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계 19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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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413회 작성일소설 읽기 : 파계 197화
파계 8권 - 22화
스르르르르르륵-
거대한 검은 천 두 개가 선두의 대형선에서 양쪽으로 뻗어 나와, 십여 장의 거리나 떨어져 있는 선착장의 기둥들을 휘어 감으면서 그대로 고정되었다. 누가 어떠한 수법을 펼쳐 이렇게 할 수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수면 위로 두 개의 검은 길이 생겨난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사사사사사삭-
대형선에서 양쪽으로 검은 복장을 한 자들이 그 천을 가볍게 밟으며 달려 나왔다. 아무리 두꺼운 천이라곤 해도,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는 움직임이 정말 대단한 경공 실력이 아닐 수 없었다.
타탁.
그들은 뛰어난 경공만큼이나 빠른 움직임으로 선착장에 도달했다. 그리고 무기를 빼들어 그들을 경계하는 정파 무림인들에겐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그들이 나왔던 배를 향해 한쪽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였다. 척 보아도 누군가를 공경의 자세로 기다리는 모습이었다.
“혈천신교 만세-! 교주 현신(敎主現身) 만만세-!”
일순, 수십 척의 배에서 세상을 떨어 울리는 함성이 터져 나왔다.
누군가 대형선의 선수(船首)를 박차고 공중을 날았다. 그리고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허공을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능공허도(凌空虛道)!”
“허공답보(虛空踏步)!”
지켜보는 정파인들은 놀란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소리쳤다.
그들 중에 평생에 한 번이라도 능공허도를 본 적이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혹은 허공답보를 펼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것도 저렇게 완벽한 경지를 말이다.
“…….”
모두를 경악시키는 경공술을 펼쳐 선착장에 내려선 사람은 기이한 분위기를 풍겼다.
검은 비단옷을 입고 있어서인지, 온몸에서 마치 검은 아지랑이가 피어나는 듯 그 느낌이 암울하고 무거웠다. 눈동자는 살짝 붉어져 있는데, 충혈된 것이 아니라 짐승의 그것처럼 자연스럽게 적광을 내고 있어서, 그 시선을 받는 이들에게 괜한 불안감을 심어주었다.
저벅저벅.
모두를 침묵 속에 몰아넣은 존재, 혈천신교 교주 위지무성은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그가 지나갈 때마다 먼저 선착장에 자리를 잡고, 공경의 자세로 무릎 꿇고 있던 교주 직속의 오도전륜지옥대 무사들 백여 명이 몸을 일으켜 위지무성의 뒤쪽에 섰다.
“크크크…….”
오도전륜지옥대 무사들이 모두 일어서 뒤쪽으로 시립한 시점에 걸음을 멈춘 위지무성은 스산한 웃음을 지었다. 그가 앞으로 걸어간 거리만큼 뒤로 후퇴한 정파인들을 비웃는 것처럼 보이는 웃음이었다.
무리의 선두에 서 있던 구파 장문인들과 수장들은 살짝 얼굴을 붉혔다.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난 자신들의 실태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와서 다시 앞으로 나설 수는 없기에, 구겨진 자존심을 애써 밖으로 보여주지 않도록 안색을 정돈하는 것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분명 나를 만나고자 했을 텐데, 아무도 입을 열지 않는군.”
이전처럼 공력이 담겨 있지 않은 음성이었기에 누구도 고통스러워하지는 않았지만, 수장들을 비롯한 정파인들 모두가 그 거칠고 메마른 음성에 알 수 없는 위협을 느꼈다.
위지무성의 말과 행동은 그 하나하나가 가볍지 않았고, 모두를 긴장시키게 하는 무게감이 있었던 것이다.
“대화는 필요가 없다는 것인가? 좋아! 나도 한담이나 나누자고 온 것은 아니니까.”
“……!”
순간 위지무성의 온몸이 안개처럼 보이는 검은 연기에 휩싸이기 시작했고, 붉은 눈동자는 더욱 강렬한 적광을 뿜어냈다.
그리고 정파인들은 경악한 표정을 지으며, 그 모습이 결코 인간일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보는 것만으로도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지금 그들의 전신을 압박하고 있는 이 강렬한 힘이 진정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라고는 믿기 힘들었으니까.
“누가 나설 테냐.”
위지무성은 더욱 메마르고 음산한 음성을 내뱉으며, 선착장 주변을 가득 메운 정파인들을 훑어보았다.
그에 정파인들은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찔하며 다시 뒤로 몇 걸음을 물러났다.
* * *
“스고이네(凄いね:대단하군).”
선두의 대형선 바로 옆쪽 배에서 선착장을 바라보던 구니마쓰 야마오는 저도 모르게 감탄성을 터트렸다.
뒤에 백여 명의 오도전륜지옥대가 있다고는 하지만, 위지무성은 홀로 수천의 정파 무림인들을 압도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로서는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광경인 것이다.
“이봐, 그대들의 교주는 사람이기는 한 건가?”
