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계 21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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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553회 작성일소설 읽기 : 파계 211화
파계 9권 - 11화
“방장 스님.”
해가 져서 주위가 어두우니 직접 숙소로 안내하겠다고 하며 방장실 밖으로 따라나온 굉덕에게 오칠이 입을 열었다.
“예, 말씀하십시오.”
“저는 내일 아침에 소림사를 떠나 산서로 갈 생각입니다.”
“문파의 사람들을 데려오시기 위해서입니까?”
무적 정의파 무리를 비롯한 오칠을 따르는 이천여 명이 모두 산서 남현에 남아 뒷수습을 하고 있는 상황이니, 오칠이 그들과 합류하기 위해서 돌아가는 것쯤은 방장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렇습니다. 해서 다른 분들에게는 방장 스님께서 잘 설명해주십시오.”
이른 아침에 떠날 생각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인사를 나눌 여유가 없을 거라고 설명하며 부탁했다.
“잘 알겠습니다.”
“그리고…….”
“……?”
“늦은 시간이기는 하지만 잠시 주변을 돌아봐도 되겠습니까? 혈향에 파묻혀 지내다 이곳 소림사에 오니 청명한 풍경과 맑은 기운을 깊이 느껴보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하군요.”
방장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시지요. 제가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아닙니다. 요 근처만 둘러볼 것이니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심려 끼쳐드릴 일은 없을 것이니 염려 놓으십시오.”
소림사의 금지에 들어가 소란 피울 일은 없을 것이라는 말이었다.
“알겠습니다. 제자들에게는 오 장문인께서 산책을 하시는 데 방해받지 않으시도록 말해두겠습니다. 그럼 제가 숙소까지만 안내해드리도록 하지요.”
방장은 오칠을 따라왔던 오십여 무리가 이미 안내받아 휴식을 취하는 선방까지 오칠과 초왕성 등을 안내해주고는 방장실로 발길을 돌렸다.
‘그런데 이 느낌은 뭐지?’
오칠을 안내해주고 돌아가던 방장은 문득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 오칠이 들어간 선방 쪽을 돌아보며 잠시 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그에게서 익숙한 느낌을 받은 거 같은데…….’
하지만 금세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리 기억을 돌이켜보아도 오칠과 같이 아름다운 미장부는 처음이었다. 더구나 그의 손에 죽은 절정의 고수들이 몇 명인가. 그와 같은 미장부에다가 저리 엄청난 고수라면 아무리 오래되었다고 해도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을 텐데, 이렇듯 느낌만 있다면 떠올릴 무엇도 없다는 말인 것이다.
방장은 곧 의문을 접고 그의 거처로 걸음을 움직여 사라졌다.
* * *
“어딜 가십니까?”
방을 나서는 오칠에게 초왕성이 물었다.
“아까 들었잖아. 산책하러 간다.”
“따라가도 됩니까?”
“왜?”
“이런 골방 같은 곳에선 달리 할 것도 없습니다.”
“마음대로 해.”
오칠이 허락하자 금철산 등도 따라가겠다며 밖으로 나왔다. 오칠은 그런 그들을 힐끔 쳐다보았다가 어깨를 으쓱이며 선방을 나서서 어딘가를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저벅저벅.
오칠이 향하는 곳은 선방과도 멀어지고, 여러 중요한 건물들이 있다는 곳과는 반대쪽 방향이었다. 방장에게 말했던 그대로 청명한 풍경과 맑은 기운을 느끼고 싶은 걸까?
하나의 소로가 나타났다. 무성한 나무들 사이로 이어져 뭔가로부터 동떨어져 있는 분위기를 풍겼다. 오칠은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그 소로를 따라 산보하듯 걸어 들어갔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가자 소로를 따라 좌우로 펼쳐진 무성한 나무들이 사라지고, 확- 하고 넓은 공간이 드러났다.
“어!”
초왕성이 생각지도 못한 광경에 놀라서 입을 벌렸고, 매 자매는 눈앞에 펼쳐진 모습에 감탄성을 터트렸다. 금철산과 사두문 대장들도 걸음을 우뚝 세우고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멋지지?”
