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천화 1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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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352회 작성일소설 읽기 : 귀환천화 16화
16화
“사람을 죽이는 일이오.”
“…….”
동대안의 표정이 다시 어두워졌다.
그는 사람을 죽여본 적이 없었다. 죽이는 방법은 수십 가지나 익혔지만.
그럴 수밖에. 살법을 익힌 후 십 년 동안 한 곳에 처박혀 있었으니까.
“그거 말고 다른 일은……?”
“내가 바라는 일은 한 가지뿐이오. 하지만 너무 걱정하진 마시오. 선한 사람을 죽여 달라는 것은 아니니까.”
악한 사람을 죽여 달라는 거라면 그나마 나았다.
“누구를 죽여 달라는 거요?”
“맹등평.”
“맹등평?”
동대안은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어차피 들어본 이름이 많지도 않았지만.
아마 강호인 중 아는 이름을 늘어놓으라고 하면 스무 명도 채우기가 힘들 것이다.
“악한 자요?”
“내가 아는 한, 그는 열 번 죽어도 시원찮을 만큼 많은 악행을 저질렀소.”
“뭐, 그럼 다행이긴 한데…… 왜 그를 죽여 달라는 거요?”
“그자가 내 형의 가족을 죽였소.”
사실이라면 당연히 죽이고 싶겠지.
동대안도 그의 마음을 이해했다. 들어준다 해도 마음에 부담이 가지는 않을 듯했다.
그래서 흔쾌히 대답했다.
“좋소, 내가 그를 죽여주겠소.”
그때만 해도 그는 맹등평의 정체를 알지 못했다.
그런데 은설이 말했다.
“강 아저씨, 혹시 그 맹등평이란 사람, 중원팔마 중의 유혼마 맹등평을 말씀하시는 거 아니에요?”
“맞다.”
강수평이 한마디로 대답하고는 동대안을 바라보았다.
“그럼 약속을 했으니 이제부터 그 섬혼은 그대 것이오. 당신이 남자라면 약속을 지킬 거라 믿겠소.”
동대안은 작은 눈을 깜박거렸다.
왠지 크게 손해 본 느낌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죽여야 할 사람이 팔마라는 자들 중 하나란 말이지?’
***
혁무천 일행은 구강에서 하루를 쉰 후 덕안으로 갔다.
파양호 호반을 끼고 있는 덕안은 구강에서 남쪽으로 백 리쯤 떨어진 곳에 있는 제법 큰 마을이었다.
덕안에 도착한 은설은 강수평의 호가 친구를 찾아보았다.
이름은 호궁, 나이는 사십 대 중반.
그는 덕안의 황수객잔 주인으로 살고 있었다.
호궁은 혁무천 일행을 후원의 내실로 안내했다.
강수평의 추천을 받고 왔다면 조심에 조심을 거듭해도 모자랐다.
자신의 정체를 알고 왔을 테니까.
하지만 은설의 말을 듣고, 자신의 정체 따위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네가 은 형의 딸이란 말이지?”
“예, 맞아요.”
“어떻게 여길……?”
“아버지의 행방을 찾기 위해서 왔어요.”
“이런…….”
“말씀해주세요. 아버지는 어떻게 되신 거예요?”
“나도 정확히는 모른다.”
“아저씨가 아버지를 비밀단체에 소개하셨다면서요?”
순간적으로 호궁의 눈빛이 흔들렸다.
은설이 그걸 놓치지 않고 추궁하듯 말했다.
“아니라고 말씀하지 마세요. 강 아저씨에게 다 듣고 왔으니까요.”
“그래, 내가 은 형을 그들에게 추천했다. 하지만 사실 나도 그들에 대해서 잘 모른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추천했다는 거예요?”
“은 형이 부탁했다. 자신이 뭔가를 할 수 있는 정파를 알려달라고. 그래서 우연히 알게 된 단체를 알려주었지. 그게 전부다.”
“정말 모르세요?”
“알면 왜 말해주지 않겠느냐?”
그때 혁무천이 한마디 끼어들었다.
“거짓말이 능숙하군.”
호궁이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려 혁무천을 바라보았다.
“무슨 근거로 내 말이 거짓이라는 건가?”
“거짓이니까.”
혁무천이 확신하듯 단정적으로 말했다.
호궁이 발끈해서 소리쳤다.
“뭐야? 이 사람이!”
은설이 그런 호궁을 빤히 보며 혁무천을 거들었다.
“오빠가 거짓이라면 거짓이에요. 아저씨는 지금 제게 거짓말을 하고 있어요.”
“흥! 은 형의 딸이라 해서 친절을 베풀고자 했거늘, 네가 지금 나를 모욕하겠다는 거냐?”
