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천화 1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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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368회 작성일소설 읽기 : 귀환천화 12화
12화
은설이었다.
그녀는 벽을 바라보고 있는 혁무천 곁으로 다가갔다.
그런데 혁무천을 빤히 바라보던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런 눈으로 보는 거냐?”
“저기, 어제만 해도 오빠 목에 있는 검은 선이 여기쯤 있었는데, 조금 줄어든 것 같아요.”
자신도 안다. 하지만 혁무천은 이유를 말해주지 않았다.
말해봐야 좋을 것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거짓말로 얼버무리고 싶지도 않았고.
‘언제 그걸 봤지?’
절반쯤은 옷으로 가려져 있는데, 눈도 좋다.
“빨리 그 선이 다 사라지면 좋겠어요. 보기가 안 좋거든요.”
“…….”
사라지면 죽는데?
“태어날 때부터 있었어요?”
“아니.”
“그럼…… 설마 멋 낸다고 문신을 한 것은 아니죠?”
뭐?
어이없는 질문에 혁무천이 툭 쏘듯 답했다.
“문신 아니다.”
“그럼 왜 생겼어요?”
“몰라도 돼.”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자꾸 묻는 걸 막기 위해 조금 딱딱하게 말했더니 아무래도 삐졌나보다.
은설이 입술을 삐죽이며 고개를 돌렸다.
혁무천은 눈만 굴려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삐진 모습이 더 귀여웠다.
***
서원청은 혁무천보다 일각쯤 늦게 돌아왔다.
부상당한 표를 안 내려고 소주천까지 하고 왔음에도 유철응의 눈까지 속일 수는 없었다.
“어떻게 된 건가?”
서원청은 대충 핑계를 대고 얼버무렸다.
“광운마방 무사들이 나를 암습자 일행으로 보고 공격하는 바람에 약간 다툼이 있었소.”
유철응은 더 깊은 내막을 묻지 않았다.
그럼에도 심상치 않은 일이 발생했다는 것을 짐작하고 표사들에게 주의를 주었다.
“새벽에 출발할 것이니 모든 사람의 외출을 금해라.”
서원청이 선실로 들어가자, 여충민과 감수명이 굳은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서원청이 자리에 앉을 때까지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런데 앉은 이후로도 아무 말이 없자, 감수명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무사하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그런데…… 놈들이 우리의 정체를 알게 되면 이곳으로 몰려올 텐데,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그들은…… 우리 정체를 알 수 없을 거네.”
“왕효가 우리 모습을 말해주면 초상을 그려서 돌릴 텐데…….”
“왕효는…… 죽었네.”
무겁게 흘러나온 서원청의 말에 감수명의 눈이 커졌다.
“예?”
“말 그대로네. 왕효는 죽었네. 그와 함께 온 무사 둘도 모두 죽었지.”
“그럼 자네가 그들을……?”
여충민이 경악한 표정으로 말했다.
서원청은 쓴웃음을 지었다.
“대주께선 이 서모를 너무 높게 보는구려.”
“그럼 누가 그들을 죽였단 말인가?”
서원청은 느릿하게 고개를 저었다. 눈빛이 잘게 흔들렸다.
“나도 모르오. 얼굴을 보지도 못했소. 바로 내 앞에서 왕효가 죽어가는 데도.”
여충민과 감수명은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바로 앞에서 왕효가 죽어 가는데 죽인 자를 보지 못했다니.
서원청은 그들의 마음을 백번이라도 이해할 수 있었다.
당사자인 자신도 믿기 힘들거늘, 어찌 저들에게 믿으라고 할 수 있을까.
“양팔이 잘리고, 목이 갈라졌소. 단 두 번의 공격에. 비령마 왕효가 말이오.”
“맙소사…….”
“내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왕효의 목에서 피가 솟구치고 있었소.”
여충민과 감수명은 입을 반쯤 벌린 채 서원청만 바라보았다.
그때, 허탈한 표정을 짓고 있던 서원청의 머릿속에 어떤 얼굴 하나가 떠올랐다.
흑포를 입고 있는 청년의 하얀 얼굴이.
하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마음에 걸리는 자라 하나 그는 이제 이십 대 청년이었다.
상대는 왕효고.
말도 안 되는 상상이었다.
‘그자일 리 없어.’
***
장소중은 수하들이 챙겨 온 왕효와 두 호위무사의 시신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양팔이 잘리고 목이 갈라진 왕효가 눈을 부릅뜬 표정으로 죽어 있었다.
