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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계 171화

무료소설 파계: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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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읽기 : 파계 171화

파계 7권 - 21화

 

 

 

 

 

만약 야만족들에게 습지를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어찌할 것인가, 야만족들이 주축이라고는 해도 결코 적지 않은 숫자인 혈천신교의 강력한 무사들은 또 어찌 상대할 것인가. 최악의 가정으로 혈천신교가 이곳을 그냥 지나쳐서 거의 지킬 사람이 없는 문파들을 초토화시킨 뒤에, 정파인들이 다급히 돌아오기를 기다렸다가 급습을 한다면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그 외에도 많은 경우를 생각해볼 수 있었다. 하지만 이곳에 있는 이들 중 그러한 생각을 하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기는 있을까?

 

‘없는 것 같군.’

 

자신밖에 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해 못하는 것도 아니었다. 노백 자신은 무장 출신이었다. 필수적으로 병법을 공부해야 했고, 이 년 정도 국경 지역에서 실전 경험도 쌓았기에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무림인들이 언제 병법을 공부할 기회가 있었겠는가. 그들에겐 그럴 이유가 없었다. 대규모의 싸움을 겪어보았자 백 명 안팎 정도의 수준인데, 전술 같은 것이 필요할 리가 없었다. 그런 싸움에는 당연히 개개인의 실력이 우선시 된다. 한 명의 고수가 싸움의 승패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따져보면 이 정도의 계획을 세운 것만 해도 칭찬해줄 만한 일이었다.

 

‘내 말은 들어주지 않겠지?’

 

노백은 자신의 생각을 수장들에게 설명할까, 하는 생각을 했지만 헛고생이 될 것임을 알기에 생각을 접었다.

 

우선 노백 자신의 정체와 과거를 설명해야 하고, 그 외에도 그들에게 믿음을 심어줄 수 있는 부가 설명까지 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의 비위를 상하게 할 수 있는 혈천신교의 장점을 장황하게 늘어놓고, 그들이 세운 계획이 어떠한 문제점을 가지고 있는지 열거해야 할 것이다. 그런 모든 절차를 거친 뒤에도 수장들이 노백의 말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게 될까?

 

절대 아닐 것이다. 무림인의 자존심과 편협한 우월감은 이전에 그가 지레 짐작하고 있던 것보다 훨씬 크다는 걸 노백은 오칠과 함께 있으면서 잘 알게 되었다.

 

특히 자신이 가면을 쓰고 있는 걸 마땅찮게 보고 있는 저 정파문의 수장들이라면 더욱 그럴 것이었다. 그가 녹명원을 구한 생명의 은인이고, 무적정의파 장문인의 의형제라는 설명을 녹선향에게서 들었다고 해도 말이다.

 

“그런데 정말 말해주지 않으실 건가요?”

 

“……?”

 

“오 장문인께서 왜 노 대협을 이곳으로 보냈는지 말이에요.”

 

노백은 가면 속에서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녹선향은 지금 노백이 여기까지 온 이유에 대한 추가적인 설명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노백이 두 시진 전에 이들 연합 무리를 찾아와서 해준 말이라고는 의형인 무적정의파의 장문인에게 호남의 상황을 살피라는 명을 받았다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짧은 설명을 듣고 수장들은 당연히 실망하는 기색이었고, 또 다른 설명을 기대했지만 노백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 녹선향이 다시 묻고 있는 것이다.

 

“이전에 말한 그대로요. 형님께선 직접 이곳에 와서 호남의 상황을 살피고 있으라고 했소이다.”

 

“상황을 살핀 뒤에 돌아오라고 하지 않고, 계속 살피고 있으라고 했단 말이에요?”

 

녹선향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어느 누가 위험한 곳에 아우를 보내면서 다시 돌아오라고 하지 않고, 부를 때까지 위험한 곳에 남아 있으라고 한단 말인가. 그것도 그를 보필할 수 있는 호위들을 같이 보낸 것도 아닌데 말이다.

