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계 161화
무료소설 파계: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520회 작성일소설 읽기 : 파계 161화
파계 7권 - 11화
‘혈천신교가 마교건, 아니건 상관없다. 그들은 그저 이곳에 긴장감이 없어지지 않도록 쉽게 쓰러지지만 않으면 된다. 이들이 자파에서 맹주를 만들겠다는 희망을 갖고 있는 동안, 그래서 자파가 만들어낸 맹주가 막강한 힘을 발휘할 수 있게 백천맹의 권한을 증대시키는 동안만 무너지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공야 각주의 의도는 그것이었다.
그리고 기존의 강대한 문파에서 절대 맹주가 선출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그의 또 다른 계획이었다. 그가 좌지우지할 수 있는 자가 맹주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하후 총수에게는 미안하지만, 당신도 맹주의 꿈은 버려야 할 것이오.’
장로들만큼이나 들뜬 얼굴의 하후진용을 보며 공야 각주는 내심 쓴웃음을 지었다.
하후 총수는 그의 의도대로 움직일 수 있는 인물이기는 하나, 그는 다른 장로들에게서 호응을 얻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하후 총수는 공야 각주가 구상한 맹주 만들기 계획에서 제외되었다.
‘이제 코앞이다.’
천이각이 강력한 정보 단체로 거듭나고, 백천맹은 명실상부한 정파의 중심으로서 중원 각지에 뻗쳐나갈 날이 머지않았다.
그리고 그 머지않은 훗날 흑천맹까지 굴복시킨다면 단 한 번도 생겨난 적이 없던 정파 무림통합의 세상이 펼쳐지게 될 것이며, 그 가장 핵심의 자리에는 자신이 우뚝 서게 될 것이었다.
‘이제 그자만 내 손에 들어오면 되는 것이구나.’
공야 각주는 자파에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 서둘러야 할 것 같다며 자리를 떠나는 장로들과 뭔가 행복한 상상에 빠져들기 위해 개인 집무실로 사라지는 하후진용에게 시선을 슬쩍 주었다가 곧바로 거두어들였다.
그리고 공야 각주의 머릿속엔 그가 세운 계획에서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해야 할 오칠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찼다.
제67장. 호남은 흔들리고, 진광대왕은 의심한다
동쪽으로 흐르는 냉수강(冷水江)의 한 줄기 지류와 남쪽으로 흐르는 홍강(洪江)의 지류가 겹쳐지는 곳.
고작 허리까지밖에 오지 않는 호남성(湖南省) 남서쪽 회화(懷化)의 작은 강가로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있었다. 그 운집한 숫자가 족히 이천은 넘어 보였다.
하지만 이천여 명의 무리는 공통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고, 몇 개의 무리로 따로 모여 약간의 거리를 둔 채 자리를 잡고 있었다.
우선 강가에서 오십 장 정도 떨어진, 그리 무성하지 않은 숲 속에 모여 있는, 얼굴에 붉은 칠을 한 수백 명의 사람들. 옷차림도 그리 문화적이지 않았고, 말도 명의 언어가 아니었으며, 얼굴 모양새도 달랐다.
노족(怒族).
광서(廣西) 북부 산간 지대에 터전을 잡고 사는 이민족이었다.
그들은 지금 혈천신교의 변성지옥대(變成地獄隊)로서 이곳에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 노족과 함께 이곳, 회화에 당도한 진광지옥대(秦廣地獄隊)의 무사들은 노족과 강가에 운집해 있는 천여 명의 사람들 사이에 경계를 짓듯 길게 늘어져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일반 무림의 무인들처럼, 혹은 자유 시간을 얻은 군인들의 휴식처럼 방만하지 않았다.
이백이 넘는 무사들이 가부좌를 하고, 무릎 위에 검을 얹어둔 채로 명상을 하듯 강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눈을 감고 있었으니 강가를 바라보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강가에 운집한 사람들은 그들이 자신들을 바라본다고, 저 경건한 분위기의 무사들이 자신들을 지켜주고 있다는 착각에 빠져 있었다.
천여 명이나 되는 사람들.
진광지옥대의 무사도 아니고, 노족의 전사들도 아니고, 그렇다고 무림인은 더더욱 아닌 그들은 누구일까.
그냥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삶의 고단함과 괴로움을 아는 사람들이었다.
동전 하나가 아쉽다고 울부짖는 도박 중독자, 낯선 사내에게 다리를 벌려야 하는 창기, 뒷골목을 지키고 자릿세를 받는 하오배, 가진 것이 없어 구걸하는 거지.
세상에서 천대받고, 세상을 향해 한없이 욕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또한 다리가 아프고, 팔이 아프고, 가슴이 아프고, 눈이 아파 한 시도 고통을 잊고 살 수 없는 환자들이 절반 이상이었다. 이들은 호남 남부에 있는 신녕(新寧), 동구(洞口), 수녕(綏寧), 소양(邵陽) 등지에서 몰려든 사람들인 것이다.