“이,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저희도 알 수가 없습니다. 싸우는 소리가 들려서 가봤더니 노사께서…….”
중년인 하나가 침중하게 굳은 표정으로 말을 흐렸다.
장소중은 악다문 턱에 힘을 주고 왕효를 시신을 내려다보았다.
만마성의 장로가 죽었다. 그것도 단숨에.
도대체 누가 왕효를 이렇게 죽일 수 있단 말인가.
절대경지에 이른 고수가 아니라면 어림도 없는 일.
더구나 왕효의 눈을 부릅뜬 표정에는 공포마저 엿보였다.
자신의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일.
장소중은 느릿하게 고개를 들고는 중년인에게 말했다.
“왕 장로를 최고급 관에 모셔라.”
“수색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중년인이 고개를 들며 넌지시 물었다.
장소중은 무거운 표정으로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오 당주, 왕 장로가 양팔이 잘린 채 죽었다. 우리가 범인을 잡을 수 있다고 보느냐?”
“잡으려 한다면…… 본 방의 사활을 걸어야 할 겁니다.”
“그래, 그래야겠지.”
착잡한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리던 장소중이 결정을 내렸다.
“시늉만 하고, 축시가 넘어가면 모두 돌아오라고 해.”
“알겠습니다.”
“그리고 사람을 보내서 만마성에 왕 장로의 죽음을 알려라. 정파 놈들에게 당했다고 해.”
오 당주라 불린 중년인이 흠칫했지만 곧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예, 방주.”
“어차피 이렇게 된 거, 그들의 힘을 빌려서라도, 악양 인근에 남아 있는 정파의 잔당들을 쓸어버려야겠어.”
장소중의 입가로 차디찬 살소가 떠올랐다.
***
배는 해가 떠오르기 전에 악양을 출발했다.
해가 뜰 무렵 동정호를 벗어난 배는 곧 장강으로 진입해서 무창으로 향했다.
무창으로 가는 와중에도 소항진은 시간만 나면 은설에게 치근댔다.
그는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혁무천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소항진만 그러는 게 아니었다. 소하민도 지지 않겠다는 듯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혁무천이 아무리 차갑게 대해도 그녀는 생글거리며 말을 붙였다.
정말 집요한 남매였다.
그런데 은설은 아무렇지도 않은지 곧잘 소항진과 대화를 나누었다.
혁무천은 그 점이 못마땅했다
‘아직 어려서 남자의 흑심을 모르는 모양이군.’
아마 소항진 남매가 강호 정세에 대해서 자세히 알고 있지 않았다면, 짜증나는 속마음을 그대로 드러냈을지도 몰랐다.
결국 그는 짜증을 내는 대신 강호정세를 시시콜콜 물어보았다.
소항진 남매는 경쟁하듯이 자신들이 알고 있는 바를 말해주었다.
“하하하, 강호에 대해서라면 나름대로 연구한 것이 있지요. 팔대마세부터 말씀드리자면…….”
“강호가 꼭 팔대마세의 힘에 의해서만 움직이는 건 아니에요. 마도십문도…….”
“사대천마야말로 당금 천하에서 가장 강한 자들이지요.”
“오빠 말도 틀린 것은 아닌데, 칠사(七邪) 팔마(八魔)도 크게 뒤지지 않아요. 그리고 아무리 정파의 위세가 약해졌다 해도 삼성(三聖), 오절(十絶), 칠웅(七雄)은 대단한 고수들이죠.”
“그래도 사대천마에게는 밀린다고 봐야 해.”
“삼성은 사대천마도 자신할 수 없을 걸요?”
때로는 그렇게 의견 차이를 보이면서 티격태격하기도 했다.
혁무천은 그 상황에 만족했다.
그만큼 은설과 자신에게 말 붙일 시간이 줄어들었으니까.
게다가 강호에 대한 이야기도 들을 수 있으니 일석이조인 셈이었다.
그의 속셈을 모르는 두 사람은 싫은 내색도 하지 않고 아는 바를 열심히 말해주었다. 그런 식으로라도 대화를 나누는 게 즐겁다는 듯.
덕분에 혁무천은 무창에 도착하기 전까지 강호정세에 대해 많은 부분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마음이 더욱 무거워졌다.
형주까지 가는 동안에는 무인들을 거의 상대하지 않았다. 기껏해야 일반인들이 하는 말을 귀동냥으로 들었을 뿐.
가끔은 무인들이 하는 말도 들렸지만, 단편적인 이야기가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자세히 듣고 보니 자신이 아는 것보다 강호의 상황이 훨씬 더 심각했다.
