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계 148화
무료소설 파계: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580회 작성일소설 읽기 : 파계 148화
파계 6권 - 23화
“글쎄. 사실 난 서신에 적힌 내용 외에는 특별히 첨가할 말이 없는데 말이오.”
“……!”
황보 맹주는 눈살을 찌푸렸다.
혈천신교에서 흑천맹에 보낸 서신 안에 적혀 있던 글은 참으로 간단한 내용이었다. 이곳 동성에서 만나자는 말과 약간의 의미 없는 표현을 빼고 요약하자면, 정파 무림을 무너트리려고 하니 흑천맹이 혈천신교의 후방을 노리는 일이 없도록 상호 불가침 협약을 맺자, 라는 요지의 글이었다.
그런데 위지무성은 그 빈약한 내용에 더해서 설명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하는 것이다.
“그럼 위지 교주의 말은, 우리 흑천맹은 아무런 조건도 내세우지 말고 혈천신교가 요구한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란 것이오?”
“이번엔 제대로 알아들은 것 같소.”
황보 맹주의 눈살이 더욱 진하게 찌푸려졌다.
조용히 협상을 하자고 했는데 황보 맹주가 사람을 너무 많이 데리고 왔다는 것에 대해 위지무성이 비꼬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위지무성의 옆에 있는 원등곡은 이 협상의 중요성 같은 것은 알지도 못한다는 듯 커다랗게 웃기까지 했다.
“그 말이 농담으로 한 것이 아니라면, 참으로 날 당황스럽게 하는 것이오.”
황보 맹주의 말에 위지무성은 웃었다.
“하하하! 맞소, 농담이었소. 어찌 협상을 하자 하면서 그런 일방적인 요구를 할 수가 있겠소.”
황보 맹주는 황당했다.
그리고 제갈 원주도, 가주들도 같은 심정이었다.
“이 협상을 하겠다고 마음먹으면서 난 농담 같은 것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소. 그러니 위지 교주는 좀 더 심각하게 협상에 임했으면 하오.”
황보 맹주는 드디어 노기를 드러내며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그러나 위지무성이나 원등곡은 여전히 웃음을 지우지 않았다. 야율도동이야 원래부터 철면처럼 표정이 딱딱한 사내고, 견봉생은 아무것도 못 먹은 강아지처럼 울상이었는지라 황보 맹주의 노기는 위지무성과 원동곡, 두 사람만을 향한 것이었다.
하지만 웃음을 지우지 않으면서도 위지무성은 더 이상 농담을 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자신들의 요구에 대해서 흑천맹은 어떤 조건을 걸겠냐고 물었다.
이제야 협상할 분위기가 되었다고 판단한 황보 맹주는 이미 그에 대해 가주들과 논의하고 내려진 결론을 이야기했다.
“기존에 우리 흑천맹의 영향 하에 있는 하북, 산동, 안휘, 강소의 지배권을 인정하고, 거기에 하북과 절강을 넘겨주시오. 이 정도면 과한 조건은 아니라고 생각하오.”
“아무것도 하지 말고 그냥 가만히만 있으란 요구에 비해 그 조건은 너무 큰 욕심을 담고 있는 것 같소. 하지만 기존의 지역에다가 절강을 추가하는 정도라면 받아들이겠소.”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아닐 거요. 당신들이 강서를 거쳐 호북, 호남을 먼저 노린다는 계획이라면 우리가 하남과 산서의 정파문들이 당신들을 향해 움직이는 일이 없도록 견제하게 될 테니까 말이오. 그 정도면 불가침 협약 이상의 도움을 주는 것이니 하남까지 이양 받는 것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으로 생각하오.”
위지무성은 잠시 동안 말이 없었다.
하지만 그의 시선이 아주 잠깐 제갈 원주를 향했던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었다. 아마도 제갈 원주가 흑천맹에서 가장 뛰어난 머리임은 물론, 그들이 어떻게 정파 무림을 공략할지를 예측하여 이 협상을 어찌 이끌어야 할지에 대한 방향을 설정했다는 것까지도 다 알고 있다는 시선인 것이다.
