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계 18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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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452회 작성일소설 읽기 : 파계 180화
파계 8권 - 5화
‘이번 혈천신교와의 싸움에서 모든 이들이 인정할 만한 영웅적인 활약을 펼치는 자가 나타난다면 모를까…….’
십장회와 얽혀 있지 않은 인물, 그것이 공야 각주가 바라는 이상적 인물이었다.
물론 오칠도 그 개인의 강한 문파를 갖고 있다는 것이 신경 쓰이기는 했다. 하지만 그는 광죽 대사의 후광을 받아 구파를 비롯한 모든 무림인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다는 큰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다른 소소한 단점을 상쇄시키고도 남을 만한 것이다.
‘어떻게든 찾아야 해.’
혈천신교와의 싸움이 시작되려면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하고, 그때까지 공야 각주는 오칠을 찾아 맹주로 추대할 것이라는 생각을 더욱 확고하게 다졌다.
‘슬슬 구파의 장문인들이 모일 때가 되었군.’
공야 각주는 구파를 비롯한 각 문파 수장들의 회합 장소로 정해진 대총부를 바라봤다.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전까지 앞으로 뽑히게 될 맹주의 힘을 실질적으로 확대하기 위해서는 각 문파의 수장들, 특히 구파 수장들의 도움이 필요했고, 그래서 그들 모두가 맹주가 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부각시키고, 그들이 가슴에 숨기고 있는 욕심이 식지 않도록 달궈줄 필요가 있는 것이다.
“각주님.”
성벽을 따라 내려가는 공야 각주의 앞으로 천이각의 수하가 다가왔다.
“무슨 일이냐?”
“지금 맹에 도착한 두 문파가 입맹을 신청하며 한 가지 요청을 했습니다.”
“입맹이라고?”
홀로 무림을 주유하는 무인들이 찾아와 혈천신교와의 싸움에 합류하는 경우는 있어도, 문파가 찾아와서 입맹을 청한 경우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들은 어디 있느냐?”
수하는 백천맹의 정문 서쪽을 가리켰고, 공야 각주는 눈에 공력을 돋워 그쪽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꽤 숫자가 많군. 합쳐서 대략 삼백 정도라…….’
“어디에 있는 문파라고 하더냐?”
“사천 서쪽 구룡(九龍)에 있는 토호(土豪) 가문인 담씨 일가와 같은 사천 북쪽 흑수(黑水)의 토호 세력인 녹류산장(錄流山莊)이라 합니다.”
“들어본 적이 없군.”
“사천의 다른 문파들에게 확인한 결과, 제법 뛰어난 무공을 지닌 토호 가문들이지만 무림에서는 활동이 거의 없어서 그 근방의 문파들 외에는 잘 알지 못한다고 합니다.”
“입맹 이유는?”
“정파 무림에 큰 위험이 닥쳤기에 미력하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해서 찾아왔다고 합니다.”
공야 각주는 내심 코웃음을 쳤다.
이야기 속에서나 나올 듯한 그런 이유로 입맹하려고 한다는 것이 가당키나 한 일인가. 그런 가식적인 이유는 어린애에게도 통하지 않을 것이다.
‘이번 일을 호기로 삼아 무림에서 활동을 시작해보겠다는 생각이겠지.’
지금껏 한 지방의 토호 가문으로서 웅크리고 있었지만, 이제부터는 더 큰 포부를 품고 세상에 나온 것이라고 공야 각주는 판단했다.
그리고 그런 문파의 등장과 입맹이 나쁘지는 않다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런 야망을 품은 새로운 문파들이 많을수록 백천맹의 힘은 더욱 커지게 되는 것이니까 말이다.
“그들이 요청한 것은 무엇이냐?”
“백천맹과 원활한 교류를 맺고, 부족한 정보에 대한 조언자로서 한 명의 길잡이를 요구했습니다.”
“길잡이? 흠, 정보를 얻기 위해 매개체가 필요하다는 말이군.”