 

‘노 대협의 무공이 높긴 하지만…….’

 

녹선향도 노백이 매우 강하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상한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물론 그녀 입장에서는 매우 반길 일이었다. 노백과 같은 고수가 힘을 보태주는 것이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얼마나 큰 도움이 되겠는가.

 

게다가 노백과 아직 못다 한 이야기들도 많은데, 갑작스럽게 헤어져서 아쉬웠던 그녀로서는 더욱 기분 좋은 일이었다. 그래서 녹선향의 얼굴에는 저도 모르게 밝은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누군가 깊게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곁에 있다는 것만큼 마음을 안정시키는 것은 없으니까 말이다.

 

‘당신의 그런 밝은 미소가 보고 싶었소.’

 

노백은 녹선향의 웃는 얼굴을 보며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그는 실제로 녹선향에게나, 다른 수장들에게나 감추고 있는 것이 없었다. 그는 진짜로 호남을 살피고 있으라는 오칠의 명을 받고 온 것이니까. 다만, 오칠이 그런 지시를 내린 것은 녹선향 때문이었다.

 

오칠이 우선 혈천신교를 주시하고 있겠다는 결정을 내리고 나서 얼마 뒤에, 천목보 보주가 보고한 백천맹의 움직임에는 열혈군의 후기지수들에 대한 것도 있었다. 혈천신교의 공격 방향이 호남에 거의 집중되어서, 호남에 사문이 있는 몇몇 후기지수들이 백천맹을 떠나 사문으로 돌아갔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그 몇몇 후기지수들 중에는 녹명원을 백천맹에 남겨둔 녹선향도 있었다.

 

그 소식을 접한 노백은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리고 그런 마음을 오칠이 눈치 챈 것이다. 그래서 자신은 다른 할 일이 있으니, 노백에게는 호남의 정세를 살피라는 명을 내렸다. 녹선향이 있는 만화곡과 행동을 같이하면서 살피라는 명이었다.

 

노백은 싱글거리는 오칠의 얼굴만 봐도 그가 그의 내심을 꿰뚫어 보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오칠의 명을 거부하지 않았다. 처음엔 이게 무슨 낯부끄러운 연정인가, 하고 감추려고 했지만 녹선향과 떨어지고 나서 그녀를 너무나 많이 좋아하고 있다는 걸 깨달은 노백은 더 이상 자신의 감정을 감추지 않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그래, 난 녹 소저의 안전이 염려되어 이곳에 왔다. 그렇다면 전술적 위험스런 요소로 인해 녹 소저에게 위해가 갈 수도 있는데, 저들이 들어주지 않을 것이라고 해서 그냥 모른 척해서는 안 되는 일이지.’

 

노백은 그가 염려하는 것들에 대해 녹선향에게 말하기로 했다.

 

“녹 소저.”

 

“예. 말씀하세요.”

 

“자세하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난 과거에 우연한 기회로 병법을 공부한 적이 있소이다. 그래서 지금 이곳에 진을 치고, 적들을 유인한다는 계획에 대해서 약간의 우려를 금할 수가 없소.”

 

노백은 이곳 지형에서 자신들에게 이점이 있다고는 하지만, 적들 역시 어떤 대안을 갖고 공격할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외에도 혈천신교의 고강한 무공을 익힌 무사들, 또한 적들이 이곳에 오지 않았을 상황에 대한 경우 등등의 것들을 말해주었다.

 

“물론 모든 것은 가정에 불과하오. 그러나 대규모 싸움에선 승리에 대한 것들만이 아니라, 계획이 틀어졌을 때에 그에 대처할 수 있는 경우들까지 세워야 한다고 생각하오. 지금처럼 너무 성급하게 승리를 확신하게 되면, 도리어 불의의 사태에 직면하게 됐을 때에는 당황으로 인해서 냉철한 대응이 어렵게 될 것이오.”

