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계 18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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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446회 작성일소설 읽기 : 파계 188화
파계 8권 - 13화
‘이 기분은 뭐지?’
변서생은 갑자기 불편해졌다. 밖에는 이백에 가까운 수하들이 대기하고 있고, 자신 또한 충분히 마음을 가다듬고 이곳에 왔는데, 지금 그의 기분은 전혀 편치가 않은 것이다. 이곳 기루는 그의 앞마당과 다름없었고 그래서 최소한 불안감은 없어야 하는데, 이상하게 그렇지가 않았다.
왜?
‘저자 때문에?’
입 안으로 술잔을 기울이며 가만히 바라보는 오칠의 시선을 변서생은 똑바로 마주 볼 수가 없었다.
지독하리만치 무심해 보이는 오칠의 눈동자가 그의 가슴 깊은 곳까지 꿰뚫어 보는 것 같다는 괴이한 기분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이길 수 있을까?’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한 달여 전 서신을 받았을 때부터 바로 조금 전까지 그 점에 대해선 전혀 걱정해본 적이 없었다. 자신이 천하제일고수는 아니지만, 그와 그의 수하들 이백이면 사파 오대세가 전체와 맞붙는다고 해도 두렵지 않다고 여겨왔다. 그런데 지금 갑자기 그런 의문이 들었다.
내가 이길 수 있을까?
나와 내 수하들이 모두 달려든다고 해서 저 교주라고 하는 자를 죽일 수 있을까?
쪼로로로…….
병 속에 남아 있던 술이 완전히 잔으로 흘러가는 소리가 변서생에게 유난히 크게 들렸다. 그리고 그 잔을 들어 입 안에 기울인 오칠이 다시 잔을 탁자에 내려놓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제 결정할 시간이다. 죽을래, 살래?”
마치 오른쪽으로 갈래, 왼쪽으로 갈래? 라고 묻는 것처럼 간단한 물음이었다.
하지만 변서생은 갑자기 엄청난 압박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입이 마르고, 등줄기로 식은땀까지 흘렀다.
‘내가…….’
겁을 먹다니, 마음만 먹으면 당장이라도 모용세가를 무너트리고 강소성의 패자가 될 수 있다고 자부하는 자신이 두려움을 느끼다니.
변서생은 오칠의 붉고 푸르게 일렁이기 시작하는 눈동자를 보며 그렇게 속으로 외쳤다.
하지만 그 소리 없는 고함은 여전히 그의 가슴에서만 울릴 뿐, 입 밖으로 터져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입을 열어 평소처럼 욕이라도 뱉어주고 싶은데 이상하게 입도 뻥긋하기가 힘들었다.
‘죽인다! 죽일 수 있다!’
변서생은 두려움을 이겨내고자 살의를 일으켰다.
양쪽 어깨에 달고 있는 철조를 손에 차면 그의 살기는 절정에 오를 것이고, 몽환절정루를 포위하고 있는 이백여 수하들이 즉각 방으로 몰려들어 저 앞의 세 명을 시체조차 남지 않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
하지만 변서생은 철조로 뻗어가던 손을 완전히 뻗지 못했다. 철조에 손도 대지 못했고, 손에 찰 의지조차 잊어버렸다.
왜?
겁이 났다. 살기를 일으키고 오칠을 죽이겠다는 마음을 더욱 크게 먹을수록, 가슴을 옥죄는 두려움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부풀어 올랐다.
‘천마신공!’
변서생은 자신을 두렵게 만든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저 오칠의 눈동자가 붉고 푸르게 일렁이는 것이, 바로 배화교의 교주만이 익힐 수 있다는 전설의 천마신공이 운용되어 나타나는 변화임을 이제야 알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는 망설임 없이 말했다.
“살겠습니다.”
그 말을 한 순간 변서생은 마음이 편안해지는 걸 느꼈다.
오칠을 죽이겠다는 살의를 지우자마자 두려움이 사라진 것이다. 급기야 변서생은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그는 더욱 확실히 알았다.
‘이길 수 없다.’
밖에 있는 모든 수하들이 덤벼든다고 해도 이길 수 없을 것이다.
오칠은 분명히 밖에 은신한 수하들의 존재를 알고 있을 테고, 천마신공에 심리적으로 압도된 수하들은 제대로 실력을 발휘하지도 못하고 죽어나갈 것이다. 변서생 자신도 예외가 아니었다.
‘엽종이 굴복했다는 걸 알았을 때, 이미 난 알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변서생은 오칠의 앞에 완전히 오체투지하며 생각했다. 다만 그걸 인정할 수가 없었고, 직접 확인해야만 승복할 수 있었다고, 그리고 자신이 굴복해야만 하는 어떤 변명거리가 필요했었다고.
“싱겁군.”
초왕성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는 뭔가 싸움이 일어나길 기대했었는데 아쉽다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그건 엽종도 마찬가지였다. 변서생도 자신처럼 오칠의 무서움을 몸으로 직접 겪었으면 좋았을 걸 하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결국 이렇게 될 줄 알았기 때문에 애써 담담한 표정을 유지했다.