“좋소. 그렇게까지 도움을 주겠다고 한다면 기존의 지배권을 인정하고, 절강과 하남의 절반을 이양하겠소.”
위지무성이 생각해낸 합의선에 대해 황보 맹주도 더 이상은 거부할 수 없었다.
그 이상은 분명히 과한 요구였으니까 말이다.
“받아들이겠소.”
“그렇다면 우리가 합의한 내용에 대해서 문서를 작성하도록 합시다.”
“잠깐! 그러기 전에 우린 당신에게 들어야 할 설명이 있소.”
“무엇을 말이오?”
위지무성은 무슨 말을 하냐고 묻고 있기는 하지만 얼굴엔 여전히 미소가 그려져 있고, 표정은 더할 수 없이 담담했다.
분명 황보 맹주가 들어야겠다는 설명이 무엇인지 예측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혈천신교는 마교와 관계가 있소?”
묻고 있는 황보 맹주나 가주들의 얼굴에 긴장감이 어렸다.
그들이 혈천신교에 대해 알게 되면서 가장 큰 궁금증이 그것이었다. 과거에 무림을 피바다로 만들었던 마교가 혈천신교의 전신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갖게 된 것이다.
이백여 년 전, 무림에서 그렇게 큰 사건이 터지고 나서 무림에는 이렇다 할 종교가 나타나지 않았다. 아주 오래전부터 중원에 자리하고 있던 종교들만 있을 뿐, 우후죽순처럼 생겨나 민심을 파고들던 새로운 종교가 근 이백여 년 동안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았던 것이다.
무슨 이유 때문이냐고 의문을 가진다면, 신흥 종교라면 마교와의 연관성부터 의심하여 절대 호의적이지 못한 시선을 보내는 무림인들의 압력을 감당할 배포를 가진 사람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해줄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무슨 신을 섬기는지도 알 수 없는 종교 단체가 나타나 해남파를 무너트렸다. 게다가 그 이름도 마교만큼이나 험악하고, 잔인한 상상을 불러일으키게 만드는 이름이었다. 누구라도 의심이 드는 것이 당연한 일인 것이다.
그리고 만약 혈천신교가 아주 조금이라도 그러한 연관성을 시인하기라도 한다면 이 협상은 불필요한 만남이 될 것이었다. 또한 곧바로 혈천신교는 정사에 상관없이 모든 무림인들의 공격 대상이 될 것이 분명했다.
“당연히 관계가 없소.”
위지무성은 처음으로 미소를 지우고 정색을 하며 말했다.
그제야 황보 맹주와 가주들의 표정에 긴장감이 사라졌다. 과거 그렇게 격렬하게 싸운 상대인데도 마교에 대해서 거의 알려진 것이 없긴 하지만, 몇 가지는 정확하게 전해진 것들이 있었다.
그것들 중에 하나가 마교인은 절대 자신의 종교를 부인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그들의 종교와 동료들뿐만 아니라, 그들의 신을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황보 맹주 등이 안심하는 걸 보면서 위지무성은 내심으로 비웃고 있었다.
‘우리의 전신은 배화교지, 너희들이 말하는 마교 따위가 아니다!’
그것이 위지무성이 당당하게 마교와의 연관성을 부인하는 이유였다.
그러나 만약 황보 맹주가 배화교와 관계가 있냐고 물었어도 위지무성은 당당하게 부인했을 것이다. 혈천신교는 이미 과거의 배화교가 아니었고, 특히 위지무성은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말과 행동도, 심지어 신을 부정하라고 해도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럼 이제 문서를 작성해도 되는 것이오?”
“그렇소.”
황보 맹주의 대답을 들은 위지무성은 원등곡에게 문서를 작성하라고 명했고, 원등곡은 미리 준비하고 있던 종이와 먹물 통, 그리고 붓을 꺼내들었다.