“움~ 움~ 움~”
몽롱하게 귓전을 울리는 나른한 비음이 주변을 조용히 유영하고 다녔다.
하지만 그건 단순한 비음이 아니었다. 그 소리에는 주술을 극대화할 수 있는 언어와 힘이 내재되어 있었다.
삶이 괴롭고, 병마에 시달리는 천여 명의 사람들이 무릎을 꿇고 엎드린 강가를 따라 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연기는 사람들이 엎드려 머리를 조아린 곳, 검은 피풍의를 머리까지 뒤집어쓴 다섯 명의 혈천신교 술사들이 들고 있는 작은 단지에서 피어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연기는 사람들의 정신을 잠식하여 그들 개개인이 원하는 행복한 꿈속에 빠져들게 했다. 술사들이 소리를 내고 있는, 주술의 힘이 담긴 비음 역시 그렇게 정신을 잠식하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진광지옥대가 자신들을 지켜준다는 착각에 빠진 것도 단지에서 피어오른 연기와 그 비음이 사람들의 이성을 미혹시켰기 때문이었다.
“나오라.”
머리꼭대기까지 검은 피풍의를 덮고 있었기 때문에, 전혀 얼굴을 볼 수가 없는 술사의 입에서 음산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엎드린 무리 중에서 오른쪽 다리를 절고 있는, 나이가 마흔에 가까운 사내가 엉성한 모양의 목발을 집고 걸어 나왔다.
“고하라.”
술사는 그의 앞에 엎드린 사내에게 특유의 음산한 음성으로 명령했다.
지난날의 고된 삶과 거친 삶을 대변해주는 칼자국이 얼굴에 가득한 사내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술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갑자기 그 험악한 얼굴을 일그러트리더니, 몽롱하게 일렁이는 눈동자에서 굵직한 눈물을 쏟아냈다.
“저… 저는 죄인입니다. 많은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들은…….”
사내는 아주 어릴 때부터 하오배였다.
사람을 때리고, 돈을 강탈하고, 물건을 마음대로 부수고, 여인을 겁탈해도 전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 망종이었다. 그리고 스물 중반을 넘기기 전에 한쪽 다리를 크게 다쳐 병신이 되었다.
하지만 그래도 그는 변하지 않았다. 목발을 짚지 않고서는 걷기가 힘들어지자 더욱 독종이 되었다. 때리는 것에 그치지 않고 살인을 했다. 돈을 강탈하는 것에 멈추지 않고 사람을 죽였다. 물건을 부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사람을 죽였다. 그리고 여인을 겁탈하고 잔혹하게 죽였다.
그는 다리를 못 쓰게 된 후 인간이기를 포기했다. 다리병신이라고 무시당할까 봐, 욕을 먹을까 봐, 먹고살 수 없을까 봐 더욱 지독하게 살았다.
하지만 그런 그도 한계가 있었다. 다리의 불편을 힘으로 극복할 수 있었던 젊음이 지났고, 그에게 악감정을 가진 사람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아졌다.
그의 하루하루가 지옥이었다. 살기 위해 살아야 하는 삶이었다. 불편한 다리 때문에 더욱 괴로운 삶이었다.
그런 그가 혈천신교에 대한 소문을 들었다. 그리고 찾아왔다. 다리를 고치기 위해 찾아온 그는 바로 눈앞에서 그보다 더욱 크게 다친 사람이 고쳐지는 것을 분명하게 보았다. 그 외에도 병마에 시달리던 많은 사람들이 고통에서 벗어나 웃게 되는 것을 보았다.
그건 걸 보고도 믿음이 생기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그래서 빌었다. 그의 모든 것을 다 바쳐 섬기겠다고 울부짖으며, 다리를 고쳐달라고 빌었다.
“아리만께서 그대를 일으키시리라.”
굵직한 눈물을 쏟아내고, 엉엉 울고 있는 사내의 어깨에 술사의 손이 닿았다.
사내는 순간 몸 전체가 딱딱하게 굳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그의 입으로 무언가 알지 못할 것이 넣어지고, 의지와는 상관없이 목구멍 안으로 넘어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투쟁하라. 그대의 죄와 고통과 싸워 투쟁하라.”
술사의 음산한 음성이 사내의 머릿속을 울렸다.
그리고 딱딱하게 굳은 몸이 다시 부드럽게 풀렸다는 걸 안 사내는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손에 쥐어져 있던 목발이 한쪽으로 쓰러졌다.
하지만 사내는 쓰러지지 않았다. 앞으로 걷기까지 했다.
“아리만이여~!”
사내는 크게 소리쳤다.
감동에 가득 차 두 팔을 번쩍 쳐들고 하늘을 향해, 그를 보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술사들을 향해 환희에 가까운 비명을 내질렀다.
“아리만이여~!”
“아리만이여~!”
사내와 술사의 모습을 지켜보던 사람들이 함께 소리쳤다.
그들은 울면서, 웃으면서 눈에 보이는 이 기적 같은 모습에 환호했다.
“나오라.”
강가를 가득 채우고 있는 환호 속에서 술사의 음성이 들렸다.
