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계 15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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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490회 작성일소설 읽기 : 파계 151화
파계 7권 - 1화
제64장. 공격하는 자들과 방어하는 자들
호남 남쪽 형양(衡陽). 그로부터 반나절 거리의 외곽으로 기양(祁陽), 안인(安仁), 영흥(永興) 쪽으로 흩어지는 길이 뚫려 있다.
양쪽으로 무성한 나무들이 풍성하게 자라난 숲을 걸치고, 사두마차 두 대 정도가 지날 수 있는 넓이의 길.
그곳에서 다시 반나절 거리에 있는 곳으로 대로가 뚫리기 전까지는, 호남의 성도인 장사로 향하는 모든 사람과 마차들이 빼곡하게 모여서 지나다녔던 고도(古道)였다.
그러나 아쉽게도 지금은 그러한 과거의 명성을 이어가고 있지는 못했다. 그저 이곳이 길이라는 걸 무시할 수 없을 정도의 사람과 마차만 지나다니는 정도의 역할로 만족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곳엔 미미한 규모의 산채 외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과거, 이곳 근방에 자리를 틀고 앉아서 재미를 봤던 대부분의 거대 산채들은 모두 새로이 뚫린 대로의 근방으로 자리를 옮겨버린 것이다.
한데, 오늘 삼백여 명이나 되는 무리가 이 길을 딱 틀어막고 있었다. 혹 이 길이 새로운 효용 가치를 가지게 되어 거대 산채가 다시 돌아오기라도 한 것일까?
물론 아니었다.
삼백여 명의 무리는 그 행색과 기세가 무림에서 흉명이 자자한 산채 이상으로 기백이 흘러넘치고 있었지만, 결코 무언가를 탐하기 위해서 길을 막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이들은 기다리고 있었다. 손에 무기를 들지 않고는 절대 안심할 수 없는 어떤 존재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늦는군.”
삼백여 무리의 뒤쪽.
가슴까지 길게 기른 수염과 비녀로 머리를 동여매 관을 쓴 모습만으로도 고고한 기운을 풍기는 노인은, 뒷짐을 지고 있는 손에 잡은 고풍스런 검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그의 옆에서 송구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장년인에게 물었다.
“놈들이 분명 이곳으로 오는 게요?”
노인의 타박하는 듯한 물음에 장년인, 구천신궁보(九天神弓堡)의 보주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이곳으로 올 것입니다. 이틀 전에 보냈던 수하들의 보고도 그렇고, 근방에서 관의 눈을 피해서 올 수 있는 곳도 이 길이 유일하니까요.”
“그들이 관의 눈을 피해서 온다는 보주의 말은 믿기가 힘들구려. 용상회와 검도원, 그리고 홍성파가 무너져도 관은 장님이라도 된 것처럼 꿈쩍도 하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소? 그렇다면 그놈들이 관의 눈을 피할 수 있다는 이 길을 꼭 선택해야 할 필요가 있느냐는 거요.”
“그건 그렇습니다만…….”
보주는 잠시 말문을 열지 못했다.
노인이 말한 용상회(龍商會), 검도원(劍道院), 홍성파(紅城派)는 이곳 형양보다 남쪽에 위치한 여성(汝城), 신전(新田), 안인(安仁)에서 패권을 차지한 무림문파들이었다.
그리고 각기 상인회(商人會), 도문(刀門), 권파문(拳派門)이라는 다른 성향을 가지고 있는 세 문파는 갑자기 등장하여 아무런 예고도 없이 정파 무림을 향해 무기를 뽑은 혈천신교(血天神敎)에 공격당해서 멸문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멸문이 근방에서 강성한 문파인 구천신궁보(九天神弓堡)와 철혈무적검단(鐵血無敵劍團), 십여 개의 소문파, 그리고 창천도문(蒼天刀門)과 더불어 호남제일로 불리는 형산파(衡山派)까지 뭉쳐서 길을 막고 있는 이유이기도 했다.
형산파(衡山派).
