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천화 17화
무료소설 귀환천하: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574회 작성일소설 읽기 : 귀환천화 17화
17화
혁무천은 걸음을 옮기며, 배에서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하루 전 화양진에 머물렀을 때 무사 네다섯 명이 올라탔다.
가만히 앉아있는데 그들이 나누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백마궁에서 갑자기 왜 무사를 모집하는지 모르겠군.”
“무사 모집하는 게 어디 어제오늘 일인가?”
“전과는 많이 다르니까 그렇지.”
“뭐가 달라?”
“간부급 고수도 뽑을 거라고 하네. 장로도 뽑고.”
“그래? 그럼 이 참에 나도 간부를 신청해볼까?”
“꿈 깨. 자네 실력으로 간부는 무슨.”
“뭐? 자네 지금 나를 무시하는 거야?”
“무시하는 게 아니라, 현실을 직시하라는 거지.”
“내 현실이 어때서?”
“제명에 죽고 싶으면 내 말 들어, 이 사람아. 요즘 분위기가 흉흉한 거 몰라? 얼마 전에 백마궁의 육안 분타가 정체 모를 자들에게 습격을 당해서 피로 물들었다고 하잖아. 그때 오십 명 넘게 죽었다고 하더군.”
“그, 그게 사실이야?”
“백마궁에 있는 내 동생에게 들은 이야기야. 아마 이번의 대대적인 무사 모집도 그 일 때문인 거 같네.”
대대적으로 무사를 모집한다는 것은 그만큼 많은 사람이 필요하단 말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모이면 그만큼 경계가 허술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잘하면 의심받지 않고 들어갈 수 있겠군.’
덕분에 백마궁으로 향하는 혁무천의 발걸음도 조금은 가벼워졌다.
천주산으로 향하는 길에는 무성한 갈대밭이 펼쳐져 있었다.
은빛 물결이 춤추는 갈대를 벗 삼아서 삼십 리쯤 걷자, 저 멀리 병풍처럼 펼쳐진 산맥군이 보였다. 대별산맥의 동쪽 끝에 백 리 길이로 펼쳐진 천주산이었다.
그런데 천주산을 바라보며 걸음을 옮기던 혁무천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길가에 잡초로 뒤덮인 폐가가 있었다. 지붕이 내려앉은 폐가는 반쯤 무너진 담장만 앙상하게 남은 상태였다.
바로 그 폐가의 담장 아래에 몇 사람이 앉아 있었다.
모두 넷. 그 중 무기를 지닌 자는 셋이었다. 나이는 주로 이십 대와 삼십 대로 보였다.
백마궁으로 향하는 길에 무기를 지닌 무사들. 아마 그들 역시 백마궁으로 가는 길일 가능성이 컸다.
그들은 모닥불을 피우고서 뭔가를 굽고 있었는데, 혁무천과 동대안을 발견하고 고개를 들었다.
“백마궁에 가는 길인가?”
삼십 대 중반의 나이로 보이는 자가 물었다. 둥근 얼굴에 눈매가 무척 선하게 보이는 자였다.
“그렇소.”
동대안이 대답하고는 모닥불 위에서 돌아가고 있는 물체에 시선을 주었다.
몸길이가 대략 두 자 반 정도 되는 짐승이었는데, 통통한 살이 노릇노릇 구워져서 먹음직스럽게 보였다.
“우리도 백마궁으로 가는 길이네. 먹고 싶으면 이리 오게나. 고기는 넉넉하니까.”
동대안이 슬쩍 혁무천의 눈치를 살폈다.
오시쯤 배 안에서 나누어준 음식을 먹긴 했다. 하지만 맛도 없었고 양도 많지 않았다.
지금쯤은 배가 꺼질 시간. 고기를 보니 입안에 침이 고였다.
혁무천은 그에 답하듯 몸을 돌려서 담장 쪽으로 걸어갔다.
둘보다는 여섯이 나았다. 게다가 최소한 자신들보다는 경험이 많을 것이다.
“이름이 뭔가?”
혁무천과 동대안이 한쪽에 앉자, 가장 나이가 많을 것 같은 삼십 대 후반의 중년인이 물었다.
짙은 갈색 장포를 걸친 그는 체구가 작았다. 그러나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노려보는 눈빛에는 호랑이도 도망치게 만들 강한 힘이 실려 있었다.
“동대안이외다.”
“자네 말고.”
중년인의 딱딱한 말투에 동대안이 입술을 씰룩였다.
“무천이오.”
혁무천은 무심한 목소리로 대답하고 모닥불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중년인이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나는 숙주의 백도강이네. 강호의 친구들은 냉홍검이라고 불러주지.”
그는 자신의 이름과 별호를 말하고 혁무천과 동대안의 반응을 살펴보았다.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나름대로 놀란 표정을 기대했거늘.
안휘성 북부 숙주일대를 종횡하며 별호를 얻은 그는 자존심이 상했다.
