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계 15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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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602회 작성일소설 읽기 : 파계 150화
파계 6권 - 25화
흑천맹에서 가문끼리의 경쟁은 전혀 숨길 필요가 없는 정당한 현실이었다. 그리고 오랜 세월 진주언가는 과거의 명예와 위치를 되찾겠다는 의지를 끊임없이 내세워 오대세가의 심기 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특히 진주언가를 밀어내고 오대세가의 자리를 차지한 모용세가의 기분이 가장 좋지 않았다. 또한 같은 하북에 자리하고 있는 하북팽가는 조금씩 힘을 키워가고 있는 진주언가의 모습이 꽤나 거슬렸을 것이다. 그래서 가주들은 언 가주의 죽음에도 크게 분노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부주의로 인한 죽음, 그리고 진주언가의 탐탁지 않은 야심이 가주들의 생각을 좌우하는 모든 이유가 아니었다. 그 외에도 나름대로 의미 깊은 이유가 있었고, 그 이유 중에는 황보 맹주나 제갈 원주가 생각하는 것들과 부합하는 것도 있었다.
겉으로는 그들이 맹주의 움직임에 수동적으로 따르는 것 같지만, 사실 오대세가의 가주라는 위치는 아무나 오를 수 있는 것은 아닌 것이다.
“더 마주하고 있어봐야 좋은 말이 나오지 않을 것 같으니 서둘러주시오.”
황보 맹주는 웃음을 머금고 있는 위지무성에게 싸늘한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
그리고 위지무성의 눈짓을 받은 원등곡은 불가침 협약 문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진주언가에서 언 가주의 죽음을 문제 삼을 것 같소?
문서를 작성하는 원등곡을 바라보는 척하며 황보 맹주는 전음으로 제갈 원주에게 물었다.
그 물음엔 고민할 것도 없다는 듯 제갈 원주는 곧바로 대답했다.
―언 가주의 죽음에 기뻐하며 우리에게 찬사를 보낼 것이라 짐작되는 자들만 해도 셋 이상입니다. 우리가 언 가주의 죽음에 대해서 말도 안 되는 설명을 한다고 해도 진주언가는 반론하지 않고 침묵할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의 도움을 받아 가주의 자리를 차지하고 싶어서 우리가 추진하는 모든 일에 대해 적극 동참하는 모습을 보여줄 게 분명합니다.
황보 맹주도 제갈 원주의 말에 동감했다.
그래서 위지무성의 이 오만하고, 간악스런 행위에 대해서 따지지 않고, 가주들까지 자중하게 만든 것이다.
“됐습니다.”
원등곡은 두 개의 종이를 위지무성에게 건네주었다.
위지무성은 종이의 내용을 한 번 쓱 읽어보고는 자신의 이름을 적어 넣었다. 그리고 두 종이를 황보 맹주에게 던졌다.
슈욱―
두 개의 종이는 마치 암기처럼 날아갔다.
혹 살수를 쓰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가주들의 어깨가 움찔했지만, 황보 맹주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매섭게 날아오는 종이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덥석.
종이는 쉽게 잡혔다.
하지만 종이에 실린 힘이 겉으로 보는 것만큼 가벼운 것이 아니었기에, 황보 맹주는 위지무성을 향해 살기 어린 눈빛을 보냈다. 그리고 곧바로 문서의 내용을 읽어보고는 특별히 첨가할 내용이 없음을 확인한 뒤에 자신의 이름을 적었다.
슈욱.
황보 맹주는 하나의 종이는 제갈 원주에게 건네고, 나머지 종이를 위지무성이 그랬던 것처럼 던졌다.
덥석.
위지무성 역시도 날카롭게 날아오는 종이를 쉽게 잡았다.
“…….”
황보 맹주의 표정이 아주 조금 딱딱해졌다.
그는 자신이 감당해야만 했던 힘의 두 배를 실어서 종이를 날렸다. 한데도 위지무성이 아무런 흔들림도 없이 쉽게 잡아버려서 기분이 좋지 않았던 것이다.
“끝났으니 우린 돌아가겠소.”
황보 맹주의 말에 위지무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이제부터 해야 할 일이 많아서 여기서 지체할 시간 같은 것은 없소. 하지만 축하하는 의미로 술 한 잔 정도는 괜찮지 않겠소?”
