섰다.
“어라?”
오칠은 어깨에 걸쳐 멘 노백이 너무 조용한 것이 아닌가 하고 봤더니 잠을 자고 있는 것이 아닌가.
어쩌면 너무 지쳐 기절해버린 것일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그 얼굴이 너무 편안해 보였다. 아마도 오칠을 믿고 있기에 안심했고, 그래서 저도 모르게 의식을 놓고 편안한 잠에 빠져든 것이겠지.
“팔자 좋은 녀석.”
마음 같아서는 물속으로 휙 던져서 욕을 한 바가지 쏟아부어주고 정신을 차리게 하고 싶었지만, 오칠은 있는 인내, 없는 인내 몽땅 끌어 모아 참아냈다.
이 모든 일이 이 멍청한 의동생의 쓸데없는 협의심(俠義心) 때문이긴 하지만, 이런 모습은 한 번 정도 애교로 봐주기로 한 것이다.
‘성질 많이 죽었다.’
오칠은 괜스레 헛웃음이 나오는 것을 빗물에 흘려보내며 강가를 향해 물살을 헤치고 터벅터벅 나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