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천화 1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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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390회 작성일소설 읽기 : 귀환천화 13화
13화
혁무천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서원청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직 부상이 낫지 않아서 안색이 해쓱했다.
“무슨 일이오?”
서원청의 눈빛이 흔들렸다.
혹시나 했는데…… 자신이 들었던 목소리와 너무 많이 달랐다.
“물어볼 것이 있네.”
“말해보시오.”
“듣자 하니 임시표사로 배에 탔다고 하더군.”
“그렇소만, 무슨 문제라도 있소?”
“아니네. 혹시 나중에라도 우리의 일을 해줄 수 있는지 알아보고 싶어서 물어본 것이네.”
“그건 어려울 것 같소. 먼 길을 가야 해서 당분간은 남의 일을 해줄 수가 없소.”
“사정이 그렇다면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그럼 쉬게나.”
서원청은 대충 말을 맺고는 몸을 돌려서 선실로 되돌아갔다.
혁무천은 무심한 눈으로 그가 선실에 들어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도 서원청이 왜 자신에게 말을 걸었는지 모르지 않았다.
어쩌면 악양에서 자신의 그림자 정도는 봤을 것이다.
설마 하면서도 알아보고 싶었을 것이다.
굳이 말해주지 못할 것도 없지만, 그럴 경우 귀찮은 일이 거머리처럼 따라올 게 분명하다.
그 때문에 그를 다그칠 때 목소리를 변형했던 것 아닌가.
‘그냥 모른 척하는 게 당신에게도 좋을 거다.’
혁무천과 달리 은설은 마냥 즐거운 표정이었다.
유철응이 오늘 밤 혁무천과 자신을 경비 임무에서 빼주었기 때문이었다.
소항진 남매가 넌지시 부탁한 덕이었다.
유철응도 화물이 절반으로 줄어들자 순순히 응해주었다. 어차피 외부 인물이니 빠진다 해도 별 문제는 없었다.
“오빠, 우리 황학루에 한번 가보지 않을래요? 저번 악양루는 코앞까지 가서 올라가지도 못했잖아요.”
은설이 환한 표정으로 말했다.
혁무천은 대답하기 전에 한쪽을 슬쩍 살펴보았다.
소항진과 소하민이 슬그머니 고개를 돌리는 게 보였다. 아마도 자신을 설득시키라고 은설의 등을 떠민 듯했다.
“곧 어두워질 거다.”
“저녁에는 등롱을 밝혀서 낮보다 더 멋있대요.”
“그래봐야 불빛이 뭐 별 거 있겠냐? 그리고 곧 저녁식사 시간이다.”
“식사야 다녀와서 하면 되잖아요.”
“가고 싶으면 따라가. 난 안 갈 거니까.”
무뚝뚝한 혁무천의 말에 은설이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 안 가실 거예요?”
혁무천은 소항진 남매의 주절주절 떠드는 소리를 들으면서 구경 가는 게 싫었다. 남의 구경거리가 되는 것도 싫고.
저번 악양루에서도 지나가던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들에게 집중되었지 않은가.
‘그 꼴을 보느니 가지 않는 게 낫지.’
물론 은설이 소항진과 함께 가는 것도 싫었지만, 가지 못하게 하는 것은 좀 그랬다.
아버지를 찾아 수천 리 길을 가는 소녀 아닌가.
가슴 속에 근심걱정이 태산처럼 쌓여 있을 터, 잠시지만 즐겁게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했다.
솔직히 울상을 짓고 있는 모습보다는 환한 표정이 보기에도 나았고.
어쨌든 잠깐인데 별일이야 있을까.
그렇게 생각한 그는 은설을 순순히 보내주기로 했다.
“그래, 나는 객잔에서 식사하고 쉴 생각이다. 그러니 너나 가서 재미있게 구경하고 와.”
경비임무에서 빠진 혁무천과 은설은 일반 객잔에서 밤을 보낼 수 있었다.
“쳇, 함께 가면 좋은데…….”
은설은 입을 삐죽이며 혁무천의 눈치를 살폈다.
아무리 봐도 구경 갈 마음이 없는 듯 보였다.
그녀의 내심에서 갈등이 일었다.
자신도 안 간다고 할까?
하지만 무창까지 왔는데 황학루 구경도 못해본다면 너무 아쉬울 듯했다.
갈까, 말까?
망설이던 그녀가 결론을 내렸다.
“알았어요. 그럼 가서 구경만 하고 바로 올게요.”
소항진과 소하민은 은설이 혼자 오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은설은 두 사람에게 사정을 설명해주었다.
“오빠는 쉬고 싶대요. 그러니 구경하고 싶으면 저희만 가래요.”
