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계 16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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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512회 작성일소설 읽기 : 파계 167화
파계 7권 - 17화
따가울 정도로 차갑던 새벽 기운이 불꽃을 잃은 모닥불과 함께 사라져갔다.
‘일장춘몽(一場春夢)이라 했던가?’
초왕성은 잘 쓰지도 않는 어려운 문구를 떠올렸다.
한바탕 봄꿈처럼 헛된 영화(榮華)를 일장춘몽이라 한다. 초왕성은 어젯밤이 바로 그런 헛된 봄꿈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리 영화롭지는 않았지만, 허기졌던 배를 따뜻하게 채웠다는 것만 해도 그에겐 너무나 큰 행복이었으니까. 그리고 그의 바로 코앞에서 조금의 거리낌도 없이 혼자서 아침 식사를 하고 있는 오칠을 보며 그 일장춘몽이라는 말을 다시금 떠올렸다.
빠드득.
절로 이가 갈렸다.
도대체 어제는 왜 오미죽을 준 것인가?
그에게 설거지를 시키고 불침번을 서게 했지만, 어쨌든 오칠이 화해의 손길을 내밀었다고 초왕성은 믿었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자신을 진정시키지 않았다면, 어젯밤에 인내의 한계에 부딪쳐서 자고 있는 오칠의 얼굴에 양날 도끼를 내리치고 말았을 테니까 말이다. 그런데 지금은 어제의 일 같은 것은 조금도 기억하지 못하겠다는 듯 혼자서 야금야금, 냠냠, 꾸역꾸역 잘도 처먹어대고 있었다.
사실, 오칠은 그렇게 추잡한 소리를 내며 먹고 있지 않았지만 초왕성에게는 오칠의 모습이 딱 그렇게 보였다.
꿀꺽.
하지만 그런 분노의 마음과는 달리 초왕성은 저도 모르게 군침을 삼켰다.
한 번 허기짐이 해소되자 위장은 금세 먹는 것에 익숙해져버렸고, 몸과 마음은 전날까지 그를 꿋꿋하게 지탱해주던 인내와 자존심을 너무도 쉽게 외면해버린 것이다.
“험, 속이 출출하군. 내 이번 여행 준비를 하는 데 착각한 것이 있어서 식량을 넉넉하게 준비하지 못했거든. 내가 나중에 갚을 테니까 좀 나눠줘.”
이전까지의 자존심 강한 초왕성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런 구구한 변명을 늘어놓는 초왕성이 매우 낯설다는 듯 오칠은 식사를 멈추고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하지만 곧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초 형께 그런 사정이 있었으면 진작 말하시지 그랬소. 자, 같이 드십시다.”
참으로 능글맞은 행태가 아닐 수 없었다.
초왕성은 오칠의 저 번드르르한 입을 쫙 찢어버리면 좋겠다는 생각과 함께, 순순히 승낙한 오칠에게 왠지 고마운 마음이 드는 이중적인 심리 상태에 내심 당혹스럽기까지 했다. 하지만 역시 그런 고민은 이차적인 문제였고, 초왕성은 곧 허기를 채우는 것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설거지는 내가 하지.”
아침 식사를 끝낸 뒤에 초왕성은 손수 냄비 등의 식기를 집어 들었다.
분명히 오칠이 설거지를 하라고 시킬 것이니, 그냥 스스로 하겠다고 하는 것이 덜 자존심 상하는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역시나 오칠은 그런 초왕성을 말리지 않았다. 응당 그래야 한다는 듯 자신의 짐을 정리하다가 초왕성이 냄비 등의 식기를 씻어오자, 그걸 짐에 넣고는 그대로 출발해버리는 것이다. 아직 짐을 추스르지도 않아서 출발 준비가 되지 않은 초왕성이 자신과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듯이 말이다.
‘역시 저 자식은…….’
오칠은 초왕성을 여행의 동료로 받아들인 것이 아니었다.
