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계 15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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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525회 작성일소설 읽기 : 파계 155화
파계 7권 - 5화
수백 장에 이르는 길이 온통 핏빛으로 가득했다. 이곳에서 벌어진 혈천신교와 정파 무림인들의 싸움이 얼마나 참혹한 것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모습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땅의 색깔까지 바꿔놓은 시체들은 다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사라지지 않았다. 시체들은 그저 숲 속으로 치워졌을 뿐이었다.
배화교가 풍장(風葬)이라는 장례 풍습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혈천신교도 풍장을 치르기 때문에 정파 무림인들의 시체뿐만이 아니라, 그들 혈천신교 무사들의 시신까지 모두 길 양쪽 숲으로 옮겨놓은 것이다.
다만, 혈천신교 무사들의 시신은 가지런하게 정렬시켜 놓아두었고, 정파 무림인들의 시체는 그냥 낙엽처럼 아무렇게나 내던져 쌓아두었다는 것이 다를 뿐이었다.
하지만 방법이 무엇이든 결과는 매한가지일 것이다. 바람에 쓸리든, 그냥 썩어 문드러지든, 아니면 짐승의 밥이 되든지 죽은 자들은 크게 다르지 않은 상태로 존재감을 잃게 될 것이니까 말이다.
스스스.
초강지옥대와 모남족의 전사들이 모두 사라지고, 그렇게 시체들만이 널려 있는 숲 속에서 작은 변화가 일어났다.
나무 표면에서 나무의 껍질과 똑같은 색의 커다란 진흙덩이가 튀어 나온 것이다. 그리고 그 불명확한 형체는 곧 복면을 하고 있는 사람의 형태를 갖춰갔다.
눈동자 두 개만을 노출시킨 복면인은 모습을 드러낸 그 상태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와 똑같은 복장의 복면인 셋이 그의 옆에 나타났다.
“말해라.”
먼저 모습을 드러내 기다리고 있던 복면인이 물었고, 다른 복면인들이 차례로 입을 열었다.
“초강지옥대의 숫자와 모남족의 숫자는 이전보다 마흔다섯 명이 줄었다. 이전처럼 큰 부상을 당하고도 죽지 않은 자들은 열외로 두었다.”
“그들이 쓰는 전술은 단순해. 금령단이라 짐작되는 약을 먹여서 잠시 동안 힘을 얻은 모남족으로 정파 무림인들을 당황하게 만들고, 좌우로 움직인 초강지옥대의 정예 무사들이 급습한다.”
“장로 두 명의 무공 수준은 칠절신군 정도쯤 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초강대왕은 그보다 조금 더 높은 정도. 하지만 이건 나의 판단일 뿐, 나보다 강한 그들을 정확히 파악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무리한 일이다.”
처음 질문을 던진 복면인은 그런 생각은 필요 없다는 듯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객관적인 판단을 내리면 되는 것이다. 지금 파악된 사항은 기록하여 보내고, 우리는 다시 놈들을 추적한다. 다른 명령이 있을 때까지 그들을 감시하는 것이 우리의 역할이니까.”
다른 복면인들도 동감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천목보 산하의 은형대(隱形隊) 대원 네 명은 그렇게 의견을 나눈 뒤, 초강지옥대와 모남족이 이동한 방향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제65장. 무식하고 유치한 사내다움
섬서성(陝西省) 서쪽, 감숙성(甘肅省)과 접경한 천양(千陽).
다른 성과 접경한 지역의 현(縣)들이 대부분 그렇듯 이곳 천양도 제법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규모를 늘려가고, 상업적 구조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미도객잔(味道客棧).
다른 여느 객잔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양새를 가진 미도객잔은 맛의 길을 추구한다는 거창한 이름을 달고 있기 때문인지 꽤나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사실, 주변에 다른 객잔들도 문전성시를 이루기는 마찬가지여서, 미도객잔이 그 간판명이 추구하는 대로 음식 맛이 좋기 때문에 손님이 많은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면 그건 잘못된 추측이며, 착각이었다.
“여기서 먹어야겠군.”
하지만 그 진실이 무엇이든 오칠은 객잔의 이름이 마음에 들었다.
꼭 성취했다기보다, 그렇게 높은 곳을 향한 의지를 담고 객잔을 운영하는 마음가짐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마치 자신이 무한의 객잔에서 좋은 술을 빚어,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인정받겠다고 생각했던 마음가짐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어서 옵셔!”
오칠이 타고 있는 말을 몰아 객잔 앞에 멈춰 서자, 점소이가 하얀 입김을 호호 불면서 뛰어나와 활기차게 인사를 했다.
한데, 인사를 하고 고개를 든 점소이는 순간 입을 떡하니 벌리고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말을 둘 곳은 있겠지?”
점소이는 조건반사적으로 오칠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의 눈동자는 뭔가 몽롱함에 젖어 있었다.
‘와~ 진짜 멋지네!’
점소이는 순간 그의 눈앞에 보이는 광경에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백설총(白雪瘻).