위지무성은 대답도 듣지 않고 자신의 잔에 술을 따라서 앞으로 들어올렸다.
황보 맹주는 아주 잠깐 망설이다가 곧 자신의 잔에 술을 따랐다.
“흑천맹의 무궁한 발전을 빌겠소.”
“나 역시 혈천신교의 욱일승천하는 소식을 기대하겠소.”
두 사람은 단번에 술잔을 비우고 빈 잔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더 이상 대면할 필요가 없다는 듯 동시에 신형을 돌렸다. 하지만 먼저 움직인 것은 위지무성의 무리였다. 흑천맹의 무리는 조금 더 있다가 시체들을 수습한 뒤에야 그 자리를 떠났다.
휘이잉.
무림을 뒤흔들고도 남을 두 세력이 협상을 치르고 간 자리에는 다섯 장의 거리를 두고 놓인 탁자와 죽은 말들의 처참한 사체에서 풍겨 나오는 혈향을 잡아서 빙글빙글 맴돌고 있는 메마른 바람만이 남게 되었다.
그렇게 동성은 다시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진 인적 없는 평야로 돌아왔다.
* * *
때는 축시(丑時:새벽 1~3시) 초.
호북 무한 무적 정의파의 명판을 정문에 걸고 있는 경가장에서도 가장 안쪽에 위치한 심처에는, 이렇게 늦은 시간에 아직 잠들지 않은 몇 사람이 모여 있었다.
그리고 그 몇 명에는 방금 전에 무한에 도착하여 곧바로 경모혁의 설명을 듣기 위해 찾아온 오칠도 있었다.
“그러니까 좌사의 말은 혈천신교란 데가 배화교의 나머지 잔존 세력들이 뭉쳐서 만든 데 같다는 거야?”
“제 판단으로는 그렇습니다.”
쉽게 결론을 내리지 않는 신중함은 경모혁의 장점이었으니 거의 확실하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오칠은 그러고 싶지는 않지만, 심각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곤란하게 됐군.”
경모혁은 그 혈천신교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고 했다.
그들은 해적들을 통합하고, 근방의 여러 야만족들을 끌어들였다. 게다가 남쪽에서는 거의 절대자처럼 군림하고 있던 해남파를 초토화시켜 재기불능으로 만들었다고 하질 않는가. 그리고 지금은 빠르게 북상 중이라고 한다.
‘뭘 하려고?’
혈천신교의 정확한 규모는 알 수 없지만, 숫자가 수천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고 했다.
그만한 숫자라면, 더구나 그 일부는 분명 강력한 무공을 수련했을 혈천신교의 무사들이니, 한 성(省) 정도는 하루도 안 되어 꿀꺽 삼켜버릴 수 있을 것이었다.
물론 혈천신교가 군대와 싸울 리는 없을 것이다. 그랬다가는 반역의 무리로 낙인 찍혀서 곧바로 수십만의 군사들에게 짓밟히게 될 것이니까. 하지만 해남파를 상대로 한 행동으로 봐서 무림 문파들과는 좋은 관계를 형성할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
“무림 정복일까?”
혼자만의 중얼거림 같지만 경모혁에게 물은 것이었다.
오칠이 백천맹으로 떠났던 무렵부터 혈천신교의 움직임을 포착해서 쭉 주시하고 있었다고 했으니, 경모혁은 그에 관련한 모든 의문들을 떠올리고, 생각을 정리해서 결론까지 내렸을 것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백천맹으로 적 자매들까지 보내서 오칠에게 돌아오라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니까.
“거의 확실합니다.”
“그 정도의 숫자면 도전할 만한 힘은 충분히 갖췄다 할 수 있겠지?”
“백천맹을 비롯한 정파의 무리만 상대한다고 한다면 충분한 힘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흑천맹까지 가세하게 되면 가능성은 절반도 되지 않을 것입니다.”
“왜?”
“대략적으로 예측되는 그들의 규모만 보자면 정사 무림인들의 숫자를 넘어서지만, 질적으로 차이가 너무 큽니다. 물론 숫자가 많아지면 개인의 무용이 차지하는 비중은 상대적으로 적어지긴 합니다. 아, 오칠님은 예외입니다.”
