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계 17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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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486회 작성일소설 읽기 : 파계 175화
파계 7권 - 25화
그런데 문득, 천양표국의 일이 떠올랐다. 오칠이 자신이 보아도 대단한 실력을 가진 국주를 비롯하여, 스물이나 되는 철기단을 홀로 대적하여 패배시킨 일을 말이다. 그리고 아주 잠깐이었지만,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두려움과 공포, 압도되었다고 표현해도 전혀 부족하지 않을 그런 감정을 오칠에게서 느꼈던 것을 떠올렸다. 그때의 충격이 얼마나 강렬했으면 지금도 그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몸이 움츠러들고, 피부에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오 형님.”
초왕성은 오칠을 불렀다.
마음을 굳게 먹은 데다, 천양표국의 일을 떠올리니 어린 오칠에게 형님이라 부르는 것도 의외로 참을 만하고, 이상할 정도로 자연스럽게 나왔다.
“오냐.”
“…정체가 뭐요?”
“무슨 정체?”
“무공을 익혔으니 누구의 제자였을 거 아니오. 아니면 어떤 문파의 사람이든가.”
“아~ 그런 정체. 나 장문인이야. 무적정의파 장문인.”
“무적정의파…….”
초왕성은 유치하기 그지없는 그 문파명을 중얼거리며 잠시 머릿속을 뒤적거렸다.
“무한의 무적정의파 말이오?”
“그래. 들어봤냐?”
들어보았다.
몇 달 전, 사천을 지날 때에 언뜻 들었었다. 무한의 판도가 변했는데 그게 새로이 생긴 무적정의파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문파의 장문인은 매우 젊고 아름다운 사내라고 소문이 났다고 했다.
‘왠지 오칠이란 이름이 낯설지 않다 싶더니, 그 장문인의 이름이 오칠이었군. 이제야 기억나네.’
객잔에서 우연히 흘려들었던 이야기인지라, 천양표국에서 오칠의 이름을 듣고도 곧바로 기억해내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이런 젊은 나이에 무한 최대 문파의 수장에다가, 무공도 강하단 말이지.’
“내 이름은 못 들어봤소?”
“천부신군 초왕성 말이냐?”
초왕성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알고 있구려. 언제부터 알고 있었소?”
“처음 봤을 때부터. 네 겉모양만 보면 모를 수가 없지. 워낙 유명하니까 말이야.”
오칠의 담담한 대답에 초양성은 왠지 기운이 빠졌다.
자신의 이름과 명성이면 오칠을 주눅 들게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니 기운이 빠지는 것이다. 거기다 오칠도 만만치 않게 이름이 있는 자가 아닌가.
물론 자신의 명성에는 아직 부족하기는 하지만, 낭인과 다름없는 자신과 일파의 수장인 오칠의 질적인 비중도를 따진다면 딱하니 누가 낫다고 결론지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무한에 문파를 놔두고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요?”
“할 일이 있어서.”
“설마 무공 수행 중은 아닐 테고…….”
오칠이 웃었다.
“천양표국의 일을 두고 말하는 거냐?”
“…….”
“숨어서 구경했다는 거 알고 있어.”
역시.
그때 오칠의 시선이 초왕성이 은신하고 있던 곳을 향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럼 돌려서 물을 필요가 없구려. 왜 천양표국과 싸운 거요? 국주가 지고 나서 충성이니, 뭐니 하던데. 무림 정복이라도 할 생각이오?”
“알 거 없어.”
“그래도 알고 싶소.”
“지금은 알 필요 없어. 어차피 나중에 자연히 알게 될 테니까.”
“…….”
초왕성은 뭘 그리 비싸게 구냐는 듯 빤히 쳐다보았지만, 오칠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그러는 아우는 어딜 가는 거지?”
“…특별히 정한 곳은 없소. 그냥 바람 따라, 구름 따라 마음에 이끌리는 대로 떠돌아다니는 거요.”