‘강호에 나온 지 얼마 안 된 애송이들인가?’
그때 처음 말을 걸었던 자가 불쏘시개로 다른 두 사람을 가리키며 말했다.
“나는 염호랑, 여기 이 친구는 관악, 그리고 저기 앉아서 고기가 구워지기만 기다리고 있는 친구는 고군상이라고 하네.”
관악이란 자는 색이 바랜 청의를 입고 있는데 이십 대 후반 정도로 보였다. 커다란 칼을 등에 맨 그는 덩치가 큰데다 우직하게 보이는 인상이었다.
반면 고군상이란 자는 말수가 없고 눈이 가늘어서 차갑게 느껴지는 인상이었다. 그는 마른 풀을 입에 넣고 질겅거리며 혁무천을 바라보기만 했다.
“이곳으로 오면서 만난 친구들이지.”
염호랑이 말을 맺으며 한 자 길이 소도로 고기를 잘랐다. 김이 무럭무럭 나는 고기는 적당히 익어서 먹음직스러웠다.
그는 잘라낸 고기를 넓적한 돌판 위에 놓고 소금을 잘게 부수어서 뿌렸다.
“정체를 말하기 싫다면 하지 않아도 되네. 요즘 세상에 알려지는 걸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한둘인가?”
마도가 천하를 움켜쥐었다. 정파에 속했던 가문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알려지는 걸 원치 않았다.
마도와 어울려서 살아가려면 어쩔 수 없었다.
“다 익었으니 먹자고.”
염호랑이 익숙하게 고기를 베어내며 말했다.
잠깐 사이 익은 부위를 손바닥만 하게 베어 놓은 고기가 십여 점은 되었다.
단지 소금만 뿌렸을 뿐인데도 고기의 맛은 의외라 할 만큼 좋았다.
고기 한 점을 천천히 먹어치운 혁무천이 넌지시 물어보았다.
“백마궁에 대해서 잘 아시오?”
염호랑이 다시 고기를 썰며 답했다.
“뭐, 잘 안다기보다 두어 번 가봤지.”
“굉장히 크다던데.”
“당연히 크지. 명색이 마도십문 아닌가?”
“내가 본래 길치여서 백마궁에 가면 길을 잃을지 모르니 건물 위치 좀 대략적으로라도 알려주시오.”
염호랑이 혁무천을 힐끔 쳐다보았다.
하늘도 공평하시지.
얼굴도 잘생기고 몸도 좋아서 조금은 질투심마저 들었다. 그런데 자신보다 못한 게 있다니.
“그거야 어렵지 않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한 염호랑이 불을 뒤적이던 꼬챙이로 바닥에 그림을 그렸다.
혁무천 뿐만 아니라 동대안과 백도강, 관악, 고군상도 고개를 쑥 내밀고 그림을 주시했다.
염호랑은 더 신이 나서 쓱쓱 선을 그었다.
“여기가 바로 백마전이네. 그리고 이렇게 건물 네 개가 백마전 주위에 있는데…….”
백마궁의 건물은 큰 것만 이십여 채나 되었다.
무사 일천에 하인들까지 천오백 명이 기거한다고 했으니 그 정도 건물이 필요한 것도 당연했다.
혁무천은 염호랑이 그리는 그림을 유심히 머리에 새겼다.
뇌옥의 위치는 물어보지 않았다. 물어보면 의심만 살 뿐. 일단 뇌옥이 아닌 건물만 알아도 뇌옥을 찾기가 그만큼 쉬워지지 않겠는가 말이다.
그런데 염호랑이 마지막쯤에 두어 곳을 쿡쿡 찍었다.
“여기와 여긴 될 수 있으면 가지 않아야 하네. 경비가 삼엄해서 멋모르고 가까이 접근했다가는 곤욕을 치룰 수 있거든.”
“비밀스런 곳인가?”
백도강이 중얼거리듯 한마디 했다.
바닥을 쿡쿡 찍고 있던 염호랑이 묘한 표정으로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정확하지는 않은데, 이 중 한 곳은 아마도 감옥이 있는 곳 아닌가 싶소. 하긴 감옥도 비밀스런 곳이긴 하오만.”
순간적으로 눈빛을 반짝인 혁무천이 무표정한 얼굴로 고마움을 표했다.
“자세히 알려줘서 고맙소. 염 형의 설명만 잘 기억하고 있어도 길을 잃는 일이 적어질 것 같군요.”
“하하하, 어차피 들어가면 알게 될 텐데 뭐…….”
염호랑이 쑥스러운 표정으로 대답하고는 다시 고기를 자르기 시작했다.
***
백마궁은 천주산 초입에서도 삼십 리는 더 들어가야 했다.
지리를 잘 모르는 혁무천과 동대안만 갔다면 헤맸을지 모를 만큼 가는 길이 복잡했다.
해가 서산 위로 떨어질 무렵.
완만한 언덕을 넘자, 드넓은 분지에 들어선 전각군이 모습을 드러냈다.