하지만 원등곡은 곧바로 문서를 작성할 수가 없었다. 진주언가의 언백소 가주가 앞으로 나서며 이 협상에 반대한다는 목소리를 높였기 때문이었다.
“사교 집단과의 협상은 절대 해서는 안 될 것이오!”
지금껏 말없이 가만히 있다가 초를 치는 언 가주의 행동에 다른 가주들이 얼굴을 붉혔다.
“언 가주, 이미 결정된 사항에 대해서 반대하면 어쩌자는 것이오?”
“이 같이 중요한 자리에서 우리 모두의 체면을 손상시킬 작정이시오?”
오대 가주(제갈세가의 가주는 동행하지 않았지만, 제갈 원주가 대리 역할을 하고 있다)들은 아직까지 오대세가의 반열에 오르지 못한 진주언가의 가주가 억지를 부려서 같이 온 것만 해도 탐탁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다된 밥에 초를 치고 있으니 어찌 고운 시선을 보낼 수 있을까.
하지만 언 가주는 그런 가주들의 곱지 않은 시선 같은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듯 자신의 의견을 더욱 강력하게 주장했다.
“과거 마교의 경우를 생각하시오. 지금이야 웃는 얼굴로 이야기하지만, 언젠가는 사악한 속내를 꺼내서 우리에게 칼을 겨누게 될 것이 분명하오!”
“언 가주, 말씀이 지나치시오!”
“근거 없는 추측을 가지고 그 무슨 망발이오!”
가주들은 어떻게든 언 가주의 입을 다물게 하려고 했지만, 그는 아주 작정을 하고 온 것이기에 이제는 위지무성에게 직접적으로 욕을 하기 시작했다.
“저자를 보시오! 저런 태도가 우리 대흑천맹을 상대로 협상을 하자는 자의 태도라 할 수 있소? 잘 생각을 해보시오! 저들은 종교 집단이라 하면서 먼저 포교를 할 생각은 않고, 다짜고짜 해남파를 멸문시켰소. 이는 마교가 처음 등장하여 나라에 반기를 들고, 무림 문파들을 향해 복종을 강요하면서 경고의 의미로 모산파(茅山派)를 멸문시킨 것과 무엇이 다르단 말이오!”
“어허~ 언 가주!”
“거참, 그만 하시오!”
조금 전보다 강하게 말리지 않고, 가주들의 표정도 슬며시 달라지기 시작했다.
언 가주의 그럴듯하고 열정적인 주장에 슬며시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왜?
가만히 들어보면 언 가주의 말이 아주 틀린 것도 아니기 때문이었다. 또한 가주들의 마음이 이렇듯 빨리 동요되는 것은, 그들도 내심 언 가주가 언급한 문제에 대해서 아주 조금씩은 불안감을 가지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준비를 잘했군.’
언 가주의 말을 듣고 동요하는 가주들을 보며 황보 맹주와 제갈 원주는 내심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사실, 두 사람의 생각도 언 가주가 말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처음부터 혈천신교가 마교와 어느 정도 연관이 있지 않을까 하는 추측까지 했었는데, 위지무성이 단호하게 부인을 해서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쨌든, 이런 저런 상황에도 혈천신교가 위험성이 다분한 종교 집단이란 생각에는 아무런 변함이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황보 맹주와 제갈 원주는 어째서 혈천신교와의 협상을 받아들인 것일까?
당연히 받아들일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다는 필요성 때문이었다.
현재의 무림은 정(正)과 사(邪), 두 성향으로 나뉘어 어느 한쪽으로도 기울지 않은 균형을 맞추고 있었다. 그래서 기존의 지역에서 문제가 생기면, 예를 들어 무한에서 사파를 지향하고 있던 천목보가 갑자기 무적 정의파란 이름으로 바꾸어 정파로 전향을 하는 경우가 그에 해당한다.