화해의 손길을 내밀었다는 등등의 생각은 어처구니없는 착각에 불과했다. 하지만 어쨌든 다시 이동은 시작되었고, 초왕성은 서둘러 짐을 챙겨서 오칠의 뒤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그래도 하룻밤 새에 뭔가 미묘한 변화가 있기는 있었던 모양이다. 십여 장이나 벌어진 채 이동하던 지금까지와 달리 두 사람의 거리 간격은 한두 장 정도 더 가까워져 있었다. 뭐, 평야보다 조금은 험한 산길이라는 것이 말의 움직임에 약간의 영향을 주어서 그랬는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 * *
소화산(小華山).
말 그대로 작은 화산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화산이란 구대문파 중 하나인 화산파가 오랜 시간 근거지로 삼고 있는, 오악(五岳) 중 서악(西岳)이라 불리는 그 명산(名山)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즉, 화산에 비해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긴 하지만 크고, 길고, 넓은 산이 바로 소화산이라는 말이었다.
그래서 오칠과 초왕성은 벌써 이틀이나 이곳 소화산의 줄기를 타고 이동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동안 초왕성은 오칠에게 밥을 얻어먹으면서 모닥불을 피우고, 설거지를 하고, 잠자리를 마련하고, 짐을 챙기는 등등의 잡일을 도맡아 했다. 그 스스로는 절대 인정하고 있지는 않지만, 한마디로 주인을 모시는 몸종 노릇을 한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하지만 처음엔 오칠이 시켜서 했던 것을, 이후로 초왕성 자신이 스스로 하겠다고 나서서 한 것이기 때문에 초왕성은 오칠을 원망할 수도 없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초왕성의 입장에서는 참으로 굴욕적이고, 모멸스러운 상황일 수 있는데도, 초왕성이 점점 이러한 관계에 익숙해져버렸다는 것이었다. 오칠은 식량을 공급하고, 초왕성은 그 외의 기타 잡다한 일을 하는 그러한 관계를 말이다.
누군가 말하길, 맹수는 한 번 길들여지면 그 환경에 익숙해져서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고 했던가?
초왕성의 모습이 딱 그것이었다. 현재로서는 다른 길이 없는 환경에서 잡일을 하고, 배를 채우는 것이 최선이라고 초왕성은 스스로를 설득해버린 것이다. 아니, 쭉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었다. 소화산을 넘을 때까지만, 마을에서 식량을 구할 때까지만 참자고 말이다.
그런데 우습게도 그렇게 최면을 걸다 보니, 왜 오칠의 뒤를 따라가게 되었는가에 대한 이유까지도 망각하고 말았다. 그래서 같이 밥을 먹으면서도 오칠에게 궁금했던 것을 물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사실, 초왕성은 생각이란 것을 거의 하지 않고 있었다. 생각이 많아지면 꾹꾹 눌러두었던 모멸감이 치솟을까 싶어 자제하고 있었던 것이다
“설거지 끝났다.”
초왕성은 그 큼직하고 투박한 손으로 깨끗이 씻어낸 식기를 오칠에게 건네준 뒤, 자연스럽게 자신의 짐을 챙기고, 먼저 출발하여 다섯 장 거리 앞에서 말을 몰고 있는 오칠의 뒤를 따라 움직였다.
이제 두 사람 간의 간격은 딱 다섯 장이었다. 처음엔 십여 장의 거리였던 것이, 초왕성이 조금만 속도를 높이면 나란히 달릴 수 있는 거리까지 줄어든 것이다. 오칠 또한 이전처럼 갑자기 속도를 높이지도 않고, 그냥 걷는 것과 같은 속도로 말을 몰았다.
물론, 그 이상은 아무것도 없었다. 대화도 없고, 웃음도 없고, 그냥 거리만 유지한 채 하염없이 소화산을 넘어가고 있을 뿐이었다.
실상 수일 동안 이렇게 조용하고, 무료한 일상이 반복되면 누구 한 사람이 대화의 물꼬를 틀 만도 한데, 두 사람은 지금의 고요함이 만족스럽다는 듯 입도 뻥긋하지 않고 이동만 하고 있는 것이다.