 

녹선향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노백의 말을 잘 들었다는 의미이지, 그의 말에 찬동한다는 것은 아니었다. 사실 그녀 역시 다른 문파의 수장들과 똑같이 이번 싸움이 자신들에게 절대로 유리하다고 믿고 있었다. 그리고 노백의 설명을 듣고도 그러한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그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고, 혹시나 생길 문제에 대해서 미리 대비하자는데 반대할 이유도 없는 것이다.

 

“노 대협의 말씀은 잘 알겠어요. 제가 가서 곡주님과 다른 문주님들에게 노 대협의 말씀을 전해드릴게요.”

 

녹선향은 빙긋이 웃으며 수장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노백은 전혀 기대하지 않는 눈길로 녹선향의 뒷모습과 가끔 자신을 향해 시선을 주는 수장들을 담담하게 바라보았다.

 

 

 

 

 

* * *

 

 

 

 

 

태산지옥대(太山地獄隊)의 태산여왕(太山女王) 냉음설은 기우뚱거리는 말의 움직임에 색기가 가득한 눈동자를 가늘게 찌푸렸다. 말은 한 걸음 한 걸음 잘 움직이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매우 지쳐 있는지 주둥이를 푸르륵거리며 거품까지 물면서 거칠고 더운 숨을 내뱉고 있었다.

 

‘땅이 너무 질척해서 말을 타기도 힘들겠어.’

 

호남 정파 무림인들의 움직임을 포착하여 류양으로 방향을 잡았는데, 이곳의 땅은 이동하는 데 너무 불편한 지형으로 가득했다.

 

거기다 정파 무림인들은 다리가 푹푹 빠지는 습지 안쪽에 진을 치고 있다고 하질 않는가. 냉음설은 이곳, 호남이 차라리 강북처럼 기온이 낮아서 지금과 같은 겨울엔 습지가 딱딱하게 얼어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건 바람일 뿐이고, 겨울에도 가을 날씨와 다름없는 호남에서 물이 얼기를 바라는 건 바보 같은 생각이었다.

 

‘짜증 나!’

 

여러 가지로 기분이 좋지 않았다.

 

츠바사와 함께 있을 수 없는 것도 짜증 나고, 이런 습지에 틀어박혀 빤히 속내가 보이는 계략을 세운 정파인들을 상대하는 것도 짜증 났다. 그리고 가장 짜증 나는 건 속이 울렁거릴 정도로 고약한 냄새가 바로 옆에서 나고 있다는 것이었다.

 

“헤헤헤! 태산여왕, 이리로 올라와. 저렇게 물컹한 땅으로는 말을 타고 갈 수 없다니까. 태산여왕이 눕고도 남을 자리가 있는데 왜 괜한 고생을 하는가.”

 

야들야들한 목소리.

 

언뜻 듣기에는 소심하고 성정이 여린 젊은 남성의 목소리 같지만, 목소리의 주인은 나이가 칠십이 넘은 백발의 노인이었다.

 

묘방등.

 

아리따운 여덟 명의 여인이 짊어진, 지붕 달린 넓고 커다란 교자(轎子)에 느긋하게 앉아 있는 사람이 태산지옥대의 조력자로서 함께 있는 육 장로 묘방등이었다.

 

그는 천욕대염공(天慾大炎功)이라 하는 음기를 기반으로 하는 마공을 익혔고, 색을 광적으로 밝히는 자였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오래전부터 냉음설을 노리고 있었다.

 

하나, 냉음설은 묘방등과 교합(交合)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정조를 지켜야 한다는 이유 때문은 절대 아니었고, 묘방등이 익힌 천욕대염공이 그녀의 기운을 빼앗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천욕대염공은 성취가 높을수록 매우 고약한 냄새를 몸에서 풍기게 된다. 물론 대부분의 여인들에게는 매혹적인 향기가 되겠지만, 냉음설에겐 세상에 다시없을 악취였다. 그런 냄새 나는 노인네랑 몸을 비빈다는 생각만 해도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그리고…….’