“그런데 그들은 정확히 한 사람의 이름을 거론했습니다.”
“그게 누구냐?”
“열혈군 인군 소속 목운교 소저입니다.”
“이유는?”
“목운교의 가문인 산서금검문, 그러니까 금검표국과 과거에 몇 차례 거래를 한 적이 있는데, 그때 목 소저와 약간의 교분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
공야 각주는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두 가문이 같이 행동하겠다면서 목운교 한 사람만을 요청했다고 하니 이상한 생각이 든 것이다.
물론 그런 식으로 교류가 있었고, 교분까지 있어 얼굴을 알고 있다면 그런 요구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왠지 뭔가 이상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아마 그 목운교가 오 장문인과 관계가 있기 때문에 이런 기분이 드는지도 모르겠군. 뭐, 자세히 알아보면 되겠지.’
설사 어떤 의문스러운 점이 있다고 해도 저 정도의 토호 가문이나 목운교 정도가 백천맹에 큰 위험 요소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공야 각주는 담씨 일가와 녹류산장을 입맹시키고, 목운교를 길잡이로 삼고 싶다는 그들의 요청도 들어주라고 명했다. 대신에 사람을 시켜서 두 문파에 대해 좀 더 조사하고, 목운교가 그들과 어찌 어울리는지도 감시하라고 명했다.
“존명.”
명을 받은 수하가 사라지고, 공야 각주는 곧 그들에 대한 관심을 접었다.
그에게는 들어본 적도 없던 토호 가문의 입맹보다 더욱 중요한 일이 많았다. 공야 각주는 서둘러 그 중요한 일들을 처리하기 위해 대총부로 향했다.
* * *
백천맹 내부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들어차서 더 이상 사람을 받을 수가 없기에, 백천맹 외곽으로도 천막들이 빼곡하게 세워져 있었다.
웅성웅성. 시끌시끌.
사람이 모이고, 사람들이 뭉치게 되면 당연히 생겨나는 것이 소음이고, 더구나 싸움을 준비하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은 절로 흥분하여 더욱 소란스럽기 마련이다.
게다가 정파라고는 해도 이들은 모두 무림인이었다.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앞으로 생겨날 싸움에 대한 이야기들로, 혹은 그 자신의 무공을 수련하고, 다른 이들에게 은근히 내세우기 위해 이곳저곳에서 창칼과 도검이 쇳소리를 내며 시끄럽게 부딪쳤다.
하지만 한 곳.
다른 곳과는 달리 기이할 정도로 고요함이 뒤덮고 있는 곳이 있었다. 대략 삼백 정도의 무리. 하지만 같은 무리가 아니라 두 개의 무리가 적당한 경계를 짓고 어울려 있었다. 백천맹 정문에서 서쪽으로 꽤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은 이유는 다른 문파들보다 늦게 도착했기 때문이리라.
그런 그들이 고요함의 근원이었다. 다른 무림인들과는 대조적으로 차분하게 천막 안에서 짐을 정리하고, 식사 준비를 하는 등 여느 무림 문파들과는 뭔가 분위기가 확연하게 다른 무리들이었다. 마치 구대문파처럼 거대하고, 고풍스런 분위기를 풍긴다고나 할까.
그리고 그러한 분위기는 묘한 위압감을 풍기고 있어서 주변의 다른 무림인들까지 숙연하게 하고, 감히 그들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해서 그들로부터 거리를 벌리고서 천막을 세워 자리를 잡게 만드는 상황을 만들었다.
한마디로 그들은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매우 널찍한 공간을 확보한 것이다. 아니, 어쩌면 의도한 일인지도 모를 일이다.
“이곳이 담씨 일가와 녹류산장이 있는 곳인가요?”
그들 외에는 아무도 접근하지 않는 무거운 분위기 사이로 여인의 음성이 파고들었다.
이십대 초반의 여인으로, 옷을 보아하니 백천맹 열혈군 인군의 복장이었다.