온몸이 새하얀 말을 이르는 말이었다.
온통 검은 털에 네 다리만 흰색이라는 오운개설(五雲蓋雪), 몸집이 흰 데다 다리만 검은색이라는 묵제옥토(墨蹄玉兎), 혹은 붉은색의 땀을 흘리는 한혈마(寒血馬)도 귀한 것이었지만, 티끌만큼의 검은 점도 찍혀 있지 않은 백설총은 더더욱 찾아보기가 쉽지 않은 품종의 말이었다.
게다가 말에 대해서 제법 안다는 사람들이 선호하는, 다리가 길고 몸집이 크며, 유선형의 몸체가 더할 수 없이 보기 좋은 모양의 백설총이었다.
물론 그런 지식에 문외한인 점소이가 그런 세부적인 점들을 파악하고 감탄할 리는 없었다. 그는 그저 눈에 보이는 전체적인 모양새에 감탄하고 있었다.
너무도 멋진 백설총에 앉아 있는 너무나 멋진 미남자.
딱 그 말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점소이는 생전 이렇듯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모습은 본 적이 없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다시는 볼 수 없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백설총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여인의 옷만 입으면 경국지색의 미녀로도 보일 수 있는 이처럼 아름다운 미남자가 쌍둥이가 아닌 이상, 세상에 둘이 있을 수는 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오죽했으면 오칠이 부채로 얼굴을 가리자, 남자인 점소이가 아쉽다는 생각을 하기까지 했을까. 순간적으로 그 자신의 성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면서 말이다.
“성질이 제법 있는 놈이니까 조심해.”
오칠이 말에서 내리며 고삐를 건네자, 점소이는 황송하다는 듯 얼른 받아들었다.
그리고 오칠의 경고가 아니라도 백설총을 함부로 다룰 생각이 없었던 점소이는 조심스럽게 고삐를 당겨 마구간으로 향했다.
“어서 옵셔!”
오칠이 부채로 얼굴을 가린 채로 말을 맡기고 객잔 안으로 들어서자, 먼저 내부를 감싸고 있는 따듯한 열기가 싸늘해진 피부를 부드럽게 다독여주었고, 다음으로 입구 계산대에 앉아 있던 주인이 일어나 꾸벅 머리를 숙이며 반기는 인사를 했다.
그리고 주인의 인사 소리를 들은 점소이 하나가 얼른 달려왔다.
‘돈 무지 많은 놈이군!’
점소이가 오칠을 보고 받은 첫인상이었다.
눈 아래를 부채로 가리고 있어 얼굴은 보지 못하지만, 너무도 귀해 구하기 힘들다는 새하얀 돈피(?皮: 담비 가죽) 가죽들로 이어서 만든 무릎까지 오는 겉옷을 걸치고, 그 안으로는 새하얀 비단옷까지 입고 있었으니 점소이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당연했다.
“머물고 가십니까요?”
이곳, 천양은 하루 유숙하는 이들이 많았고, 그래서 점소이가 묻는 것이었다.
“식사만 할 거다.”
“빈자리가 없어서 그런데, 합석하셔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이맘때의 천양은 워낙에 오고 가는 손님들이 많으셔서, 다른 객잔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객잔으로 가보았자 헛고생일 테니 그냥 여기서 합석하라는 말이었다.
“그러지.”
오칠이 흔쾌히 수긍하자, 점소이는 얼른 마땅한 자리를 찾아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점소이보다 오칠이 먼저 알맞은 자리를 찾아 손으로 가리켰다.
“저기가 좋겠군.”
오칠이 가리키는 자리는 여섯 명은 족히 앉을 수 있는 자리에다가 화로에서 가까워 요즘처럼 추운 날씨에는 더할 수 없는 명당인데도 불구하고, 고작 한 사람이 앉아서 술을 홀짝이고 있었다.
“저 자리 말씀이십니까?”
점소이는 진심으로 하는 말이냐는 듯 빤히 쳐다보았다.
사실, 의문을 느끼고 점소이가 다시 물을 수밖에 없는 것이 그 자리가 널찍한 공간을 가진 자리이기는 했지만, 그곳에 같이 합석할 장년인의 용모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드문드문 흰머리가 난 산발한 머리에, 덩치는 산만 하고, 등에는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꽉 막힐 정도의 크고 묵직한 양날 도끼가 두 개나 엇갈려 메어져 있었다.
딱 보아도 무림인인데, 그 모양새만으로도 흉포함이 가득 풍겨 나오는 위험한 분위기의 무림인인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점 때문에 저 널찍한 공간에서 값싼 소채 하나를 안주로 해서 술만 마시고 있는데도 주인에게 쫓겨나지 않았고, 다른 손님들이 감히 합석할 생각을 않고 있는 것이었다.
“왜? 저 자리는 안 되나?”
“아… 아닙니다요. 하지만 저 손님이 합석을 허락하실지 확실하지가 않아서…….”
사실, 점소이는 감히 합석을 청하기가 두려웠던 것이다.