오칠은 뒤를 돌아보고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가 이곳에 대해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는 듯 말했지만, 초왕성 등은 미처 그 의미를 깨닫지 못했다. 그저 눈앞의 광경을 감탄스런 시선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휘유우~
부드러운 바람이 불었다. 그들의 눈앞에는 보름달의 은은한 빛이 영롱하게 비춰드는 대지 위로 크고 작은 탑들이 곳곳에 세워져 있었다. 달빛의 어두운 틈새로 드문드문 보이는 둥그런 모양은 누군가가 묻혀 있을 무덤이었고, 그 모습들은 음침하다기보다는 고즈넉하고 여유로운 느낌을 발산했다.
탑림(塔林).
그들의 앞에 나타난 곳은 소림사 역대 고승들의 묘와 석탑이 나무처럼 늘어서 있는 탑림이었다. 그리고 과거 오칠이 광인처럼 살면서 가는 실과 같은 희망을 부여잡고, 모진 삶을 이어가며 지냈던 곳이기도 했다.
‘예전에는 이곳의 모습을 이렇게 볼 수 없었지.’
어떻게든 살기 위한 방도를 모색했고, 남몰래 무공을 익히는 것만 해도 정신이 없었다. 한시라도 방심했다가는 광인을 연기하는 것이 들킬까 봐 더욱더 마음이 척박하기만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탑림의 아름다운 풍경을 보이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가 있었다. 그래서 이곳으로 올 생각을 했는지도 모른다. 과거의 기억 속에서 자신은 어떠한 마음이었는지, 그리고 지금은 어떻게 그때를 추억하는지 알기 위해서 말이다.
‘추억?’
진정 추억을 하는 걸까? 아니면 그저 과거의 기억을 떠올려보며, 제대로 있는지도 의심스러운 감정의 여린 줄기를 잡아당겨 보려는 걸까? 그것도 아니면…….
저벅저벅.
오칠은 발걸음을 움직여 과거에는 익숙했던 탑림 사이의 길을 걸어갔다. 그리고 어느 한 비석 앞에 멈춰 섰다.
“비석은 많은데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아서 누구의 것인지 알 수가 없잖아.”
사두문 대장 중 한 명인 양만청이 불만스럽다는 듯 말했다.
“뭔가 적혀 있으면 읽을 수는 있냐?”
구장질이 별 웃기는 소리를 다 듣는다는 듯 타박했고, 양만청은 너야말로 제 이름도 쓰지 못하는 눈뜬장님이 아니냐며 화를 냈다. 만약 금철산이 조용히 하라고 눈을 치켜뜨지 않았다면, 두 사람은 바닥을 뒹굴며 싸웠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곳에 대해 알고 계셨나요?”
영리한 매적화가 오칠의 모습에서 뭔가 느낀 것이 있는지 조용히 물었다. 그러나 오칠은 고개를 내저을 뿐, 아무 설명도 해주지 않았다. 오칠이 말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걸 안 초왕성 등은 그냥 묵묵히 지켜보기로 했다.
‘난 달라졌는데 노스님은 여전히 그대로군요. 죽음이란 끝이 아니라 영원이 변하지 않게 되는 겁니까?’
오칠은 노승의 유골과 사리가 묻혀 있는 묘비를 바라보며 물었다. 하지만 대답이 들려올 리가 없었다.
‘어떠신가요? 그때 노스님의 말씀처럼 해탈하여 극락에서 지내고 계실 테죠? 좋으신가요? 사바를 떠나 마음을 속박하고 있는 사랑, 분노 등의 집착을 가지지 않아서 좋으신가요? 전 아직 모르겠습니다. 감정이 메말랐지만, 예전과 다름없이 집착은 버릴 수가 없습니다.’
여전히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하지만 오칠은 어느 날 노승과 나누었던 사바에 대한 대화를 떠올렸다.