소항진은 환한 표정을 지었고, 소하민은 입술을 깨물었다.
“하하하, 그래요? 그럼 출발합시다.”
소항진은 미련 없이 곧바로 출발을 알렸다.
“오빠하고 설매 먼저 가. 곧 뒤따라갈게.”
“민아야, 그냥 가자. 무 형은 그냥 쉬라고 해.”
“오빠…….”
소하민이 눈을 흘기며 말을 이으려 하자, 소항진이 전음으로 말했다.
<은 소저가 몇 번이나 말해도 안 간다잖아. 네가 말한다고 해서 가겠어? 이 오라비는 네가 상처 입는 걸 보고 싶지 않다. 오늘은 그냥 우리끼리 가는 게 좋을 것 같구나.>
소하민은 입술을 질겅 깨물고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도 자존심을 굽히면서까지 사정하고 싶지 않았다. 사정한다 해서 움직일 사람도 아니고.
‘흥! 지가 뭔데? 뭐가 그리 잘나서!’
오기가 생긴 그녀는 홱 몸을 돌렸다.
“알았어, 그럼 우리끼리만 가.”
혁무천은 소항진 남매와 은설이 황학루 구경을 떠난 후 잠시 무창의 선창가를 거닐었다.
오랜만에 혼자 있는 시간이었다. 은설을 만난 이후로는 처음이었다.
수많은 생각이 머릿속에서 뒤엉켰다가 한 가닥, 한 가닥 실처럼 풀어져 나왔다.
그는 선창가를 한 걸음, 한 걸음 걸으면서 마음의 실타래에 혼란의 실을 감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어쩌면 이것 역시 세상의 흐름일 뿐……. 세상의 흐름이 그렇다면 그에 따라 흘러가면 될 터…….”
나직이 뇌까린 그는 몸을 돌렸다.
자신도 모르게 시선이 저만치 우뚝 서 있는 황학루 쪽으로 향했다.
시커먼 산 위에서 밝은 빛으로 둘러싸인 누각이 보였다.
은설의 말대로 낮보다 더 화려해서 멋지게 느껴졌다.
괜히 심통이 났다.
‘뭐 구경할 게 있다고 아직 안 와? 컴컴해졌는데.’
풍양표국에서 선실의 손님을 위해 마련한 객잔은 선창 동쪽 끝에 있었다.
일층과 이층은 식사를 하는 곳이었고, 객방은 후원에 따로 있었다.
혁무천이 들어갔을 때는 탁자가 손님으로 반쯤 차 있었다.
그가 조금 늦게 갔기 때문인지 몰라도 표국의 표사나 정화상단 호위무사는 보이지 않고 선실의 손님만 두어 명 있었다.
그는 구석진 곳에 있는 빈자리로 갔다. 창이 바로 옆에 있어서 바깥 풍경이 보이는 자리였다.
간단하게 생선요리를 하나 시킨 그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늦가을 찬바람에 옷깃을 여민 사람들이 종종걸음을 옮기는 게 보였다.
저 사람들은 행복할까?
문득 엉뚱한 의문이 들었다.
그렇게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보며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있을 때 점소이가 요리를 가져왔다.
그는 상념을 떨치고 식사에 열중했다.
은설은 그가 식사를 마칠 때까지도 돌아오지 않았다.
‘왜 안 오지?’
은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차를 마시고 있는데, 누군가가 그의 자리로 다가왔다.
선실의 손님 중 하나, 눈이 콩알만 한 자였다.
“앉아도 되겠나?”
“좋으실 대로.”
“험, 며칠 동안 같은 배를 탔는데도 인사 한번 나누지 못한 것 같군.”
“그동안 손님과 인사나 나누고 있을 만큼 한가하지 않아서 말이오.”
“하, 하, 하. 그건 그렇군. 나는 동대안이라 하네.”
대안(大眼). 눈이 크다는 뜻.
당사자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름에 혁무천은 웃음이 나올 뻔했지만, 겨우 웃음을 억누르고 이름을 말해주었다.
“무천이오.”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붙여준 이름이지. 아버지의 작은 눈을 닮지 말라고. 그 때문인지 아버지보다는 눈이 크게 태어났다네.”
그럼 동대안이란 자의 아버지 눈은 얼마나 작단 말인가.
그런데 동대안이 말했다.
“아버지의 이름은 태안(太眼)인데, 할아버지께서 지으셨다네.”
“훗.”
결국 혁무천의 굳게 닫힌 입에서 실소가 흘러나왔다.
동대안은 작은 눈을 굴려서 혁무천을 흘겨보았다. 그도 혁무천이 웃는 이유를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따지지 않고 질문을 던졌다.
