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계 13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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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543회 작성일소설 읽기 : 파계 137화
파계 6권 - 12화
“으음…….”
상관현표가 몸을 뒤척였다.
그리고 아직 완전히 아물지 않은 복부의 고통 때문인지, 아니면 누군가 곁에 있다는 기척을 느꼈기 때문인지 분명치 않은 이유로 잠에서 깨어났다.
“누구냐……?”
흐릿한 시선에 잡힌 존재를 분명하게 확인할 수 없었던 상관현표가 물었다.
“나다.”
“혀… 형님?”
“그래, 나다.”
“형님!”
상관현표는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하지만 곧 신음을 흘리며 욱신거리는 복부의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그러나 고통보다는 상관석표가 출관하여 돌아왔다는 기쁨이 더욱 컸기에 그는 완전히 상체를 펴고 몸을 일으켰다.
“언제 출관하신 겁니까?”
“방금 전에 나왔다. 그대로 누워 있어라.”
“괜찮습니다. 이제는 다 나았어요.”
상관현표는 그의 형이 이미 모든 정황을 전해 들었으리라 짐작했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굳이 설명하지 않았다.
하지만 상관석표는 동생에게 직접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하나도 빼놓지 말고 이야기해봐라.”
“그것이…….”
잠시 망설이던 상관현표는 싸우기 전날의 일과 싸우게 된 날의 일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나름대로 객관적인 설명이었지만, 일부는 상관현표의 감정이 개입되어 있어 전체적으로 오칠의 잘못이 더 크다는 느낌이 전해지는 설명이었다.
‘들었던 대로 현표의 잘못이군.’
상관석표는 바보가 아니었다.
아무리 동생에 대한 정이 깊다 해도 잘잘못을 구분하지 못할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일에 대한 진실이 무엇이든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상관석표에겐 그의 동생이 크게 다쳤다는 사실이 진실보다 중요했기 때문이다.
“무한 사파 세력을 제패한 무적 정의파의 장문인이라…….”
동생이 싸운 상대는 오칠이 아니라 그의 의동생이란 자였다고 하지만, 분명 오칠이 책임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러니 상관석표는 노백이 아니라, 오칠에게 빚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알겠다.”
상관석표는 내가 복수를 하겠다느니, 꼭 해결하겠다느니 하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상관현표는 형을 믿었다. 그가 당한 굴욕과 고통을 꼭 갚아줄 것이라 믿고 있었다.
“그만 쉬어라. 나중에 다시 오마.”
상관현표는 완전히 잠에서 깨어나지 못했던 것인지 곧바로 잠에 빠져들었다.
어쩌면 상관석표가 돌아왔고, 자신의 복수를 해주리란 생각에 여유와 안정을 찾아서 보다 마음 편하게 잘 수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너를 다치게 한 것이 실수라는 걸 알게 해주겠다.’
상관석표는 그렇게 내심으로 말을 하고는 조용히 방을 나왔다.
그리고는 밖에서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던 시종을 손짓해서 불렀다.
“무적 정의파와 그 장문인에 대해서 모든 걸 알아내라.”
그렇게 알아낸 뒤 자신에게 보고하라는 의미였다.
시종은 두말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시종 신분인 그에게는 싶지 않은 일이겠지만, 못하겠다고 할 수도 없는 일인 것이다.
“쉬어야겠군.”
자신의 숙소로 돌아온 상관석표는 시녀들에게 목욕물을 준비하게 했고, 반년 만에 편안한 마음으로 몸을 씻었다.
하지만 몸은 편할지언정, 마음은 그 누군가에 대한 분노와 싸움에 대비한 투지로 가득 차 있었다. 그에게 연이은 패배를 안겨준 금원종에게 폐관의 성과를 보여주려고 했는데, 그 전에 시험해볼 수 있게 되었다는 기대감도 가득한 그런 마음인 것이다.
* * *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저 위로 높고도 넓게 솟아올라 있는 여모봉의 거체를 따라 저물어가는 태양의 그림자가 해남도의 중심을 잠식하고 있었다.
“이거 너무 쉽게 여모봉에 당도하니 영 실감이 나질 않는군.”
