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계 19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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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333회 작성일소설 읽기 : 파계 195화
파계 8권 - 20화
“처음부터 한곳으로 힘을 집중해서 산서 무림인들과 싸웠어야 했거늘!”
불행과 실패가 반복되다 보면 누군가 원망할 사람이 필요한 법이었다. 그리고 팽월능은 그 누군가를 황보 맹주로 찍은 것이다.
‘설득하기가 쉬워지겠군.’
남궁진용은 팽월능의 분노 어린 말을 듣고는 내심 잘되었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팽월능 이상으로 황보 맹주의 모든 것에 분노하고 있었고, 그래서 팽월능을 설득하여 함께 뭔가를 도모하고자 하는 마음을 먹고 있었던 것이다.
“저도 팽 가주님과 같은 생각입니다. 황보 맹주는 일을 너무 독단적으로 진행해서, 무리하게 계획을 밀고 나간 것입니다. 지금과 같은 사태가 그의 모든 책임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분명 맹의 일인자로서 책임을 져야 할 일이지요.”
“…….”
팽월능은 남궁진용이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몰라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게다가 지금 우리는 본가의 기반을 모두 잃었습니다. 산서 공략이 문제가 아니라, 연고지로 돌아가 우리의 내실을 다져야 할 때라는 것입니다. 산서를 집어삼켜보았자 지킬 힘이 없으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팽월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생각도 남궁진용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황보 맹주는 아마도 모든 힘을 끌어 모아서 단번에 산서 정파 무림을 궤멸시킨다는 계획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제 생각에는 그 계획 자체부터 무리수입니다. 물론 모두 힘을 합하여 친다면 이기지 못할 리는 없겠지요. 하지만 우리도 크나큰 전력의 손실을 입게 될 것입니다. 더구나 싸움의 선봉으로 황보 맹주가 앞장설 것이라는 것에는 저는 확신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분명 우리를 선봉으로 삼아 적의 예봉을 꺾는다는 듣기 좋은 말로 명령을 내리겠지요.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자신의 가문 무사들을 먼저 희생시킬 생각은 없을 테니까요.”
“흠, 아마도 그럴 것 같구려.”
팽월능의 얼굴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가 맹주라고 해도 그렇게 할 것 같은데, 황보 맹주라고 다를 리가 없는 것이다.
“어쨌든 이번 싸움은 우리의 승리로 끝날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이렇게 퇴각을 해야만 하는 수모를 겪고는 있지만, 그건 양천에서 의외의 기습을 받아 우리의 기세가 꺾였다는 이유가 가장 큽니다. 그러나 오태에서는 분명 우리가 이기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최대한 그 싸움에서 전력을 보전해야 합니다. 즉, 맹주가 선봉을 명령하더라도 절대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말이지요.”
“하나, 아무 이유도 없이 맹주의 명령을 거부할 수는 없는 일이지 않겠소.”
흑천맹이 연합체제이기는 하지만, 분명히 맹주의 권위는 인정해줘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흑천맹은 사분오열되어 금세 와해될 테니 말이다.
“맞습니다. 그래서 제 생각에는 맹주가 우리에게 선봉을 맡기기 힘들게 해야 합니다.”
“어떻게 말이오?”
“우리의 전력이 선봉을 맡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겁니다.”
“……?”
팽월능은 늘 말을 빙빙 돌려서 하는 남궁진용의 대화법에 조금 짜증이 났다.
남궁세가의 사람들은 제갈세가의 사람들처럼 지략이 뛰어나면서도, 자신들의 우월성을 보여주는 것에 매우 큰 기쁨을 느끼는 기묘한 취미가 있었다. 그리고 팽월능은 그 취미가 지금 이 순간 조금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남궁진용도 그런 팽월능의 기분을 감지했는지, 곧 자신이 하고자 하는 말을 직접적으로 꺼내놓았다.
“오태에 우리의 전력 일부를 숨기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중에 황보 맹주가 우리의 속임수를 알아보면 어찌한단 말이오?”