호궁이 코웃음치며 강하게 나왔다.
그러나 은설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호궁의 말보다 혁무천의 말을 더 믿었다.
“저는 지금 어디론가 사라진 아버지를 찾기 위해서 왔어요. 아버지가 사라지신 동안 어머니도 돌아가셨죠. 아버지를 찾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어요.”
“그만 가봐라! 나는 더 이상 너와 말하고 싶지 않다!”
호궁이 버럭 소리치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나 반도 못 일으키고 엉거주춤한 자세로 멈춰 섰다. 어느새 그의 어깨에는 혁무천의 손이 올려져 있었다.
“않으시오. 아직 대화가 끝나지 않았으니까.”
호궁은 혁무천의 힘에 대항하며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도 일류 수준의 무공을 익히고 있었다. 세상에 드러나는 것이 두려워서 객잔의 주인으로 행세하고 있는 것일 뿐.
그러나 일어나기는커녕 오히려 혁무천의 손짓을 따라 다시 의자에 앉혀졌다.
호궁은 속으로 식은땀이 흘렀다.
마치 만근 바위가 어깨를 짓누르는 듯했다.
그저 평생 두 번 보기 힘들 정도로 잘생긴 놈인 줄로만 알았는데, 강호의 고수였다.
자신이 정체를 밝히고 전력을 다한다 해도 상대하기 힘든 고수.
“아무리 네가 뭐라 해도 나는 더 할 말이 없다.”
“먼저 그 단체의 이름부터 말해주세요.”
“모른다니까.”
“아저씨는 알고 있어요.”
“글쎄…….”
“말해주세요. 아버지를 찾을 수 있게요.”
은설이 눈물 가득한 눈으로 그를 보며 말했다.
호궁은 입을 꾹 다물고 눈을 돌렸다.
그도 말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말해주면 자신이 그동안 쌓아온 모든 것이 무너질지 몰랐다.
그때 동대안이 넌지시 말했다.
“설아야, 내가 알아볼까? 고문이라면 자신 있는데.”
은설은 고개를 저었다.
“아버지의 친구분이세요. 고문은 안 돼요.”
“일각이면 충분한데, 안 된다면 어쩔 수 없지. 그래도 정 입을 안 열면 나에게 말해. 힘줄 몇 개 뽑고 뼈마디 몇 개 뒤틀어 놓으면 지워진 기억도 되살아 날 거다.”
호궁은 장난스럽게 들리는 동대안의 말에 모골이 송연해졌다.
그저 꼬마아이가 나비의 날개를 잡아 뜯는 것처럼 태연한 말투, 표정이었다. 그래서 더욱 두려웠다.
은설이 그런 호궁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저를 나쁜 아이로 만들지 마세요.”
“정말 몰라서 그런 거…….”
“계속 그러시면 저도 어쩔 수 없어요, 아저씨. 정말 마음에 안 들지만, 정말 하고 싶지 않지만, 아버지를 찾을 수 있는 방법이 그것뿐이라면…….”
“…….”
“설아야, 잠깐 나가 있어라. 나와 동 형이 알아보마.”
“오빠…….”
“나가 있어. 피를 볼지 모르니까.”
입술을 깨문 은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호궁의 눈이 심하게 흔들렸다.
자리에서 일어난 은설이 그를 지그시 바라본 후 몸을 돌렸다.
“알았어요. 나가 있을게요. 그래도 너무 심하게 대하지는 말아주세요.”
“죽이지는 않을 거다. 그래도 네 아버지의 친구였던 사람이니까.”
“정말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은데…….”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고는 걸음을 옮기자, 호궁이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는 고문을 하겠다는 동대안보다 담담히 말하는 혁무천이란 자가 백배는 더 두려웠다.
하늘이 무너져도 자신이 할 일을 끝까지 할 것처럼 보이는 자.
저런 자에게는 그 어떤 거짓말도 통하지 않을 듯했다.
“후우우우, 알았다. 사실대로 말해주마. 대신 약속해라. 나에게 들었다는 말을 누구에게도 하지 않겠다고.”
은설이 걸음을 멈추고 돌아섰다.
“걱정 마세요. 절대 다른 사람에게는 말하지 않을 테니까요.”
그제야 호궁이 씁쓸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네 아버지에게 소개시켜 준 단체는 정은맹이라는 곳이다.”
혁무천은 정은맹이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며칠 전 일이 떠올랐다.
‘그래, 그들도 맹이라고 했지.’
서원청과 감수명이 나눈 이야기에 ‘맹’이라는 단어가 나왔었다.
