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계 20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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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536회 작성일소설 읽기 : 파계 202화
파계 9권 - 2화
쏴아아.
협곡의 위쪽으로 반 시진을 걸어 산 중턱에 형성된 작은 폭포.
오칠은 달빛이 은은히 비치는 수면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옷을 벗기 시작했다. 오랜 여정을 통해 더러워진 옷을 모두 벗어버리고 태생 그대로의 육체를 드러낸 그의 모습은 참으로 아름답고 강인해 보였다.
첨벙첨벙.
오칠은 작은 폭포로 인해 허리까지밖에 오지 않는 깊이의 웅덩이 안으로 들어섰다. 아직 겨울의 끝자락에서 벗어나지 못한 산꼭대기에서부터 흘러내려온 물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하지만 오칠은 조금도 개의치 않고 한 걸음, 한 걸음 전진해나가 폭포 바로 아래에 우뚝 멈춰 섰다.
쏴아아아.
머리로 떨어지는 폭포의 물줄기를 맞으며 오칠은 눈을 감았다. 긴 머리칼이 조각처럼 잘 다듬어진 육체 위로 늘어지고, 은은한 달빛을 받아 더욱 황홀한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다.
쏴아아아.
무엇을 씻어내고 싶은 걸까. 어떠한 상념이 오칠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일까.
‘달을 품고 싶다.’
몸이 타들어갈 정도의 뜨거운 태양이 아닌, 조금씩 몸과 마음을 감미롭게 달구어줄 달과 같은 따사로움이 그리웠다. 오칠은 스스로를 끌어안았다. 자신의 양어깨를 자국이 생겨날 정도로 강하게 움켜잡고 더욱 강하게 끌어안았다.
‘목운교…….’
그녀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눈꺼풀에 덮여 캄캄해진 시야 속에서 목운교의 모습이 아련하게 그려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분명하게 모습을 형상화시킬 수가 없었다. 그녀를 보지 못한 지 벌써 수 개월. 너무나 많은 시간들이 흘러가버렸기 때문일까?
‘보고 싶다.’
오칠의 가슴에서 유일하게 요동치는 열기였다. 중원을 오가는 역동적인 움직임과 두 손에서 흘러내리는 핏물과 살육, 그리고 무언가에 대한 분노와 살의도 마음속의 공허함을 채워주지는 못했다. 웃고, 떠들고, 먹고, 마시고, 스스로가 원하는 욕구를 마음껏 해소했음에도 언제나 가슴은 텅 빈 공간처럼 쓸쓸하기만 했다.
‘그녀가 보고 싶다.’
목운교를 봐야만 했다. 예쁘지는 않지만 그녀의 웃는 얼굴을 보고, 매혹적이지는 않지만 그녀의 동그란 어깨에 손을 얹고 싶었다. 그녀에 관한 모든 것을 지금 이 순간 너무도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
첨벙첨벙.
누군가가 웅덩이 안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오칠은 눈을 뜨지 않았다. 그는 이미 누군가의 존재를 느끼고 있었고, 또 누구인지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쏴아아아.
시원스럽게 머리를 두드리고, 귓전을 몽롱하게 울리는 소리 속에서 오칠은 그의 가슴에 얹어지는 두 개의 섬세한 손길을 느꼈다. 여인의 손길이었다. 하지만 두 손길은 비슷한듯하면서 달랐다. 하나는 부드러우면서 자연스러웠고, 하나는 매끄러우면서 조심스러웠다.
‘그녀의 손은 어떠했지?’
오칠은 목운교의 손이 어떠한 느낌이었는가를 기억해보려 했다. 딱 한 번 그녀의 손을 잡아보았었다. 백천맹을 떠나올 때 그를 외면하고 사라지려 했던 목운교를 붙잡아 세우던 순간, 오칠은 그녀의 손을 느낄 수가 있었다.
‘거칠었어.’
여느 여인들의 섬세한 손은 아니었다. 무림의 여인들이 아무리 무공을 익히느라 손을 혹사시킨다고는 하지만 그녀의 손처럼 투박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오칠은 저도 모르게 빙긋이 미소를 지었다. 목운교의 그 투박한 손길에서 느꼈던 따스함을 기억하기 때문이었다.
‘그래, 그 손은 그녀의 마음을 보여주고 있었지. 나를 생각하는 마음을 그 손에서 분명하게 느낄 수가 있었어.’
오칠은 목운교가 더욱더 진실되게 표현해주기를 원했었다. 감추지 말고 있는 그대로 말해주기를 바랐었다. 하지만 그건 욕심이었다는 걸 지금 이 순간 깨닫게 되었다. 오칠 자신이 목운교를 통해 떠올렸던 과거의 애틋함과 열정이면 충분했던 것인데, 목운교에게 더 많은 무언가를 바라고, 그녀에게서 오칠 자신의 메마르고 감추어진 감정을 더욱 강하게 끌어올릴 수 있는 무언가가 표출되기를 바란 것은 너무도 이기적인 욕심일 뿐이었다.