“퇴각 중에 흩어졌던 무사들이 돌아왔다고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물론 그런 변명에 빈틈이 많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때가 되면 우리의 전력이 황보세가와 제갈세가를 능가할 것이니, 그들도 어찌할 수 없을 것입니다. 분명 우리의 힘이 필요할 테니까요.”
“흠…….”
팽월능은 눈을 감고 생각에 빠져들었다. 아마도 남궁진용의 계획이 가진 여러 가지 단면을 살피는 중일 것이다.
하지만 그는 곧 눈을 뜨고 고개를 끄덕였다. 달리 생각해봐도 남궁진용의 계획만큼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알겠소. 그보다 지금 우리와 함께 있는 문파들은 어찌할 것이오?”
“그들을 설득하는 것은 일도 아닙니다. 그들의 전력을 보존하게 되는 일인데, 누가 거부를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렇구려.”
팽월능은 뭔가 씁쓸한 기분이었지만, 이미 다른 방법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대로 밀어붙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럼 오늘 밤 수장들을 불러 모아 설득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하루를 쉬고, 오태로 출발하지요.”
“그렇게 하도록 합시다.”
두 사람은 그렇게 대화를 끝냈고, 팽월능은 다시 그의 무리로 돌아갔다.
‘생각보다 빠르겠어.’
어두운 그림자 속으로 사라지는 팽월능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남궁진용은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그의 염원이자, 가문의 염원이 바로 코앞으로 다가온 듯했기 때문이다. 황보강패의 등장으로 그의 가문이 잃어야 했던 사파 제일문과 흑천맹 맹주의 자리를 되찾는 염원 말이다.
* * *
하북 서쪽 신악(新樂).
좌우로 숲이 우거진 제법 넓은 계곡을 따라 삼백여 필의 말이 한가롭게 물을 마시고 있었다. 그리고 그 왼쪽으로 말 수에 맞는 숫자의 오행교군들이 방금 지은 따끈한 밥을 옹기종기 모여서 먹고 있었다. 그 모습들만 보자면 너무도 평화로워서 근래 사파 무림인들을 두려움에 떨게 만드는, 그래서 일명 사풍단(死風團)이라는 별명이 붙은 오행교군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언제까지 여기에 있어야 합니까?”
입 안 가득하게 구겨 넣은 밥을 다 삼키지도 않고서 초왕성이 물었다.
오칠은 밥알을 튀겼다가는 맞을 줄 알라는 눈빛을 보내며 어깨를 으쓱였다.
“때가 되면.”
초왕성과 엽종, 그리고 변서생은 잠깐 답답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이 이곳 신악에 머물러 있는 시간도 벌써 사흘. 이제는 이동을 하거나 뭔가 설명을 들을 때도 되었는데, 오칠은 앞으로의 일정에 대한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사실, 오칠이 말해주지 않는 것은 그도 해줄 말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가 흑천맹을 와해시키는 것에 대한 대략적인 계획을 세우기는 했지만, 적절한 움직임과 시기 등등에 대한 세부적인 것들은 상황에 따라 변모하며, 광명좌사(光明左使) 인 경모혁이 그 상황에 따라 계획을 다시 짜 맞추어 오칠에게 조언을 하게 되어 있었다.
즉, 하북팽가를 마지막으로 일단 오대세가의 근원지를 완전히 궤멸시켰고, 그래서 흑천맹의 후방을 어지럽힘으로써 상황이 또 달라졌으니, 경모혁이 이를 파악하여 다시 알맞은 계획을 세워 조언을 하면 그 조언을 바탕으로 오칠이 지시를 내리고, 모두가 유동적으로 움직이게 되는 것이다.
사사삭.
계곡의 입구 쪽에서 은신한 채로 경계를 서고 있던 혈귀화교군의 무사들 중 하나가 조용하고도 빠르게 달려와, 오칠 등이 밥을 먹는 곳 앞에 멈춰서 부복했다.
“상의에 교의 표식을 하고 있는 사내 둘이 이곳을 향해 오고 있습니다.”
