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계 16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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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568회 작성일소설 읽기 : 파계 164화
파계 7권 - 14화
“…….”
계당은 잠시 이해하지 못했다.
창천도문의 부흥을 이룩한 그가, 무림의 절정고수라 칭해지는 환도신군인 그가, 환도의 정점을 바라보고 있는 그가 저런 표정을 짓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 누구보다 가까이서 상관승을 보필해온 계당이었기에 더욱 그랬다.
하지만 그는 곧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상관승의 시선이 고정된 방향에서 직선으로 다가오는 한 사내를 보는 순간 알 수 있었다.
‘위험하다!’
갈대 숲에 길이 만들어지듯 진광대의 무사들이 좌우로 물러난 사이를 차분하게 걸어오는, 병을 앓고 있는 것처럼 창백한 인상의 사내.
진광대왕 공병악을 보는 순간, 계당은 상관승이 매우 위험한 상대와 싸우게 될 것임을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 계당은 더욱 이곳에서 떠날 수 없었다. 조금 전까지는 그저 임무 때문이었지만, 지금은 주군의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는 상황이라는 걸 알게 되었으니까 말이다.
“계당.”
상관승은 명을 따르지 않으려 하는 계당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고개를 돌려서 그를 보지는 않았다. 상관승의 시선은 처음부터 그랬듯 공병악을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마치 조금이라도 고개를 돌렸다가는 그대로 목이 베어지고 말 것이라는 극한 상황에 놓인 것처럼 보였다.
“곧 뒤를 따라가겠다.”
상관승은 호통을 치지 않았다.
명을 따르지 않는다고 화를 내지도 않았다. 그저 차분한 음성으로 계당을 설득했다.
그래서 계당은 더 이상 고집을 부릴 수 없었다. 명령을 하는 것도 아닌, 친우를 설득하듯 말하는 상관승의 의지를 거부한다는 것은 수십 년을 함께 한 그 자신의 인생 자체를 불신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었다.
타탁.
명을 따르기로 마음먹은 계당은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곧바로 바닥을 박차며 저 앞으로 사라졌다.
* * *
“이름은?”
다섯 장 거리로 다가온 공병악을 향해 상관승이 물었다.
“공병악. 당신은?”
“상관승.”
“당신이 환도신군이군. 예사 인물은 아니라고 생각했지.”
상관승과 공병악은 마치 이곳에 두 사람밖에 없다는 듯 편안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사실, 두 사람 주위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퇴각하는 정파 무림인과 그들을 쫓는 진광지옥대의 무사들, 그리고 광기에 젖은 사람들. 적과 아군의 구분이 명확한 수백의 사람들이 그들 주위에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들은 두 사람의 근처로 오지는 않았다. 죽고 죽이고, 병기를 거세게 휘두르면서도 약속이라도 한 듯 두 사람 근처로는 다가오지 않았다. 퇴각하면서도 두 사람을 피해 퇴각했고, 쫓아가면서도 그들을 피해서 쫓아갔다.
진광대 무사 삼십여 명이 상관승을 목표로 모여 있었지만, 그들도 두 사람을 넓게 포위만 하고 있을 뿐이었다.
왜?
기세 때문이었다.
눈으로는 볼 수 없는, 말로는 정확하게 설명할 수 없는 강력한 기세가 상관승과 공병악에게서 퍼져 나왔다. 가까이 다가갔다가는 그대로 몸이 잘리고 말 것이라는 위험한 기운이 두 사람을 감싸고 돌아서, 아무도 주변으로 다가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두 사람도 서로의 그런 기운을 느끼고 신중하게 거리를 좁히고 있었다. 아주 조금씩, 주변의 빠른 변화와는 너무나 다른 미세한 흐름 속에서 서로를 향해 공격할 틈새를 탐색하고 있는 중이었다.
‘계당과 비슷한 느낌이군.’
상관승은 공병악의 자세를 보며 그렇게 느꼈다.
오른쪽 허리에서 뽑히지도 않은 검은 공병악이 좌수검객이라는 것뿐만이 아니라, 발검술에 매우 뛰어나다는 걸 말해주고 있었다. 즉, 쾌에 치중하고 일격필살의 공격력을 가진 자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의 그림자이자, 좌호법인 계당 역시 그러한 일격필살류의 도법을 익혔다.
‘그렇다면 내가 유리할까?’
상관승은 오래전부터 계당을 상대로 수련한 자신이 유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깐 했다.
하지만 같은 쾌와 일격필살이라 해도 검과 도는 차이가 있었다. 또한 공병악은 좌수검이었다. 흔하지 않아 익숙하지 않은 수법에 맞상대해야 하는 상관승에겐 부담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게다가…….’