보주의 말문이 막힌 이유는 그 이름 때문이었다. 결코 노인이 따져 묻는 것에 대답할 말이 없어서가 아닌 것이다. 노인이 형산파의 고수이기 때문에 곧바로 반박하여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
사실, 형산파는 어떤 특정화된 규율로 뭉친 문파가 아니었다. 그저 형산(衡山)에서 가장 유명한 축융(祝融), 자개(紫蓋), 천주(天柱), 연화(蓮花)봉에서 각기 독특한 무공을 가진 무리를 통틀어 형산문, 혹은 형산파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노인 관심생은 형산파의 수장격인 천주문(天柱門)의 장로로서 이곳에 온 오십여 명의 형산파 고수들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오만하지만, 그만큼 능력이 있기에 무시할 수 없는 노인인 것이다.
“수하들이 보내온 소식에선 그들의 진로가 분명히 이 길로 이어진다고 했습니다. 또한 제 판단으로도 이 길 외에는 그들이 올 길이 없다고 사료됩니다. 그러니 관 장로님께선 조금만 참고 기다려주십시오.”
보주는 오늘 이 자리에 절대 없어서는 안 될 인물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형산파에서도 나름대로 사안을 심각하게 보고 관 장로를 위시하여 실력 있는 고수들만 오십을 보낸 것이지만, 정작 그러한 명을 받고 온 관 장로는 혈천신교를 너무 가볍게 생각하고 있었다.
과거 마교의 사례를 보더라도 사교의 무리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걸 알고 있을 텐데도, 관 장로는 그들의 등장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마교가 사라진 지 이백여 년이나 지난 시간의 흐름과 형산파의 위명 등을 생각했을 때는 충분히 이해할 만한 일이기는 했다.
하나, 자신은 그런 관 장로와 달랐다.
자신들보다는 규모면에서 조금 떨어지지만, 그래도 쉽게 무너질 만한 곳이 아닌 용상회 등의 세 문파가 보름도 되지 않아 깡그리 몰살당했다는 것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자신들에겐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과 다름없는 다급하고 위험한 상황인 것이다.
형산파야 고수가 많으니 홀로 대적할 수 있을지 몰라도, 자신들은 이전에 몰살당한 문파들과 같은 처지가 될 가능성이 높았으니까 말이다.
‘그러니 당신도 도와주면 좀 좋아!’
보주의 시선이 슬쩍 오른쪽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손에 든 철검만큼이나 투박한 인상의 사내가 눈을 감고 앉아 있었다.
그는 철혈무적검단의 단주였다. 생긴 것만큼이나 묵직하고, 거친 검법을 펼치는 인물로 유명했다. 문파의 규모도 구천신궁보보다 더 컸다.
하지만 처지는 별반 다르지 않았다. 형산파의 도움이 없다면 똑같이 혈천신교에 먹혀버릴 처지인 것이다.
그래서 보주의 심정은 알랑거리기만 할 뿐 별 도움도 되지 않는 소문파의 문주들과 달리, 나름의 이름이 있는 철혈무적검단의 단주도 같이 합세하여 이 까다로운 노인네를 함께 다독여주었으면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런 보주의 마음을 외면하고, 처음부터 쭉 저쪽으로 물러나서는 묵직한 분위기만 잡고 앉아 있었다.
그러나 보주는 원망하는 마음만 가질 뿐, 그에게 직접적으로 도움을 청하지는 않았다. 원래 그는 그렇게 입이 무겁고, 아부하고는 완전히 담을 쌓은 사내였으니까 말이다. 그저 검을 단련하고, 검객으로서 노력하는 사내일 뿐인 것이다.
또한 그 점이 지금과 같은 상황에선 믿음이 갈 수밖에 없었다. 겁에 질려 도망칠 걱정이 없는, 믿고 같이 싸울 수 있는 동료가 있다는 것은 그렇게 마음을 든든하게 해주는 법이니까 말이다.
“오는 모양입니다.”