“그래? 드디어 찾아왔나 보군. 통과시켜.”
“존명.”
무사는 머리를 깊이 숙이고는 그가 왔던 계곡 입구로 다시 달려갔다.
“누가 찾아오기로 했습니까?”
지금까지 초왕성 등도 눈치 못 챌 사이에 광명좌사의 서신을 받아왔던 오칠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직접 모습을 드러내놓고 온다고 하니 기이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그것도 두 명이나.
“보면 알아.”
오칠도 정확히 누가 올지는 몰랐다. 경모혁이 확실하게 어떤 사람을 보낸다고 미리 알리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조금 뒤 오칠을 포함한 모두가 궁금해 하는 두 명의 사내가 말을 탄 채 모습을 나타냈다.
“어라? 저놈도 왔네?”
오칠은 의외라는 듯 살짝 미소를 지었다.
한 명은 경모혁의 세 아들 중 하나고(세쌍둥이라 정확히 누구인지는 오칠도 모른다), 또 다른 한 명은 과거에 하오배 무리였다가 오칠을 통해 인생이 달라진 사두문(四頭門)의 대형 왕공단이었다.
“주군!”
오칠 등을 멀찍이서 발견한 왕공단은, 경대광을 두고 서둘러 말을 달려와 그대로 뛰어내린 뒤 땅속으로 박혀 들어갈 것처럼 오칠의 앞에 넙죽 엎드렸다.
오칠은 왕공단의 움직임을 보고 그동안 무공이 일취월장했음을 알 수가 있었다.
하지만 초왕성 등은 왕공단의 과거를 모르기 때문에 무공 실력이 높아졌는지 어쨌는지는 알 수 없었고, 다만 어이없어 했다. 눈물까지 글썽이는 왕공단의 행동이 너무 과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게다가 그 생김새나 덩치로 볼 때,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 아닌가 말이다.
“누가 보면 수십 년 동안 생이별한 사이인 줄 알겠다. 고작 석 달 정도 못 봤다고 이게 무슨 추태냐.”
오칠이 보고 있기 민망하다며 얼른 일어나라고 했다.
하지만 왕공단은 조금의 부끄러움도 없이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을 손으로 박박 비비며 고개를 저었다.
“주군께서 이렇게 고생하시는데 제대로 보좌하지도 못하는 이놈에겐 석 달이 삼십 년과 같았습니다.”
초왕성 등은 어찌 철면을 쓰지도 않고 저런 소리를 할 수 있는지 믿기 어려운 일이라며 결국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리고 왕공단이 계속해서 그의 부족함을 반성하고, 다른 형제들은 지금도 주군의 안위를 염려하고 있으며, 왕공단이 알고 있는 모든 표현을 활용하여 오칠의 위대함을 찬양하는 통에 모두를 질리게 만들었다. 심지어 최고의 존경과 칭찬을 받는 당사자인 오칠까지도 말이다.
“됐다. 그만 해라.”
오칠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서둘러 왕공단의 입을 틀어막고는, 어느새 다가와 오체투지하고 있는 경대광에게 일어서라고 했다.
그리고 왜 왕공단을 데려왔냐는 질책의 눈빛을 보내 경대광을 송구스럽게 만든 뒤에, 경모혁이 전한 서신을 받아들었다.
‘내 명령대로 담조응과 진태함이 목운교를 보호하게 됐으니, 그쪽은 염려할 필요가 없고.’
담조응과 진태함은 사천에서 신분을 숨기고 살았던 오행교군 중 두 가문이었고, 지금까지 은밀하게 목운교의 안전을 책임지고 있던 은형대 대신 직접 백천맹에 침투하여 목운교를 보호하라는 임무를 인계받은 것이다.
‘그리고 흑천맹이 건곤일척의 승부를 위해 오태산에 불을 질러 산에 숨어 있는 정파인들을 끌어냈고, 다른 두 곳의 사파인들을 오태로 불러들이고 있단 말이지.’
