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계 16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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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565회 작성일소설 읽기 : 파계 160화
파계 7권 - 10화
“…….”
분명 부상도 입지 않았고, 아직 싸울 여력이 있는 국주였지만, 이상하게도 그는 더 이상 아무런 움직임도 취하지 않았다. 그저 죽어버린 그의 흑마 옆에 주저앉아서 멍하니 오칠을 올려다볼 뿐이었다.
―철혈금교군으로서 의무를 거부한 것과 나에게 대항한 죄는 네 흑마의 죽음으로 대신하겠다.
오칠의 전음을 듣고 국주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그대로 무릎을 꿇고, 오칠을 향해 땅에 닿도록 머리를 숙였다. 그는 오칠에게 패배하면서 알게 되었다. 오칠의 강력한 힘에 겁을 먹고 두려움을 느끼면서 왜 오칠에게 굴복해야 하는지 알게 되었다.
‘이분은 우리의 교주님이기 때문이다.’
국주는 그보다 더욱 확실한 이유는 없다고 생각하며, 바닥에 머리를 쿵쿵 찍으며 크게 소리쳤다.
“오칠님께 충성을 맹세합니다!”
* * *
초왕성은 은신한 곳에서 돌처럼 굳어 있었다.
백설총 위에 앉아서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이 오만한 모습으로 내려다보는 오칠을 향해, 오체투지를 하는 천양표국의 국주와 지금껏 전혀 모습을 보이고 있지 않았던 수백 명이나 되는 천양표국의 식솔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오칠의 앞에서 극공경의 자세로 넙죽 엎드린 모습들.
그 모든 광경이 너무나 낯설고 이질적이었다. 그러나 그런 광경 때문에 초왕성의 몸이 굳은 것은 아니었다.
‘이 느낌은 뭐냐?’
꽉 움켜진 양 손바닥에 땀이 흥건했다.
등줄기를 타고 생겨났던 소름은 아직까지 초왕성의 목덜미에 오싹한 한기의 여운을 남겨두고 있었다. 지금껏 그가 단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두려움과 공포, 그리고 압도되었다고 표현해도 전혀 부족하지 않을 그런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초왕성은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저 녀석에게 내가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고?’
너무나 당혹스러웠다.
싸우지도 않은, 그저 관조하고 있었을 뿐인데, 오칠에게 두려움을 느낀 스스로의 정신 상태를 초왕성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국주의 공격에 밀린 순간부터 변하기 시작한 오칠의 기세는 정말 엄청난 것이었다.
하나로 묶여 있던 오칠의 긴 머리칼이 풀어헤쳐져 하늘로 곤두서고, 그의 온몸에서 붉고 푸른 기운이 넘실거리는 광경은 단순히 기이한 공력을 운용한다는 말로 설명할 수 없었다.
그것은 마치… 이야기 속에 나오는 마신(魔神)의 모습을 연상케 했다.
그렇다고 사악한 느낌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세상의 것 같지 않은 붉고 푸른 기운, 그리고 그 기운에서 뿜어져 나오는 힘은 멀리 있는 초왕성의 피부까지 짜릿하게 할 정도로 강렬했다.
더구나 그의 가슴 밑바닥에서 있는지도 모르고 있던 두려움과 공포 등의 감정을 끌어올렸다. 초왕성은 그저 관조하고 있었을 뿐인데도 그렇게 느낀 것이다.
‘저 녀석의 정체는… 이름이 오칠이라 했지? 오칠이라…….’
초왕성은 그 이름이 완전히 낯설지가 않았다.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기는 한데, 어디서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마도 객잔이나 주점 등에서 흘려들었는데 촌스럽고, 투박하다는 독특함 때문에 기억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저 녀석에 대해서 더 알아야겠다.’
초왕성은 국주의 보필을 받아, 표국 내부의 심처로 사라지는 오칠의 뒷모습을 보며 그렇게 결심했다.