‘이들의 말이 사실이면, 정파는 거의 꺼져가는 모닥불 신세군.’
한편으로는 아직 소항진 남매조차 모르는 부분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악양에서의 일만 해도 심상치 않았다.
무당파가 움직였고, 정화상단 역시 그들과 모종의 관계가 있는 듯했다.
그래봐야 자신과는 무관한 이야기지만.
“저기 무창이 보이네. 이제 거의 다 왔군.”
표사 중 이씨 성을 가진 자가 옆에서 말했다.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던 혁무천도 고개를 돌려서 하류 쪽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 사산(蛇山)에 우뚝 솟은 거대한 누각이 보였다. 무창의 자랑이라는 황학루(黃鶴樓)였다.
형주를 출발한 지 닷새 째 되던 날 오후, 무창에 도착한 상선은 제법 많은 화물을 내렸다.
하지만 다시 실은 물건도 적지 않아서 화물의 양은 별 차이가 없었다.
그날 저녁.
정화상단 사람들이 풍양표국에 뜻밖의 요구를 했다.
“죄송하지만 무창에서 만날 분이 있소. 우리 상단의 중요한 손님이오. 약초 중 절반을 그분이 구매하실지 모르니, 내일 하루만 더 머물고 모레 오전에 출발합시다.”
유철응은 그들의 갑작스런 요구가 탐탁지 않았다.
“표행은 하루하루가 돈과 직결되오. 상선을 하루 묶어두려면 상당한 비용을 지불해야 하외다.”
“그 비용은 우리가 충당하겠소. 은자 오십 냥 정도면 될 것 같소만.”
은자 오십 냥을 내겠다면 상황이 달라진다.
선실의 여행객 일곱 명에게 방과 식사를 제공한다 해도 은자 다섯 냥이면 충분하다.
남는 금액은 사십오 냥. 그 금액이면 선원과 표사들에게 추가 수당을 주고도 절반은 남는다.
더구나 비용에 차이가 없으면서 지켜야 할 물건이 줄어들면 표국으로서도 나쁠 것 없다.
만에 하나 잘못되었을 경우 배상비가 줄어들 테니까. 표사 몇 명 정도는 다른 곳으로 돌려도 될 것이고.
“좋소이다. 정 사정이 그렇다면 모레 오전에 출발하겠소.”
유철응은 능숙하게 오십 냥을 벌어들이고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정화상단의 정확한 정체를 모르는 그로서는 그 당시 최선의 결정을 내렸다고 할 수 있었다.
혁무천 역시 무창에서 하루를 더 보내는 게 싫지 않았다.
중경에서 의창까지, 형주에서 무창까지 배를 탔지 않은가.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는 배에서의 생활이 지루해지던 터였다.
소항진과 소하민이 귀찮게 굴지만 않으면 좋을 텐데…….
***
다음 날 미시 말(未時 末:오후 3시 직전) 무렵.
서생처럼 보이는 삼십 대 장한 하나가 정화상단 사람을 찾아왔다.
여충민은 일행 몇 사람을 대동하고 그자와 함께 배를 떠났다. 개중에는 감수명도 있었다. 서원청은 부상이 낫지 않아서 따라가지 않았다.
그로부터 한 시진쯤 지났을 때, 여충민 일행이 돌아와서는 약초를 절반쯤 내렸다.
선원들은 화물을 다시 정리했다.
화물 정리는 어둑해질 즈음에서야 끝이 났다.
혁무천은 화물이 정리될 때까지의 상황을 한쪽에서 묵묵히 지켜보았다.
다행히 정리가 마무리될 때까지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이대로 일이 마무리되면 내일 오전에 배가 출항할 수 있을 듯했다.
하지만 아직은 안심할 수 없었다.
정화상단을 찾아온 자 때문이었다.
혁무천은 그자가 서생이 아니라는 걸 눈치 채고 있었다.
무인, 그것도 상당한 실력을 지닌 절정고수였다.
정화상단은 ‘맹’이라는 수상한 단체의 하부세력이고, 정파와 연관되어 있지 않은가.
절정고수가 그들을 찾아왔고, 그들이 정체불명의 사람들에게 물건을 넘겼다는 것 자체가 예사롭지 않게 보였다.
‘조용히 지나갔으면 좋겠는데…….’
생각에 잠겨 있는 그를 누군가가 불렀다.
“무천이라 했지? 잠깐 이야기 좀 하세.”