백마궁이었다.
석양 때문인지 염호랑이 말한 것보다 더 거대하게 느껴졌다.
언덕 아래 저만치, 그들보다 한 걸음 앞선 자들이 거대한 백마궁을 향해 다가가는 게 보였다.
여섯 사람도 언덕을 내려갔다.
정문은 언덕을 내려가서도 백여 장 정도 더 가야만 했다.
그들이 다가가자, 정문을 지키던 위사가 앞으로 걸어 나오며 앞을 막아섰다.
“무사에 지원하려고 왔소?”
“그렇소이다.”
염호랑이 대표처럼 대답했다.
“그럼 저쪽으로 가서 이름과 사문, 거주했던 지역을 적으시오. 그 후 간단한 시험을 통과하면 배치가 될 때까지 지낼 곳을 알려줄 거요.”
여섯 사람은 정문위사가 가리키는 곳으로 갔다.
서기가 탁자 앞에 따분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탁자 위에는 명부가 펼쳐져 있고, 먼저 온 세 사람이 자신들의 출신과 이름을 기재하는 중이었다.
차례가 돌아오자, 백도강을 필두로 한 사람, 한 사람 명부에 필수사항을 기재했다.
혁무천은 다섯 번째로 붓을 잡았다.
이름, 혁천.
고향, 경덕진
사문, 조부에게 가전 무공 사사.
서기가 혁무천의 얼굴을 빤히 보며 감탄과 질시의 표정으로 말했다.
“계집들이 줄을 서겠군. 얼굴에서 광이 나네, 광이 나.”
혁무천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속으로는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음부터는 변용을 하고 다닐까?’
대법을 마친 후 몇 살 더 젊어진 듯 보이는 거야 그러려니 했다. 하지만 피부가 이렇게까지 변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소하민만 해도 그렇고, 앞으로도 귀찮은 일이 계속 생길지 모른다.
붓을 내려놓은 혁무천은 엉뚱한 고민을 하며 옆으로 비켜섰다.
동대안이 마지막으로 붓을 들었다.
이름, 동대안.
고향, 사천.
사문, 외조부에게 사사.
지켜보고 있던 서기가 눈을 가늘게 뜨고 동대안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앞이 보이긴 하오?”
동대안은 서기의 눈을 확 빼버리고 싶은 충동을 누르고 담담히 답했다.
“아마 당신보다는 더 눈이 좋을 거요.”
사실이 그랬다. 그는 남들이 볼 수 없는 곳까지 볼 수 있었다.
“그 눈으로? 신기하군.”
서기가 정말 신기하다는 듯 눈을 깜박이며 말했다.
동대안은 다시 한 번 인내심을 발휘했다.
혁무천만 옆에 없다면 섬혼을 뽑아서 서기의 눈에 구멍을 내주었을 텐데…….
그런데 서기가 또 말했다.
“어떻게 콧구멍보다 눈구멍이 더 작은 것 같네.”
이 개시끼를!
동대안이 막 섬혼을 잡아가려는데, 소매가 어디에 걸린 듯 움직여지지 않았다.
슬쩍 보니 혁무천이 소맷자락을 잡고 있었다.
겨우 마음을 가라앉힌 동대안이 역공을 취했다.
“거, 서기를 하면 한달 녹봉을 얼마나 받소?”
“녹봉? 이것저것 다 제하고 은자 석 냥은 받지. 어디 가서 일해도 이만큼 받기 힘들다네.”
“은자 석 냥도 돈이라고…… 험, 그 돈으로 먹고 살려면 힘들겠군요. 부인이나 자식들이 원망은 하지 않소?”
“원망을 왜 한단 말인가?”
“왜 요즘 부인들이 그런다잖소. 옆집 누구는 얼마를 버는데 당신은 겨우 코 묻은 돈 벌어오냐고 말이오.”
“석 냥도 적은 게 아니라니까?”
서기의 목소리에 살짝 날이 섰다.
누구든 자신의 봉급을 무시하듯 말하면 기분이 상하는 법이다.
그런데 그 역시도 부인에게 그런 말을 들어본 적이 있어서 더욱 더 기분이 좋지 않았다.
거기다 대고 동대안이 마지막 한방을 날렸다.
“버는 돈도 적고 그거까지 작으면 더 대접을 못 받는다고 하던데, 보아하니 그것도 별로인 것 같고…….”
“이 친구가 진짜!”
서기가 얼굴이 벌게져서 벌떡 일어났다.
안 그래도 그거 때문에 지난 십 년 동안 구박만 받았다.
그런데 남에게 그 말을 들으니 그 동안 쌓인 열불이 한꺼번에 터졌다.
“눈깔이나 아니나 콩만 한 것이 뭐가 어째?”
동대안도 눈을 치켜떴다.
“뭐요? 콩? 어디 내 눈 만큼 큰 콩 있으면 갖고 와보쇼! 확 그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