“일어나.”
오칠의 명령에 변서생은 곧바로 일어나 무릎을 꿇었다.
“한 잔 받아라.”
변서생은 무릎걸음으로 다가가 공손하게 오칠이 따르는 술을 받았다.
“마셔라. 이제부터 넌 혈귀화교군의 교군수다.”
변서생은 시원스럽게 술잔을 입 안으로 기울이고는 머리를 숙인 채로 오칠의 하명을 기다렸다.
“오늘 밤으로 출발 준비를 해라. 강소성의 모용세가를 시작으로 흑천맹의 오대세가를 멸문시키면서 산서로 북상할 것이다.”
변서생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러나 곧 그의 수하들이 그에게 절대 복종하는 것처럼, 그도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혈귀화교군의 교군수 변서생, 지존이신 교주님의 명을 받듭니다.”
제76장. 석문(石門), 그리고 태흥(泰興)에서
호남의 석문(石門).
원래는 호남의 명문대파였던 창천도문(蒼天刀門)의 장원이 있던 곳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산 하나를 등에 지고, 넓게 솟아 있는 그 구릉 위로 거대한 건축물들이 모양을 갖춰가고 있었다.
수백 장의 구릉 주위로 성벽이 둘러쳐지고,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개미 떼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그 사이사이를 오가며 목재와 돌 등의 자재를 날랐다. 그리고 그 중심에선 흡사 황제의 그것처럼 거대하고, 웅장하고, 또한 보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위압감을 느낄 수 있는 규모의 건물이 차근히 하늘로 솟구쳐 올라갔다.
둥-
구릉 전체로 넓게 퍼져나가는 둔중한 종소리가 들려왔다. 돌을 나르고, 목재를 쌓고, 성벽을 만들어가던 모든 사람들이 동작을 멈추고 종이 울리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종은 아직 절반도 완성되지 않은 중심 건물의 바로 옆, 오 장 높이의 커다란 망루 위에 달려 있었다. 처음 이곳에 건축을 시작할 때 가장 먼저 했던 두 가지 일 중 하나가 바로 망루를 세워 종을 다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 종소리는 그들의 주인, 그들의 지존, 그들이 절대적으로 믿는 존재를 향해 절을 해야 할 때를 알리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중얼중얼.
수천 명이 중심 건물을 바라보며 일제히 엎드려 어떤 알 수 없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한족의 언어도, 대륙 곳곳에 살고 있는 이족들의 언어도 아니었다.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언어였고, 그건 그 소리를 내고 있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내는 소리의 의미를 요약하자면 이런 것이었다.
태초, 물과 공기로 세상을 빚어낸 최고의 신 아후라 마즈다 아래에는 창조를 담당하는 성령인 스펜타 마이뉴와 파괴를 담당하는 앙그라 마이뉴가 있었고, 세상은 이 대립되는 두 성령이 부딪치는 순간 발생되는 창조력을 바탕으로 창조와 파괴를 반복하면서 균형 있게 유지되어갔으며, 두 세력 간의 대립과 투쟁이 계속되면서 인간은 선과 악의 투쟁 한가운데에 놓이게 되고, 결국은 종말을 향해 치닫게 될 것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페르시아어.
수천의 사람들이 내는 소리는 조로아스터교의 창세신화를 페르시아어로 말하는 것이었다. 뜻도 모르지만, 그들에게 기적을 보이는 술사들이 정해진 시간마다 절을 할 때 기도하며 외우라고 했기 때문에, 그렇게 하면 그들의 믿음은 더욱 커지고, 암흑의 신 아리만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고 했기 때문에 하는 것이었다.
사실, 그 소리를 가르쳐준 술사들조차 페르시아어를 잘 모르기 때문에 그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도 그 위의 존재들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것이다. 그리고 그 위의 존재들 역시 페르시아어를 모르기는 마찬가지였고, 혈천신교 최고의 존재인 교주에게서 전해 받고 아래로 퍼트린 것이니 참으로 우스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만약 수천의 신도들이 그 내막을 알게 된다면 어찌 될까?
아마 그들은 상관하지 않을 것이다. 믿음이란, 이성을 마비시키고, 진실이 무엇이냐와는 상관없이 그 외의 기타적인 요소를 꺼내들며 절대적 신앙을 더욱 과시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것이 맹목적 믿음이고, 광적인 신앙이며, 종교의 무서움이었다.
둥-
절을 하고 기도하는 시간이 끝났음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그러자 사람들은 다시 그들이 해왔던, 그리고 해야 할 일을 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혈천신교인가!’
건설이 진행되고 있는 구릉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 수백 장 높이의 절벽 중간 바위틈 속에서, 바위와 같은 색의 천을 뒤집어쓰고 은신한 채로 관찰을 하고 있던 백천맹 천이각의 무사는 경악과 두려움이 가득한 눈을 하고 있었다.