‘응?’
말의 흔들거림에 몸을 맡기며 그냥 무의미한 시선으로 앞을 빤히 바라보고 있던 초왕성은, 저 앞으로 보이는 수십 명의 무리를 발견하고는 의아해했다.
‘저거 산적들 같은데?’
오십 명은 그냥 넘을 것 같은 규모의 무리였다.
그리고 뒷모습만 봐도 산적들이란 걸 알 수 있는 몰골들이었다. 그들이 산적이라고 쓴 커다란 깃발을 들고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옷차림이나 들고 있는 투박하고 무식한 모양의 무기들만 보아도 충분히 알아챌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이른 아침에 웬 산적들이란 말인가?
그것도 숲에 숨어서 강탈할 손님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어딘가를 향해 이동하는, 몰래 가는 것이 아닌 훤하게 뚫린 산길을 따라 이동하고 있는 것이었다.
‘뭐, 내가 상관할 일은 아니지.’
초왕성은 곧 관심을 접었다.
이틀 동안 먹고, 자고, 이동하는 반복적인 단순 생활을 하다 보니 평소의 호기심도 줄어든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무는 가만히 있으려 해도 바람이 가만 놔두지 않는 것이 세상인심이었다. 오칠과 초왕성은 그냥 산적들을 무심히 지나쳐 가려 했지만, 산적들이 그들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여자 아냐?”
“척 보아도 옷차림이 아니지 않습니까, 채주님.”
“에이~ 세상이 하도 험하고, 무서우니까 남장을 하고 다닐 수도 있는 일이지!”
오칠의 백설총이 중앙을 가로질러 오면서 좌우로 물러나 피하던 산적들의 이목이 그에게 집중되었다.
그리고 자기들끼리는 들리지 않게 소곤거린다고 하지만, 초왕성과 같은 고수에게는 바로 코앞에서 말하는 것처럼 선명하게 들렸다.
“그런가요? 그러고 보니 사내 녀석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얼굴이긴 합니다.”
“그렇지? 음… 이김에 한탕 할까?”
“그럴까요? 척 보니 말과 옷이 돈 좀 될 것 같습니다. 품속에도 돈이 될 만한 것이 많아 보이고요. 저 뒤쪽에 있는 놈이 힘깨나 쓰는 것처럼 보이긴 하지만, 우리 정도의 숫자면 충분히 제압할 수 있을 겁니다. 사실, 요 근래에 우리의 본업을 너무 외면하고 있었어요. 그러니 속 시원하게 털고 기분을 푸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간만에 피를 보면 수하 녀석들의 풀어졌던 기강도 바로 세울 수 있을 거고 말입니다.”
“말 한번 잘했다. 하지만 털기 전에 우선 저 요사스럽게 예쁜 녀석이 사내인지, 계집인지부터 알아보자.”
“헤~ 옷이라도 벗겨볼까요?”
당연하게도 오칠의 여자처럼 아름다운 외모가 문제가 되고 있었다.
산적들 중에는 뭔 상상을 하는지 헤벌쭉한 얼굴로 오칠을 바라보는 자들도 있었다.
‘하여튼 얼굴 반반한 것들은 어디서든 분란을 일으킨다니까!’
초왕성은 산적들이 숙덕이는 소리를 들으며 내심 혀를 찼다.
보통 남자들을 충동질하여 소란을 일으키는 원흉은 여자들이었지만, 어쨌든 이제 곧 산적들이 오칠에게 어떤 수작을 걸 것인지 초왕성은 대충 짐작할 수가 있었다.
“어이, 거기 멈춰.”
가장 앞장서서 가고 있던 채주라 짐작되는 커다란 체구의 사내가 오칠이 향하는 길을 막아서며 소리쳤다.
하지만 오칠은 말을 멈춰 세우지 않았다. 마치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는 듯 앞으로 계속 말을 몰았다.
“어~ 어~!”
채주는 이거 뭐야, 하는 얼굴로 뒷걸음질 쳤다.