‘남자는 어리석어.’
여자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의 마음조차 알지 못하기 때문에 남자는 어리석은 존재였다.
“…….”
오칠은 눈을 떴다. 그리고 그의 좌우에 서서 그의 몸을 조심스럽고 섬세하게 씻겨주고 있는 매청화, 매적화 자매를 바라보았다. 그녀들 역시 그처럼 실오라기 하나 없는 나신이었다. 하지만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칠의 몸을 씻겨주고 있었다.
“미안하다.”
오칠이 그렇게 말했다. 순간 두 여인의 손길이 멈추었다. 하지만 그것은 순간의 반응일 뿐 그녀들은 오칠의 몸을 계속해서 씻겨주었고, 그것을 절대 멈추지 않았다.
“미안해.”
오칠이 다시 말했다. 하지만 매 자매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들의 새하얀 나신 위로 떨어지는 폭포수의 거친 물줄기 소리 때문에 듣지 못하는 것일까?
아니었다. 다만 대답을 할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오칠이 그녀들을 받아들일 수 없음을 미안해하는 그 말에 감히 대답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오칠의 음성 속에 담겨진 진실한 감정의 느낌이 너무도 감당하기 버거워서 도저히 입을 열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녀들은 오칠의 몸을 씻겨주는 것에 더욱 집중하고 있는 중이었다.
쏴아아아.
떨어져 내리는 폭포수는 밤하늘 달빛에 물들어 더욱 처연했고, 매 자매는 물줄기에 눈물을 감추며 연모(戀慕)의 감정을 조금씩 씻어내고 있었다. 처음 그녀들의 마음을 흔들어놓았던, 그리고 그 마음을 허락도 없이 매정하게 빼앗아 가버린 오칠의 존재를 가슴속 깊은 곳, 영원히 돌아보지 않을 곳으로 흘려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 * *
산서의 성도 태원(太原)으로부터 북동쪽으로 이틀 거리에 위치한 정양(定襄).
주변에 서늘하게 피어오른 안개가 상큼한 새벽 기운을 담고 대지로 잠겨 들어갔다. 그러나 그러한 새치름한 기운과는 별개로 넓게 펼쳐진 대지의 메마른 풀잎 사이로 선연한 핏줄기가 줄기줄기 흩뿌려져 있었다. 아니, 사방에 가득 펼쳐진 핏줄기는 수십 개의 도랑을 이루어 수백, 수천 구의 시신들과 함께 한 폭의 지옥도를 그려내고 있었다.
“사… 살려……!”
푹.
간신히 생명을 이어가고 있던 정파 무사의 가슴 위로 하나의 검이 쇠꼬챙이처럼 파고들어 좌우로 비틀어졌다. 그리고 극도의 고통을 입 안에 머금었다가 차마 내뱉지 못하고 마지막 숨결을 내뱉은 정파 무사의 사지는 물먹은 솜처럼 늘어졌다.
“이봐, 얼른 이동하지 않고 뭐 하는 거냐!”
저 앞쪽에서 무리를 통솔하는 조장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그러자 정파 무사의 가슴에 검을 찔러 넣었던 사내는 얼른 검을 빼들어 뒤로 숨겼다. 죽지 않은 적들을 찾아내 죽이라는 명령이 없었기 때문에 이런 행동 하나만으로 처벌을 받을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몸을 사리면서도 그의 얼굴엔 숨길 수 없는 만족감이 피어나고 있었다.
‘기분 좋은 살인이지.’
웃고 있는 사내의 얼굴은 마치 뱀처럼 생겨 잔혹해 보이는 인상을 풍겼다.
현재는 흑천맹의 일개 무사지만, 얼마 전까지 그는 하남 등봉 하오배 무리인 도끼파의 두목이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이렇게 정파 무사들을 죽이는 재미에 빠져 있는 중이다. 과거의 그였다면 정파 고수들을 상대로 감히 실행할 수 없었던 행동인 것이다.
‘흑천맹이 산서를 먹으면, 그리고 소림사를 쓸어버리고 하남까지 지배하게 되면…….’
이렇게 죽어가는 정파 무사를 처리하는 것보다 더욱 큰 힘을 발휘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사내가 도끼파의 수하들을 이끌고 흑천맹에 투항한 것도 다 그러한 힘을 얻게 되기를 바랐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사실, 사내처럼 그러한 꿈과 희망을 품고 흑천맹에 투항한 하오배들만 수백이었다. 그리고 어젯밤부터 시작해서 새벽 내내 있었던 산서 정파인들과의 처절한 싸움이 흑천맹의 압도적인 승리가 되면서 그러한 희망은 더욱 현실적인 모양으로 그려지고 있었다. 물론 오늘의 싸움에서 죽음을 당해 꿈도 삶도 아무 의미 없이 되어버린 하오배들도 너무나 많았지만 말이다.