“얽매이지 않은 삶이라… 좋은 거지.”
오칠의 중얼거림에 초왕성은 내심 코웃음 쳤다.
자신보다 젊은 오칠이 늙은이처럼 말을 하는 것이 우습기 그지없었다.
화르르― 지글지글―
“…….”
“…….”
오랜 여정 속에서 늘 두 사람과 함께하곤 했던 고요함이 다시금 주변을 휘어 감았다.
그러한 침묵과 대화 결핍은 두 사람에게 일상적이고, 익숙한 것이었기에 원래는 전혀 문제 될 이유가 없었다. 그건 내기로 인해 형님, 아우가 되었다고 해도 만찬가지였다.
그런데 지금 초왕성은 그러한 고요함이 힘겨웠다. 바로 눈앞에 있는 아직 다 익지 않은 멧돼지를 먹고 싶다는 욕망을 고요함과 침묵이 더욱 부채질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초왕성은 멧돼지에 대한 집중도를 떨어트리기 위해 오칠과 다시 대화를 나눠보기로 했다.
“일파의 수장이면 요즘 무림 정세에 대해 좀 아는 게 있는 거요?”
“대충은.”
“그럼 그 채주 녀석이 말한 것에 대한 건 아시오?”
“흑천맹에 관한 거?”
“그렇소.”
“아우는 모르나?”
“알면 묻겠소?”
“물어보는 태도가 불량하군.”
“…원래 나란 인간이 그렇소.”
“내 앞에서는 다른 인간이 돼봐.”
“오 형님은 아직 어려서 잘 모르겠지만, 이 나이가 되면 변화를 모색하는 것이 쉽지가 않소.”
오칠은 웃었다.
“나이 많아서 좋겠군.”
“과찬이시오. 그보다 흑천맹이 왜 사람을 모으고 있는지, 왜 갑자기 헛짓거리를 하려고 하는 건지, 아는 게 있으면 말 좀 해보시오.”
오칠은 어깨를 으쓱였다.
“간단해. 혈천신교 때문이지.”
“혈천신교?”
“못 들어봤나?”
초왕성은 고개를 내저었다.
사천에서의 생활 이후로 몇 달 동안 섬서의 태백산에 틀어박혀서 무공연마에 빠져 있었기에 그 사이의 일은 거의 알지 못했다. 이렇다 하게 큰 진전이 없어 산을 내려오고 나서는 곧바로 오칠과의 사건이 있었고, 그래서 쭉 오칠을 따라다니느라 강남 무림을 격동시키고 있는 혈천신교에 대해 알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새로 생긴 사교요?”
“뭐, 그렇게 볼 수 있지.”
“그런데 사교하고 흑천맹이 움직이려는 거하고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거요?”
“혈천신교는 호남 지역을 집중적으로 해서 정파 무림을 공격하고 있지. 흑천맹의 영향권인 안휘부터는 건드리지도 않고 있는 거야. 흑천맹이 이런 기회를 놓칠 수가 없잖아. 이김에 자신들의 영향권을 늘리려는 거지.”
“그런 거였군. 그런데 혈천신교가 그렇게 강한 놈들이요?”
“지금 호남의 절반 이상이 무너졌어. 한 달 정도 지나면 호남은 완전히 그들에게 넘어가게 될 거야. 그리고 다음으로 호북이 싸움에 휩쓸리게 되겠지.”
“흠, 그렇게 강한 놈들이란 말이지…….”
그렇게 막강한 힘을 가진 사교가 등장했다는 것에 초왕성은 흥미를 느꼈다.
무림에 큰 싸움이 생겼다는 것은 그와 같은 낭인들의 효용성이 커진다는 의미이기 때문이었다. 특히 사상적 대립으로 무림이 팽팽하게 분리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그로 인해 냉전의 평화가 지속되었던 만큼 이렇다 하게 시원스런 싸움을 할 수 없었던 초왕성에게는 매우 반길 일인 것이다.