하지만 곧 사태를 파악하고, 분노를 터트리면서 등에 메고 있던 커다란 구환도(九環刀)를 뽑아들었다. 어디서 구했는지 제법 잘 만들어진 구환도였고, 아홉 구멍에 걸려 있는 아홉 개의 환이 듣기 좋은 소리를 내며 찰랑거렸다.
“안 멈추면 말과 함께 두 쪽으로 잘라버리겠다!”
채주는 살벌한 음성으로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오칠은 말을 세웠다. 하지만 채주에게 대꾸하는 말을 들어보면 절대 겁을 먹고 멈춘 것은 아니었다.
“너야말로 안 비키면 죽는다.”
“뭐? 이 개자식이! 아니지, 저놈이 아직 여자인지, 남자인지도 모르잖아.”
“채주님, 목소리로 봐서는 아무래도 남자 같습니다.”
채주의 측근인 산적이 실망스럽다는 얼굴로 말했다.
“그래? 그럼 반드시 죽여야지. 난 저렇게 예쁘게 생긴 여자는 좋아해도, 사내새끼는 진짜 싫어하거든.”
채주는 오칠이 여자가 아니라는 사실에 더욱 크게 분노한 모양이었다.
‘이거 웃어야 하나, 울어야 하나?’
초왕성은 채주와 자신이 공통점을 갖고 있다는 것에 기묘한 기분을 느꼈지만, 그것보다 문제는 오칠이 그를 불렀다는 것이었다.
“초 형, 쓰레기들이 길을 막고 있으니 좀 치우시오.”
“…….”
이건 말 그대로 명령이었다.
하지만 머리는 그 말에 거부감을 느끼면서도, 몸은 말을 움직여서 앞으로 가고 있다는 것에 초왕성은 쓴웃음을 지었다.
“얘들아, 좋은 말로 할 때 그냥 비켜라.”
초왕성은 그냥 오늘은 운이 없었다고 생각하라며 다독이기까지 했다.
그런데 산적들의 반응은 초왕성의 배려를 완전히 배신하는 것이었다. 채주가 마구 내뱉는 듣기 거북한 욕지거리를 시작으로 오십여 명의 산적들이 일제히 무기를 꺼내들고, 채주에게 뒤지지 않는 수준의 욕지거리를 마구 퍼부었던 것이다.
“죽기 싫으면 말에서 내리고, 가진 거 하나도 빼놓지 말고 다 바닥에 내려놓은 뒤에, 땅에 대가리 박고 엎드려 있어!”
그래도 채주라고 수하들이 하염없이 쏟아낼 것 같은 욕지거리를 막은 뒤에, 제법 일목요연하게 요구 사항을 나열했다.
하지만 오칠이나, 초왕성은 채주의 그런 요구에 응할 사람이 아니었다.
“이것들이 좋게 말로 할 때 들어먹지!”
초왕성은 말 등을 차고 그대로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그리고는 어느새 등에서 뽑아든 두 개의 양날 도끼를 휘두르며 채주의 앞으로 떨어져 내렸다.
“어라?”
채주는 십여 명의 수하들을 단번에 뛰어넘어 공중을 날아오는 초왕성을 보고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저게 인간으로서 가능한 도약이야? 하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곧 사태를 파악하고, 구환도를 마구 휘두르며 뒤로 물러났다.
쩌정― 쩡쩡쩡―
마구 휘둘러지는 구환도와 양날 도끼가 무겁게 격돌하고, 채주는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해 뒤로 밀려나다가 벌러덩 쓰러졌다.
“죽여!”
채주는 쓰러지면서 수하들에게 소리쳤다.
멍하니 있던 산적들은 그제야 와~ 하며 초왕성에게 달려들었다.
“이것들이―!”
초왕성의 관자놀이에 굵직한 핏줄이 불끈 일어섰다.
그리고 그의 두꺼운 양팔이 좌우에서 덤벼드는 산적들을 맞아 풍차처럼 휘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