정파의 단체 중 ‘맹’이라는 곳이 여기저기 널려있지 않은 이상 의심해볼 이유는 충분했다.
호궁은 이후로도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을 다 말해주었다.
그렇게 일 각 정도, 이야기가 끝날 즈음 호궁이 은설을 측은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네 아버지는…… 지금 백마궁에 갇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은설의 눈빛이 세차게 흔들렸다.
혁무천의 눈도 가늘어졌다.
‘묘한 인연이군.’
백마궁의 소궁주라는 자를 만난 게 불과 며칠 전 아닌가.
그런데 또 다른 이유로 그들과 다시 엮인 것이다.
“확실해요? 왜 아버지가 백마궁에 갇혀 있는 거죠?”
“나도 한 달 전에 언뜻 들은 것이어서 정확한 것은 모른다.”
“혹시 임무인가 뭔가 때문에 갇힌 거 아니에요?”
“으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구나.”
“아저씨에게 그 말을 해주었다는 분은 어딜 가야 만날 수 있죠?”
은설은 가슴이 미어질 것처럼 아픈 와중에도 핵심을 짚어나갔다. 호궁에게 그 말을 해준 자를 찾으면 좀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러나 호궁의 대답은 그녀의 바람을 여지없이 무너뜨렸다.
“그 친구, 보름 전에 죽었다.”
혁무천 일행은 들어간 지 반시진쯤 지났을 때 객잔을 나왔다.
은설은 어깨가 축 처져 있었다.
“오빠, 제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요?”
상대가 백마궁이라면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구해야지.”
“다른 곳도 아닌, 마도십문 중 하나인 백마궁이에요. 보나마나 깊숙한 곳에 갇혀 있을 텐데 어떻게 구해요?”
“너는 구강의 대장간에 가 있어라. 백마궁에는 내가 가볼 테니까.”
“저도 함께 갈래요.”
“네가 가봐야 도움은커녕 방해만 된다.”
사실이 그랬다.
은설도 모르지 않았다. 그런데도 은설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래도 갈 거예요, 이곳에서 무작정 기다리기는 싫어요.”
“아버지를 구하는 일이 그만큼 어려워질 텐데도?”
“그건…….”
은설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녀도 자신으로 인해 아버지 구출이 어려워지는 것은 원치 않았다.
“정말 제가 가지 않으면 구할 수 있어요?”
“해보는 데까지 해보마. 소항진 말에 의하면 백마궁이 천주산에 있다 했으니 그리 먼 곳도 아니다.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다.”
입술을 깨문 은설은 그제야 고집을 꺾었다.
“알았어요. 그럼 부탁드릴게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인 혁무천이 고개를 돌려서 동대안을 바라보았다.
동대안은 고문을 못한 것이 아쉬운 듯 손가락 마디를 꺾으며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진짜 고문을 했으면 힘줄을 뽑아냈을지도…….
“동 형, 은설을 안전한 곳에 머무르게 한 후 함께 갑시다.”
“나보고 함께 가자고?
“싫으면 마시고.”
이제 혁무천은 동대안을 움직이기 위해서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아니, 싫다는 건 아니고…….”
동대안이 어물거리며 눈알을 굴렸다.
너무 위험한 일이다.
정 때문에 목숨 거는 일을 하라고?
머리를 요리조리 굴려보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손해 보는 장사였다.
혁무천이 그의 마음을 눈치 채고 은근슬쩍 한마디 보탰다.
“그리 위험하지는 않을 거요. 안 되겠다 싶으면 곧바로 빠져나올 거니까.”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못한다고 하기도 그렇고…….
동대안은 슬쩍 은설을 살펴보았다.
그녀가 눈물이 그렁거리는 눈으로 자신을 째려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빛이 ‘겁쟁이!’라고 소리치는 듯했다.
찔끔한 동대안은 마지못한 표정으로 혁무천의 청에 응했다.
“알았네.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매몰차게 마다할 수는 없지.”
할 수 없이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속은 무척 쓰렸다.
‘제길, 괜히 따라왔나?’
그때 은설이 말했다.
“저는 대장간 강 아저씨 집에 가 있을게요.”
***
혁무천은 은설을 강수평의 대장간에 맡겨놓고 동대안과 함께 다시 배를 탔다.
백마궁이 있는 천주산은 구강에서 약 사백 리.
강수평 말에 의하면, 배를 타고 장강을 따라 내려가다가 안경에서 내려 북쪽으로 백 리 가량 가면 천주산의 초입이 나온다고 했다.
구강을 출발한 지 사흘 후 신시 무렵, 혁무천과 동대안은 안경의 선창에 내렸다.
배에서 내린 그들은 곧장 백마궁이 있다는 북쪽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