독룡방의 방주, 구니마쓰 야마오는 낄낄거리며 그의 옆에 서 있는 공병악을 쳐다봤다.
하지만 남해의 모든 이들이 불가능하다는 일을 너무도 쉽게 성공한 공병악은 담담한 표정 그대로였다.
‘하긴 남해의 해적들을 통합시키는 데 고작 보름의 시간이면 충분하다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현실로 만든 자니까.’
남해에서 활동하는 대소 이십여 개의 해적들이 독룡방의 깃발 아래 무릎을 꿇게 만든 시간이 딱 보름이었다.
그리고 독룡방은 그 숫자만 천이 넘는 엄청난 규모의 해적단으로 변모할 수 있었다. 명실공히 남해 최고의 해적이 된 것이다. 그리고 처음 공병악이 말한 대로 해남파를 무너트리기 위해 이곳 여모봉에 당도하게 되었다.
어떻게?
독룡방의 책사인 츠바사가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고 말한 것대로 해남파의 시야가 미치지 못하는 문창(文昌) 쪽에 배를 안착하여, 타민족에 대한 적개심이 하늘을 찌르는 여족(黎族)의 영역을 지나서 여모봉 밑자락에 이른 것이다.
그런데 여족이 아니라면 지나갈 수 없다던 여족의 영역을 독룡방은 어떻게 지나올 수 있었을까?
그러한 일을 가능케 한 이들은 혈천교에서 파견된 진광지옥대(秦廣地獄隊), 태산지옥대(太山地獄隊)와 함께 온 열 명의 술사들이었다. 공병악은 그들이 교주 직속 단체인 혈령대에 속한 이들이라고 했는데, 기묘한 연기를 피우는 단지를 들고서 천여 명의 해적들 사이를 오가는 것이 그들이 한 전부였다.
그런데 그 단순한 작업에 주변으로 접근하던 여족들이 두려움에 질려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그들이 그렇게 놀라며 존재를 드러내지 않았다면 해적들은 여족이 근처에 와 있었는지도 몰랐을 것이다.
야마오는 도대체 영문을 몰라 공병악에게 물었지만, 그도 자세한 것은 모른다고 했다. 그저 술사들이 단지에서 연기를 피우기 전에 자신들에게 먹였던 단약이 여족들처럼 두려움을 느끼지 않게 한 것이라고만 했다. 아마도 단지에서 피어오른 연기가 여족에게 두려움을 느낄 어떤 환상을 만들어냈을 거라는 것이다.
하지만 해적들이 여족에게서 안전했던 것은 술사들의 능력 때문만은 아니었다. 또한 여족들은 야마오가 짐작하지 못하는 어떤 두려움 가득한 환영들을 보았다고 해서 금방 포기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여족들은 해적들을 향해 또다시 은밀히 접근했다가 다시 두려움에 떨게 되었다. 놀랍게도 독침을 맞고, 칼에 찔린 해적들이 죽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악귀처럼 괴성을 지르면서 반격하여 여족들이 죽임을 당했다.
금령단(金靈丹).
술사들이 준 단약 말고, 공병악이 해적들에게 먹인 콩알만 한 붉은 단약의 이름이었다.
정신을 몽롱하게 만드는 미혼산(迷魂散)과 식물성 극독인 학령초(鶴靈草) 등등의 독을 마교 비전의 방법으로 배합하여 만든 각성제였다. 어떤 고통에도 무감각하게 만들며, 웬만한 부상에도 죽지 않게 하지만, 열 번의 복용을 기점으로 점점 신체의 균형이 무너져 죽어가는 후유증을 발생시키는 단약이었다.
한마디로 생명을 갉아먹는 독약인 것이다.
물론 야마오가 들은 금령단의 효능은 열두 시진, 그러니까 하루 동안을 고통에 무디게 하고, 독에도 끄떡하지 않을 정도의 강인한 생명력을 부여한다는 정도였다. 그래서 공병악이 부하들에게만 먹이고 야마오에게는 먹지 말라고 한 것이 의아하기는 했지만, 어쨌든 그 금령단의 효능으로 해적들은 여족의 공격에도 죽지 않는 불사신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그 모든 일의 성과는 생각지도 못한 놀라운 결과를 만들어냈다. 무사히 여모봉에 당도할 수 있도록 여족들의 안내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해적들을 어둠의 정령이라 생각하고 두려움에 떨던 여족의 족장이 직접 찾아와 절을 하고서, 어둠의 정령을 공격한 불경죄를 용서해달라는 뜻으로 그들 부족의 전사 백 명을 종으로 바치기까지 했던 것이다.