“그렇소만, 소저는 누구시오?”
등에 기다란 검은색의 죽봉을 매고 있는 장년의 남자가 앞으로 나서서 물었다.
“백천맹 열혈군 인군 소속의 목운교라 합니다. 저를 길잡이로 청하셨다고 해서 왔습니다.”
“아, 목 소저시구려. 난 녹류산장의 장주 진태함이라 하오.”
진태함이 포권을 취하며 인사를 건네고, 곧바로 뒤쪽에서 시위가 풀린 대궁을 어깨에 걸치고 있는 장년의 사내가 나서며 자신을 담씨 일가의 가주 담조응이라고 소개했다.
“듣기로는 저를 아신다고 들었습니다.”
목운교 자신은 진태함 등이 초면인 것 같은데 어찌된 일이냐는 표정으로 물었다.
“아, 목 소저는 기억 못할 수도 있을 거요. 내가 지금보다 젊을 적에 부친과 함께 금검표국과 거래를 한 적이 있소이다. 그때 산서금검문에 몇 번 들른 적이 있었는데 기억을 못하시는 모양이구려. 뭐, 그럴 수도 있는 일이지. 그보다 우리가 무림엔 초행이라 여러 가지 조언을 구할 것이 많소. 곧 식사가 준비될 것이니 같이 먹으면서 백천맹과 요즘 호남의 근황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해주시오.”
목운교는 당혹스러우면서도 의문스러움을 지우기가 힘들었다. 진 장주는 자신을 길잡이로 청한 이유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듯 설렁설렁 넘어가버리고, 이야기의 초점을 다른 방향으로 슬쩍 돌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 우선 차를 마시면서 이야기해봅시다.”
담 가주가 손짓하여 의문 가득한 표정을 짓고 있는 목운교를 천막 안으로 청했다.
목운교는 이렇다 하게 거절할 명분이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천막 안은 정갈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이곳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들었는데, 준비를 철저히 해왔음을 알 수 있었다.
‘두 가문은 원래 친분이 있는 사이인가?’
진 장주와 담 가주는 탁자 좌우로 목운교를 접대하듯 앉아 있었고, 그 자연스런 모습에 그런 생각이 든 것이다.
“담씨 일가와 녹류산장은 이전부터 교류가 있었던가요? 실례되는 말씀이지만, 무림에 초행인 두 가문이 이렇게 같이 출두하여 함께 어울리는 경우는 처음 보는 것이라서요.”
진 장주는 빙그레 웃었다.
“사실, 그리 교류가 두터운 사이는 아니오. 다만 선대부터 알고 있던 사이라고 하면 맞는 말이겠구려. 그리고 중간에 몇 가지 사정 때문에 잠시 교류가 끊겼다가 최근에 다시 소식을 나누기 시작했소. 이번에도 우연찮게 무림의 안녕을 위해서 더 이상 웅크리고만 있지 말아야 한다는 데 의견과 뜻이 일치하여 같이 오게 된 것이오. 지금과 같이 어렵고 힘든 시기엔 힘을 합쳐 함께 싸우는 것이 좋지 않겠소이까.”
조금의 틈도 없는 깔끔한 설명에 목운교는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진 장주가 매우 외향적이고 말을 청산유수처럼 잘하는 반면에, 담 가주는 내향적인지는 정확하게 모르겠지만 필요할 때에만 입을 여는 진중한 사람임을 알게 되었다.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이지만, 우리같이 무림 초행의 문파들에겐 무엇보다 목 소저 같은 분의 도움이 절실하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소이다.”
“잘 부탁하오.”
포권을 취하는 두 사람의 정중한 인사에 목운교는 어색해하면서도 얼른 마주 포권을 취했다.
“많이 부족하지만 저도 능력이 되는 한 최선을 다해서 두 분께 도움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고마운 말씀이시오. 그리고 앞으로 우리 양쪽 문파의 여무사들이 목 소저를 보필할 것이니 요긴하게 부리시구려. 밖에 있는 아이들은 들어오너라!”