 

지금의 냉음설에겐 다른 어떤 남자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묘방동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젊고 미남인 사내가 눈앞에서 유혹한다고 해도 그녀는 눈도 깜빡이지 않을 것이었다.

 

왜?

 

츠바사.

 

냉음설의 모든 생각과 열정은 오직 츠바사란 사내에게만 향하고 있었다. 지금껏 그처럼 부드럽게 그녀를 안아준 사내는 없었다. 모든 사내들은 욕망이란 힘으로 그녀를 거칠게 내리누르려고 했지만, 츠바사는 달랐다. 그는 그녀를 아주 소중하게 다루어주었고, 달콤한 말로 그녀를 배려하며 남녀의 관계란 것이 어떻게 이어져야 하는지도 깨닫게 해주었다.

 

‘조선의 남자들은 모두가 그와 같을까?’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츠바사의 존재는 이제 단순히 육체적 관계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녀의 다른 반쪽이었다. 한시도 머릿속에서 지울 수 없는, 지금도 그의 존재감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완벽한 영혼의 동체(同體)였다.

 

“정지!”

 

냉음설은 갑자기 무리의 이동을 멈추게 했다.

 

옆에서 계속 치근덕거리는 육 장로가 짜증나기도 했지만, 서둘러 호남을 뚫고 나가 츠바사를 만나야 한다는 생각에, 그의 품에 안기고 싶다는 생각에, 그와 얘기 하고 싶다는 생각에 이곳에 있는 정파인들을 상대할 방법을 생각해낸 것이다.

 

“왜 그래, 태산여왕?”

 

육 장로가 의아하여 물었지만, 냉음설은 못 들은 척 무시했다.

 

“술사!”

 

무리의 뒤쪽에 있던 술사들 중 하나가 냉음설의 옆으로 달려왔다.

 

“새로 입교한 사람들까지 해서 모두 몇 명이지?”

 

“칠백 명이 조금 넘습니다.”

 

피풍의를 머리까지 뒤집어쓴 술사는 어둡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대답했다.

 

“충분하군. 그들에게 짚과 나무를 가득 구하게 해서 앞에 세워.”

 

“그들을 어떻게 쓰실 생각이십니까?”

 

술사는 인간을 마치 도구처럼 지칭했다.

 

하지만 술사의 그런 표현은 너무도 자연스러웠고, 냉음설도 달리 문제 삼지 않았다.

 

“이 질척한 땅에 짚과 나무를 깔아서 이동하기 좋게 만든다. 그리고 그들 모두에게 금령단을 먹인 뒤에 정파인들을 공격하게 할 거다. 그 정도만 해도 놈들은 당황하겠지. 대협이니, 뭐니 하며 거들먹거리는 자들이니까 말이야.”

 

“알겠습니다.”

 

술사는 그 정도 설명이면 충분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습지에선 짚과 나무를 구하기가 매우 힘들다는 걸 알면서도, 적과 조우할 때까지 습지에 깔 수 있을 정도의 많은 양을 구하기는 더욱 힘들다는 걸 알면서도 그에 대한 어려움과 난감함을 주장하지 않는 것이다.

 

어차피 일은 그가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일까?

 

물론 그런 이유도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는 광신에 빠진 사람들은 믿음의 힘으로 그 어떤 일도 해낼 수 있다는 걸 술사가 알기 때문에 반박하지 않은 것이다.

 

어쨌든 술사는 태산지옥대(太山地獄隊)의 무사들과 도시지옥대(都市地獄隊)란 이름을 받은 흘료족(??族) 전사들 뒤에 가지각색의 옷차림을 하고 있는 칠백여 명의 사람들이 운집한 곳으로 돌아갔다.

 

그들은 혈천신교가 치유의 힘을 가졌다는 말을 듣고 찾아온 병자들이었고, 지금은 광적일 정도로 혈천신교를 믿고 있는 열혈 교인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곧 냉음설의 지시를 받은 술사의 명에 따라 짚과 나무를 구하기 위해 사방으로 흩어졌다. 술사의 예상대로 그들은 조금의 의심도 하지 않고, 믿음에 따라 움직인 것이다.