관 장로의 기분을 적당히 맞추어주며 아부를 하고 있던 보주는, 저 멀리서 급하게 달려오는 감시자를 발견하고는 때가 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양쪽 숲에 매복한 그의 수하 육십여 명에게 신호를 보냈다.
구천신궁보는 특이하게도 활을 무기로 사용하는 문파인데, 처음 문파가 만들어진 계기가 근방에 유명한 사냥꾼들이 하나의 무리를 이루면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지금부터 구천신궁보의 궁수들은 치명적인 선제공격을 가하기 위해, 숲 속에서 화살을 메긴 채 적들의 등장을 기다리게 될 것이었다. 그리고 형산파의 고수들을 중심으로 한 삼백여 명의 무리는 당황하는 적의 중심을 꿰뚫어, 그들이 멸문시킨 문파들과 같은 처지로 만들어버릴 계획을 갖고 있었다.
“준비들 해라.”
지금껏 투덜거리기만 하던 관 장로가 앞으로 나서면서 오십여 형산파 고수들에게 말했다.
관 장로는 이곳에 있는 이들 중에서 무공 실력이 최고인 만큼, 적들이 다가오는 기척을 가장 먼저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내키지 않는 아부를 하느라 기분이 뭐 같았던 보주는 역시 이름값은 하겠구나, 하는 마음에 좋지 않았던 기분을 풀 수 있었다.
“……!”
“……!”
웅성웅성.
한데, 혈천신교의 등장을 기다리고 있던 그들은 어느 순간 놀란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동요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드디어 나타난 적들의 규모는 일견하기에도 그들의 두 배는 넘어 보였고, 어느 정도 예상은 했었다고 해도 짐승 가죽을 뒤집어쓰고 있는 모습의 적들은 꾹꾹 눌러두고 있던 두려움을 밖으로 끄집어 올릴 정도로 기괴했던 것이다.
“동요하지 마라!”
당황하는 수하들을 더 이상 방관할 수 없었던 보주는 서둘러 놀란 마음을 추스르고 크게 소리쳤다.
그리고 다른 문주들도 보주를 따라 각자의 수하 무사들을 진정시키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미 그들을 흔들어놓은 당혹감은 이 싸움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었다.
‘관 장로가 뭔가 보여주어야 할 텐데. 아니면…….’
놀랐다기보다는 호기심 섞인 시선을 적들에게 보내고 있는 관 장로를 보면서 보주는 내심 그렇게 생각했다.
무사들의 꺾인 기세를 바로 세우려면 아군의 힘이 숫자에 구애받지 않을 정도로 강하다는 믿음을 얻을 수 있는 계기가 필요했다. 혹은, 매복하여 적들이 사정권 안으로 다가오기만을 기다리는 궁수들이 적들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주어야 할 것이다.
‘놈들은 매복을 눈치 채지 못했다.’
등에 메고 있던 철대궁(鐵大弓)을 꺼내들어, 철시(鐵矢)를 메기면서 보주는 그렇게 확신했다.
적들은 자신들을 발견하고서는 백 장 정도의 거리를 두고 잠시 멈췄다가, 급작스럽게 속도를 내며 달려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즉, 이곳의 지리가 매복하기 좋다는 점 같은 것은 전혀 개의치 않고 정면 승부하겠다는 의미와 다름없었다.
매복이니, 혼란을 틈탄 공격이니 하는 무림인답지 않은 자신들의 방식보다 더욱 무림인다운 맹목적인 공격을 시작하고 있는 적들의 모습이 씁쓸한 기분이 들게 했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무림인의 자존심이고 뭐고 간에 우선 살고 봐야 하는 것이다.
‘지금이다!’
적들 무리의 선두가 오십 장 정도의 거리 안으로 진입했다.
그리고 보주는 딱 맞추기 좋은 사정거리에 들어온 적들을 향해 힘껏 당긴 시위를 놓았다.
팽―
보통의 화살이 곡선으로 날아가는 것과 달리, 보주가 쏜 철시는 묵직한 소리와 함께 직선의 거리를 빠르게 날아가 정면에 있던 야만족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큭!”
쿠당탕!