또한 셋으로 분리되었던 산서 정파인들도 속속 오태 쪽으로 모여들고 있다고 했다. 분명 오태에서 이번 싸움의 승패가 완전히 결정되는 것이다.
‘혈천신교는?’
혈천신교에 대한 소식은 특별한 것이 없었다.
백천맹은 힘을 불리는 데 온 힘을 다하고 있는데, 혈천신교는 호남에서 성을 짓는 것 외에는 이렇다 하게 움직이지 않고 있다는 것 정도였다. 그리고 경모혁은 오칠의 지시대로 염 태보라고 하는 권력자 하나를 포섭하여, 혈천신교가 밀고 있는 정 태사를 견제하게 만들어서 정 태사가 힘을 쓰지 못하도록 만들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오칠은 서신을 모두 읽고 삼매진화로 불태워버린 뒤, 경대광과 전음으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경모혁이 어떻게 현재의 상황을 보고 있으며, 움직일 방향과 개입할 시기 등등의 것들을 경대광이 세세하게 전했다.
-좌사에게 그대로 실행하라고 전해.
-알겠습니다.
이야기를 끝낸 오칠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를 빤히 쳐다보는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이제 움직일 시간이다.”
제79장. 일차 교전(一次交戰)
호북 사시현(沙市縣)은 장강을 끼고 있는 지역으로, 다른 곳에 비해서 인구수가 많지 않았다. 장강의 폭이 상대적으로 좁은 편이라, 비가 올 때마다 매년 범람해 피해가 유독 많이 일어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사시 지역에서도 인구수가 백 명을 조금 넘는 정도의 작은 어촌 마을.
이곳엔 지금 이천여 명이나 되는 정파 무림인들이 마을 사람들을 식량 조달 및 조리(調理)와 짐을 정리하는 데 필요한 일꾼으로 고용하고서(마을 사람들은 형편상 백천맹의 제의를 적극 반겼다) 진을 치고 있었다.
하지만 백천맹의 소집령으로 은시에 모여 있던 정파 무림인들 모두가 온 것은 아니었다. 우선적으로 칠 할 정도의 숫자가 먼저 이곳 사시에 도착했다. 그리고 나머지 삼 할이 이틀 안으로 도착할 예정이었다.
“모두 쉰두 척이라고 했소?”
마을의 중심에 특별히 만든 높고 넓은 전망대 위에서, 화산파 장문인 능천조는 중형의 배들이 길게 늘어서 있는 선착장을 바라보며 공야 각주에게 물었다.
배들의 크기와 숫자에 비해 선착장이 너무 작고 수심이 낮아서, 배들은 선착장으로부터 십여 장 정도 떨어진 거리에 안착해 있었다.
“사실, 열 명 정도가 승선할 수 있는 작은 배들까지 합하면 더 많습니다.”
공야 각주는 이 정도 숫자의 배들을 구하는 데도 적지 않은 노력이 필요했다는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그 말을 해보았자 지금 이 전망대 위에 있는 구파의 장문인들을 비롯한 여러 수장들이 그의 노고를 제대로 알아주지도 않을 테니까 말이다.
물론 겉으로야 수고했다 하지만, 속으로는 전혀 아닌 것이다. 이들은 응당 공야 각주가 해야 할 일을 한 것으로 아는 사람들이었다. 아니, 몇 명은 그 정도도 부족하다 여기기도 했다. 청성파 장문인 보냉신도 그중에 한 명이었다.
“하면, 한 번에 천오백 정도가 승선할 수 있으니, 두 번 이상에 걸쳐서 강을 건너야 한다는 말이 아니오? 허허! 일이 참으로 번거롭게 되었구만.”
누가 들어도 공야 각주를 질책하는 의미의 말이었다.
“능력이 이 정도밖에 되지 못하니, 여러 장문인들께 송구할 따름입니다.”
보냉신이 더 무슨 꼬투리를 잡고 말을 하기도 전에 공야 각주가 먼저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며 사죄했다. 그래서 할 말이 없어진 보냉신은 헛기침만 터트려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