진 장주의 부름에 갑자기 십수 명의 여인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일사불란하게 안으로 들어왔다.
진 장주처럼 등에 흑색 죽봉을 매거나 담 가주처럼 어깨에 시위를 푼 대궁을 걸치고 있는 여인들이었다. 그리고 그녀들의 눈빛이나 동작 등을 볼 때, 최소 일류 수준의 고수들이 분명해 보였다.
‘내가 이런 여인들을 어찌 부린단 말인가.’
당연히 목운교는 부담감을 느끼고 손을 내저으며 거부의 말을 했다.
“이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아니오이다. 우리와 원활하게 정보를 공유하고, 촌각의 시간을 아껴 전달하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일이오. 그러니 거절치 말고, 편안하게 이들을 받아들이시오.”
진 장주의 간곡한 요청에 목운교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여야 했다.
길잡이로서, 또 앞으로 있을 싸움에 있어서 꼭 필요한 조치라고 하는데 어찌 필요 없다고 거절할 수가 있겠는가.
“자, 그럼 이야기를 들어봅시다. 앞으로 쭉 함께 있으면서 알게 되겠지만, 백천맹이나 지금 호남을 흔들고 있다는 혈천신교에 대해 기본적인 것은 어느 정도 알아두어야 하니까 말이오.”
목운교는 심각하게 물어오는 진 장주의 말에 자신이 아는 것들에 대해 설명해나갔다.
그리고 그날 이후로 목운교는 담씨 일가, 녹류산장의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목운교 자신이 왠지 길잡이로서가 아닌, 오히려 두 가문의 보호를 받고 있다는 괴상한 기분을 느껴야 했다는 것이다. 시종 그녀의 주변을 떠나지 않는 여무사들의 존재부터가 그녀에게 그런 느낌을 주었다.
하지만 그녀는 백천맹의 상부로부터 지시받은 명을 충실히 수행해야 했고, 그래서 의문과 이상한 느낌을 가슴에 감춰두고 길잡이로서 열심히 임무를 수행하면서 두 가문 사람들과 친분을 다져 나갔다.
* * *
하남성의 동북쪽 끄트머리 학벽(鶴壁).
산서, 하북, 산동을 삼면에 두고 있는 교묘한 위치에 자리하고 있어서 각 지역의 특색이 골고루 섞여 있는 곳이었다. 그리고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는 길목으로 삼는 곳이기도 했다.
“이제 좀 날씨가 풀려가는 거 같지?”
길고 넓게 펼쳐진 학벽의 평야 위로 작은 규모의 상단을 호위해가는 표사들 중 하나가 털모자 아래로 흐르는 땀을 닦아내며 말했다. 하지만 그 옆에 있던 표사는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을 하냐는 듯 가슴 쪽 옷깃을 더욱 꽉 오므리며 핀잔을 주었다.
“자네가 나보다 추위를 덜 타는 체질이라서 그래. 내가 볼 때는 이놈의 겨울이 다 가려면 아직 한 달은 더 있어야 할 걸세. 말끔히 씻겨 나가려면 그보다 보름은 더 지나야 하고. 지금도 칼날 같은 바람 때문에 얼굴이 다 얼얼할 정도야. 그리고 저 하늘을 봐. 어둑하게 구름이 낀 것이 큼직한 눈발이라도 펑펑 쏟아질 분위기잖아.”
“그런가? 난 이 털옷 때문에 오히려 덥기까지 한데.”
표사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하늘을 힐끔 쳐다보고 탄성을 질렀다.
“오~ 자네 말대로 진짜 눈이 오네.”
“거봐, 내가 날씨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맞추지.”
자신의 선견지명에 흡족한 표정을 짓는 표사는 어깨를 으쓱이며 우쭐해했다.
한데, 표사의 눈이 동그랗게 변하더니만, 어딘가 먼 곳을 바라보는 것처럼 가늘게 좁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