‘아버지나 형님도 꽤나 골머리를 앓고 있겠군. 가만, 무적정의파가 호북 무한에 있는데 이 녀석은 왜 이리 태평하지?’
“그런데 그 혈천신교가 곧 호남을 먹고 호북을 노릴 것이라면, 무적정의파도 위험해지는 거 아니오?”
“아마도.”
“그런데 왜 그리 태평하시오?”
“무적정의파는 강하거든.”
“무적정의파가 뭐가 그리 강하오?”
“내가 장문인이잖아.”
초왕성은 참 대단한 자신감이라 생각하며 인상을 찡그렸다.
하지만 왜 오칠의 말이 그냥 우스갯소리로만 들리지 않는 것일까?
“그렇게 강하면 지금 수하들을 이끌고 강남에 내려가서 사교를 때려 부수지 그러시오? 그럼 당장에 무림 영웅으로 떠올라서 백천맹의 맹주까지도 될 수 있을 거요.”
“맹주라… 난 별로.”
“맹주가 하고 싶지 않단 말이오? 정파 무림인이라면 누구나 하고 싶다는 그걸? 이유가 뭐요?”
“내가 정파인이 아니니까.”
“무적정의파는 정파문을 지향한다고 들었는데? 그게 아니었소?”
“맞아, 무저정의파는 정파문이지. 하지만 난 아니야.”
“그럼 오 형님은 사파인이오?”
“아니.”
초왕성은 눈살을 찌푸렸다.
“나하고 장난하는 거요? 정파인도 아니고, 사파인도 아니면 그럼 뭐요?”
“난 나야.”
“…….”
초왕성은 더 이상 묻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대화가 길어질수록 화만 나고, 농락당하는 기분인데 계속 대화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오칠도 그런 초왕성의 마음과 부합했는지, 얼굴에 미소만 달고 있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돌고, 시간이 흘러갔다.
“다 익은 거 같네.”
기름기가 자르르 흘러내리는 멧돼지를 이리저리 살핀 오칠의 말에 초왕성은 재빨리 소도를 꺼내들었다.
참으로 지루하고, 힘겨웠던 인내의 시간이었기에 멧돼지를 향해 손을 뻗어가는 그의 움직임은 전광석화와 같았다. 하지만 그는 곧바로 동작을 멈춰야 했다.
“어허!”
멧돼지에 소도를 찔러 넣으려는 초왕성을 향해 오칠이 나무라는 시선을 보낸 것이다.
어디 형님도 손을 대지 않았는데 아우가 방정맞게 구느냐는 의미가 가득한 눈빛이었다. 초왕성은 배알이 꼬였지만 어쩔 수 없이 먼저 먹으라며 앞으로 뻗었던 소도를 뒤로 뺐다.
오칠은 짐 속에서 잘게 빻은 소금과 날카롭게 갈아진 비수를 꺼내들었다. 그리고 기름이 뚝뚝 떨어지는 멧돼지의 앞다리 뿌리 깊숙이 비수를 찔러서 뜯어냈다.
으적.
오칠은 소금을 뿌려놓은 멧돼지의 앞다리를 큼직하게 물어뜯었다.
꿀꺽.
초왕성은 입술에 기름을 잔뜩 묻히며 맛나게도 씹는 오칠을 부러운 듯 쳐다보았다.
“먹어라.”
입 안에 잔뜩 물고 있었던 고기를 기분 좋게 삼키며 오칠이 말했다.
초왕성은 저도 모르게 가득 고였던 침을 삼키고는 황급히 멧돼지의 뒷다리를 뜯어냈다. 그리고 지금껏 참았던 것을 보상이라도 받겠다는 듯 게걸스럽게 먹기 시작했다.
와구와구. 으적으적. 쩝쩝쩝쩝.