야마오는 츠바사의 옆에 바짝 붙어 떨어질 줄 모르는, 하지만 그처럼 선착장의 위지무성을 넋 빠진 표정으로 보고 있던 냉음설에게 물었다.
“사형은… 아니 교주님은 사람이에요. 아니,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그녀도 확신할 수가 없었다.
위지무성은 강한 사람이었다. 교주가 되기 전에도, 그리고 되었을 때도 강했고, 모두에게 두려움과 경외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인간 같지 않은 위압감을 풍기지는 않았다. 이렇게 멀리서 지켜보고 있는 그녀의 가슴이 떨릴 정도로 흉포하고, 살기 가득한 사람이 절대 아니었다.
‘좋지 않은데…….’
츠바사는 야마오처럼 감탄만 하지 않았다. 냉음설의 반응이나 다른 배들에 타고 있는 십왕지옥대왕 등 혈천신교 수뇌들의 반응을 보자면, 위지무성의 모습은 분명 자연스런 것이 아니었다.
더구나 그가 듣기로 위지무성은 매우 냉철하고, 이성적이며, 철저한 계산 속에서 움직이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런데 지금의 위지무성은 아니었다.
호남으로 내려와 백룡맹이 도강(渡江)할 만한 곳들을 탐색하고, 감시하던 오관지옥대(독룡방)의 배를 모두 불러들이고는 이렇게 백룡맹을 직접적으로 도발하다니. 그것도 전혀 사전 계획도 없이 즉흥적으로 내린 명령이었고, 저렇게 소수만 데리고 홀로 뒤집어놓겠다고 나선 것이다. 이건 결코 이성적이고, 계산적인 사람이 할 수 있는 행동이 아니었다.
‘교주가 뿜어내는 기운도 전혀 정상적이지 않다는 게 영 꺼림칙해.’
다른 사람도 아는지 모르겠지만, 츠바사는 위지무성이 매우 불안한 상태라는 걸 감지하고 있었다.
이번에 그를 처음 보았기 때문에 과거와의 차이점을 알 수 없어서 정확히 어떻게 불안한 상태인지는 설명할 수 없었지만, 분명 뭔가 문제가 있는 것이다.
‘뭐, 그 불안한 상태도 교주의 강함에 가려져 거의 티가 나지 않지만…….’
마음이 편치 않은 츠바사도 그래서 위지무성이 대단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수천의 정파 무림인들을, 그중에는 분명 엄청난 고수가 있음에도 전혀 주눅 들지 않고 오히려 압도하는 것은, 단순히 배포가 크고 기세만 강하다고 되는 것이 아닌 것이다. 진정 강하고,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정도의 힘이 없다면 불가능하다고나 할까.
‘응?’
생각을 멈추고 선착장에 이목을 집중하려던 츠바사의 시선이, 위지무성과 그를 둘러싼 정파인들을 넘어 마을의 끄트머리를 향했다.
그곳에서 누군가가 느긋하게, 하지만 결코 느리지 않은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왠지 그 존재가 츠바사의 눈에는 예사롭게 보이지가 않았다.
* * *
“……!”
막 정파 무림인들을 향해 움직이려던 위지무성도 츠바사처럼 누군가의 접근을 감지했다.
정파인들 모두가 흥분과 살기, 그리고 긴장감을 발산하는데, 뭔가 평온하고 조용한 기운이 그의 감각을 자극했던 것이다.
“크하하하-!”
위지무성이 갑자기 앙천광소를 터트렸다.
그 웃음소리에 담긴 힘과 흉포한 기운이 정파 무림인들을 더욱 당혹시키는 가운데, 갑자기 무리의 정중앙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마검신군이다!”
“척발조 대협이다!”
위지무성의 기운에 눌려 움츠러들어 있었던 정파인들이 갑자기 활기를 띠며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정파인들은 갈라진 길을 따라 걸어 나오는 마검신군 척발조를 중심으로 뒤로 물러났다. 마치 위지무성과 싸울 사람은 척발조밖에 없다는 듯이 말이다.
“…….”
위지무성은 가만히 척발조를 바라보았다. 정돈되지 않아 부스스하게 산발된 머리와 수염으로 인해서 나이를 짐작할 수가 없었고, 옷은 얼마나 오랫동안 빨아입지 않았는지 해지고 찢어진 데다 원래의 색깔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심하게 탈색되어 있었다. 한마디로 허름한 모양새인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 척발조를 달리 보이게 하는 것이 있었으니 허리에 차고 있는 고색창연한 검이었다.
유리검(琉璃劍).
정확히 누가 만들었는지(조화창의 경우처럼 전대 단철방 방주가 만들었다), 어떻게 척발조가 얻게 된 것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전까지는 이름 자체가 생소한 검이었으니까.
사실, 검 자체가 매우 뛰어남에도 불구하고 그렇다는 것은, 아마도 어느 집 구석진 곳에서 가치를 제대로 알아봐주는 주인을 만나지 못해 고철처럼 뒹굴고만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유리검은 척발조의 명성과 함께 천하의 명검 중 하나로 이름이 높은 무기였다.