그리고 은밀하게 담장을 넘어서 오칠이 나올 때까지 기다릴 만한 곳을 찾아 움직였다.
* * *
백천맹(白天盟) 대총부(大摠府) 회의실.
천이각(千耳閣)의 각주 공야정진은 십장회의 장로들과 맹주를 상대로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그들을 쉽게 생각해서는 절대 안 됩니다. 벌써 호남의 대소 삼십여 개의 문파가 멸문했고, 지금도 계속해서 북진하고 있다고 합니다. 고작 두 달여밖에 되지 않는 시간 동안, 호남의 절반이 혈천신교에 무너져버린 겁니다.”
“하지만 너무 과민한 반응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구려. 형산파까지 패퇴했다는 건 우리도 놀라운 일이라 생각하고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맹령(盟令)을 발휘해서 전 무림 소집령을 내린다는 건…….”
“그렇소이다. 작은 불씨에 놀라, 장강의 물길을 끌어왔다가 집이 잠겨버리게 되는 수도 있소. 호남에서 끝날 소란에 겁을 먹고 소집령을 내려 정파의 힘을 모았는데, 그 일로 흑천맹을 도발하게 되면 어찌 뒷감당을 하려 하시오? 잘못하면 정사대전이 일어날 수도 있는 일이란 말이오.”
“호남엔 아직 많은 문파들이 있소. 공야 각주는 혹시 환도신군의 창천도문을 잊은 건 아니겠지요? 그들의 힘에다 나머지 호남 정파인들이 합류하게 되면 그깟 사교는 단번에 전멸시켜버릴 수 있을 것이오.”
장로들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거부 반응을 보였다.
‘이렇게 나올 줄 알았다.’
공야 각주는 속으로 장로들을 욕하면서도 얼굴엔 그렇게 생각할 만도 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곧 무거운 얼굴로 한 가지 더 알려야 할 정보가 있다고 했다.
“그게 무엇이오?”
“아직 명확하게 밝혀진 정보는 아닙니다. 그러나 이제는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군요. 천이각에서 입수한 정보에 의하면 혈천신교의 전신은 마교일지도 모릅니다.”
“마교?”
“마교!”
장로들의 눈동자가 이 무슨 황당한 소리냐는 듯 크게 떠졌다.
지금까지 공야 각주의 열성적인 설명을 들으면서도 미리 언질을 받은 것이 있었던지라, 담담한 신색을 유지하던 총수 하후진용까지 당황한 얼굴이었다.
“확실하게 밝혀진 것도 아니고, 그 정보의 진원조차 불확실했던지라 저도 처음엔 믿지 않았습니다. 아니, 믿고 싶지 않았습니다. 과거 무림을 도탄에 빠트린 그 저주받을 이름이 나왔다는 것을 어찌 믿고 싶었겠습니까. 하지만 이제는 무시하기도 힘들어졌습니다. 혈천신교의 잔혹하고, 복수심에 가득 찬 듯한 공격은 과거 우리 정파인들을 능멸한 마교를 떠올리게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전해오는 정보에 의하면 혈천신교의 신도들과 야만족들은 마치 불사의 능력을 지닌 것처럼 보인다고 합니다. 활에 맞아도 죽지 않고, 사지 중 하나만 남아 있어도 괴물처럼 덤벼든다는 겁니다. 그건 마교의 사술이 아니면 불가능합니다. 과거 마교에 대한 정보는 너무도 부족하긴 하지만 그들이 사악하고, 음험한 사술을 사용해서 무림을 혼란으로 몰아넣었다는 건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장로들은 침중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교가 빠른 기간 내에 혹세무민(惑世誣民:세상을 어지럽히고 세상 사람을 미혹하게 하여 속임)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바로 병마에 시달리던 사람들을 고치는 사술이 아니었던가.
