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계 16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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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579회 작성일소설 읽기 : 파계 162화
파계 7권 - 12화
‘확실히 숲의 자식들이라고 불릴 만한 족속들이군.’
석 장 높이의 나무 꼭대기 무성한 가지 사이에 몸을 숨기고 있던 사 장로는 주변을 쓱 둘러보며 감탄하고 있었다.
그의 눈으로도 숲에 매복한 노족들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거의 오백이 넘는 숫자였다. 그런데 그들의 터전인 광서 북부 우거진 밀림에 비해 턱없이 빈약한 이 숲에서 그들은 거의 완벽하게 몸을 숨기고 있는 것이다. 장강 이북의 기온과는 차이가 있다 해도, 겨울이기 때문에 더욱 앙상한 나무들로 가득한 이 숲에서 말이다.
‘오는구나!’
사 장로의 시선이 가지와 가지 사이로 날카롭게 뻗어나갔다.
그리고 조용히, 주변을 세심하게 살피며 다가오는 정파 무림인들을 찾아냈다. 드문드문 거리를 두고 있기는 하지만, 그들의 숫자는 척후의 보고대로 수백에 이르렀다.
사 장로는 그가 은신한 나무 좌우로, 각자 자리를 잡고 몸을 숨기고 있는 제자들에게 고개를 돌렸다.
―큰놈만 죽인다. 잔챙이들은 노족에게 맡겨.
사 장로의 전음을 받은 네 명의 제자는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도 자신들이 어떠한 역할을 해야 하는지 이곳 회화까지 오는 동안 수없이 경험했다. 따로 사부의 지시를 받아야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언제나 사부의 지시를 받았다. 제자란 응당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스스스.
사 장로는 그의 몸을 버티고 있는 것만 해도 놀라울 정도로 가는 가지 위를 조용히 움직여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제자들도 사 장로와 간격을 맞추며 뒤를 따랐다.
‘어느 놈이냐…….’
나무 아래로 십여 명의 정파 무림인들을 그냥 흘려보내면서 계속 움직이고 있던 사 장로의 눈동자가 일순 파랗게 일렁였다.
‘그래, 네놈이구나!’
사 장로는 이동을 멈췄다.
그가 죽이기로 작정한 목표가 거리 안으로 들어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다. 또한 그가 처음 은신한 곳 주변에서 몸을 감추고 있던 노족들이 뛰어나와 적들을 공격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크악!”
저 뒤쪽에서 기다리던 첫 번째 비명이 들려왔다.
어떤 놈인지 모르지만, 가장 먼저 노족의 공격을 받은 재수 없는 놈이었다. 그 비명을 시작으로 곳곳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욕지거리와 병기가 뽑히는 소리, 알아듣지도 못할 괴성은 노족의 것이리라.
기습을 받은 정파 무림인들은 곧바로 반격하여 노족들의 배에 칼을 쑤셔 박거나 어깨, 혹은 다리를 잘랐을 테지만, 그래도 다시 덤벼드는 노족 때문에 더욱 당혹스러워하고 있을 것이다. 이전에 그들과의 싸움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이 노족들의 괴물 같은 생존력에 대해서 전했다고 해도, 막상 눈앞에서 목도하면 그 충격은 상상과는 확연한 차이가 있기 마련이니까.
‘침착한 놈이군.’
사방에서 난리가 났는데도 사 장로가 노리고 있던 자의 움직임은 여전히 신중했다.
두말할 것 없이 고수였다. 또한 심기가 차가운 자였다. 흥분한다고 해서, 다급하게 달려간다고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라는 걸 분명하게 알고 있는 것이다.
사 장로는 이렇게 암습하는 것보다 정면으로 대결하고 싶어졌다. 정면으로 붙는다면 후회 없이, 정말 시원스럽게 싸울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희망사항일 뿐이었다.