‘이곳이 사바라 하지만, 지옥에 있는 이들에 비하면 좋은 것이기 때문에 그들은 이곳을 동경하겠지요? 그래서 우리가 상대적으로 정토를 동경하는 것이겠지요? 근데 전 왜 그러고 싶은 마음이 없죠? 전 그냥 오래오래, 풍족하게 사바에서 살고 싶기만 해요.’
오칠은 그렇게 말했고, 노승은 별소리를 다 듣는다는 듯 한 가지 이야기를 해주었다.
‘옛날 한 성인에게 제자가 너와 비슷한 질문을 했다. 그러자 성인은 이렇게 말했다. 사바에 사는 우리 범부들은 헤매고 있는 것이다. 깨달음을 얻고자 헤매고, 그렇게 헤매기를 반복하다 보니 저도 모르게 집착을 하게 되는 것이지. 하지만 시간이 지나게 되면 헤매는 것은 절로 해결되고, 집착도 모래성처럼 허물어지게 될 것이며, 그때는 자연히 정토로 가게 될 것이니 걱정하지 마라, 라고 말이다.’
노승의 말을 주인공은 당연히 수긍하지 못했다. 그때는 노승의 모든 말들에 수긍할 수가 없었으니까. 그렇다면 지금은?
‘여전히 모르겠습니다.’
오칠은 피식 웃었다. 가르친 것도 아직까지 이해 못하는 정말 못난 제자를 살리기 위해 노승이 자신의 목숨을 희생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래서 스스로를 비웃은 것이다.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한 가지뿐입니다.’
오칠은 비석 앞에서 두 손 합장을 하고는 눈을 감았다.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 사리자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 사리자 시제법공상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시고공중무색 무수상행식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
오칠은 염불을 읊조렸다. 노승의 염불 소리를 너무 많이 들어서 귀에 박혀버린 염불을, 노승이 죽고 수년이 흐른 뒤에도 여전히 머릿속에 또렷이 기억된 염불을 그냥 아무런 감정도 없이 외웠다. 그것이 오칠이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오칠은 수년 만에 돌아와 노승에게 그만의 인사를 드렸다.
제85장. 오래된 은원(恩怨)
소림사로부터 빠른 말로 이틀 거리에 위치한 하남 동북쪽 활현(滑縣).
오칠은 무리와 함께 소림사를 나와서 백설총을 비롯한 오십여 마리의 말 무리를 가지고 활현에서 기다리고 있던 은형대 칠 조장을 만난 뒤 하북 북경으로 이동했다.
왜?
경모혁으로부터 급작스럽게 한 가지 첩보를 전해 받았기 때문이다. 어떤 상황과 계획에서든 일어날 수 있는 변수 하나가 발생했다고나 할까. 그래서 사안의 중대함을 감안해서 오칠이 직접 손을 쓰기로 한 것이다.
“으리으리하군.”
북경에 도착한 오칠과 그 무리는 곧바로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커다란 거각을 찾아 그 뒷문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이틀 동안은 아무 일 없이 조용했다. 늘 그런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거각을 들락거렸지만, 그 어디서도 오칠과 그 무리의 흔적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 * *
‘혼자 들어가서 깔끔하게 죽이는 게 편한데.’
견봉생은 달도 별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구름이 짙게 깔린 덕분에 사위가 칠흑같이 깜깜한 어둠 저편 어딘가를 응시하며 속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주인이 명령한 것은 그렇게 간단한 수준이 아니었다. 피가 튀고, 살이 찢겨나가고, 그래서 그들이 포섭한 정 태사(太師)까지도 겁을 먹을 정도로 화끈하게 처리하고 오라는 것이 그의 주인이 지시한 명령의 요점인 것이다.
‘시끌시끌해지는 것이야 정 태사가 알아서 해결하겠지만…….’
괜히 일을 복잡하게 만들 필요가 있을까, 하는 불만이 그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종이었다.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는 충견과 같은 종자인 것이다.
“준비해.”