탐색을 하고 있다고 해도 자신이 먼저 공격해야 했다.
일격필살류의 검법이라면 분명 반격하는 의미의 발검술로 공격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니 자신이 먼저 공격해야만 공병악이 반격할 것이기에 자신이 선공을 해야 하는 것이다.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말이다.
쉭―
“……!”
하지만 상관승의 예상은 빗나갔다.
아직은 도의 거리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고 판단한 그와 달리, 공병악은 눈에 보이지도 않을 속도로 검을 뽑아서 그를 향해 찌르고 있었던 것이다.
팅―
검이 뻗어오기 전부터 미간에 따끔한 자극을 받았던 상관승은 느끼는 그대로 도를 위로 쳐올렸고, 공병악의 검은 위로 튕겨 올랐다.
하지만 위로 올라간 검은 곧바로 그 배의 속도로 떨어져 내렸다.
츠앙―
도와 검이 맞부딪치면서 듣기 좋은 맑은 쇳소리가 울렸다.
하지만 상관승과 공병악은 서로의 목숨을 빼앗기 위해 온 힘을 다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소리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그저 상대의 틈새를 찾기 위해 움직이면서, 살벌한 기운을 사방으로 뿌려대고 있을 뿐이었다.
스악―
다시 공병악의 검이 길게 뻗어 나와 휘둘러졌다.
두 사람 사이에 벌어졌던 간격을 단번에 줄이면서 휘둘러져오는 검끝을 상관승은 고개를 뒤로 빼서 피했다. 그리고 손목의 좌우 이동을 극대화하여 도를 내리쳤다.
스사사사사사―
수많은 도영.
환도신군이라는 별호에 어울리는 엄청난 공격이었다. 그 도영만 보자면 공병악은 단번에 분시가 되고도 남을 것 같았다.
하지만 누구에겐 다행이고, 누구에겐 불행하게도 공병악은 상관승이 만들어낸 도영으로부터 조금의 상처도 입지 않았다. 공병악은 이리저리 몸을 움직이며, 그 수많은 도영을 완벽하게 피하고 있었던 것이다.
환영천섬마환보(幻影天閃魔幻步).
발끝의 작은 움직임만으로 몸 전체를 자유자재로 이동시킬 수 있는 보법이었다.
많은 공격보다는 완벽한 공격을 선호하는 공병악은 그렇게 보법을 펼치면서 도영들을 피하고, 상관승의 지척으로 다가갈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스악―
“……!”
좌우로 움직이며 수많은 도영을 만들어내던 상관승의 눈앞으로 하얀 선이 그어졌다.
쿵!
상관승은 강하게 땅을 밟았다. 그리고 그의 신형은 순간적으로 오른쪽으로 두 장이나 이동해 있었다. 그는 그대로 도를 휘둘렀다.
광풍낙화(狂風落花).
빈 공간을 허망하게 그어버린 공병악의 왼쪽으로 사나운 바람이 몰아쳤다.
공간을 산산조각 낼 것 같은 폭풍. 한 곳에 밀집된 그 광폭한 바람을 타고 수많은 도영들이 공병악의 왼쪽을 뒤덮어갔다.
끼익―
등골을 오싹하게 만드는 기음이 터졌다. 그리고 하얀 섬광이 폭풍을 타고, 덮쳐오는 도영들을 일시에 반으로 잘라버렸다.
“……!”
상관승은 그가 만들어낸 도기들을 일시에 조각내어 흐트러트리고, 왼쪽으로 접근하는 공병악을 보며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도기를 만들어내는 것이 어려운 만큼, 도기를 잘라낸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같은 수준, 혹은 그 이상의 검기가 아니면 불가능하니까 말이다.
그래서 상관승은 마음이 무거워졌다. 공병악이 그의 생각 이상으로 강하기 때문이었다. 계당과 비슷한 유형의 무공을 쓰지만 그 실력의 차이는 컸다. 그런 유의 무공을 오랫동안 경험했다고 자신의 우세를 생각했던 것 자체가 어리석게 느껴졌다.
‘하지만…….’
상관승의 신형이 낮게 숙여지며 공병악이 다가오고 있는 반대 방향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그의 도가 휘둘러졌다.
촤라라락―
땅이 도기에 긁혀 수십 개의 고랑을 만들어냈다.
아래로부터 위로 솟구쳐 오르는 수많은 도기가 이리저리 몸을 움직이는 공병악의 하반신을 노렸다. 상관승은 공병악의 움직임을 차단하려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공병악은 쉽게 당하지 않았다.
타타탁, 타타타탁.