강한 적과 싸우고 싶어 하는 것은 혈천신교의 무인들이라면 누구나 똑같았다. 과거의 배화교와 달리, 암흑의 신 아리만을 섬기는 데 치중하고 있는 혈천신교는 강함과 투쟁을 가장 우선시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런 교리와 더불어 교주의 권위 또한 절대적이었다. 특히 지금의 교주는 혈천신교 탄생 이후 가장 막강한 능력의 교주였다. 과거 속에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전설이나 다름없던 마공까지 익힌 혈천신교의 진정한 교주인 것이다. 그리고 그런 교주의 명은 최소의 희생을 통한 최대의 승리였다.
실상 공병악이 무인의 투쟁심을 뒤로한 채, 별의별 방법을 다 쓰는 이유도 그것 때문이 아니던가. 그러니 사 장로 역시 강자와 싸우고 싶다는 본능을 따라 마음대로 행동할 수는 없는 것이다.
‘미안하지만, 그냥 죽어줘야겠다.’
사 장로는 딱 거리 안으로 들어온 적을 향해 조용히 몸을 날렸다.
그의 손에는 어느새 등에 메어져 있던 혈겸이 들려 있었다.
“……!”
사 장로의 암습을 뒤늦게 감지한 적은 허리의 검을 빼들며 그대로 하늘을 향해 휘둘렀다.
쩡―
뛰어난 발검이었고, 뒤늦은 반응이었음에도 그의 검은 강하게 내리찍어오는 혈겸을 막아냈다.
“어?”
하지만 혈겸은 낫을 크게 만든 기형 무기였다.
전체적인 몸체의 곡선이 바깥쪽으로 휘어져 있어서 단순히 막았다고 해서 안심할 수 없는 무기인 것이다. 그래서 혈겸을 정확하게 막아냈다고 순간 안심했던 적은 삐죽하게 기울어진 겸끝에 정수리를 꿰뚫리고 말았다. 제대로 싸우지도 못한 채 의문의 단발성을 내뱉고 이승을 하직한 허망한 죽음이었다.
“문주님!”
정수리를 혈겸에 찔려 죽은 자가 바닥으로 허물어짐과 동시에, 좌우사방에서 놀란 외침이 터져 나왔다.
죽은 자는 어떤 문파의 수장인 모양이었다. 그리고 놀라 외치고 검을 뽑아든 사내들은 그를 호위하는 자들이었을 것이다. 아니면, 호위보다는 조금 더 무게 있는 위치의 인물들이던가.
어쨌든 그들은 수장의 죽음에 놀라고 분노하여, 복수하기 위해 검을 뽑아들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그 모든 일련의 과정을 거치고 사 장로에게 달려들려고 했던 그들의 동작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목이 잘려 머리가 한 치나 떠올랐다가 바닥을 구르는데, 그 몸이 제 맘대로 움직일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적이다!”
“적이다!”
조금 전까지는 생생하게 살아 있었던 시체들, 그리고 사 장로와 제자들을 중심으로 두고 당혹스런 외침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그러한 경고의 외침은 단 두 번뿐이었다.
스샤샤샤샥―
다시 대여섯 명의 머리를 몸에서 매끈하게 분리시켜버리고, 사 장로와 제자들은 순식간에 나무 위로 모습을 감추었다.
당연히 또 다른 고수를 찾기 위해서였다. 저렇게 비명이나 지르고, 죽을 놈들을 처리하는 것은 괴물 같은 생명력을 얻어 전투력이 몇 배나 치솟은 노족들만으로도 충분하니까 말이다.
* * *
강가로부터 오십여 장이나 떨어진 숲 속, 그리고 그보다 훨씬 더 안쪽에서 비명과 알아듣지도 못할 괴성이 터져 나오고 있었지만, 이곳 강가는 이상할 정도로 조용했다.
아니, 조용하다기보다는 침묵이 감싸고 돌았다.
“모두 비켜라!”