뒤쪽에 흑의 복면을 한 백여 명의 무리가 흑탄을 칠해 빛이 반사하지 못하도록 한 도를 일제히 뽑아들며 다음 명령을 기다렸다. 혈령대(血靈隊)에서도 암살에 능한 자들로만 골라와 무사들의 움직임과 기세가 예사롭지 않았다.
‘뭐, 이런 것도 재미라고 할 수 있겠지.’
암살단 무리를 이끌고, 나라의 고관저(高官邸)를 유린하는 일이 어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겠는가.
“간다.”
견봉생은 북경의 한쪽, 보통 거주지와는 동떨어진 지역, 보통사람들은 감히 쳐다보기도 두려워하는 삼공(三公) 정일품 염 태보(太保)의 집을 향해 몸을 날렸다.
휘우우우-
허공을 내딛는 한 걸음 한 걸음마다 견봉생의 신형은 대여섯 장씩을 일순간에 줄여버리며 어두운 하늘을 날았고, 그 아래로 백여 명의 혈령무사들이 바닥으로 몸을 낮게 깔고 내달렸다.
스스스스스.
마른 풀잎이 발끝에 걸려 흔들리는 소리만이 어두운 공간을 미세하게 채워가고, 혈령무사들은 순식간에 작은 횃불이 드문드문 켜져 있는 커다란 정문 앞에 당도했다.
샤악- 샤샤샤악-
빛에 반사되지 않는 도광들이 커다란 문을 빗겨 흘러가고, 미끈한 소리와 함께 사분오열된 문이 뒤로 넘어갔다.
쿠당탕탕!
조용한 어둠 속에서 울리는 소리는 더욱 커다란 소음으로 울려 퍼지는 법. 혈령무사들이 조각난 문 안으로 진입한 순간, 수십 명의 경비무사들이 우르르 뛰쳐나왔다.
“죽여.”
짧고 단호한 명령이 정문의 처마 끝에서 흘러나왔다. 공중을 날아와 처마 끝에 내려선 견봉생의 음성이었다.
스악-
“컥!”
“큭!”
날카롭게 베어지는 소리와 함께 비명들이 난무했다. 그리고 십수 명이 순식간에 바닥을 나뒹굴며 땅바닥을 선명한 붉은색 선혈로 뒤덮어갔다.
“뭐……!”
견봉생은 잠시 동안 할 말을 잃었다. 죽이라는 명령에 따라 혈령무사들이 먼저 공격을 시작했지만, 정작 죽고 있는 것은 경비무사들이 아니라 혈령대 무사들이었기 때문이다.
‘함정이구나!’
정확히 누가, 어떤 세력이라는 구체적인 유추는 할 수 없었지만 견봉생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정 태사의 정적(政敵)이 된 염 태보를 죽이려는 것은 그들 스스로가 세운 계획이었지, 누군가가 의도한 꼬임이 아니었다. 그러니 견봉생이 생각하는 함정과는 거리가 먼 상황인 것이다.
다만, 강북으로 진출한 혈천신교 무리로부터 빠져나온 견봉생과 혈령대 백여 명을 탐지했다는 보고를 받고서 경모혁이 염 태보의 위험을 감지했고, 그래서 오칠 등이 그 암살을 막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을 두고 함정이라고 한다면 달리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어쨌든 암살에 능한 자들로만 선발되어온 혈령무사들은 초왕성과 금철산, 사두문 대장들, 그리고 매 자매 등을 비롯한 오십여 고수들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며 급격하게 숫자가 줄어들고 있었다. 혈령무사들이 숫자가 두 배나 많았지만, 오칠에게서 전수받은 강력한 배화교의 무공을 바탕으로 공격을 펼치는 금철산 등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엄청난 파괴력으로 사방을 종횡무진하며 몰아치는 초왕성이 혈령무사들의 기세를 내리누르며 죽음의 나락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안 되겠다.’
견봉생은 혈령무사들이 얼마 안 있어 전멸하게 될 것임을 직감하고 슬며시 몸을 감췄다. 하지만 물러나기 위함이 아니라, 그 혼자서라도 염 태보를 암살하기 위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