경모혁은 아부를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분명 객관적인 판단으로써 오칠의 가치가 전세(戰勢)를 뒤흔들 정도로 크다고 확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정사의 무림인들은 거의 전부가 무공을 익혔고, 그 숫자도 적다고 볼 수 없습니다. 그런 그들이 체계적으로 뭉쳐서 대응하기 시작하면, 그것도 양쪽에서 포위하듯이 공격해오면 혈천신교는 숫자로 밀어붙이는 데 한계가 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렇겠군. 하지만 흑천맹이 움직이지 않거나, 백천맹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지금 대립하고 있는 모양새를 보면 서로 협력하지도 않고, 상대가 위험에 처했다고 해도 도와주지 않을 것 같은데?”
“정확히 보셨습니다. 하지만 혈천신교가 마교의 전신이라는 걸 알게 되면 두 맹은 힘을 합칠 수밖에 없습니다. 그만큼 과거 우리 배화교가 그들에게 입힌 피해가 크고, 우리에게 갖는 두려움이 적지 않으니까요.”
경모혁은 그 말을 하면서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는 것에 대해 숨기지 않았다.
“그렇다면 내가 나타났다는 걸 혈천신교에 알리는 건 어찌 생각하지?”
경모혁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분명, 오칠이 그와 같은 질문을 던지리라 짐작했을 텐데도 그는 대답하는 것을 망설이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꽤나 말로 하기 난감한 대답을 준비한 모양이었다.
“그들은 오칠님을 부정할 것입니다.”
“그건 경 좌사도 마찬가지였고, 화 우사도 그랬지. 다른 가문들도 처음부터 내게 머리를 숙인 것은 아니잖아?”
그 점에 대해서 경모혁은 아직까지 죄스러운 마음을 감출 수 없다는 듯 머리를 살짝 숙였다.
사실, 경모혁과 화웅섭은 그 일을 두고 벌을 청했었고, 아직도 유효한 상태였다. 다만, 오칠이 그럴 마음이 없기 때문에 다시 거론되지 않을 뿐인 것이다.
“그들이 처음엔 날 거부해도 내가 교주의 증거를 보여준다면 결국 수긍하게 되지 않을까?”
사실, 오칠이 그렇게 말은 하고 있지만, 그 자신도 가능성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었다.
교주가 나타나기를 이백 년 동안 조용히 기다린 사람들과 기다리지 않고 자신들만의 교를 만들어 무림 정복에 나선 자들이 똑같을 수는 없는 것이니까.
그리고 경모혁도 그 점을 지적했다.
“그들이 과거 배화교의 못다 한 열망을 이어가겠다고 한다면 혈천신교라는 이름을 사용하지 않았을 겁니다. 당당하게 자신들의 종교를 설파하고, 싸움을 시작했겠지요. 즉, 혈천신교는 배화교의 열망과 아후라 마즈다님에 대한 믿음보다는 무림을 정복하겠다는 그들만의 야욕을 가지고 모습을 드러낸 것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제가 풀어놓은 정보망에도 걸리지 않을 정도로 몸을 숨기고 있던 그들이 지금 나온 것은 그만큼 자신감이 있다는 의미도 되지만,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야욕이 큰 자가 혈천신교를 대표하고 있다는 뜻도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야욕자가 신앙에 휘둘릴 리는 없겠지요. 오히려 오칠님의 존재를 알게 되면 오칠님의 목숨을 노리는 불경한 마음을 품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좌사의 생각은 어떤데?”
“저로서는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왜?”
“혈천신교의 등장에 대응할 방법은 몇 가지가 있습니다. 그들에게 오칠님의 존재를 밝히고 복종할 것을 요구한다든지, 그들이 결국 오칠님을 부정한다면 단호히 징벌을 내린다든지 하는 방법들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저 교도로서 오칠님의 생각을 따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혈천신교가 그걸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간에 그들은 배화교도였다.
경모혁은 같은 배화교도로서 그들의 처우를 결정할 수 없었다. 혹 교주가 없고 그 대리로서 권한을 부여받는다면 모르지만, 교도들을 심판할 자격은 광명좌사인 그에게도 부여되지 않은 힘이었다.
그 권한은 오직 교주만이 가질 수 있는 가장 고유하고, 가장 강력한 힘인 것이다.
오칠은 경모혁의 뜻을 알아들었다. 그리고 일단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판단도 내린 상태였다.