“험, 자넨 고향이 어딘가?”
“경덕진이오.”
“아! 도자기로 유명한 경덕진?”
“선친께서 도공이셨소.”
“그랬군. 그런데 무공은 어디서 배웠는가?”
그 말을 할 때는 동대안의 작은 눈이 순간적으로 반짝였다.
혁무천은 장강을 바라보느라 그 눈빛을 보지 못했다.
“조부께 배웠소.”
“조부? 조부께선 사문이 어떻게 되시나?”
“그건 말씀드릴 수 없소.”
무겁게 말을 내뱉은 혁무천이 고개를 돌려서 동대안의 작은 눈을 직시했다.
동대안은 슬며시 고개를 돌리고는 짐짓 따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지금 잠자리에 들기도 그렇고, 어디 밤거리나 구경가볼까?”
결국 자리에서 일어난 동대안은 바람 좀 쐬고 온다며 휘적휘적 객잔의 입구로 향했다.
혁무천은 그의 뒷모습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휘적휘적 걷는 그의 걸음걸이가 눈에 익었다.
‘혹시……?’
그때였다.
동대안이 객잔을 막 나서려는데 한 사람이 먼저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느닷없는 상황에 뛰어 들어오던 자도, 동대안도 놀라서 눈이 커졌다.
부딪치는 것이 당연하던 그 순간, 동대안이 휘청거리며 몸을 옆으로 틀었다.
그 덕에 두 사람은 교묘하게 충돌을 면했다.
그 광경을 바라본 혁무천의 입술 끝이 살짝 틀어졌다.
‘역시 그렇군.’
비록 단순한 몸짓이었지만, 그 움직임에는 극상승의 무리가 담겨 있었다. 자신이 생각했던 그의 후예가 분명한 듯했다.
하지만 더 이상 그에게 신경 쓸 수가 없었다.
객잔 안으로 뛰어 들어온 자는 풍양표국의 표사였다. 그는 미안하다는 말을 하는 시간도 아까운 듯 다급히 후원으로 뛰어갔다.
—무슨 일인가 벌어졌다!
혁무천은 순간적으로 판단을 내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풍양표국과 관련된 일이라면 상선의 표물이 최우선.
그는 즉시 객잔을 나섰다.
임시라지만 표사는 표사. 만약 표물에 이상이 있다면 모른 척할 수 없었다.
사과도 않는다며 투덜거리고 있던 동대안이 작은 눈을 깜박이며 그의 뒤를 따라갔다.
“무슨 일인가?”
“이제 알아볼 생각이오.”
무뚝뚝하게 대답한 혁무천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멀리서 봐도 풍양표국의 배는 고요했다.
별다른 이상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럼 표물이 아니라는 뜻인데…….’
순간, 그의 고개가 황학루 쪽으로 돌아갔다.
불이 환하게 켜진 황학루 쪽에서 심상치 않은 소리가 들렸다.
집중하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소리였다.
웅성거림.
이 밤중에 황학루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릴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뜻.
더구나 소항진 남매와 은설이 돌아오지 않은 상태였다.
혁무천은 즉시 황학루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동대안이 그 뒤를 따라가며 말했다.
“황학루에서 뭔가 일이 벌어졌나 본데? 무기를 가진 무사들이 제법 많군.”
혁무천의 눈에도 황학루 안의 광경은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동대안은 마치 자신의 눈으로 본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무사라는 것, 그들이 무기를 지니고 있다는 것까지.
남들은 넘겨짚은 말이라 생각할지 몰라도, 혁무천은 그의 말이 사실일 거라 생각했다.
동대안이 정말 자신이 생각한 자의 후예라면 충분히 가능한 능력이었다.
“어느 층에 있소?”
“중간쯤에.”
마음이 급해진 혁무천은 땅을 박차고 미끄러지듯 빠르게 나아갔다.
한 걸음에 칠팔 장씩 나아가는 그를 보고 동대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래봐야 조금 큰 콩알 정도였지만.
‘겁나 빠르군. 생각했던 것보다 더 고순데?’
그러면서도 뒤를 바짝 따라붙었다. 그의 속도도 혁무천에 못지않았다.
황학루에 도착한 혁무천이 누각 안으로 들어가려 하자, 무사 넷이 앞을 막아섰다.
그들 중 하나가 턱을 쳐들고 오만한 표정으로 물었다.
“누군데 안으로 들어가려 하느냐? 신분이 확실하지 않은 자는 들어갈 수 없…….”
혁무천은 무표정하게 그들을 보며 걸음을 내딛었다.
“비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