“야, 인마!”
사내를 닦달했던 조장이 노려보며 다시 소리쳤다.
“예, 갑니다!”
사내는 상념에서 깨어나 검을 휘둘러 핏물을 털어내고는 서둘러 앞으로 뛰어갔다.
“모두 전 속력을 다해서 이동한다!”
각 가문의 수장들이 사방에서 외친 명령들이 공력에 실려 넓게 넓게 퍼져나갔다. 그리고 흑천맹 소속 사천여 명의 무사들이 시커멓게 떼를 지어서 산서 정파인들의 잔여 세력들이 도주한 길을 따라 빠르게 이동해갔다.
* * *
철퍽철퍽! 철퍽철퍽!
질척하게 젖어 있는 강변의 습한 대지로 천여 명의 무리가 급하게 내달리고 있었다.
“헉… 헉… 헉…….”
절정의 고수라고 할 수 있는 몇몇을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격한 숨결을 내뱉으며 차갑게 메마른 입술을 꾹 다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몸 곳곳에 생겨난 상처와 무리한 내공의 운용으로 정상적이지 못한 진기 상태, 그리고 한숨도 자지 못하고 밤새 처절한 싸움을 해야만 했던 심신으로는 그리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리고 그건 세상에 이름이 자자한 소림의 고수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쪽으로 쭉 가면 현수교(懸垂橋:양쪽 언덕에 줄, 쇠사슬 등을 건너질러 거기에 의지하여 매달아놓은 다리)가 있단 말이오?”
장경각 각주 굉진은 애써 힘겨움을 참아내고 있는 소림의 무승들을 돌아봤다. 그리고 패주하여 퇴각을 하는데 그 길잡이로서 앞장선 채 달리고 있는 십이비응방의 단 장로에게 물었다.
‘염병, 몇 번을 말하게 하는 거야!’
단 장로는 순간 짜증이 났다. 그들이 정양에서 크게 패하고, 이곳 남현(嵐縣)까지 퇴각하여 그냥은 건널 수 없는 강을 넘어가기 위해 지금 이렇게 급하게 이동하는 것에 대해서 벌써 네 번이나 같은 설명을 반복해왔다.
물론 이정표 하나 없이 허리까지 오는 갈대밭이 끝없이 펼쳐진 이곳의 지형이 모르는 사람에게는 너무나 혼란스러울 것이란 건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았다. 또한 물어오는 사람이 대소림사(大少林寺)의 장경각 각주라는 것, 자신들이 그래도 흑천맹을 상대로 천여 명이나 살아서 퇴각할 수 있는 것이 모두 굉진 대사를 비롯한 소림사 무승들의 덕분임을 충분히 고려하고 있기도 했다. 그래서 지금까지 네 번이나 화 한 번 내지 않고 설명을 해준 것이 아니던가.
그런데 이렇게 또 묻다니! 산서성 전반에 걸쳐서, 그리고 근방의 지역을 제 앞마당처럼 꿰고 있는 자신에게 저런 의심에 가득 찬 눈빛을 보내다니! 단 장로는 너무 짜증이 났다. 가뜩이나 힘들어 죽겠는데, 이러한 의심과 반복적인 질문에 바보처럼 계속해서 대답을 해야만 하는 것일까?
“이제 금방입니다. 조금만 더 참으십시오.”
하지만 역시나 단 장로는 굉진 대사를 함부로 대할 수가 없었다. 다른 무엇보다 지금의 이 굴욕적인 퇴각과 앞날을 어찌 기약해야 하는가에 대한 불안함으로 마음 상태가 좋지 못한 자신의 심경 상태를 감안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기습을 받았다고는 해도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던 흑천맹과의 싸움에서 전력의 삼분지 이 이상이 소진되는 크나큰 패배를 당한 뒤라서 굉진 대사가 더욱 신중을 기하고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사숙님.”
단 장로가 해준 다섯 번째의 성실한 답변에도 딱딱하게 굳은 표정을 풀지 못하고 달리는 굉진 대사의 옆으로 팔대호원(八大護院)의 원주이자 소림 방장의 제자인 십팔나한(十八羅漢)의 가락가벌차 담성이 다가왔다.
그는 이곳에 있는 소림 무승들 중 가장 멀쩡한 신색을 유지하고 있었다. 굉진 대사조차도 자잘한 부상을 입은 상태였건만, 그는 마치 조금 전에 합류한 것처럼 처음과 다름없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지금도 저 뒤쪽에서 쏜살같이 달려왔음에도 조금도 호흡이 흐트러지지 않고 있지 않은가. 그만큼 경신법 등의 무공 기초가 놀랍도록 잘 다져져 있다는 뜻이었다.