옅은 달빛을 등지고, 모닥불 하나에 의지하여 활기를 얻고 있는 숲 속의 한 귀퉁이. 그곳에서 두 사람은 인간 본연의 식성을 마음껏 뽐내며 조용한 주변의 숲 속을 그들만의 소음으로 채워나갔다.
* * *
‘설마.’
섬서성 소화산을 넘고, 포성(蒲城)을 지나, 산서성에 진입하고 하진(河津)에 이르렀을 때에도 초왕성은 그럴 리가 없다고만 생각해왔다. 하지만 오칠의 백설총이 산서성 길현(吉縣) 입구에 들어섰을 때에는 설마 설마 하던 것이 현실이 되었음을 인정해야만 했다.
“길현엔 왜 온 거요?”
“가볼 곳이 있어서.”
오칠은 간단하게 대답했고, 초왕성은 뭔가 짐작되는 것이 있어서 묵묵히 그 뒤를 따랐다.
“날 따라올 필요는 없어.”
오칠은 뒤로 힐끔 시선을 주고 네 갈 길 가라는 식으로 말했다.
하지만 초왕성은 대꾸 없이 그냥 계속 뒤를 따랐다. 오칠도 처음 한 번 말하고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길현초가…….’
오칠이 제법 번화한 길현의 중심을 벗어나 저 멀리 산자락 밑으로 보이는 장원을 향해 다가가는 걸 보고, 초왕성의 표정은 살짝 찌푸려졌다.
그는 장원의 이름이 길현초가(吉縣超家)임을 알고 있었다. 또한 산서의 패자이자, 정파제일의 규모를 자랑하는 십이비응방(十二飛鷹幇)의 한 가문임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왜 표정이 좋지 않은 걸까?
“장원을 찾아오셨습니까?”
장원 정문에 있던 경비무사들 중에서 나이도 많고, 가장 노련해 보이는 무사가 오칠을 보며 정중하게 물었다.
그 표정에는 다른 경계무사들의 얼굴에 지어진 것과 같이, 오칠처럼 아름답게 생긴 사내는 처음 보았다는 기색이 가득했다. 하지만 눈동자에 어린 경계하는 빛이 자신의 임무는 잊지 않았다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었다.
“가주를 찾아왔다.”
오칠의 당당하고, 어찌 들으면 건방지기까지 한 응대에 경비무사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하지만 오칠의 외모나, 목소리에 담긴 당당함 때문에 경비무사는 함부로 불쾌한 심정을 꺼낼 수가 없었다. 오칠은 그냥 척 보아도 뭔가 있어 보이는 방문객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객을 맞이하는 일반적인 순서대로 오칠의 신분과 가주와 약속이 되었는지에 대한 유무를 물어보기로 했다.
“……!”
그런데 갑자기 경비무사의 눈동자가 크게 뜨여졌다.
자신이 지금 보는 광경을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무사의 놀란 시선은 오칠이 아닌, 그의 뒤쪽을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오기 싫다는 듯 느릿하게 말을 몰아오고 있는 초왕성이 있었다. 경비무사는 초왕성이 천부신군 초왕성임을 단번에 알아보고 놀란 것일까?
하지만 경비무사의 이유를 알 수 없는 놀람 가득한 반응뿐만 아니라, 초왕성의 태도 역시 이상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요 며칠 들어서 거의 꽁지에 바짝 붙은 상태로 오칠의 뒤를 따르던 초왕성이었는데, 지금은 석 장여의 거리를 둔 채로 말을 멈춰 세우고, 그 이상 다가오질 않는 것이다. 더구나 경비무사의 놀란 눈을 보고는 얼굴을 돌려 시선을 외면하기까지 했다.
“왜 그러십니까?”
다른 경비무사들이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하지만 경비무사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대신 시선을 외면하는 초왕성을 보며 더욱 확신이 들었다는 듯 앞으로 몇 걸음 다가왔다. 그리고 놀람과 반가운 감정이 가득한 음성으로 소리쳤다.
“작은 공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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