빠르게 땅을 두드리는 발끝의 움직임을 따라, 공병악의 신형이 뒤로 쭉 물러났다.
그리고 도기들이 빈 공간을 타고 하늘로 사라진 그 순간 몇 배의 빠르기로 다시 앞으로 나오며, 순간적으로 비어버린 공간 속에 검을 길게 뽑아 올렸다.
쉭―
빛살처럼 뻗어가는 검끝은 금방이라도 상관승의 목 줄기를 꿰뚫어버릴 것 같았다.
하지만 상관승은 이미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그런데 찔러가는 공병악의 검은 멈추지 않았다. 마치 제천대성의 여의봉처럼 길게 늘어난 듯 앞으로 계속 뻗어가며, 물러나고 있는 상관승의 요혈을 향해 빠르게 찔러 들어갔다.
“합!”
물러나던 상관승은 주변을 넓게 포위하고 있는 진광대 무사를 힐끔 쳐다본 뒤, 짧은 기합을 질렀다.
진광대 무사 때문이라도 계속 물러나고만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상관승의 도가 정면으로 올려지고, 어깨로부터 손목까지 좌우로 요동치기 시작했다. 갑자기 검끝과 상관승 사이에 하얀 벽이 생겨났다.
햇빛을 받아 더욱 환하게 빛나는 백색의 벽.
도막(刀膜).
일월합벽(日月合闢)에 다다른 공력을 바탕으로 환도가 절정의 수준에 이르지 못하면 만들어낼 수 없는 경지의 수법이었다.
쩡―
강렬한 불꽃이 피었다. 공병악의 검과 막을 형성한 도가 맞부딪치며 생겨난 것이었다. 그리고 공병악이 뒤로 쭉 물러나면서 상관승이 이득을 얻었음을 알 수 있었다.
‘역시 만만치 않군.’
공병악은 울렁거리는 가슴을 손으로 쓰다듬으며, 창백한 얼굴에 한 줄기 미소를 그렸다.
하지만 상관승은 그런 공병악의 미소를 미소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그건 그저 입이 양쪽으로 길게 늘어진 것뿐이었다. 오히려 그 미소로 인해 공병악의 창백한 얼굴은 피를 달고 사는 살귀의 그것처럼 냉혹하게 변해버렸다.
“…….”
공병악은 검을 양손으로 잡아 아래로 늘어트렸다.
보법을 펼치기에는 불편한 자세였다. 상관승의 수많은 도영을 피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현란한 보법을 펼쳐야 할 터인데, 공병악은 방어를 완전히 도외시한 듯했다.
‘무슨 생각이지?’
의문이 들었지만, 의문은 그저 의문일 뿐이었다.
상관승은 검을 땅에 늘어트린 채, 한 걸음씩 무겁게 다가오는 공병악의 왼쪽으로 빠르게 움직이며 도를 휘둘렀다.
휘리릭.
변화무쌍한 보법을 펼치지 않는 공병악은 베어버리기 쉬운 목표였다.
하지만 상관승은 안이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수많은 도영을 만들어내는 것으로 자신이 최선을 다하고 있음을 알게 했다. 그리고 그런 상관승을 보는 공병악의 눈동자가 차갑게 빛났다.
끼익―
아까처럼 등골을 오싹하게 만드는 기음이 들려왔다.
상관승은 아까 전에 들었던 그 기음이 그가 만들어낸 도영을 공병악이 검으로 잘라내는 순간 마찰로 인해 생겨난 소리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날카롭게 뻗어나가는 도영이 공병악의 검과 닿지도 않았는데, 그 기음이 먼저 상관승의 등줄기를 짜릿하게 훑고 지나갔으니까 말이다.
촤아아악―
도영들이 아까처럼 허망하게 반으로 잘려나갔다. 그리고 공병악과 상관승 사이에는 커다란 공간의 구멍이 생겨났다. 공병악은 그런 공간을 날카롭게 바라보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귀혼검(鬼魂劍).
기음의 근원은 천지일기공(天地一氣功)의 막대한 공력을 바탕으로 펼쳐지는 귀혼검이란 검법이었다.
공병악의 검이 다시 일자로 그어졌다.
끼익―
공병악의 검은 길게 선을 만들어내며, 마치 유성처럼 빠르게 지나갔다.
‘이건!’
지척으로 바짝 다가온 검기를 본 순간 상관승은 그대로 쓰러졌다.
스아악―
철판교의 수법으로 등이 땅에 닿도록 누운 상관승의 눈앞으로 서늘한 기운이 훑고 지나갔다.
“……!”
코끝이 아릿할 정도의 여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