그가 이곳 석문으로 와서 기존의 감시자와 교대를 한 것이 이틀 전이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저 혈천신교 무리들의 모습을 지켜봐왔다. 그런데 그 모든 광경들이 그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는 것들이었다. 저런 말도 안 되게 거대한 건축물을 지으려 하는 것 자체부터 입이 벌어지는 일이었고, 그 고되고 험난하며 목숨을 담보로 하는 일에 수천 명이 웃음을 지으며 한다는 것도 놀랄 일이었다.
그들은 건축 전문가들이 아니었다. 보통 사람들이었다. 아니, 절반 이상이 혈천신교에 현혹된 병자들이었다. 그런 사람들이 소수의 전문가들이 내리는 지시에 따라 저 엄청난 건축물을 짓고 있는 것이다. 최소 하루에 열 명은 바위에 깔리거나, 기반이 다져지지 않은 성벽에서 떨어져 죽는데도 말이다.
그리고 묘시(卯時:오전 5~7시) 중순부터 일이 시작되어 두 시진마다 종이 울리고, 사람들이 중심 건물을 향해 이상한 소리를 내면서 절을 하는 것도 정말 소름 끼치는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
혈천신교에 대한 분노와 경이감까지 느끼며 몸서리를 치던 무사는 갑자기 기묘한 느낌을 받았다. 마치 누군가가 자신을 빤히 내려다보고 있는 듯한 그런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런 기분이 든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그가 은신한 곳은 수백 장 높이의 절벽. 그도 밧줄을 이용해서 이곳으로 내려올 수 있었는데, 그것도 밧줄은 이전 교대자가 가지고 갔으니 이곳으로 올 수 있는 사람은 있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누군가의 시선을 느끼다니.
‘혹시?’
무사는 절벽 아래쪽, 그리고 구릉 쪽을 세심하게 살폈다. 혹시 자신이 있는 곳을 의심스럽게 생각한 자가 있는지 확인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사람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가 않았다.
‘…….’
사람은 보이지 않고, 시선에 대한 느낌은 여전히 그의 신경을 자극하고 있어서 무사는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하늘 쪽, 밧줄이 없다면 맨몸으로는 절대 내려올 수가 없는 위쪽 절벽을 올려다보았다.
“……!”
있었다.
놀랍게도 십 장 위, 마치 도마뱀이라도 된다는 듯 직각으로 경사진 절벽 면에 웅크리고 있는 자가 무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떻게 저럴 수가 있지?’
의문은 잠깐이었다.
자신을 보고 있는 자가 누구든 같은 편은 아닐 테고, 그렇다면 무사가 우선적으로 해야 할 행동은 이곳을 벗어나는 일이었다.
휙.
덮고 있던 천에 공력을 실어 자신을 보고 있던 자에게 던졌다. 그리고 손에 각기 날카로운 비수를 움켜진 무사는 바위 아래로 몸을 날려 비수로 절벽을 찔러 몸을 고정시켰다. 그의 무공이 낮진 않지만, 이런 방법은 분명 위험하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아래쪽 절벽으로 도주하는 것이 지금으로선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파팍! 파파파팍!
밑으로 급격하게 떨어져 내리던 무사는 연속으로 비수를 벽면에 찌르며 떨어지는 가속도를 줄였다. 그리고 도망칠 수 있다는 확신은 더욱 커져갔다.
“아!”
하지만 온 신경을 속도를 조절하는 것에 집중해 떨어져 내리던 무사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를 지켜보고 있던 자가 바로 이 장 옆에서 절벽을 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달렸다.
딱 그 말 그대로였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모르지만, 그자는 절벽을 달리고 있었다.
그리고 무사가 너무도 놀라 비수로 절벽을 깊숙이 찔러 낙하하던 것을 덜컥 멈추자, 그자도 달려 내려가던 몸을 그대로 빙글 회전시키며 허공에서 우뚝 멈춰 세우고는 그대로 절벽에 착 달라붙어 무사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가까이 보니 삐쩍 마르고 볼품없어 보이는 장년의 사내였다. 하지만 그 능력은 결코 볼품없지 않았다.
‘엄청난 경공 고수다!’
이 높고 경사진 절벽을 달려 내려오다가 원하는 때에 즉각 몸을 멈출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제는 단절된 것과 다름없다 여겨지는 벽호공(壁虎功)까지 능수능란하게 펼치고 있는 고수였다.
“너 누구냐?”
지금은 혈천신교 교주의 충실한 노예이지만, 과거에는 무림 최고의 도둑인 만리신투(萬里神偸)라고 불리었던 견봉생이 물었다.
그러나 무사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는 어떻게 하면 이곳을 벗어날 수 있을까만 생각했다.
휙.
무사는 고정되었던 몸을 다시 아래로 낙하시켰다. 다른 방법이 없었다. 저렇게 묻는 것을 보면 아직 죽일 생각은 없는 것 같고, 그래서 이 찰나의 틈을 비집고 무조건 도망쳐보자는 생각이었다.
“누구냐니까?”
멈춰 세울 수 있을까 싶을 정도의 무서운 속도로 떨어지던 무사는 이 장 옆에서 절벽을 타고 달리며 묻는 견봉생의 물음에 비명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