‘최고의 암살자들인 여족 전사 백 명까지 생겼으니, 저 해남파를 무너트리는 것은 이제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다!’
야마오는 꿈에도 생각 못했던 일을 바로 목전에 두었다는 생각에 어린애처럼 가슴이 다 두근거렸다.
이제는 말 그대로 남해의 왕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츠바사는 왜 아까부터 저리 표정이 굳어 있는 거야?’
야마오는 저 옆쪽 수하들 사이에 앉아 있는 츠바사를 보며 의아해했다.
암고양이처럼 달라붙은 냉음설이 아양을 떠는데도 츠바사는 돌처럼 표정을 굳인 채 아무 말도 않고 있었다.
해남도에 오기 전에, 그러니까 남해의 해적들을 소탕할 때까지만 해도 저런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츠바사였기에 더욱 이상하게 보였다.
그러나 야마오는 그런 츠바사에게서 곧바로 관심을 접었다. 어차피 그는 츠바사의 속내를 알아낼 수 없었다. 과거 츠바사가 살고 있었던 조선의 섬 마을에서 청년이었던 그를 처음 만나고, 자신을 비롯한 삼십여 명의 수하들을 홀로 죽일 수 있었음에도 수하가 되기를 자청했던 츠바사의 속내를 아직까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지금 역시도 고민한다고 해서 츠바사의 속내를 알아낼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금령단이란 단약은 위험해.’
야마다가 짐작할 수 없을 것이라 판단한 츠바사의 생각은 금령단에 대한 것이었다.
고통을 무디게 하고, 여족의 독에도 끄떡없게 만드는, 그리고 강인한 생명력을 부여한다는 금령단의 효능은 듣기에는 더할 수 없이 좋은 것이다.
하지만 그런 효능을 가진 단약이란 꿈에서나 가능할 수 있는 것이었다. 옛적 선경(仙境)에 있다고 하는 불로초를 얻기 원했던 진시황 의 망상처럼 그러한 효능의 단약이란 환상일 뿐, 있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 두 시진 전에 여족의 공격을 통해 그러한 효능이 입증되기는 했지만 분명히 그에 상반되는 후유증을 가지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아마 복용할수록 생명을 갉아먹는 약이 분명해.’
특별히 그러한 짐작을 뒷받침할 증거는 없었다.
하지만 술을 먹으면 잠시 동안은 활력이 넘치고 힘이 강해지지만, 다음날이면 지독한 숙취와 고통에 시달리는 것이 이치였다. 그러니 지금 수하들이 불사신처럼 무적의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 효능이 유지되는 열두 시진이 지나게 되면 수하들은 그 반대되는 고통에 시달릴 것이다.
물론 그러한 생각은 역시 짐작일 뿐이었다. 효능이 사라지는 그때가 되어보아야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확인하게 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이 있을까?
‘방주는 그 모든 걸 각오하고 협력하고 있다.’
바다의 왕이 된다는 건, 해적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일이었다.
그가 조선의 남서쪽 해안에서 활동하는 야마오를 이곳 중원의 남해로 옮겨오게 한 것도 다 그러한 종류의 야망을 부추겼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설사 금령단이 수하들을 죽어가게 만드는 약이라는 걸 야마오가 알게 된다고 해도 그의 마음은 변하지 않을 것이 자명했다.
‘야망이 코앞에 있다고 생각하는 방주는 분명 내 말을 듣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혈천교에서 우리를 쓰레기로 취급하지 못하게 하는 수밖에 없겠군.’
만약 금령단이 츠바사가 짐작하는 후유증을 가지고 있다면 결국 혈천교는 독룡방과 해적들을 중원의 무림인들을 상대할 방패막이 정도로 생각한다는 의미였다.