환호는 곧바로 사라졌다. 사람들은 금세 경건한 자세로 엎드려, 또다시 생겨날 기적에 숨을 죽였다.
하루에 다섯 명.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은 천 명이 넘었지만, 술사들이 병과 상처를 고쳐주는 기적을 행하는 것은 하루에 다섯 번뿐이었다.
그리고 다리를 절뚝이던 인간 망종의 사내를 시작으로 미리 선택된 다섯 명은 한 명씩 차례로 술사의 부름을 받아 앞으로 나갔고, 그들은 고쳐졌다.
* * *
‘믿음이란 무엇인가?’
진광지옥대의 진광대왕 공병악은 가늘게 뜬 눈으로 사람들과 그들을 미혹시키는 술사들을 보며 자신에게 물었다.
하지만 아무 의미 없는 물음이었다. 그 자신이 대답할 수 없는 물음이었고, 관심도 없었다. 그냥 요 며칠간 아무 싸움도 않고, 너무 조용히 있었기 때문에 공병악은 기분이 이상해진 거라고 생각했다.
‘자꾸 이상하군.’
공병악은 미간이 간질거리는 느낌에 눈살을 찌푸렸다.
호남에 진입하고부터 가끔씩 이런 기분에 신경이 예민해졌다. 정확히 알 수 없는, 왠지 누군가에게 감시를 받고 있는 것만 같은 불쾌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의 이목을 피할 수 있는 감시자는 있을 수 없었다. 이 많은 수하들과 저렇게 숲을 점거한 노족들의 눈을 피해 몸을 감춘 자가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대왕님!”
사방으로 퍼져나가 정파인들이 접근하는 것을 경계하고 있던 무사가 달려와 공병악의 앞에 머리를 숙였다.
“정파인들이냐?”
“예. 십오 리 거리의 북쪽 강가를 따라 삼백 정도의 무리가 빠른 속도로 오고 있습니다.”
공병악은 잠시 생각해보았다.
그 정도의 숫자로 공격할 리가 없었다. 완연히 규모의 차이가 보이는데, 싸움을 걸 생각을 한다는 것은 바보나 하는 짓거리일 테니까.
그리고 공병악의 생각은 숲에 있던 노족 통역인이 다가와 대략 오백 정도의 숫자가 숲을 통해 접근하고 있다는 말을 전하면서 확실해졌다.
“진광대왕, 적들이 나타난 것인가?”
몸이 삐쩍 마른 노인이 다가와 물었다.
그는 혈천신교의 사 장로로, 등에 메고 있는 커다란 붉은색의 겸을 귀신처럼 사용할 수 있는 고수였다.
“예, 사 장로님. 정파인들이 이제부터 기다리지 않기로 한 모양입니다.”
“그럴 만도 하지. 그렇게 당했는데도 제 앞마당만 지키고 있겠다고 한다면 상대할 가치도 없이 멍청한 종자들일 테니까. 그런데 어찌할 텐가? 나가서 놈들을 맞이할 텐가, 아니면 여기서 기다릴 것인가?”
“기다렸다가 대응할 생각입니다.”
“그래?”
사 장로는 의외라는 듯한 표정이었다.
“저들이 우리 혈천신교의 신도가 됐으니, 그 믿음을 증명할 자리를 만들어줄 생각입니다.”
“…….”
사 장로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병을 고치겠다고 찾아온 천여 명의 사람들을 공병악이 어찌 활용할 생각인지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음에 들지 않아.’
사 장로는 공병악이 쓰려는 방법이 탐탁지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반대한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이 무리의 책임자는 공병악이었다. 교주로부터 임무를 부여받은 그가 모든 걸 결정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실 공병악도 이런 방법을 좋아하지 않는 인물이었다. 하나의 검을 잡고서 다른 무공은 돌아보지도 않고, 검에만 매진한 무인이 그런 비겁한 방법을 쓴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으니까.
하지만 그런 공병악이 그 방법을 선택했다. 그 자신의 임무를 잘 알고, 교주의 명에 충실히 따라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어찌 그런 공병악의 결정에 반대할 수가 있겠는가 말이다.
“그럼 난 변성지옥대를 돕겠네.”
“그러셔야 할 것 같습니다. 수하들을 붙여드릴까요?”
“되었네. 내 이 혈겸(血鎌) 하나면 충분해.”
공병악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사 장로에겐 저렇게 큰 혈겸뿐만이 아니라, 그를 그림자처럼 따르고 있는 네 명의 제자들도 있었다. 그러니 달리 염려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내 말을 술사에게 전해라.”
공병악은 수하 무사 한 명을 불러, 그가 천여 명의 사람들을 활용하기 위해 계획한 방법을 일러주었다.
“알겠습니다.”
무사는 재빨리 술사들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공병악이 일러준 방법을, 그들을 신봉하는 사람들이 듣지 못하도록 조용히 전했다.
‘이제 기다리는 일만 남았군.’
공병악은 그의 수하들처럼 바닥에 앉아, 무릎에 검을 얹어놓고서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