물론 많은 사교들이 그러한 방법을 내세우긴 했지만, 마교는 그 수법의 고명함이 그 전까지의 사교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뛰어났다. 무림인들까지도 속아서 교인이 될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 진정한 진실이 무엇인가는 둘째 치고, 공야 각주의 주장은 약간 억지스런 면이 있었다. 선전포고도 없는 혈천신교의 공격과 잔혹한 손속, 그리고 불사처럼 보이게 만드는 술법을 두고 과거의 마교와 비슷하다고 하는 주장은 너무 두루뭉술하게 공통점을 합리화하는 억지 주장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과거부터 지금껏 마교에 관한 모든 것이 그랬다. 과거 마교가 혹세무민한다는 것도, 그들이 무림에 패악을 끼칠 거라는 것도, 그들이 환자를 고치고, 고초를 겪는 민초들에게 희망을 주어 활기를 얻게 한 모든 것이 무림은 사술이라고 주장했고, 또 그렇게 모두가 믿었다.
그래서 십장회의 장로들은 공야 각주의 주장을 억지스럽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마교와 사술은 떼어낼 수 없는 하나의 고리라고 믿는 고정된 가치 판단 속에서 장로들은 공야 각주의 주장을 매우 설득력 있게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만약 그들의 전신이 마교라고 한다면, 이는 무림 전체의 안위가 걸린 문제가 될 것이오.”
“하지만 공야 각주도 아직 확실한 건 아니라고 했소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혈천신교의 움직임은 과거의 마교를 떠올리게 할 정도로 패악한 구석이 있는 것 같소이다.”
“궁 장로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런 말씀을 전혀 언급하지 않더니만, 왜 지금에서야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게요?”
“허, 그러니까 가만히 생각해보고 말한 것이라 하질 않소.”
장로들은 갑작스럽게 마교의 이름이 언급되자 매우 혼란스러워했다.
마교라면 큰일이라느니, 마교가 아닐 수도 있다느니, 마교의 등장이라면 어찌 대응해야 하냐느니, 생각들을 일단 속에 감추어두었다가 나중에야 꺼내놓던 장로들은 아직 정리도 되지 않은 생각들을 마구 쏟아냈다.
“모두 진정하시오!”
끝내는 화산파 곡 장로가 장내의 소란을 제지하고 나섰다.
당금 구파에서 소림을 제외하고 그 성세가 제일이라고 평가되는 화산파 장로의 목소리였기에, 다른 장로들은 소란을 멈추고 잠잠해졌다.
“우선 신중하게 다루어야 할 마교에 대해 언급한 공야 각주의 말을 들어봐야 할 것 같소. 분명 확실히 밝혀진 것이 아니라고 했는데, 마교를 들먹이며 이렇게 우리를 당혹스럽게 만든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겠소이까.”
곡 장로의 날카로운 눈빛이 공야 각주를 쏘아보았다.
공야 각주는 겉으로는 그런 눈빛에 아무런 거리낌도 없다는 표정이었지만, 내심으론 역시 화산파의 장로라며 혀를 내두르고 있었다.
“장로님들을 당혹스럽게 하려는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물론 혈천신교에 대한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는 의도가 있었음을 부인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혈천신교가 마교와 연관이 있다는 것에 대해서 오 할 이상의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장로님들이 염려하시는 대로 맹령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그보다 더욱 높은 확률적 확신이 있어야 한다는 것에 동의합니다. 그래서 십장회에 요청하고자 합니다. 지금의 천이각은 충분한 정보 능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천이각이 규모와 인원을 늘리고, 각 지역과의 원활한 정보 교환을 위해 열혈군 후기지수들을 활용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그리고 독립적인 정보 수집 및 활용 권한도 주시길 요청합니다.”
장로들은 딱딱한 표정으로 침묵했다.
아마도 공야 각주의 의도를 파악하고자 하는 것이리라. 하지만 공야 각주는 그들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어선 안 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말했다.