그렇게 한 지역에서 균형이 무너지면 그 근방에까지 영향을 주어 한쪽은 힘이 커지고, 한쪽은 힘이 축소되는 급박한 정세 변화를 초래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근래에 사파는 상대적으로 위축되는 모습을 보여 왔다. 특별히 어떤 큰 사건이 발생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상하게도 정파의 기세가 점점 더 커져가고 있었던 것이다.
흑천맹의 맹주 된 입장에서, 사파를 대표하는 제일인의 입장에서 황보강패는 그러한 정세 변화를 타개할 방법이 필요했다. 또한 흑천맹의 군사라 할 수 있는 제갈모학도 그 자신의 역할에 부합하는 생각을 하고, 행동을 취해야 했다.
그런데 이러한 때에 그들이 등장했다.
혈천신교(血天神敎).
그들의 등장을 알게 되고, 더구나 협상을 하자는 서신을 받게 되면서 두 사람은 내심 기뻐했다. 현재의 정세를 타파함은 물론, 정파를 저 구석으로 몰아넣고, 사파가 득세하는 무림을 만들 수 있다는 희망찬 계획까지 구상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혈천신교의 위험성을 알면서도 두 사람은 가만히 있는 것이다. 그들이 위험한 집단일수록 그들의 계획은 더욱 뚜렷한 모양을 갖출 수 있을 테니까.
―이쯤에서 제지할까요?
가주들의 잠잠해진 분위기에 더욱 기세가 높아진 언 가주가 이제는 위지무성을 향해 삿대질까지 하자, 제갈 원주는 여기서 그만두게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황보 맹주에게 전음을 보냈다.
―위지 교주의 변함없는 태도를 보니 조금 더 자극해도 될 것 같소. 그리고 약간의 힘을 보여줌으로써 저자의 오만한 마음을 조금은 서늘하게 만들 필요가 있을 것이오.
고양이가 아닌 호랑이의 모습으로 협상을 해야 한다고 황보 맹주가 이미 언급했었기에 제갈 원주는 그 말에 반대하지 않았다.
* * *
“이거 참 재미있는 상황이오.”
위지무성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하지만 여전히 웃음기를 담은 얼굴 그대로였다. 또한 원등곡 등도 자신들은 물론, 교주까지 욕을 먹는데도 남의 일 보듯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이보시오, 언 가주?”
위지무성이 부르자, 언 가주는 코웃음을 치며 그를 바라봤다.
“난 당신과 아무 할 말이 없소!”
‘하하하! 이제 나의 생각대로 이 협상이 엉망이 되었으니, 황보 맹주가 날 설득하는 일만 남았다.’
혈천신교의 위험성에 대해 핏대를 세우며 소리를 높였지만, 사실 그는 그 문제에 대해서 크게 관여할 생각이 없었다.
혈천신교가 가진 추상적인 위험보다는, 현재 가문에서 입지가 흔들리고 있는 자신의 처지가 더욱 급했으니까. 더구나 결맹 대회에서 강함을 증명하고 당당하게 맹주가 된 황보강패가 협상을 하겠다고 하는데 끝까지 반대하는 것도 그에게 좋을 것이 없는 일이었다.
“당신이 이곳에 있는 사람들 중에서 협상을 반대하는 유일한 사람이오?”
“내가 먼저 당신들의 위험성을 지적했으나, 이제 다른 가주들도 내가 말한 의미를 깨닫고 지지하게 될 것이오.”
할 말이 없다고 했으면서도 언 가주는 일일이 대꾸를 하고 있었다.
황보 맹주가 아직까지 나설 기미가 없자 그는 자신의 가치를 조금 더 높일 필요성을 느꼈고, 황보 맹주가 더욱 당황하여 서둘러 나서게 하려는 속셈인 것이다.
“하지만 현재까지는 당신만이 우리와의 협상을 반대하고 있는 것 같은데?”
언 가주는 위지무성이 자꾸 같은 말로 꼬투리를 잡고 늘어지자, 짜증난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