 

“통역.”

 

냉음설은 흘료족과의 의사소통을 책임지는 무사를 불렀다.

 

“도시대왕은 이 습지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지?”

 

“그들에게 이런 습지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답니다. 흘료족의 터전은 이보다 더한 곳이 많고, 그들의 전사들은 깊이 빠지는 땅을 피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합니다.”

 

냉음설은 저쪽에서 입을 꾹 다물고 있는, 키가 큰 흘료족의 족장을 만족스런 시선으로 바라봤다.

 

빠지는 땅을 피할 수 있는 능력뿐만 아니라, 흘료족은 기이할 정도로 다리가 길어서 경신법을 펼친 것만큼 걸음이 빨랐기 때문에 웬만한 깊이의 습지 정도는 우습게 뛰어다닐 수 있을 것이었다.

 

“…….”

 

냉음설이 시선을 보내면서 잘 부탁한다는 듯 고개를 숙여 보이자, 족장도 마주 고개를 끄덕였다.

 

냉음설 정도의 색기 가득한 미인이 시선을 주면 아무리 무뚝뚝한 사내라고 해도 살짝 웃음이라도 지을 법한데, 족장의 얼굴은 아무런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냉음설은 그런 딱딱한 반응에 기분 나빠하지 않았다. 흘료족은 침묵이 미덕이기 때문에 거의 말이 없다. 그래서 보통 때도 손짓으로 대부분의 의사를 전달한다고 한다. 그러니 족장인 그가 고개를 끄덕인 것은 충분히 예의를 갖춰 대꾸한 것이라 할 수 있었다.

 

“태산여왕, 날 너무 무시하는 거 아닌가.”

 

땅 위에 내려서서 장강 어딘가에 있을 츠바사를 상상하고 있던 냉음설은 차갑게 가라앉은 육 장로의 음성을 듣고는 그에게 고개를 돌렸다.

 

‘이 노인네의 비위를 상하게 해서 좋을 것이 없지.’

 

색이나 밝히고, 냄새가 고약한 늙은이였지만, 그의 무공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물론 그의 무공이 무섭다는 것이 아니라, 적과 싸우는 데 아주 효용성 있는 인간이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잘 구슬려서 열심히 싸우게 한다면 보다 빨리 호남을 제압하고 츠바사를 볼 수 있지 않겠는가.

 

냉음설은 육 장로가 타고 있는 교자에 가까이 다가갔다.

 

“육 장로님, 저야말로 섭섭하네요. 그 말씀은 저를 못 믿겠다는 것이 아닌가요?”

 

냉음설은 새침하게 눈을 뜨고, 짐짓 마음이 상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요 귀여운 것 같으니라고!’

 

누구라도 눈이 돌아갈 미모에, 천성적으로 색기가 강하고, 거기다 저런 표정까지 지으며 바라보니 육 장로의 하초는 저도 모르게 불끈 일어섰다.

 

“허허! 누가 누구를 못 믿는다는 게야. 난 다만 태산여왕이 내 말을 듣지도 않는 것 같으니까…….”

 

“아니에요! 제가 어찌 육 장로님의 말씀을 듣지 않겠어요. 전 다만, 교주님의 명을 빈틈없이 수행하기 위해 그쪽으로 정신이 빠져 있었던 거예요.”

 

냉음설은 너무나 정신이 없어 가슴이 다 가쁘다는 듯, 그녀 자신의 가슴을 가늘고 긴 두 손으로 살포시 쥐어 잡았다.

 

엄청나게 크지는 않지만 사내의 마음을 들끓게 만들 정도의 풍만한 가슴이 냉음설의 손가락 틈에서 팽팽하게 뒤틀리고, 그걸 보는 육 장로의 심장은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것처럼 쿵쾅거렸다.

 

냉음설은 그녀의 붉은 입술을 혀로 핥으며 살며시 한숨을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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