‘다음 대 소림의 방장으로서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아이지.’
다만 아쉬운 것은 오래전부터 방랑승으로 중원을 주유할 뿐, 소림사로 돌아오지 않는 소림 최고수 광죽 사백이 이 뛰어난 아이에게 한마디 조언이라도 해주었다면 더욱 좋았을 것이라는 점이었다. 그랬다면 담성의 성취는 더욱더 놀라운 발전을 이뤄낼 수 있었을 것이 분명하니까.
“다친 제자들은 어떠하더냐?”
“현재는 다른 제자들의 도움을 받아 이동 속도를 맞추고는 있지만, 휴식과 안정이 필요한 상태입니다.”
하지만 지금 급박하게 퇴각을 하는 중이기에 휴식과 안정이란 말은 너무나 큰 사치에 불과했다. 그래서 굉진 대사나 담성의 표정이 편치 않은 것이다.
“우선 강을 넘도록 하자. 우리가 현수교를 넘고 다리를 끊는다면 흑천맹의 무리가 도강(渡江)을 하는 데 적지 않은 시간이 소요될 것이니, 그때는 잠시라도 휴식을 취할 수 있을 것이다.”
단 장로는 굉진 대사의 말에 살짝 어깨를 움찔했다. 현수교는 관의 주도하에 건설된 다리였다. 그 다리를 관할하는 관리와 초병들까지 있다. 그러니 그런 다리를 끊게 되면 관으로부터 꽤나 집요한 추궁을 받을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하긴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이 같은 때에 그런 게 뭐 중요한 일이겠는가.’
단 장로는 관이고 뭐고 간에 우선 자신이 살아 있어야 한다는 점을 새삼 절실하게 깨달으며 고민을 접었다. 그리고 다른 이들처럼 고통과 힘겨움을 참고 현수교를 향해 달려가는 것에 온 힘을 기울였다.
철퍽. 철퍽. 철퍽.
“……?”
한데, 그렇게 한참을 달려가던 단 장로는 저 멀리 보이는 현수교를 확인하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아직 너무나 먼 거리여서 명확하지는 않지만 초병들의 초소가 있어야 할 곳에 웬 무리가 보였기 때문이다. 그것도 말을 타고 있는 꽤 많은 무리였다.
‘고위 관료가 순찰이라도 나왔나?’
그렇다면 큰일이었다. 도검을 차고 피를 덕지덕지 묻힌 천여 명의 무리를 고위 직위의 순찰자들이 그냥 모른 척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혹 거금이라도 미리 준비해서 품에 넣어두고 있었다면 어찌어찌 설득이나 해볼 것인데, 싸움에 나선 자신들에게 그런 큰돈이 준비되어 있을 리가 없었다.
‘이름을 팔아야 하나?’
관 역시 산서에서 십이비응방의 이름을 무시할 수 없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산서성의 제형안찰사 등등의 고위 관료들도 때론 십이비응방의 눈치를 봐야 할 정도였다. 그러니 십이비응방의 장로는 물론 총방주까지 있는 무리의 이름을 걸고 후일 보상을 하겠다고 협상을 한다면 어찌어찌 해결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걱정이 되는 것은 관에서도 지금 산서 정파 무림과 흑천맹의 싸움을 알고 있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산서 정파가 상대적으로 열세에 놓여 있다는 것도. 그걸 알고 있는 관료가 그냥 고개를 끄덕이며 쉽게 협상에 응할 리가 없었다.
아마도 지지부진하게 시간을 끌면서 더욱 큰돈을 우려내려고 하겠지. 그렇게 되면 지금과 같이 시간을 다투어 도강을 하고 다리까지 끊을 생각을 하고 있는 자신들에게는 정말 피를 말리는 일이 될 것이다.
‘그냥 모두 죽여서 입을 막아?’
결국 단 장로는 최악의 상황까지 머릿속에 그려야만 했다. 그런데 그런 생각을 하며 달리는 단 장로를 굉진 대사가 붙잡아 세우고, 무리 전체의 이동까지 멈춰 세웠다.
“왜 그러십니까?”
“흑천맹이요.”
“……!”
단 장로는 깜짝 놀라서 현수교의 초소가 있어야 할 곳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곳에 모여 있는 무리의 세세한 모양이 여전히 명확하게 잡히지가 않았다. 단 장로의 공력은 굉진 대사의 공력에 미치지 못하여 그처럼 볼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굉진 대사가 흑천맹이라고 한다면 굳이 확일할 필요도 없이 흑천맹일 것이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