침묵이 깨졌다.
수면에 파문이 일 정도로 크고 힘 있는 고함이었다. 하지만 그 고함이 향한 곳에 반원으로 운집한 천여 명의 사람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 사람들은 뭐야?’
고함을 지른 장년인과 그 좌우 뒤에서 무기를 들고 싸울 준비를 하고 있는 정파 무림인들은 당혹스럽기 그지없었다.
빠르게 공격하여 급습의 효과를 살려야 할 그들이 혈천신교와는 전혀 상관없을 것 같은 천여 명의 보통 사람들에게 막혀서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있었다.
“저들은 사교에 미혹되었소.”
어찌해야 할지를 모르고 있는 삼백여 명의 정파 무림인들 사이로 잔잔하지만 명료한 음성이 전해졌다.
“상관 대협, 그렇다면 어찌해야겠습니까?”
조금 전, 물러나라 고함을 내질렀던 사내가 뒤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크고 훤칠한 키에 단정하게 묶은 머리, 가슴까지 기른 검은 수염이 아니었다면 서른쯤으로 보아도 이상하지 않을 잘생긴 장년의 사내가 있었다.
그가 바로 창천도문(蒼天刀門)의 문주이며, 칠절신군 중 환도신군(幻刀神君)이라 추앙받는 상관승이었다.
오늘 공격은 이곳으로부터 한참이나 북쪽 지역에 근거지를 두고 있는 석문의 창천도문까지 합류한 공격인 것이다.
“방법은 한 가지뿐이오.”
“……?”
“저들을 베고 갈 수밖에 없소.”
“하지만 저들은…….”
사내의 얼굴에 난감한 표정이 지어졌다.
아무리 앞을 막고 있다고 해도 이 사람들은 무림인이 아닌 보통 사람들이었다. 물론 그 외견을 보자면 평소에 그들이 무시하고 거들떠도 보지 않던 천박한 신분의 사람들이었지만, 그래도 무림인으로서 힘도 없고, 무기도 들지 않은 이들을 베어버린다는 것은 좀 과한 방법이라 생각한 것이다.
“우리는 이곳에서 지체할 시간이 없소. 지금 숲으로 길을 잡은 동도들이 싸우는 소리가 들리지 않소? 잘 보시오. 저들은 사교의 주술에 미혹되어 제정신이 아니오. 그러니 이자들 중 몇 사람을 베어버리면 나머지는 정신이 깨어서 겁을 먹고 도망치게 될 것이오.”
본보기로 몇 사람을 죽인다는 행위는 정파인으로서 취할 행동은 아니었다.
하지만 상관승의 차분한 설명은 선두의 사내를 비롯한 다른 정파 무림인들에게 매우 설득력 있게 들렸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곳에서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이런 무지몽매한 자들에게 막혀서 지체하고 말았다는 이유 때문에 그들 자신의 생명이 위태롭게 될 테고, 나아가 호남 무림의 안위가 흔들리고 말 것이었다.
“상관 대협의 말씀이 옳소이다!”
“그렇소. 저깟 놈들 때문에 우리가 죽을 수는 없는 일이오!”
너도나도 어서 뚫고 가자고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성질이 급하고, 상관승에게 잘 보이고자 하는 마음을 가진 몇 명의 사내들이 앞으로 나서서 자신들이 모두를 대신하여 손을 쓰겠다고 무기를 들어올렸다.
“나를 원망 말아라!”
“너희들이 자초한 일이다!”
반원으로 서서 꿈쩍도 하지 않는 사람들의 앞에서 잠깐 망설이며 한마디씩 내뱉은 사내들은 각자의 무기를 내리쳤다.
스삭―
콰직―
살을 베어가는 소리와 어깨를 뭉그러트리는 소리가 여과 없이 들려왔다.