“지금부터 우린 모습을 감춘다.”
“……?”
“혈천신교가 어떤 야욕을 가진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인 목적을 드러내고, 백천맹과 흑천맹이 그들을 상대로 어찌 대응할 것인지도 확실히 알아야 해. 그때까지 우린 방관자가 된다.”
물론 우선적인 상황 정보에 대한 일차적인 판단일 뿐이었다.
그 이후에 어찌 움직일지에 대해서는 그 상황에 따라 달라질 것이었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경모혁은 가장 오칠다운 명령이라고 생각했다.
정과 사를 구분 짓지 않고, 자신과 자신의 것들을 우선시하는 가장 오칠다운 생각인 것이다. 그리고 경모혁은 교주인 오칠의 생각에 티끌만큼도 반대할 마음이 없었다.
“그리고 백천맹과 흑천맹 쪽으로 혈천신교가 어떤 자들인지 짐작할 수 있는 정보를 우리가 보낸지도 모르게 은밀히 제공하도록 해. 그러면 그들이 어찌 대응할 것인지에 대해서 더 빨리 파악할 수 있겠지.”
“알겠습니다.”
“우리가 조용히 지낼 만한 곳은 있겠지?”
우리라 함은 무적 정의파는 물론, 열락문과 같은 그 산하 문파와 충성을 맹세한 단철방을 비롯한 가문들 모두를 이르는 것이었다.
그 숫자만 해도 엄청난 규모의 무리가 혈천신교나 백천맹, 흑천맹 등의 정보망에 걸리지 않을 안전한 곳을 구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경모혁은 두말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러한 상황에 대비하여 준비한 곳이 몇 군데 있습니다.”
“역시 좌사의 준비성은 철저하군.”
“과찬이십니다. 그럼 단철방 등에 오칠님의 명을 하달하도록 하겠습니다.”
경모혁은 그의 뒤쪽에 말없이 시립해 있던 세 쌍둥이 아들들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들은 곧바로 오칠에게 머리를 숙이고는 방을 나갔다.
“그리고 한 가지 더.”
“하명하십시오.”
“믿을 만한 사람으로 구성해서 목운교를 보호하게 해. 절대 그녀의 신상에 나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물론 특별한 일이 없는 이상은 모습을 드러내지 말아야 하지만, 다급하면 어떤 방법을 쓰든 그녀를 구하도록 해야겠지.”
“은형대의 대주와 그 절반을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경모혁은 오칠이 목운교를 어찌 여기는지 알고 있었고, 그래서 이 할만 보내도 충분한 인원을 그 배로 구성하여 보내겠다고 한 것이다.
당연히 오칠은 흡족했다. 그도 은형대의 능력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곧 무림에 닥칠 험악한 변화 속에 목운교의 안전을 더 이상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사실, 마음 같아서는 목운교를 데리고 오고 싶지만, 그녀는 결코 오칠의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었다.
“좋아. 이제부터 무림이 어찌 돌아갈지 지켜보자고. 그리고 우리의 욕심 많은 교도들이 어떻게 싸워나가는지도…….”
오칠의 말은 완성되어진 문장이 아니었지만, 그 뜻은 명백했다.
어차피 무림의 안위 같은 것은 그에게 관심 밖의 일이었다. 다만, 그러한 싸움으로 인해 그에게, 그리고 그와 관련된 것들에게 문제가 생기는 것은 용납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래서 만약 혈천신교가 그의 심기를 불쾌하게 만든다면 그는 곧 그들을 배화교의 반도(叛徒)로 규정할 것이다. 백천맹이나 흑천맹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들도 오칠의 심기를 좋지 않게 만든다면 적으로서 규정될 것이다.
“일단 지켜보자고…….”
독백처럼 중얼거린 오칠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뒤에서 석상처럼 앉아 있던 노백에게 배고프다며 밥이나 먹으러 가자고 했다.
곧 무림은 참혹할 정도로 혼란스러워지겠지만, 그런 상황은 지금의 오칠에겐 그가 현재 느끼는 허기짐만큼의 문제도 되지 않는 것이다.
그 어떤 무림 세력보다 현 무림 정세를 잘 파악하고 있는 이들이 모였던 경가장의 심처는 그렇게 다시 새벽의 고유함 속에 잠겨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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