괜히 말이라도 걸었다가 저 커다란 도끼가 휙 하고 날아올지 어찌 알겠는가 말이다. 하지만 그런 점소이의 문제를 오칠이 가볍게 해결해주었다.
“내가 직접 묻지.”
점소이는 뭐가 그렇게 잘났다고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서 돈이 너무 많아 유람을 나온 한량이 아닐까 하는 모양새를 한 오칠이 무슨 용기로 이러는 것인가 하고 의아해했지만, 말려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오칠이 위험해질지 모른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정확히 어찌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고, 사실 내심 어떤 일이 일어날지 궁금했던 것이다.
“저 사람 뭐야?”
“지금 저 자리에 합석하려는 거야?”
오칠이 위험스런 모습의 무림인이 앉아 있는 곳으로 걸어가자, 많은 손님들이 이목을 집중하며 자그맣게 숙덕이기 시작했다.
그들도 점소이처럼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에 대해 궁금해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합석해도 되겠소?”
오칠은 장년인에게 다가가 물었다.
장년인은 입가로 가져가던 술잔을 내려놓고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시선을 위아래로 움직여 오칠을 훑어보았다. 오칠의 굉장히 고급스런 옷차림을 본 그의 눈가가 찌푸려졌다가, 천에 싸서 등에 메고 있는 묵철곤을 보고 의외라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곧 관심 없다는 눈빛으로 변했다. 멋 내기 좋아하는 놈이 구색을 맞추기 위해 무기를 가지고 다닌다고 생각한 것이다.
‘생각보다 젊네.’
오칠은 장년인의 얼굴을 보고 그렇게 생각했다.
멀리서 본 전체적인 모양새는 꽤 나이가 있어 보였는데, 가까이에서 본 얼굴은 많아 봐야 마흔 정도밖에 되지 않을 것 같다는 느낌을 주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크고 두꺼운 코와 부리부리한 눈동자, 구레나룻에서부터 이어져 입 주변과 턱을 시커멓게 뒤덮고 있는 수염, 게다가 크고 작은 상처 자국으로 인해서 그 인상은 더욱 거칠게 느껴졌다.
“맘대로 해라.”
장년인은 다시 술잔을 들어 입가로 기울이면서 툭 내뱉었다.
점소이나, 다른 손님들이 기대하는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다. 위험스런 모습의 무림인은 의외로 너무도 쉽게 합석을 허락한 것이다. 그가 이곳 객잔에 들어와 자리를 잡고 앉아 있던 한 시진 동안, 사람들은 괜한 두려움과 상상력을 키운 모양이었다.
“뭘 드시겠습니까?”
그래도 장년인에 대한 두려움을 완벽히 지우지 못한 점소이는 그의 눈치를 보며 오칠에게 물었다.
“음… 뭐가 좋을까? 항상 주문을 하는 건 어디서나 골머리를 썩이는 일이란 말이야. 그냥 여기서 제일 자신 있게 하는 걸로 몇 가지 가져와.”
“술도 드실 겁니까?”
시간은 이제 고작 사시(巳時:오전9~11시) 중순쯤이었지만, 일월의 추운 날씨는 몸을 달궈줄 수 있는 술이 간절한 계절이었다.
하지만 오칠은 고개를 저었다. 그는 어차피 더위니 추위니 하는 것에는 거의 영향을 받지 않았고, 지금은 술 생각도 별로 없었다. 그냥 허기진 배를 채우길 원할 뿐인 것이다.
“조금만 기다려주십시오.”
점소이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를 잔에 따라주고는 주방으로 사라졌다.
오칠은 얼굴을 가리고 있던 부채를 내리고 찻잔을 들어올렸다.
“……!”
순간, 앞에 앉아 있던 장년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오칠의 아름다운 얼굴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반응이었다. 하지만 그건 객잔 안에 있던 다른 손님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냥 돈 많은 한량 녀석이라고 생각했는데, 부채가 내려지면서 드러난 얼굴은 뭔가 더 그럴듯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질 않은가.
특히 곳곳에 앉아 있던 여자 손님들의 반응은 남자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녀들 평생에 이처럼 아름다운 사내를 본 적이 없다는 그러한 유의 표정들인 것이다.
그러나 오칠은 그런 반응이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무심한 표정을 유지한 채, 뜨끈한 찻물을 입에 머금고 가만히 눈을 감고서 음미했다.
하지만 그 여유로운 표정 역시 또 다른 종류의 매혹적인 분위기를 발산해서 남자들을 경악시켰고, 여자들을 황홀경에 젖어들게 만들었다.
“야.”
입에 머금었던 찻물을 삼키며 오칠이 눈을 뜨고 시선을 앞으로 던졌다.
그리고 왜 불렀냐는 눈으로 장년인을 바라봤다.
“딴 데로 가라.”
“……?”
“너 같은 놈하고 같이 앉아 있는 것이 싫으니까 딴 자리로 옮기라고.”
“나 같은 놈이 어떤 놈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