즉, 중원을 공격하는 싸움 중에 해적들이 모두 죽는다고 해도, 독룡방이 형체도 남기지 못하고 산산이 분해된다고 해도 혈천교는 전혀 상관하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었다. 아니, 몸을 사리기라도 하면 계략을 짜서 강제로 등을 떠민 뒤에 죽기 살기로 싸우게 할 가능성이 높았다.
‘바보처럼 이용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지.’
그러니 츠바사는 혈천교가 자신들을 만만하게 볼 수 없게 해야 했다.
규모와 힘을 더욱 키우고, 해적들이 최대한 죽지 않게 해서 인원을 그대로 유지한 채, 중원 공략에 있어서 혁혁한 전과를 세우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아무리 혈천교라 해도 자신들을 함부로 이용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내가 해야 할 일은 독룡방을 다시 남해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다.’
그것이 책사인 츠바사의 할 일이었다.
그리고 야마오가 진정 남해의 왕으로 등극하면 그를 옆에서 보좌하여 남해의 해적들을 완벽하게 조절하고, 체계화된 조직을 만들 생각이었다.
힘없는 양민들을 상대로 약탈해서 사는 해적들이 아닌, 정당한 해상무역과 그로 인해 생겨나는 이득으로 힘과 부를 축척하는 독립적인 해상 세력을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츠바사, 아니 조선인 김만해가 해적이 되어야만 했던 이유에 정당성을 얻게 되는 것이었다.
“츠바사,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는 거야?”
혈천교와 독룡방이 협약을 맺은 그날 이후로 더할 수 없이 가까운 사이가 된 냉음설은 츠바사의 단단한 팔뚝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투정을 부렸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보다 냉 낭자도 이제 본래의 자리로 가봐야 할 듯싶습니다.”
“왜~ 내가 옆에 있는 것이 싫은 거야?”
“하하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지난밤의 냉 낭자를 생각하면 한시도 옆에서 떼어놓기 싫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랍니다.”
츠바사의 능글맞은 대꾸에 냉음설은 깔깔거리고 웃으며 그의 옆구리를 꼬집었다.
심각한 표정을 지우고, 이제야 본래의 츠바사로 돌아온 것 같아서 기쁘다는 표현이었다. 그리고 이제 곧 해남파를 공격할 시점이 되었다는 걸 냉음설도 알고 있기에, 그녀가 대주를 맡고 있는 태산지옥대의 무사들이 정렬한 곳으로 돌아갔다.
* * *
“자, 이제 해남파를 치러 가자!”
척후대로서 해남파의 동정을 살피러 갔던 해적들이 돌아오고, 상세한 돌격 방향을 공병악, 츠바사와 의논한 야마오는 드디어 해남파를 향해 진격한다는 명령을 내렸다.
군대의 출진처럼 당당하고 웅장하게가 아니라 천여 명이 훌쩍 넘는 인원임에도 불구하고 은밀하고 조심스럽게 진격했지만, 분명 그 위세는 투지와 살의로 넘쳐났다.
그리고 한 시진가량의 시간을 소비한 끝에 진광지옥대 이백여 명, 태산지옥대 삼백여 명과 천여 명의 해적, 백 명의 여족 전사들은 해남파의 크고 높고 긴 담장이 훤하게 보이는 숲 속에 당도하게 되었다.
“크크크! 해남파, 이제 곧 짓밟아주마!”
산에 오르기 전에 결정된 방법대로 공병악이 지휘하는 진광지옥대는 우측을, 냉음설이 지휘하는 태산지옥대는 좌측을 공격하기 위해 움직였다.
그리고 야마오가 지휘하는 천여 명의 독룡방, 그리고 백 명의 여족들은 거대한 정문이 떡하니 버티고 있는 곳을 바라보며, 공병악 등에게서 준비가 되었다는 신호가 올 때까지 기다렸다.
“방주, 신호가 왔습니다.”
은밀하고 급작스런 공격을 하기 위해서는 소리를 낼 수 없기에 신호 방법은 거울로 태양빛을 반사시켜 보내는 반사광이었다.
“좋아! 공격이다!”
짧고 강한 야마다의 음성은 조용하게 가라앉은 숲 속에 빠르고 넓게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