“난 척발조요.”
긴 수염으로 뒤덮여 있는 입술이 열리며 그리 많지 않은, 대략 마흔 후반 정도쯤 되지 않을까 싶은 남자의 음성이 살짝 갈라진 채 흘러나왔다.
아마도 사람들과 대화를 거의 하지 않았기 때문에 목소리가 거칠어진 듯했다.
“당신과 검을 나누어보고 싶소.”
척발조의 담담한 시선이 위지무성의 허리에 매달린 혈천검(血川劍)을 향했다가 들려졌다.
위지무성은 척발조가 마치 그의 검을 만지고 간 것과 같은 기이한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그건 매우 큰 불쾌감을 유발하며 그를 분노케 했다.
“네놈 마음에 안 들어.”
위지무성은 딱 그 말만 했다.
스릉.
그리고 곧바로 뽑혀진 그의 혈천검이 여섯 장이나 떨어져 있는 척발조를 향해 찔러갔다.
슈웅-
혈천검의 끝에서 검은 기운이 뾰족하게 솟구쳐 순식간에 척발조의 왼쪽 가슴으로 와 닿았다. 아니, 닿은 것처럼 보였지만, 척발조의 신형은 그 자리 그대로 서 있었다. 그리고 검은 기운은 저 뒤쪽으로 날아가 사라져버렸다.
“……!”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검기를 쏘아 보낸 위지무성이나, 움직이지도 않은 것 같은데 그 검기를 피해버린 척발조나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내기는 마찬가지였다.
‘마검신군의 실력은 진짜다!’
얼마 전까지 척발조에 대한 불신과 의심으로 가득했던 장문인들과 수장들은 놀라움과 감탄, 그리고 한편으로는 질투심마저 느꼈다.
구파 장문인들 중 소림방장을 제외하고는 가장 강하다고 세인들에게 평가되며, 스스로도 내심은 그렇게 믿고 있었던 화산파 능 장문인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의 경지가 높은 만큼 가장 크게 감탄했고, 또 가장 크게 질투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현실을 인정하는 이성적인 사람이었고, 그래서 척발조가 강한 만큼 위지무성을 처리해주기를 바랐다. 그렇지 않다면 이 중에서 단독으로 그를 감당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우르르.
정파 무림인들은 서 있던 자리에서 한참이나 더 물러났다. 두 사람이 싸움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면 그 격돌의 폭풍이 얼마만큼 넓어질지, 방금 전에 본 한 초식만으로도 충분하게 깨달은 것이다.
“크크크!”
정파인들이 그에게 갖는 기대가 전혀 상관이 없다는 듯 덤덤한 신색을 유지하는 척발조와 달리, 위지무성의 얼굴은 점점 일그러지고 웃음소리는 한층 음침해져갔다.
후아아~
그리고 순간 위지무성을 중심으로 바람이 불었다. 파천혈전공의 기운이 연기처럼 뒤섞인 바람이었다.
“……!”
담담하기만 하던 척발조의 얼굴이 살짝 찌푸려졌다. 갑자기 위지무성의 혈천검이 검게 물들더니, 한 장이나 길게 늘어났기 때문이다.
‘검강?’
강력한 내공을 형상화시킨 검의 높은 경지였다. 하지만 저렇게 선명하고 긴 검강은 지금 이 자리의 누구도 본 적이 없었다.
우우웅-
혈천검이 울고 위지무성은 무릎도 굽히지 않는 절정의 신법을 이용한 도약을 통해 척발조의 앞으로 쭉 밀고 들어갔다.
스릉.
유리검이 매끄러운 소리와 함께 뽑혀 나왔다. 마치 맑은 물로 만들어진 것처럼 투명한 검신이 보는 이들의 눈을 현혹하고, 그를 향해 혈천검을 휘둘러오는 위지무성의 정면을 시리도록 아름다운 광채로 가득 채웠다.
후우우우우우~
스사사사사삭-
쇠의 부딪침도 격돌의 광폭한 소음도 없었다. 혈천검이 공간을 뒤덮고 유리검은 틈새를 파고들었지만, 마치 전혀 다른 장소에서 마주치는 것처럼 두 검은 공허하게 상대의 좌우로 미끄러지기만 했다.
“…….”
하지만 보는 이들은 누구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나무로 만들어진 선착장은 수백 년을 견디다 썩어 들어가는 것처럼 야금야금 부서져나가며 형체를 잃어가고, 겨울이 거의 지나가며 녹기 시작한 대지는 곡괭이로 내리친 것처럼 움푹움푹 파헤쳐졌다. 그리고 그 사이사이로 위지무성과 척발조의 신형이 눈으로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 놀랍고 격한 싸움을 보면서도 사람들은 두 사람이 호각의 대결을 벌인다고 여겼다. 아무런 격돌도, 아무런 부상도 나타나지 않는 완벽한 균형의 상태. 그래서 사람들은 언제 그 균형이 깨지게 될 것인지를 긴장과 초조함을 가지고 지켜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