아무리 생사를 옆구리에 끼고 살아가는 무림인들이라 해도 고함과 비명이 터지고, 혹은 잔뜩 흥분된 상태에서나 사람을 찌르고 베었기 때문에 고요함 속에 들리는 파육음은 그들에게도 듣기 거북한 소리이기는 마찬가지였다.
“……!”
한데, 눈살을 찌푸리던 정파 무림인들의 눈동자가 당황으로 크게 떠졌다.
“주… 죽지 않는다!”
검에 베어져 옆구리가 길게 갈라진 남자가 흥분에 찬 음성으로 소리쳤다.
머리의 사분지 일이 으스러진 남자도 두 팔을 번쩍 들어, 자신은 죽지 않는다고 환성을 내질렀다.
“죽이자!”
사람들 뒤쪽에서 그런 말이 나왔다.
누가 그렇게 말했는지 알 수 없었지만 검에 맞아 배가 갈라지고, 철봉에 찍혀 머리가 깨져도 죽지 않는 모습을 본 사람들은 그 말을 듣고 금세 선동되어 흥분했다.
“죽이자!”
“아리만을 믿지 않는 저들을 죽이자!”
“죽이자, 죽이자!”
환희에 찬 고함은 순식간에 광기 어린 괴성으로 변해버렸다.
그리고 배가 갈라진 남자가 당혹스러워하는 무림인에게 달려들어 어깨를 물어뜯는 순간, 주변은 돌이킬 수 없는 광란의 상황으로 빠져 들어갔다.
“죽어엇―!”
“비키지 못해!”
여인이 째지는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자 무림인은 차마 검을 휘두르지 못하고, 금나수의 수법으로 팔목을 잡아 비틀었다. 그리고 뒤로 밀쳐버릴 생각이었다.
그러나 여인은 팔목을 잡혔음에도 불구하고 달려들던 속도를 멈추지 않고, 무림인의 머리를 나머지 한 손으로 움켜잡았다.
우득.
손목이 금나수법에 속박 당했음에도 개의치 않고 달려든 여인의 손목이 단번에 부러졌다.
하지만 여인은 뼈가 부러진 고통도 모르는지, 움켜잡은 무림인의 머리를 끌어당겨서는 귀를 물어뜯었다.
“크윽!”
귀가 물어뜯기는 고통을 참지 못한 무림인은 본능처럼 여인의 부러진 손목을 완전히 비틀면서 그녀의 복부에 검을 쑤셔 박았다.
“꺽!”
검이 배를 뚫고 들어오자 여인은 귀를 물어뜯던 입을 떡하니 벌렸다.
하지만 여인은 곧바로 무림인의 귀를 더욱 강하게 악물었다. 그리고 고개를 마구 흔들었다.
“끄아악!”
무림인의 고통스런 비명이 터지고 여인의 입에서, 무림인의 귀에서 붉은 피가 마구 샘솟았다.
무림인은 배에 박은 검을 앞뒤로 흔들었다. 그리고 공력을 운용하여 검에 주입하고, 온 힘을 다해 위로 치켜 올렸다.
츄아악―
검이 가슴을 쪼개고, 그대로 목을 뚫고 나온 순간 무림인의 뜯겨나간 귀를 입에 문 여인의 몸체가 땅으로 허물어졌다.
“헉… 헉… 헉……!”
고작 귀를 뜯겼을 뿐인데도 무림인은 격한 숨을 내뱉었다.
귀가 뜯겨나간 곳에선 계속 피가 흘러나오고, 그 피로 인해 상반신은 이미 절반이나 흠뻑 젖어 있었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너무나 많은 피를 흘렸고, 미친 여인의 광기 어린 공격에 엄청난 충격을 입은 머릿속이 어질어질했다.
하지만 숨을 가다듬으려고 노력하면서 주변을 둘러본 무림인은 진정되어가던 가슴에 또다시 충격을 먹었다. 사방에 그가 방금 전 겪었던 상황과 똑같은 모습들이 펼쳐져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