정확하게 철시에 맞은 야만족은 뒤쪽에서 달려오는 다른 야만족 두 명과 함께 얽히며 바닥을 뒹굴었다.
“와~!”
축 처져 있던 분위기 속에서 작은 탄성들이 터져 나왔다.
작은 성과에도 기쁨을 느낄 정도로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는 의미였다. 어쨌든 나쁜 반응은 아닌 것이다.
하지만 적 세 명이 쓰러진 것으로 적들의 거센 진격이 멈추어질 리는 없었다. 오히려 그들은 괴성을 지르면서 살기에 가득 찬 자신들의 정신 상태를 더욱 강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그러나 보주가 어떤 큰 효과를 바라고 철시를 쏜 것은 아니었다. 그저 매복한 궁수들이 적들을 향해 공격을 개시할 신호를 보내고자 한 것이다.
피피피피피피피핑―
양쪽 숲으로 각기 삼십여 명씩 매복해 있던 궁수들이 모습을 드러내며 하늘을 향해 화살을 날렸다.
그리고 무성하게 공간을 가른 화살들은 곧바로 빗줄기처럼 곤두박질치며, 조금도 겁을 먹지 않고 계속해서 달려오는 적들의 몸을 강타했다.
“저럴 수가!”
보주의 경악 어린 외침이 터진 것은 적들에게 화살이 퍼부어지기도 전이었다.
그는 본 것이다. 그의 철시에 가슴이 꿰뚫려서 동족들 둘과 얽혀 쓰러진 야만족 전사가 다시 일어나서 달려오는 것을.
어떻게?
입고 있는 짐승 가죽 안에 철판이라도 넣은 것일까?
하지만 가슴팍을 관통해버린 철시의 꼬리 부위가 덜렁거리는 모습은 그런 생각을 부정하게 만들었다.
‘도대체?’
아무리 생각해도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분명 죽어야 할 자가 일어나서 달려오는 것은 어떠한 상식으로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비상식적인 상황은 그 야만족의 경우만이 아니었다.
빗줄기처럼 떨어지는 화살을 몸에 맞은 적들이 쓰러지지 않고 계속해서 달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 * *
“이건 언제 봐도 재밌는 광경이란 말이야.”
교주의 사제가 아니라, 이제는 혈천신교(血天神敎) 초강지옥대(初江地獄隊)의 초강대왕(初江大王)인 원등곡은 그들과 함께 하는 모남족(毛南族)들이 화살에 맞고도 멀쩡한 것처럼 달려가는 모습을 보며 낄낄거렸다.
하지만 그만 그렇게 즐겁다는 듯 웃고 있을 뿐, 다른 수뇌들은 전혀 웃지 않고 있었다.
‘이 녀석은 아무리 봐도 익숙해지지 않는군.’
원등곡과 함께 온 혈천신교의 대장로 좌구염은 내심 눈살을 찌푸렸다.
생긴 것은 호감이 갈 정도로 잘생겼고, 언뜻 보이는 성격은 쾌활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그건 일부분의 모습일 뿐, 원등곡은 광기를 품고 있었다. 물론 무공을 익힌 이들이라면 싸움을 두려워 않고 즐길 줄 알아야 하니, 그러한 광기는 누구나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원등곡은 그런 수준이 아니었다. 뭔가 딱 하니 집어낼 수 없는 그런 광폭함을 그 잘생긴 얼굴에 숨겨두고 있는 것이다. 왠지 두려움이 생길 정도의 그러한 광폭함을 말이다.
“그런데 오 장로님은 송제대왕이 꽤나 마음에 든 모양입니다.”
원등곡이 여전히 낄낄거리는 웃음과 함께 눈짓으로 가리키는 방향을 돌아본 대장로는 실소를 지었다.
그곳에는 송제지옥대(宋帝地獄隊)라는 이름을 얻은 모남족의 족장, 즉 송제대왕(宋帝大王)이 있었고, 그 바로 옆엔 십여 세의 어린아이가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하하하 웃고 있었다.
바로 그 어린아이가 오 장로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