“제가 요청한 사안은 지금 당장 결정되어야 합니다. 고작 두 달여 만에 호남의 절반을 집어삼킨 혈천신교에 대해 조사하고, 혹시라도 그들이 마교의 무리임이 밝혀졌을 때에 즉각 대응하기 위해서는 빠른 정보 전달 기능이 있어야 합니다. 즉, 천이각의 확충과 유동 있게 움직일 수 있는 독립적 권한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겁니다.”
그래도 장로들은 쉽게 입을 열지 않았다.
결국 공야 각주는 장로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하나의 제안을 내놓았다.
“물론 이러한 천이각의 확충과 독립적 위치는 혈천신교의 문제가 해결되면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공야 각주의 그 말이 장로들의 마음을 충족시켰다.
“공야 각주의 요청이 타당하다고 생각하오만…….”
무당파의 오평 진인이 먼저 긍정의 뜻을 밝혔다.
그리고 다른 장로들도 한명씩, 한명씩 찬성의 말을 꺼냈다.
“다른 분들의 뜻이 정 그렇다면 나도 따르겠소.”
화산파 곡 장로가 가장 마지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의 말은 마치 다수결에 어쩔 수 없이 따를 뿐이라는, 만약 문제가 생긴다면 화산파는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다. 그리고 다른 장로들은 곡 장로의 말뜻을 알아챘지만, 달리 반박할 수 없었다. 이미 결정된 사안에 대해서 다시 책임 문제를 따질 수는 없는 일이었으니까.
“그럼 장로님들께서 제 요청에 대해 구두합의하신 것으로 알고 있겠습니다.”
공야 각주는 혹시라도 뒤늦은 반대의 목소리가 나올까 싶어 빠르게 결론을 내리고, 장로들의 동의를 얻었다.
그리고 결정된 사항에 대해서는 따로 문서를 작성하여 제출하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미리 당부드릴 것은 이번 혈천신교의 일에 대해서 장로님들께선 서둘러 사문에 전해두셔야 할 것입니다. 혹시라도 다급하게 힘을 모아 혈천신교를 상대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할 때에는 분명 모두의 힘을 하나로 모을 수 있는 구심점이 필요할 테니까 말입니다. 너무 성급한 생각이라 여기실지도 모르지만… 유비무환(有備無患)이라고, 미리 그에 대한 논의를 해두는 것이 나쁠 것은 없다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장로들의 눈빛과 표정이 다시 변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건 마교의 이름을 들었을 때와는 다른 변화였다. 우려와 염려가 아닌, 약간의 탐욕과 무언가에 대한 염원 비슷한 것들이 담겨 있는, 열기에 들뜬 표정들이었다.
‘맹주의 자리가 눈에 아른거리겠지.’
공야 각주는 장로들의 내심에 어떤 생각들이 있는지 알고 있었다.
아마 장로들 역시도 그들 스스로의 마음에 피어난 열망의 정체를 분명하게 알고 있으리라.
맹주(盟主).
이백여 년 전, 소림 장문인을 맹주로 한 맹의 창립 시기 이후로 사라져버린 자리였다. 지금은 총수를 두어 맹의 행정적 수뇌로 삼고, 의결기관인 십장회로서 운용하며 맹주를 선출하고 있지 않지만, 분명 무림 최고의 위치라 할 수 있는 맹주의 지위는 변함없이 누구나가 염원하는 자리였다.
하지만 마교를 물리치고, 이후 소림 장문인이 스스로 물러나 공석이 되었을 때에 아무도 맹주의 자리에 앉을 수 없었다.
혼란한 시기에 주어졌던 막강한 권한이 모두 없어지고, 그저 명예직에 불과한 자리인데도 불구하고, 자신이 될 수 없으면 다른 누군가에게도 줄 수 없다는 명예욕과 질투심으로 가득 찬 많은 사람들 때문에 결국 없애버리기로 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 맹주 자리에 대해서 지금 공야 각주가 언급한 것이다. 그는 마교의 재등장 가능성에 이어, 다시 맹주의 필요성을 꺼내놓으면서 장로들을 혼란 속으로 빠져들게 만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